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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문학>(2011. 가을호, 96호)에 특별기획 "경남도내 문학관 순례⑥" <박경리기념관>과 <평사리문학관> 편에 우리 경남소설가협회 회장인 하아무 작가(평사리문학관 사무국장)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를 조명한 해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로 일군 삶 - 박경리의 삶과 문학세계 가 실렸습니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로 일군 삶 박경리의 삶과 문학세계
하아무
반갑습니다. G시 초등학교 학부모독서회에서 오셨다고 했지요? 환영합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보신 데가 최 참판 댁입니다. 연간 60~7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시는 곳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다보면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개중에 어떤 분은 그러시더라고요. "건물이 오래된 느낌이 나는 것으로 봐서 한 400년은 되었을 것 같구먼." 그리고 최 참판 댁 사랑채에 참판어른 역할을 하시는 자원봉사자가 계신데, 허연 수염에 관을 쓴 모습을 보며 더러 묻기도 합니다. "저어, 이 댁 후손이신 것 같은데, 어디 최씨이신가요?" 그러면 자원봉사자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예, 저는 토지 최씨입니다." 눙치곤 합니다. 맞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최 참판 댁은 이제 지은 지 10년이 조금 넘었고요, 어디 최씨랄 것도 없이 대하소설 《토지》의 등장인물이니 '토지 최씨'랄밖에요.
그렇습니다. 최 참판 댁을 비롯한 문학관, 문인집필실 등 평사리의 시설물 대부분은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평사리를 주 무대로 한 작품 덕에 수많은 독자들이 평사리를 방문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토지》가 없었다면 평사리는 여전히 외지인이 거의 찾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로 남아 있었겠지요. 대단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부터 박경리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로 함께 들어가보시겠습니다.
선생이 쓰신 〈옛날의 그 집〉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시 〈옛날의 그 집〉 중 일부)
선생을 둘러싼 환경이 고스란히 느껴지지 않나요? 사납고 무서운 맹수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지요?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큼 힘겹고 모진 세월을 살아오신 것이지요. 하지만 선생은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이겨냈습니다. 그것도 책상과 원고지, 펜 하나로 말이지요.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 없었네/ (중략) /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여기까지 왔네" (시 〈눈먼 말〉 중 일부)
허허로운 벌판에 서야 했던, 어두운 젊은 날
박경리 선생 세대가 대부분 그랬듯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고통 속에서 살아나오셨어요. 일제시대에 태어나 학교를 다녔고, 6․25로 인해 남편을 잃었지요. 게다가 혼자 몸으로 가계를 꾸리며 살아오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는 상처를 입기도 했어요. 한마디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겪을 수 있는 고통은 죄다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요. "어린 것과 노인을 두 팔에 껴안은 것 같은 심정만으로 가진 것 하나 없어 허허로운 벌판에 서야 했던 젊은 날, 옷깃을 세워도 목덜미에 찬바람이 기어드는 것만 같았던 어두운 젊은 날"(산문집,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중 일부)이었지요.
박경리 선생은 1926년 음력 10월 28일 경남 통영시 명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이름은 '금이'였어요,'박금이'. 출생과 관련해서 쓴 시가 있습니다.
"계집아이의 띠가/ 호랑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낮도 아니고 새벽녘도 아니고/ 한참 호랑이가 용을 쓰는/ 초저녁이라/ 그 팔자가 셀 것은 말해 뭐하냐/ 어릴 적에 나는/ 그 말을 종종 듣기도 했고/ 점쟁이는 팔자가 세니/ 후취로 시집보내라 그랬다는 것이다" (시, 〈나의 출생〉 중 일부)
태어날 때부터 순탄치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지요? 아버지 박수영은 네 살 연상이었던 어머니와 결혼하였기에 부부 사이에는 깊은 애정이 있지도 않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존재도 그 스스로 비극이라고 할 만큼 환영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지요. 아버지는 유랑 생활을 자주 했고 조강지처를 내버려둔 채 이곳저곳에서 가정을 꾸리기도 하다가 종내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재혼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유랑 생활과 여성 편력은 아버지를 증오하게 만들었지요. 박경리 선생의 글 여기저기에서 그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는데요, 스스로 "나의 출생은 불합리했다"고 하실 정도였지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스스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고백한 바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시 〈여행〉 중 일부)
고 하신 적이 있어요. 이렇게 천성적인 영향에 환경적인 요인까지 겹쳐 '독서광'이 되었습니다. 허균이 "만권 서책 중의 좀벌레가 되고 싶다"고 했다지요? 아마 박경리 선생도 그런 생각이었던가 봅니다. 읽고 싶은 책,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기 위해 꾀병을 부리고 학교에 결석을 했을 정도였어요. 직장생활 할 때도, 대부분은 승진을 빨리 하기 위해 좋은 부서를 선택하려 하지만 박경리 선생은 정반대였어요. 책을 읽고 싶어서 일부러 일이 거의 없는 곳에 자원해서 갈 정도였지요. 그래서 선생은 "독서량이 내 모든 기초"라고 하실 정도였지요.
