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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1. 4.18
이미 정해져 있던 운명이었던가?
작년 6월에 캐나다에서 돌아가신 분의 복사판이 또 벌어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형제분들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막내이모님의 큰 아들이다. 우리 어머니를 포함해 어머니의 형제분들을 난 결코 좋아하거나 따를 수 없었지만. 막내 이모님은 특별하시다. 배움을 가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세상에 대한 인식도 바르시고, 유머감각까지 겸비하셨다. 살아온 인생살이 또한 너무나도 애통절통하다. 물론 한 인간으로써 바라볼 때, 우리 어머니 역시도 참으로 힘에 겹고 한 많은 삶을 살다 가셨다. (세상에 평탄하고 안온한 삶이 흔한 건 아니다)
막내이모님, 그 시대 그 환경에서 까탈스럽고 잔소리 입에 달고 사시던 친정 부모님을 끝까지 모셨고, 먹을 것 없던 시절, 없는 살림에 변덕과 탐욕으로 가득 찬 바로 위에 형제 분의 여러 자식들 까지 맡아 키우셨다. (그렇지만 그 에미의 그 자식이라고-어른이나 아이나 안 좋은 건 어찌 그리 잘도 닮는지, 인간의 본성이던가?- 그 자식새끼들 키워준 은공을 생각하기는 커녕 그 더러운 입으로 말도 많고.)
그러나 정작 당신 딸은 어린 나이에 남의 집에 식모살이 보내고, 식모살이 보냈던 딸이 또 어린 나이에 나이 좀 있는 남성에게 시집을 가서는 남동생(이번에 돌아가신)을 데려다 대학까지 뒷바라지 했다.
차라리 우리 어머니의 아들은 외국에 체류하다 돌아가시는 바람에 속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아들 중엔 셋째인 그 분이 어머니를 데려갔는지 모르겠다. 아들이 세상을 등진지 모르고 계셨던 어머니는, 아들이 떠난 지 불과 13일 만에 덩달아 세상을 떠나셨다.
남녀 사이에 로맨스라는 거, 미혼상태이든 기혼상태이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인생사 중에 한 가지이다. 부러 이놈 저놈 이년 저년 넘보며 색욕을 즐기는 인생막장이 하는 짓들을 두고 로맨스라 명명할 순 없는 일이다. 다만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 어떤 계기로든 간에- 예기치 않게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게 되고, 그로 인하여 세상에서 정해 놓은 도덕적 윤리적 규범 따위를 허물게 되는 경우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거다. 그런 경우를 굳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로맨스가 단순히 로맨스로 그치는 게 아닌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는 거다. 예를 들자면, 거기에 꼭 금전(그 밖에 재물)이 끼어든다거나,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시키거나 혹은 감추기 위해 굳이 다른 사람(법적인 배우자)을 모함 모략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는 거다.
고향에 가게 될 때, 윗분들의 잔소리에 못 이겨 가끔 한 번 씩은 그 여성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살 때가 있었다. 고향마을에 있는 가게 보다 훨씬 먼 그 가게로.
무엇보다도 나는 이종사촌 올케언니인 그 여성의 눈빛과 마주보는 너무 게 싫었다. 돈독으로 번뜩이는 그 눈빛은, 내가 구입하는 물건에서 얼마의 이득이 발생할 것인가를 계산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다는 게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 밉지 않은 얼굴과 당당한 체구, 돈이 되는 거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억척스러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에 일순간 나는 질식당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인간은 참으로 위대爲大 하다!)
나의 그런 감정은 어쩌면, 지금까지의 내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날에나 지금이나 늘, 돈이 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내 삶의 행로 때문일 것이다. 돈을 피해다닌다고 해야 하나?(최근 얼마동안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살고 있는지에 대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자연요법(충분히 가능성이 있기에)으로 치료해 보겠다고, 그렇게도 간곡하게 귀국요청을 했지만. 그러나 그 여자는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며 끝끝내 그 분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 나라의 사회보장제도에 따른 혜택을 받으려는 ‘계산’만 한 것이다. (그 나라의 법은, 보호자(배우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퇴원시킬 수 있고, 출국의 경우도 -환자이니까- 마찬가지였다. ) 그 여자는 철저하게, 그걸 악용했다.
순전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여태까지 탱자탱자 건달로 살아온 큰형제분께서는, 개발광풍이 몰아닥쳐 평당 100만원을 웃도는 땅덩어리가 3만평이나 남았는데도 끝끝내 그 분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았다. 그 분께서 그토록 처절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탱자탱자 식탐과 놀이를 즐기며 살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그곳 영사관과 종교단체 관계자 및 그곳으로 이민 간 그 분의 동료와 교포사회 등등에 국제전화와 메일을 보내 호소하며, 긴급후송으로 그 분을 귀국시킬 방법을 모색하느라 몇 개월간 그토록 애를 태운 나만 우습게 되고 말았다. (영사관에선 법적인 문제-배우자의 동의-만 해결되면 무엇이든 협조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여자가 동의만 했어도, 아니면 큰 형제분께서 그 여자가 요구한 액수의 돈을 해 주기만 했어도 그 분은 귀국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 여자는 결국 몇 천만원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그 분이 그곳에서 사망했을 경우의 사회보장제도로 인한 혜택을 택했다.)
