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젠 당신의 손을 잡고 싶습니다.
핀키 솔리벤 이그나시오
저는 1973년 9월 14일에 필리핀의 누에바 에크야 주 산호세 시에서 1남 4녀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평범한 가정이었으며 부자는 아니었지만 행복하였고,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두 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였지만,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직업을 가져야 했으므로 학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약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일하는 동안 누군가가 제게 다가와 외국인과의 만남을 알선해주는 Unification에 입회하기를 권유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제 꿈인 외국에 가보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 기회를 잡기로 하고 모임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때가 1995년 8월이었으며, 1996년 1월에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3월 중순에 남편은 저를 만나러 다시 필리핀에 와서 4개월을 머물렀고, 우리는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1996년 5월에 결혼 날짜까지 잡았고, 우리는 그날 무척 행복했습니다. 7월에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가 떠난 후, 저는 그를 따라 한국에 가 함께 살 수 있도록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서류가 한국 대사관에 통과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저는 즉시 남편을 따라 갔습니다. 그때가 10월이었는데 날씨가 무척 추웠습니다. 그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전북 부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 끝에 마침내 집에 도착하여 우리가 도착하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어머님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두 팔을 벌려 저를 반겨주셨고, 저를 만나 무척 행복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도 저를 만나 너무 좋다고 하셨습니다.
제 가족과는 처음으로 멀리 떨어져 살아본 저로서는 향수병을 이기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 제게는 밤이 견디기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와 남편은 제게 추수일을 거들라 하셨는데, 필리핀에서는 해본 적도 없고, 날씨도 무척 추워서 힘들었습니다.
어머니와 남편은 11월 24일 이곳(한국)에서 두 번째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저희 식구들은 하나도 없이, 저 혼자 치러야 했기에 너무 슬펐습니다. 그때가 저로선 가장 슬픈 날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갑자기 태도가 변하여 저를 예뻐하지 않으셨는데, 저는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집안 일을 열심히 했고, 청소와 소 여물먹이고, 개 밥 주기, 그리고 요리까지 다 했는데, 어머니는 옷을 빨 때 세탁기를 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겨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차가운 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하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 저는 어머니가 말씀하시면 뭐든 순종하였고, 저를 예뻐해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하루 종일 한 일에 대해 고마워 하시지도 않으셨기에 저는 점점 슬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제게 너무 잘 해줬기 때문에 어머니가 절 좋아하지 않으셔도 포기하지 않고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불행히도 아이 상태가 좋지 않아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였으며, 제 상태도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제 건강뿐 아니라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제 건강보다는 병원비를 더 걱정하셨지만, 하느님은 그게 제 잘못이 아니란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남편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시어머니가 제 건강 상태에 대해 물어보시면서, 돈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병원비를 걱정하시기에 저는 의사에게 퇴원 결심을 말씀드렸고, 동시에 필리핀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진정으로 제가 여기 살길 원하는지 물었고, 어머니 대신 저와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끼리 살 경우에만 한국에 머물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남편은 제 의견에 동의하여, 남편이 일하던 김제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남편이 일하던 공장 근처에 살게 되었고, 한 달 후 저는 다시 임신을 하여 첫째 딸 유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유진이는 1998년 6월 11일에 태어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였으며, 저는 이렇게 예쁜 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딸보다 아들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았고, 시어머니는 실망하셨지만, 저는 그저 행복했습니다.
김제에서의 생활은 너무 행복했고, 아무런 걱정도 없었습니다. 저와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예전보다는 점점 좋아졌습니다. 적어도 제 생각엔 그랬습니다.
세월은 흘렀고, 저는 우리 삶의 크나큰 시련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리라고는 믿지도 않았습니다.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을 때 저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중병이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남편의 증세는 악화되었고, 저는 둘째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2000년 12월 13일이었으며, 한 달 후 남편은 병원에 가서 의사로부터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니 대학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아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으나, 너무 늦었다고 하여 바로 그날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폐암을 앓고 있었으며, 그의 몸은 이미 병마가 완전히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의사와 가족들은 제게 그의 병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의사에게 그의 상태에 대해 물었고, 그날 저는 충격을 받아 밤새도록 울기만 했습니다. 남편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몰랐고, 그의 건강과 우리 아이들, 우리 미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잘 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 그 당시 아이는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행히 시아주버님의 도움으로 남편과 저는 매일 병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항상 저와 우리 아이들을 돌보아 주신 시아주버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남편의 사망이었습니다. 2001년 3월,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슬프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저와 두 아이만 남겨 두고 말입니다. 남편의 사망 이후 몇 년이 흘러 우리는 부안으로 돌아가서 정착하여 아이들도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첫아이는 7살이었고, 작은 아이가 5살 때였습니다. 아이들은 그맘때 아이들처럼 마냥 행복해 하기만 했고, 우리 두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제가 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모든 집안일과 두 아이 양육, 교사 일까지 다 해내는 것이 힘들어 필리핀에 계신 친정어머니를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처음에 어머니가 비자를 받는 게 까다로워 여러 차례 거절당하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제가 살아갈 수 없었기에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어머니는 초청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한 순간이었죠. 그때부터, 다시는 저 혼자가 아닐 거라는 걸 알았기에 말입니다.
이제 어머니가 한국에 오셔서 저를 도와주고, 우리 아이들을 돌봐주신다면 예전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제 시어머니가 너무 노하셔서 친정어머니가 필리핀으로 돌아가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희 친정어머니도 화가 나셔서, 저희 어머니 댁에서 분가하였고, 제가 도움을 원할 때는 결코 도와주지 않으셨습니다.
시어머니가 저희를 도와주지 않는데, 같이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저희 시어머니는 제 친정어머니에게 여기 계신 것이 싫은 게 아니라, 늘어나는 경비 때문에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모두 돈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시어머니에게 거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어머님 도움 없이는 제가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저와 함께 계시면 이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제 생각은 어긋났습니다. 올해 6월 30일. 저는 제 인생에서 또 한 번의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사고가 날 당시 저는 교사 세미나차 서울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서울 근처의 버스 터미널에 있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고, 고개를 돌려보았을 때 누군가가 절 보고 있다가 저한테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데, 다음 순간부터 저는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고, 의사를 만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는데, 한 가지가 머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날 제 목숨이 위태했다는 것과, 살아날 가능성이 50퍼센트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족이었습니다. 가슴은 울고 있었지만, 이것은 삶의 한 부분이기에 저는 강해져야 했습니다.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직은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심장병을 앓고 계셔서 놀라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차근차근히 제 상황에 대해 설명해 드렸고, 어머니도 저와 마찬가지로 저와 제 두 아이에 대해 걱정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제 친구들(필리핀인)에게 부탁하여 아이들과 함께 저 혼자 지내던 병원에 오셨습니다.
그날 저는 여러 가지 이유로 괴로웠습니다. 먼저, 병원비를 낼 돈이 없다는 것, 둘째, 돈은 있지만,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거기 없었기 때문에 시어머니 계좌로 입금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경비를 제 친구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물론 다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어머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다 헤쳐 나갈 수 있었을지... 어머니가 여기 계신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어머니. 제 남편의 어머니이기에 제게도 어머니이신 분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여전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8월 28일에도 치료를 받았으며 여전히 치료비를 감당해내느라 벅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 가족들이 인생에서 너무 많은 시련을 겪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제가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행복해 하고 만족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와 좋은 가족관계를 통해 우리도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어머니! 사랑하는 내 남편의 어머니! 우리 아이의 어머니 이젠 당신의 손을 잡고 싶습니다.
닥쳐올지도 모를 모든 시련들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겨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