시 쓰는 것도 좋아하셨습니다. 아궁이며 이불 속이며 노트를 감추어 가면서 매일매일 일기같이 시를 썼어요. 선생에게 시는 위안이었으며,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여 살아남았고 희망을 잃지 않게 해준 버팀목이었지요. 사실 선생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던 소설가 김동리 선생에게 맨 처음 보여준 원고는 소설이 아니라 시였습니다. 한데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냉정한 평가를 했다고 하지요. 상심한 박경리 선생에게 김동리는 "시 대신 소설"을 써보라고 권했고, 그렇게 하여 쓰인 소설이 바로 〈계산〉이라는 등단작이지요.
초기-단편, 중기-중․장편, 후기-『토지』 이후
선생의 작품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의견들이 많아요. 작품의 변모 양상에 따른 시기 구분도 마찬가지인데,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세 단계로 구분하는 방법입니다.
① 초기-1950년대 단편들. 작가의 삶과 전쟁 체험이 주관적으로 투영된 작품 다수. ② 중기-1960년대 중․장편들. 객관적인 시점에서 전쟁을 형상화하고 남녀 간의 사랑이나 사회사적 문제를 담은 작품들. ③ 후기-대하소설 《토지》의 작품 세계.
물론 다양한 의견이 있고, 지금도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선생의 작품 중 《토지》 이전의 작품 경향은 단편과 장편으로 분리해서 경향을 논의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도 있어요. 왜냐하면 단편은 대체로 문예지에 게재된 작품이고 장편은 신문 연재소설로 통속성이 가미된 작품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논의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지요. 1950년대, 1960년대 식의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문학으로 단편소설류와 장편소설류로 분류하고, 이후 《토지》도 1, 2부와 3, 4, 5부로 나누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초기의 단편소설류에서는 한 개인의 내면화에 의해서 드러난 소외의식, 장편소설류에서는 한집안, 혹은 한 개인이 서서히 몰락함으로써 세계로부터 고립, 가족제도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은 모두 세계와의 단절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건 《토지》에 와서도 일정 부분 지속되어 나타나는데, 1, 2부에서 운명적 세계관에 의한 세계의 폭력성 앞에 어쩔 수 없다는 체념적 현실관이 드러난 반면, 3, 4, 5부에서는 세계와의 화해를 시도하고 민중적 현실관으로 세계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자세를 보인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그런 논의를 깊이 있게 하는 자리가 아니지요. 저도 한 사람의 창작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논의가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해서 가장 보편적이고 설명하기 쉬운 방법으로 선생의 작품세계로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초기-개인적 체험과 사소설 논란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선생의 어린 시절은 힘겹고 우울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고민하고 아파해야 했거든요. 선생은 1955년 단편 〈계산計算〉으로 등단했는데, 2년 뒤인 1957년 발표한 단편 〈반딧불〉에 아버지의 기억과 유년기에 대한 자전적인 요소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요. 〈반딧불〉에 보면, "고향에 돌아오면 으레히 거리 위에서 한두 번은 마주치고 마는 피둥피둥하게 살이 찐, 그 아버지 꼴이 보기 싫"어하는 여대생 주영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으면서도 그런 아버지에게 항상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는 어머니를 미워하지요. 이것은 학비를 보내기로 약속했던 아버지가 학비를 보내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어쩌다가 좁은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치게 되면 목뼈가 부러질 만큼 외면을 했었고, 만주로 떠나는 아버지를 만나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 임종에도 가지 않았던" 박경리 선생의 실제 체험이 투영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하였습니다. 선생은 1945년 2월에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1946년 1월 30일 김행도金幸道와 결혼했어요. 남편은 당시 사회주의 사상에 친근감을 가진 인천 전매국 직원이었는데, 집에는 수많은 사화과학 책이 있었어요. 박경리 선생은 남편의 책을 모조리 다 읽었고, 그 책들을 통해 민족의식과 우리 조국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지요. 해방 후 좌우대립으로 혼란을 겪다가 전쟁이 터지자 선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불행히도 남편과는 사별하고 맙니다. 박경리 선생이 남편과 함께 지낸 것은 겨우 5년여에 불과했는데, 이러한 삶의 체험은 초기 소설에 반영되어 결혼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 대부분에서 남편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흑흑백백〉(1956년)의 주인공 혜숙을 비롯해, 〈불신시대〉(1957년)의 진영, 〈영주와 고양이〉(1957년)의 민혜, 〈암흑시대〉(1958년)의 순영, 〈돌아온 고양이〉(1959년)의 선주 어머니는 모두 미망인입니다. 이들 주인공들은 모두 6․25때 남편을 잃었는데, 작품 안에서 실제 등장인물로서 남편은 나오지 않고 심지어 남편에 대한 추억이나 회고담조차 거의 나오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남편을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사건으로 전개되지 않고 남편의 부재로 인하여 생겨난 생존의 고통만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있어요. 이처럼 갑자기 가장 역할을 떠맡게 된 여성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6․25전쟁 중에 남편이 폭사한 것으로 나와요.
