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濯纓 金馹孫
김일손(金馹孫․1464~1498)위 자는 계운(溪雲)이며 호는 탁영(濯纓)이고 본관은 김해로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의 손자이고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아들이다. 1464년(세조 10년)에 청도 운재리(지금의 서원동)에서 태어났다. 출생당시 앞내에서 무지개 같이 뻗쳐 오랫동안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이 우주간기(字宙間氣)로 태어난 그는 천성이 총명하여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에서 동문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친하게 교류했다.
1486련(성종 17년 ) 8월에 식년문과 갑과로 각각 장원급제 했으며, 그해 10월에 알성대과(謁聖大科)에서 또한 장원급제 했다. 시관이었던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의 추천으로 홍문관, 예문관 등의 청환직을 거쳐 1488년(성종 19년) 왕의 특혜로 호당(湖堂)에 들어가 수학했다. 호당은 젊은 문신 중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왕의 명으로 뽑아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여 조정에 기용해서 장차 국사를 맡기기 위한 요원 양성기관으로 조선조 최고의 학당인 것이다.
그 후 이조정랑(吏曹正郎), 1490년(성총 21년)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 28세 때는 서장관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때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많은 서예품과 특히 소학집설(小學集說)등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가져와 보급된 것으로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한바 있다. 또한 명나라에 머물 때 명현, 정유(程愈)와 주전(周銓) 등과 교결하였으며 후세에 우암(尤庵) 송시열은 탁영의 문장은 양양대해 같고 중국의 문호 한창여(韓昌黎)에 비견하기도 했다.
성종 때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에 직필하고 그 뒤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고하여 이극돈의 친근을 사게 됐다. 이후에도 권신들의 부정부패를 직필했다. 그리고 스승 점필재 김종직가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이극돈은 자기의 비행이 사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 그에게 빼주기를 비밀히 간청하였으나 탁영은 네 목숨이 다해도 뺄 수 없다고 거절하자 복수심을 가졌다.
이에 앞서 유자광(柳子光)이 함양 학사루(學士樓)에 놀러가 지은 시를 군수에게 부탁하여 걸었는데 1671년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와서 이것을 보고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떼어내 불살아 버렸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유자광은 점필재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 성종재위시대는 점필재의 위세에 눌러있었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이극돈은 전라감사 재임 중 성종이 서거해 국상중임에도 장흥의 기생과 놀아나는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김일손이 그 사실을 사초에 넣자 사원을 풀기 위해 훈구파의 유자광과 당시의 중신들인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한치형(韓致亨), 신수근(愼守勤)등에게 공개했다. 평소 학문과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왜곡해 충동시켜 드디어 1498년(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지를 토막 내 죽였다.
또한 1494년(성종 25년)에 단종의 후사(後嗣)와 소능(昭陵)의 복위 등을 전후 3회나 상소했으며, 뿐만 아니라 1496년(연산군 2년) 탁영이 충청 도사(都事)로 있을 때 왕의 난정과 간신들의 부정부패 등을 간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다. 이와 같이 문장과 충절의 선비이며 정서와 풍류도 즐겼으며 거문고는 신금(神琴)으로 이름이 높았다. 일두 정여창과 더불어 탐승유람(探勝遊覽)과 악양(岳陽)의 뱃노리 등으로 서정과 낭만을 찾기도 했다. 그에게는 과격하다는 평가가 따른다.
1506년 (연산군 12년 : 중종 원년)에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 신원되어 복작하고 도승지(都承旨)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받고 1830년(순조 30년)에 문민(文愍)의 시호를 내렸다. 출생지인 청도 서원동의 자계서원(紫溪書院)의 사액을 내리고, 도승지 홍처량(洪處亮)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또한 탁영은 목천(木川)의 도통서원(道東書院), 남원(南原)의 사동서원(社洞書院), 함양(咸陽)의 청계서원(淸溪書院)등 에도 봉안하고 있다.