이번에 돌아가신 이종사촌 형제분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여자로 말할 것 같으면, 지척에 시부모님이 계신데도 -자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 역시도 시댁에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이유는 시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과 논밭을 자기 명의로 해주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이종사촌이 돈을 벌지 않느냐, 정 반대였다. 집 짓는 목수인 이종사촌은 그동안 쉴 새 없이 일을 했다. 그 결과로 현재, 평당 100만원이 넘는 그 지역의 땅을 엄청 사들여 놓았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것도, 찜질방을 지어 놓고 준공을 앞당기기 위해 (준공을 마쳐야 공사대금을 받을 수 있으니) 무리하게 혼자서 야간작업을 하다가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의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는데,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시부모님이 치료비를 대지 않으면 자기는 포기하겠다고. 대학까지 마친 세 딸들까지 동원하여 난리난리 깽판을 친 것이다.
결국 이모님 내외분께서는 급한 대로 신용대출을 받아 3천만원을 만들어 가져다주었고, 내려오시는 도중에 또다시 딸들을 동원하여 전화질로 1억원을 요구했단다. 이모님 내외분이 올라가셔서 있는 하루 동안도 그 자신은 물론이고 딸들을 동원하여 “당신들이 낳은 자식이니, 당신들이 비용을 대서 살리려면 살려내고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겠다.” 라고.
세상에나 마상에나!
아무리 눈이 맞아 한동네 남자와의 로맨스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해도. 그 역시도 배우자가 있는 처지인 그 남자, 그렇게 궁핍하지 않은 처지인 그 남자에게는 그토록 기천 만 원씩, 수차례에 걸쳐서 돈을 해다 바쳤다는 거, 빠끔빠끔 버전에다 말할 때마다 침 튀기는 게 주 특성인 그 남자가 제 입으로 동네방네 소문 다 내었는데.
정계에 있다는 누군가를 동원하여 산재보험처리로 돌려놓아 당신이 살고 계신 논밭 팔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막내이모님. 어린 나이에, 자식이 없으니 잘 키우고 학교를 보내주겠노라 약속한 시누이의 말을 믿고 어린 딸을 그 댁에 양자로 보냈었다는.
본인은 얘기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누군가에게 들으니 학교를 보내기는커녕, 식모로 빡세게 부려 먹었다는 얘기를 들으시고는. 낳아놓기만 하고, 키워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당신이 살고 계신 논밭을 딸 앞으로 이전해 놓으셨다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남동생 데려다 대학까지 보내준 것도 그 딸이므로.)
산재보험처리로 치료를 시작한지 불과 며칠 만이었다. 어려운 수술이란 수술을 다 해서, 경과도 좋았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 그 얘기 듣는 순간, 그 여자의 눈빛과 함께 어떤 끔찍한 환영이 내 뇌리를 강타하고 지나갔다.
아들의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에 발걸음을 하지 않으시는 이모님을 찾아뵈어 얘기를 들어보니, 내 머리를 강타했던 환영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그렇잖아도 형수의 난리법석에 자기 형이 너무 위험해 보여 ‘감시’를 한답시고 내 또래의 이종사촌이 인천에서 자주 병원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사실 그래봐야 생업에 매달린 사람의 발걸음이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오죽했으랴! 딸들과 그 여자 모두가 병원에 있는 내내 시가 쪽 식구들만 눈에 뛰면 입에 거품을 물고 돈타령을 했단다. 오죽하면 이모님의 딸은 전화노이로제에 걸렸고, 치료비 전액을 시가식구들이 해 내놓지 않으면 당장 치료를 중단하겠노라는 협박에 몸살을 앓았단다. 평당 100만원이 넘는, 그 많은 땅은 절대로 손대지 않겠다며.
이모님 내외분이 살고 계신 지역의 땅은 -ㅎ력 ㅂ전소 옆이라서- 거래도 되지 않거니와 값도 없다. 땅이라봐야 논밭 다 합해서 천 평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자식을 살려내야 하니, 비용 다 대주기로 하고 치료를 시작했고, 뒤늦게 높은 사람의 도움으로 산재보험처리로 돌려놓아 한 시름 놓고는 2차 치료를 시작한 지 불과 며칠 만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산재보험으로 처리되는 경우, 당사자가 사망했다면 어떤 혜택(?)이 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하지만 뒤를 캐어 알아보니, 생명보험과 기타 보험이란 보험은 다 들어 있더란다.
섹스에 즐거움이 그렇게 크단 말인가? 그 남자와 몸을 섞을 때의 기분에 대해 그토록 적나라하게, 행위 하나하나까지 시시콜콜 소문을 낼 정도로 좋았다 해도. (그 자체를 탓하는 게 아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렇게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을까.)