얼마 후 또 하나의 커다란 슬픔을 겪는데요, 바로 아들의 죽음입니다. 선생은 "내 생애 가장 쓰라렸던 사건" 가운데 하나로 "아이의 사망"을 꼽은 바 있습니다. 1957년에 쓴 〈불신시대〉는 아들의 죽음 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그에 반해, 이듬해 쓴 〈암흑시대〉는 아들의 죽음 그 자체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지요. 결국 주인공이 사회를 불신하는 것이나 사회의 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불신감이 팽배했던 전후 한국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처럼 경험 위주의 작품 때문에 당시 사소설 논란이 있었습니다. 김우종, 김치수 등과 같은 평론가가 지나치게 자신의 체험에 안주하여 폭넓은 시야를 가지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이지요. 그러자 선생은 적극적으로 "사소설 유감"과 같은 산문을 통해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선생은 자신의 경험과 초기 작품을 통해서 "생명사상"을 이끌어 냈고, 작품에서 내면과 주변 상황의 문제점을 나름대로 객관화시키고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그런 노력으로 1960년대 들어서면 사소설 논란도 말끔히 사라지게 됩니다.
문학평론가 정현기 씨가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박경리 선생은 문학적 용어로 트라우마, 그러니까 비극적 삶을 통해 받은 상처를 말하는데, 그걸 그분은 '세 개의 칼날'이라고 했어요. 첫 번째 칼날은 처녀시절의 정신대 문제인데, 굉장히 어려워했고 고통스러워 했으며, 그래서 결혼을 일찍 했다는 겁니다. 결혼한 여자는 정신대에 안 보냈거든요. 두 번째 칼날은 남편과 사별하는 과정인데 그 후 아들까지 잃고 만 것이고, 세 번째 칼날은 사랑하는 딸의 남편인 김지하 시인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지요. 그 와중에 암 수술도 했고, 어쨌든 그런 엄청난 칼날 위에서 선생의 삶 전체를 놓고 글쓰기와 힘겨운 투쟁을 벌였고, 그 투쟁에서 마침내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중기-소설 공간 확대, 사회문제로 심화
그러다가 1960년대 들어서면, 앞서와 같은 그런 특징은 어느 정도 지속되면서 소설적 공간이 상당히 확대가 되고 시선도 좀 더 넓은 데로 옮겨 가족과 사회, 민족문제로까지도 심화가 됩니다. 1960년대 박경리 선생의 장편소설 시대를 대표하는 세 편의 장편이 있는데요, 《김약국의 딸들》(1962년)과 《시장과 전장》(1964년), 그리고 《파시》(1965년)를 꼽습니다. 이들 작품을 통해 초기의 사소설적 분위기는 사라지고, 작가의 관심이 개인에서 사회, 그리고 역사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요. 물론 그 세 작품 이외에도 많은 작품이 있어요. 《성녀와 마녀》라든지, 《가을에 온 여인》, 《노을진 들녘》, 《내 마음은 호수》 등 많습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잡지 연재소설이 많고, 그런 경우 통속성을 바탕으로 삼각관계나 불륜 등 비극적인 애정문제를 다룬 것이 많아요. 앞에 거론한 세 작품의 경우 어느 정도 통속성을 띠면서도 가족이나 사회, 민족의 문제를 다루었고 공간의 확대, 주제의 통일성 등의 측면에서 단연 돋보인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김약국의 딸들》은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통영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여러 소문을 소재로 선택하여 무속적이고 향토적인 것을 바탕으로 운명이라는 무게로 형상화시킨 소설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운명에 희생되는 한 가족의 삶을 다루었는데,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었어요. "비상 묵은 자식은 지리지(번식하지) 않는다"는 주술적 담화가 아버지 김성수로부터 김약국의 딸들에게로 옮아가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이 작품은 박경리 소설의 중요한 계기를 이루는데요, 초기 작품에서 되풀이되던 개인적 경험, 즉 사소설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설화적 테마와 향토적 색채가 짙은 운명적 세계관으로 변화되는 첫 번째 작품이 되었던 것이지요.