4)任士洪
임사홍(1445․세종 27~1506․중종 1)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훈구파의 거물로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의(而毅). 아버지는 좌찬성 원준(元濬)이다.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도 각각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어 왕실과 밀착된 관계를 형성했다.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에 급제,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 홍문관교리·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돼 사림의 공격표적이 되었는데, 1478년(성종 9)에는 유자광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공주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으나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중국어에 능통, 1490년 관압사(管押使), 1491년 선위사(宣慰使)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파를 축출하자, 전횡을 일삼았다. 그의 아들인 희재(熙載)도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에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함께 모의,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가 폐위·사사된 내막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성종 때의 중신과 사림들을 대대적으로 제거되게 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아버지 임원준과 함께 처형당했으며 이어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가산도 몰수당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해서(楷書)에 능했다.〈서거정묘비명 徐居正墓碑銘〉·〈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 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월산대군이정비명 月山大君李婷碑銘등 여러 금석문이 전하고 있다.
5)李克墩
흔히 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을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넣었다가 성종실록편찬책임자였던 이극돈(李克墩)이 발견하고 이를 유자광과 모의하여 당시 임금이었던 연산군(燕山君)에게 일러바쳐 김일손을 비롯한 수많은 사림파들이 희생된 걸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사화의 중심에 있던 김일손과 이극돈의 사이에서는 과연 무슨 악연이 있었던 것일까?
김일손은 성종 17년, 소과와 대과를 장원해 관직의 첫 발을 내디뎠고, 이어 진주의 교수로 파견되었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몰두했다. 바로 이때에 김종직의 명성을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사관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나, 항상 부패한 현실을 바로 잡으려는 일념으로 살아갔다. 또한 사림의 힘을 기르기 위해 동료 사림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적극 도움을 주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선비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극돈은 광주 이씨로,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광주에서 토착한 세력으로 증조인 이집(李集)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금 올림픽공원 일대인 둔촌동과 그 주변이 이집의 활동 무대였기에 그의 호 또한 둔촌(遁村)이다. 강남·서초·송파가 그 당시 광주이다. 이극돈은 5형제인데, 모두 문과에 급제한 당대 최고의 문벌집안이었다. 당시 몇 대에 걸쳐 한두 사람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둔촌 집안의 성세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성종 17년 병오년(1486)에 과거시험이 있었다. 출제와 채점을 담당하는 시관은 예조 소속의 이극돈·윤필상·유지(柳輊) 등이었다. 이극돈과 김일손의 첫 대면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김일손이 몇 달 전 소과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가 다시 재차 대과인 병오년 문과에 응시한 것이었다. 김일손의 문장은 이미 조정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극돈 또한 이를 익히 듣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 채점을 하던 도중 모두 입을 모아 장원이라고 여기던 답안지는 바로 김일손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극돈은 1등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막았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화려하고 능숙한 문장이라는 점은 이극돈도 인정했다. 하지만 과거시험에서 글을 짓는 것은 일반적인 제술(製述)과 달라 일정한 격식이 있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응시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도록 하는 답안지 관리가 엄격했지만 이극돈은 그 답안지가 김일손이 작성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일손을 결국 장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2등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것이 첫 번째 악연이다.
그 후 이극돈이 이조판서가 되어 이조낭청을 뽑아야했다. 낭청이란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들은 인사권을 장악한 막강한 자리였다. 반드시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는 것이 관례이기도 했다. 낭청들이 한결같이 김일손을 추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극돈은 그 사람은 장차 홍문관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이란 핑계로 '망(望)'에 넣어주질 않았다. 망이란 삼망, 즉 3배수 후보자를 임금께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김일손과 이극돈이 맺은 두 번째 악연이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사귄 벗들이 수기에 치중하는 모습에 내심 불만을 가진 김일손은 당면한 현실개혁에 매달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가 언관으로 활약할 때에는 직언을 할 수 있었다. 외직으로 나가서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금기사항으로 여긴 소릉(昭陵) 복구 상소까지 올렸다. 소릉은 단종 어머니 권씨의 무덤이다. 사육신 사건 때 파헤쳐졌던 소릉을 복구해야 한다는 주장은 곧 세조정권의 부당성을 말하는 것이다. 김일손의 서릿발 같은 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강직한 성격은 사초를 작성하는 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이극돈이 기생과 놀아난 일, 뇌물에 관한 일 등의 비리를 사초에 남긴 것이 세 번째 악연이었다. 이극돈이 자신에 관한 사초가 실록에 기록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발견한다. 세 번째 악연은 결국 김일손 자신만 아니라 신진 사림 전체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되어 버렸으니, 악연치고는 너무나 큰 악연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