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삶
디도서 2:11-14
기독교 영성 작가로써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는 필립 얀씨가 쓴 책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비교 종교학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서 주제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주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토론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유명한 영국의 C. S. 루이스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독특한 주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나 혹은 기독교 교리를 통해서 다른 종교에서 찾을 수 없는 기독교만이 제공하는 일관성 있는 주장 가운데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의 교리' 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은혜의 교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내용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디도서의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디도서는 우리가 잘 알듯이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지중해 연안에 그레데 섬이라는 곳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졌을 때 사도 바울은 그곳의 목회자로 자신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도를 보냅니다. 그러면서 디도가 앞으로 목회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해야 하는 것, 그리고 설교를 할 때마다 가장 중요하게 강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은혜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도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신앙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로마서를 통해서 로마교회에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쓸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성은 디도서에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는 2장 뿐만 아니라 3장 5절에서도 은혜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3장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기에 보면 은혜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은혜라는 단어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긍휼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저주 대신에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긍휼과 은혜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디도서의 중요한 초점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았다는 그 사실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셨습니까?"라고 하면 갑자기 당황해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은혜라는 개념은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은혜는 구원받은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은혜보다 더 본질적인 은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물음 앞에 확실하게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은혜 받은 사람들이 은혜 받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과거에서 버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과거에서 버릴 것이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회복되어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피 흘리시고 희생하는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불법의 대가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죄를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린다면 죄는 불법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대답입니다. 죄는 불법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명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라"는 것과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라는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골라 가면서 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는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불법에서 속량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은혜로 우리는 이런 불법에서 사함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중요한 것은 다시 그 불법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신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불법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안에는 과거의 불법에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분명히 모든 불법에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아직도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죄악의 본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애굽 땅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 앞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 땅, 노예된 그 곳에서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된 상태에서 해방되고 자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의 힘으로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완전한 해방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되었던 애굽 땅에서 나와 약속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가운데 다시는 애굽 땅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까? 맞으면 1번, 틀리면 2번. 어느 것입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들이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래도 애굽 땅에서는 삼겹살도 먹고, 통닭도 먹고, 스테이크도 먹었는데" 라고 불평하면서 애굽을 그리워합니다. 노예생활을 한 주제에 말입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그들은 끊임없이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있고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맞습니까? 맞으면 1번, 틀리면 2번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자꾸만 과거에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노예로 만들었던 그 과거에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죄의 노예였습니다. 불법의 노예였습니다. 영원히 멸망 받아야 할 어둠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속하심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용서를 얻었습니다.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그 과거에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 비참한 과거,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는 과거에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그 과거를 깨끗하게 단절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천국의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과거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과거로 돌아가면 끝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악과 어둠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자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 어느 부부 세미나에서 어떤 분이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자기 옆에 있는 부인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은 너무 너무 히스토리칼해서 제가 인생을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너무 히스토리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미나를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히스토리칼이라뇨? 히스테리칼을 잘못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대답하기를 "아니에요. 이 여자는 히스테리칼한 것이 아니라 히스토리칼합니다."