《시장과 전장》은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지영과 기훈을 주인공으로 삼아 두 줄기의 서사를 진행시키는 방식의 소설입니다. 전장은 6․25 전쟁을 가리키고 시장은 흔히 생각하는 가난이나 현실, 싸움 등의 이미지가 아닌 사람들이 어울리는 공간으로서의 시장인데, 화해와 희망의 장으로 파악해볼 수 있겠지요.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작품이 없지만, 이 작품 역시 선생에게는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던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파시》도 《시장과 전장》처럼 두 개의 이야기 축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공간적으로 보아 부산과 통영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부산은 자본주의적 경쟁논리와 도덕적 불감증만 남은 도시고 통영은 봉건적 윤리의식과 공동체적 질서가 남아 있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어요. 이 소설 역시 전쟁이나 이데올로기 등의 민족적인 현실과 얽혀 있던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보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피폐되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선생의 중기 장편소설들은 1950년대 사소설적 분위기는 사라지고 통영지방 풍물과 향토적 색채가 선명히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작가의 관심이 개인에서 사회, 역사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요.
후기-《토지》 시대 : 히말라야의 노새
언젠가 선생이 어린 손자를 업고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원고를 쓰던 모습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선생은 사위 김지하가 감옥에 있어 그 뒷바라지도 하고, 더군다나 유방암 때문에 절제술 수술을 받아 심신이 몹시 피폐하고 고달플 때였다고 하더군요. 몸이 성한 상태에서도 하기 어려운 작업을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해낸 의지는 거의 초인적인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25년간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해 마침내 『토지』를 완성하였지요.
원고지 분량만 대략 30,000장, 모두 5부 16권 25편 361장으로 완성되었으며, 2002년에는 총 21권으로 재간행되었다. 한편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897년에서 1945년까지 약 50년간이며, 공간적으로는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만주 일대와 남으로는 일본 동경 등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근대화의 진행과정에서 한․중․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서사 내에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등장인물은 거의 700여 명에 달하며 이들은 평사리를 중심으로 5세대에 걸쳐 확대된 관계를 통해 그려진다. ─박상민, 〈《토지》의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문화예술산업〉 중 일부
이 전무후무한 대작 《토지》에 대해서는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한두 마디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 성과가 많이 나왔지만 앞으로 훨씬 더 많은 분석과 평가가 나올 겁니다. 문학평론가들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학자들로부터 근대사회사의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는 작품으로 인정받은 바도 있지요. 또 한국의 민속사, 민중사, 생활사, 풍속사, 역사, 사회사, 민족 변란사, 가족사, 언어 변천사, 사상사, 경제사, 문화사, 민족 수난사 및 여성사를 총망라한 가운데 속담, 전설, 설화, 판소리, 무속, 민중언어 및 향토언어의 재현과 해학과 풍자, 사회진단, 현실비판, 애정과 애욕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대서사시라는 격찬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는 외할머니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선생도 생전에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어요. "《토지》는 육이오사변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잡았던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선생이 외할머니한테 들었던 이야기가 우리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의 하나로 탈바꿈을 한 셈이지요.
《토지》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최 참판 댁의 손녀 최서희가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패망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우리 역사와 최서희가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연결시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대단한 소설은 그 한 가지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다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상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평론가에 따라 상이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박경리 선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지》는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생명, 그 한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그릇이에요. 나를 오랫동안 누르던 그늘과 그것에 저항하려는 삶과 생명에의 연민-글쓰게 하는 힘은 바로 그 생명에의 연민이지요."
선생의 생명사상은 사위인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아요. "나를 중심으로 볼 때 이웃이 둘레고, 이웃을 중심으로 볼 때는 내가 둘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자기가 중심이면서 모든 전체 속의 하나다. 이것이 생명의 기본 원리"인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나아가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그 바탕이라는 것이지요. 그 바탕이 없었으면 이렇게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생명사상의 바탕 위에 우뚝선 작품 《토지》는 양면가치적인 것들이 죽어가고 민중들의 웃음이 시들어가는 슬픔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처절하게 하부의 삶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서희와 봉순과 길상이 있었기에 끈질긴 생명력으로 복원이 되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선생의 생명사상입니다. 《토지》를 모르는 사람도 드물지만 정작 《토지》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드물고, 선생의 생명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독자도 많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땅이란 우리가 잠시 빌려서 쓰는 것인데, 그 땅에 화학비료를 뿌리고 농약을 무분별하게 살포하다 보면 땅심을 죽여 본전마저 까먹게 되지요. 그래서 비료나 농약 대신 퇴비를 주고 정성을 쏟아 땅심을 북돋워야 한다셨어요. 지금을 사는 우리는 빌린 본전을 까먹지 말고 그 이자만 가지고 살다가 본전은 고스란히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박경리 선생의 "본전론"이며 "생명사상"이지요.
어이쿠, 시간이 다 되었네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만 마치겠습니다. 정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부언하겠습니다. 다음에 오실 땐 드라마 <토지>를 본 얘기만 하지 마시고 《토지》를 읽고 오셔서 소설 얘기를 하시는 분이 더 많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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