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의 꿈
김사은
문학회원들과 함께 한 중국 여행길,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황허 유역에서 발을 멈추었다. 언제나 누렇고 언제까지 맑아질 줄 모르는 강, 이 누런 물이 중국의 문명을 일으킨 힘이다. 인도의 갠지스 강처럼, 중국인에게 있어 황허는 어머니의 강으로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단다. 무심하게 강을 바라보다 눈길을 거두어 되돌아서는데, 일행 중 내일 모레 정년퇴임을 앞둔 분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청운의 꿈을 안고 황허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어야지!”
근처에 있던 일행과 어울려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그 나이에도 청운의 꿈이 있단 말인가’
버스에 올라 다시 한 번 황허를 바라보다가 나의 경솔함을 깨닫고 후회했다. 60대 후반이라고 해서 ‘청운의 꿈’을 품지 말란 법이 어딨던가.
그러고 보니 나의 꿈은 무엇이었지? 내가 되고자 했던 것, 내가 바라던 일, 내가 희망하고 간구했던 그 무엇,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너 커서 뭐가 될래?”라는 질문에 “여판사”라고 대답을 하곤 했는데, 그것은 어른들의 ‘세뇌’에 의한 준비된 대답이었을 것이다. 철들 무렵 나의 장래 희망은 글쓰기에 대한 동경이었다. 여고시절에는 처음으로 써본 소설이 모 대학 고교문예현상에 덜컥 입상하는 바람에 한동안 구체적으로 ‘소설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나 그 꿈 역시 막연한 동경이었지 싶다.
대학 진로를 결정할 때 원광대학교를 적극 추천하신 분은 J대학 출신의 은사님이었다. 시인이었던 그분은 ‘글 쓰는 분위기는 단연 원광대가 월등하다’라는 명쾌한 해석으로 학교 선택에 대한 고민의 여지를 줄여주셨고 인기 상한가를 누리던 ‘신문방송학과’로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대학 시절에는 대학신문사에서 학생기자로 활동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했지 ‘무엇이 돼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전주에서 확실한 일거리를 갖고, 아파트를 하나 얻어서, 냉장고에 시원한 맥주나 가득 채우고 가끔씩 친구들이나 불러서 맥주 파티나 열면서 사는 것’이 소박한(?) 바람이거나 혹은 간절한 의망이었을 게다. 더 솔직히 절실히 간구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으므로…….
졸업한 이듬해 서울에서 방송 스크립터를 몇 개월 하다 꿈에 그리던 고향에서 일간지 기자가 되어 소원대로 성냥갑만 한 아파트에서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삼겹살에 소주나 맥주 파티를 벌이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되돌아보면 그리 나쁜 출발은 아니었다. 꿈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결혼과 함께 20대를 마감하고 ‘기자’직도 일단락을 맺었다. 30대에 접어들어 운 좋게도 ‘방송 작가’의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전파, 영상 매체의 매력에도 젖어보았다. ‘신문’과 ‘방송’일을 하면서 훌륭한 분들과 인연을 맺은 것이 큰 행운이었고, 그 분들의 인생관을 통해 삶의 교훈을 얻었다. 겸손의 미덕, 최선을 다하는 자의 아름다움, 치열한 자기계발, 일가를 이룬 삶,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례가 없었다.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면서 나는 날마다 주문처럼 외웠다. “인생은 아름답다”고.
치열하게 30대를 달려오다 어느 날 문득 40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일 글을 쓰고 살면서도 정작 ‘나의 글쓰기’는 힘들었다. 은사님과 선배의 적극적인 권유와 배려로 등단을 해서 문단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고 말년을 함께할 직장에서 신들메를 고쳐 매었다. 틈틈이 지방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쌓은 인연으로 재능 있고 인성 좋은 제자들과 ‘사제의 정’을 나누는 과분한 행운도 누렸으니 더 바랄 게 없는 듯하다. 일찍이 재능의 한계를 느꼈으니 더 이상의 희망은 과욕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스스로 타일렀다. ‘지금도 과분하다’고, ‘더 이상 욕심을 내지 말자’고…….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꿈과, 그 꿈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의 상처에 대한 두려움과, 꿈을 실현하기까지의 치열한 과정을 겁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황허에서부터 시작된 화두, 중국 태산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꿈’의 실체와 맞부딪치기로 결정했다. 태산은 ‘태산이 높다하되’로 시작되는 양사언의 시조 덕분에 더 유명한 산이다.1,545미터의 태산은 케이블카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지만, 정상에 오르고 보니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내용에 깊이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오르지 않고 뫼만 높다 했던 거야!
비로소 황허의 누런 물도 품안에 들어오고 태산의 안개 걷힌 산이 가슴에 안긴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홀가분한 기분으로 일행을 향하여 정상에서 이렇게 외쳤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태산을 배경으로 사진이나 한 장 찍자구요!”
솔직히 말하면,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꿈을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로 나는 줄곧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다. ‘꿈’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무슨 꿈을 꿀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꿈을 꾸기로 한 순간부터 나는 다시 새로워지고 있다.
오늘도 주문을 외우듯이 “인생은, 눈물나게, 아름답다”고 외치며 ‘어떤 이의 꿈’이란 가요를 회두삼아 하루를 연다.
“어떤 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어떤 이는 꿈을 나눠주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을 이루려고 사네. 어떤 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어떤 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은 없는 거리 하네……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