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닭이 우는구나.
우리가 여기 나서 여기 사는것
무엇무엇 때문도 아니구나.
시절이 바뀔 때마다
큰소리 떵떵 치던
면장도 지서장도 중대장도 교장도 조합장도 평통위원도
별것이 아니구나.
워싱턴도 모스끄바도 동경도 서울도 또 어디도
시도 철학도 길가에 개똥이구나.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더라
그이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들은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토착화되지 않을
이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하며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는 구나.
섬진강 관련 시를 인터넷에 치게 되면 열의 아홉은 거의 김용택 시인이 나온다. 그 중에서 나는 여러가지 섬진강 시 중 이 12번 시가 맘에 들었다.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하여 아주 진실하고 애틋하게 표현하여 인상에 남은 것 같다. 또한 부모님에 대한 사랑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한낱 검불이구나' 라는 구절로 비판하는 것이 시적으로 좋은 작품이다. 우리 사회를 비판하면서 부모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해서 '역시 김용택 시인은 김용택 시인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