목사님이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여자는 시간만 있으면 과거 이야기를 합니다." 결혼 전의 과거를 꺼집어내서 자기를 못살게 군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꺼집어내는 것은 히스토리칼한 것입니다. 반면에 히스테리칼한 것은 신경질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히스토리칼하십니까, 히스테리칼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절대로 히스토리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그분을 붙잡았을 때 주님은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과거의 모든 불법들을 그의 피로 깨끗이 지워버리시고 기억도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왜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우리의 삶이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서도 분명한 변화의 모습들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면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새 출발입니다. 새롭게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로 후퇴하지 않고 성장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적절하게 양육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양육의 첫 발걸음은 과거의 죄나 불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버릴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은 떠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입니다.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1절에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은혜를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양육을 시작하십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그런데 양육의 첫 번째 발걸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육하실 때 첫 스텝이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버려야 할 것은 버리십시오. 그래야 영적으로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신앙이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버릴 것은 버리십시오. 미련 없이 버리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축복된 인생을 위해서는 전혀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버려야 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리십시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성경이 일관성 있게 가르치고 있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버리지 못하면 결코 신앙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2장 1절과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구원이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신앙생활 초기에 반드시 세워야 할 결단, 그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가차없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100년 전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교인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교인들이 얼마나 많아졌습니까? 그러나 한국의 초대교회보다 지금 이렇게 교인들이 많아졌지만 세상에 끼치고 있는 거룩한 영향력이 별로 없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교인들은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 교회와 교인들이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된 삶 가운데 현저하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버렸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버렸습니다. 술을 버리고, 도박을 버리고, 바람도 버렸습니다. 버릴 것을 분명히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가 교회에 나온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시면서 제일 먼저 다루시는 것은 과거에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죄와 불법으로부터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그리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결단코 자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버리셨습니까? 버려야 할 것들을 분명히 버리셨습니까? 포기하셨습니까?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버릴 것을 버리셨습니까?"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분들은 버리지 못한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과거에 버릴 것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시는 은혜로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현재에서 붙잡을 것이 있습니다.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버리고 끊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붙잡을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
우리는 결코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성경이 반드시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선행입니다. 선행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행은 구원의 열매요 상급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아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천국에서 똑 같은 생활을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공평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 2장 8절을 읽어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동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9절 다음에 몇 절이 있습니까? 10절입니다. 1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신 것입니까? "선한 일을 위하여." 이제부터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선한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창세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내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 선한 일 가운데 살아가는 내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싶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8절과 9절을 좋아해서 거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에서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구원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구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성숙시키고 더 이상 죄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의지적으로 선한 일을 하고자 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과거에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알아서 뿌리를 내립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의지는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노력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위해 억지로라도 최선의 노력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적인 신앙도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우리는 천국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강조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 14절을 생각하며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고 흥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진짜 내 아들이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저는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단순히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적 선행입니다. 그런 선행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선행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선행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은 자기 이름 석자를 내는 그런 수준의 선행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행은 당연히 옳기 때문에 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감격해서 저절로 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가슴에서 솟아나는 자발적인 감격의 충동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도덕적 당위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아서 그 거룩한 충동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복음적인 선행의 모습입니다.
필립 얀씨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을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99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아이큐가 75 밖에 안 되는 포레스트 검프라는 우직한 저능아를 주인공으로 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저능아인 검프가 무슨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저 아이가 무슨 인간적인 행동을 할 것인가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포레스트 검프가 제니라는 여인의 사랑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사랑을 느끼자마자 자기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달리기입니다. 그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길에서도 달리고, 운동장에서도 달립니다. 그에게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자기의 이름 석자를 내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제니 때문에 달립니다. 사랑 때문에 달립니다. 그것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이제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삶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야 할 그 길을 향해서 선한 일을 붙들고 달려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무엇입니까?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경험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일깨워져야 합니다. 내가 예배의 자리에 올 때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넘어져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넘어졌던 포레스트 검프가 제니의 음성을 듣습니다.
"포레스트! 런, 런, 런. 일어나! 일어나 달려야 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음성이 다시 들려옵니다. "일어나야지! 어서 일어나!" 그 순간 다시 일어나 달리는 내 모습,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과거에 버릴 것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현재에서 붙잡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 억지로라도 의지적으로 선한 일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 번째, 미래에서 바라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미래에서 바라볼 것이 있습니다. 소망 가운데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바라보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고 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부딪치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선의를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다가 상처받고 좌절합니다. 그럴 때 내가 선한 일을 하려는 동기가 잘못되었는지를 한 번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할 때 그에 대한 대가와 결과를 바라고 한 사람은 반드시 상처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해야 하는 동기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때문에 선한 일을 하셔야 합니다. 첫째는 은혜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해서 선한 일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내가 선한 일을 하는 동기는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하지만 저 사람을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경건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2절에서 버려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12절 하반부에는 우리가 버리면서 동시에 붙잡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로움과 경건함의 목표가 되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주님께서 나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나 자신의 부족함으로 스스로 지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못다 한 내 인격의 마지막 부분도 예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소망하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광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경건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바라보고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을 에워싸도록 은혜 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리하여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한 가운데 천국의 참된 기쁨을 맛보아 알아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