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을 만드는 일보다 지속시키는 일이 더 중요
1919년 3월 1일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종교계 인사들이었다. 구체적으로 손병희와 최린이 주도한 천도교와 이승훈이 주도한 개신교 인사들이 중심이 됐고 신흥사 승려 한용운과 해인사 승려 백용성 등이 합세했다. 한계가 있지만 세 종교가 힘을 합쳐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는 사실은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는 서자 출신이어서 신분 때문에 차별당해야 하는 사회 현실에 불만을 품고 10대를 방탕하게 보냈다. 그러다 스물두 살 때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귀하다’는 동학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입교한 후 갑오농민전쟁에서 북접의 중군통령으로 농민군을 이끌었고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어 도통을 물려받았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평북 정주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16세에 유기상 점원으로 일하다 보부상이 되어 10년 만에 거상이 되었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인해 두 번에 걸쳐 파산하고 만다. 어렵게 재기한 후 종9품 벼슬(능참봉)을 사서 양반행세를 하던 그는 평양의 만민공동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교육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만해 한용운은 갑오농민전쟁의 영향으로 출가했다고 전해진다. 충청도 결성의 소지주였던 아버지가 동학군 토벌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고 번민하다 몇 년 후 의병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관가를 습격한 뒤 쫓기는 신세가 됐고 그로 인해 불가와 인연을 맺게 됐다는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또 한 명의 승려 백용성은 그와 친분이 돈독한 사이었다.
기미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인생 경로 자체를 바꿀 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와의 만남은 결코 흔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만남이라도 그 인연을 이어갈 깜냥이 없다면 부질없는 일이 되기도 한다.
물론 한때 소중하다 생각했던 인연이 악연이 되는 일도 많다. 악연의 반대말은 가연(佳緣)이다.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말이다. 기미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게 된 이승훈의 부탁을 받고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다석 유영모는 기미독립운동 참여로 인해 평양고보를 자퇴하고 스물이 넘어 뒤늦게 오산학교에 재입학한 함석헌을 만나게 된다.
조선총독부가 교장 취임을 허가하지 않아 이듬해 서울로 돌아가야 했던 다석은 홀로 역까지 배웅 나온 함석헌에게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함군 자네 한 사람 만나기 위해서였나보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함석헌은 평생 이 말을 기억했고 몇 년 후 동경에서 김교신을 통해 만나게 된 우찌무라 간조와 함께 다석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이런 가연이 많을수록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주 만나는 사람의 평균이 우리 삶의 수준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사람의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의 강연을 듣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수준과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인연을 소중하게 지속시키는 것은 그런 인연을 많이 만드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 최성진(순천하늘씨앗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