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초기인 1398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형제들을 죽이는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이성계는 함흥으로 떠나 은거하게 된다. 태종이 된 아들 이방원이 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사자들을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 이성계는 그 사신을 죽이거나 가두어 다시 돌려보내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기도 하였다.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 태조 이성계를 맞으러 나온 태종이 있었던 곳이 바로 ‘살곶이 다리’ 자리이다.
부왕을 맞을 준비를 하던 태종은 뚝섬에다 큰 차일을 치면서 굵고 높은 기둥을 세웠다.
도착한 태조가 태종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태종을 향해 별안간 활을 쏘았다.아들 이방원은 피했고 기둥에 화살이 꽂혔다.
그래서 화살이 꽂힌 곳, 살곶이가 된 것이다. 살곶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 전관(箭串)이다.

함흥에 가 있는 태조에게 문안 사신으로 간 사람마다 죽고 살아 돌아오는 이가 없었던 때이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번엔 누가 가겠느냐고 물었지만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박순(朴淳, ?-1402)이 가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떠날 때 수레를 타지 않고 새끼 딸린 말을 타고 갔다.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의 행재소(行在所 : 왕의 임시 처소)가 보이는 곳에서 일단 멈추고
새끼 말은 거기에 매어 둔 채 어미 말만 타고가니 새끼 말과 어미 말이 서로 돌아보면서 우는 바람에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었고 여간 지체하지 않았다.
행재소에 도착하여 태조에게 인사를 올리자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태조가 그 까닭을 물었다.
박순은 속마음으로 바로 이때로구나 하고 입을 열었다.
“길을 오는데 방해가 되어서 새끼 말을 떼어서 나무에 매어 놓았더니 그 야단입니다.
하찮은 미물인데도 어미와 새끼가 차마 서로 떨어질 수 없어서 저렇게 야단입니다.”
태조는 가슴이 찡해옴을 느꼈다. 태조는 옛친구인 박순에게 돌아가지 말고 남아 있으라고 하였다.
어느 날 태조가 박순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털썩!“하고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둘러보니 지붕에서 쥐 두 마리가 떨어졌는데, 어미 쥐가 새끼 쥐를 안은 채 죽어 가고 있었다.
박순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바둑판을 밀치고 그 자리에 엎드려 태조에게 눈물로써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드디어 태조로부터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박순은 태조에게 인사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태조를 모시고 있는 신하들은 박순도 예외없이 죽여야 한다고 태조에게 강력히 요청하였다.
망설이던 태조는 박순이 용흥강을 다 건너갔으리라고 생각되었을 즈음 비로소 허락하고, 사자에게 칼은 내어 주면서 말했다.
“박순이 용흥강을 이미 건넜거든 더 이상 추격하지 말라.”
그런데 귀경길에 오른 박순은 도중에 병이 나서 속도가 지체되었다.
추격대가 도착했을 때 그는 막 배에 오르는 중이었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추격대의 칼에 맞아서
허리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몸뚱이의 절반은 강위에, 절반은 배위에 있다네.”라는 시가 생겨났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깜짝 놀라며 애통해 하며 말했다.
“박순은 좋은 친구였는데, 내가 어젯밤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다.”
태조는 드디어 한양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박순의 상반신을 그려 바치도록 했다.
박순의 아내 임씨는 남편의 부음을 받고 목을 쩔러 자결하였다.
박순의 벼슬은 판중추에 이르렀다.--대동기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