아무리 남편과 마음이 멀어졌다고(아니, 애시 당초부터 가깝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인간 대 인간으로써 도리라는 게 있는 거다. 예의라는 게 있는 거다. 생판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게 인간이 갖고 있는 천성이 아니던가?(맹자여, 허튼 소리 작작 하시오!)
ㅋ나다에서 돌아가신 그 분의 그 여자나, 이번에 일을 당하신 이종사촌의 그 여자나.
평소의 삶도 그랬다. 그녀들의 남편은 누가 봐도 성실하여, 갑부는 되지 못해도 쓸 만큼은 돈을 벌고 있는데. 그런데도 항상 남편이 돈을 못 번다고. 돈이 없다고. 그래서 시댁식구들에게 사람 노릇할 수 없노라고.
그분의 발병 소식을 듣고 ㅋ나다에 다녀왔던 조카는 말을 아꼈었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중에야 들었지만, 죽든지 말든지 남편을 국립병원에다 쳐 박아 놓고는, 투병중인 가족이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그 여자.
조카가 도착해서 가족들이 준비해준 돈의 액수가 눈에 차지 않았던지, 계좌번호를 불러주며 닦달을 했다던 그 여자. 전화를 걸어도 오로지 돈 얘기와 돈타령 외에는 하지 않고. 요구한 액수만큼 입금되지 않자 아예 전화를 받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단단히 교육을 시켜 놓았던 그 여자.
이모님께서도 이미 마음을 그렇게 정하셨다고 했다. 선산이 있긴 하지만, 손녀들 꼬라지를 보아하니, 누구하나 아버지 산소에 관심 둘 것 같지 않다고. 차라리 화장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은 그렇지만, 말은 하시지 않겠다 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에미가 무슨 낯짝이 있어서 말을 하겠냐고. 며느리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참, 아니나 다를까. 다 장성한 딸년들께서 화장을 하자고 했단다. (그렇다고 그년들이 무슨 이 나라, 전 국토의 산소 화(무덤화)를 염려해서 그런 고결한 결정을 한 게 아닌 것을!) 아버지의 흔적을 없애버리고픈, 그 여자의 마음일 것이다. 에미로부터 철저하게 세뇌된 것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고인이 되신 두 분의 살아생전에 그 어떤 친밀감이나 인간적 교류도 갖지 않았었다. 지극히 개인주의적 삶을 살았던 두 분 모두가 내 ‘관심’의 대상으로 써는 전혀 무관했다. ㅋ나다에서 돌아가신 분과는 피를 나눈 형제지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 적대적 관계였다. 공적으로는 대기업 총무부에 종사했던 그 분의 삶을 난 결코 좋아하지 못했고, 개인적으로는 그 분과 나의 삶의 행로가 정 반대여서 그 분 역시도 나에 대한 감정이 좋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사가 어찌 호불호만을 가지고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들의 인생살이과정은 물론이고, 종말의 과정 또한 참으로 애통절통하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을!
내 주제꼴에, 감히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게 어이없고 같잖은 일인 것을 안다. 쥐뿔도 가진 거 하나도 없는 존재가 어디 ‘사람’ 축에 속하던가? 인간 과로 쳐 주든가 말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출고 된지 만으로 18년을 넘어선 썩은 자동차가 전부다. 그것도 중고를 구한 것이다.
중고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인생 전부가 중고인 셈이다. 중고 컴퓨터와 중고 노트북과 갖가지 중고 살림살이. 속옷만 빼놓고 모조리 중고를 구입해서는, 비누를 묻혀 박박 세탁해 입는 옷들도 내 ‘소유’라고 말 할 수 있긴 하다. (이불의 경우는 몇 날 며칠을 물에 담가 놓았다가 세탁한다. 결벽증적으로!)
아, 이번에 공동주택으로 이사를 오면서 새것을 구입한 게 한 가지 있다! 빨래 탈수기.
성장기때엔 주어진 상황으로 인한 거였고, 성인이 되고 나서 환경문제에 집착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습관이 생활화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 내가 존재함으로써 발생되는 폐해를 최소화하고픈 나의 간절한 바램의 결과이다.
내가 재물에 대해 거의 결병증적으로 반응하는 것 또한 내 인생에 주어진 숙명이리라.
너무 어린 나이 때부터 사람(어른)들의 삶을 관조하는 습관을 가진 것부터가 그랬다. 누가 그 어린 나이에 시시콜콜 사람들의 인생살이 면면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갖는 단 말인가?!
탐욕으로 흔들리는 인간의 눈빛, 그에 따른 행동(생활)양식에 대해서 말이다.
재물에 대해 초연하고픈, 초연하겠다는 확고한 의지 및 강박관념이 내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일 게다.
나 자신, 스스로의 삶을 어렵게 운명 지어 놓은 게 어디 그것뿐이던가?.
우리 사회의 고질병 중에 하나인 ‘학력’이 바로 그거다. 학력(예전엔 고졸이었지만, 지금은 대졸이다)이 없는 게 어디 인간(사람)이던가?
내게 지워진, 어쩌면 운명적 삶으로부터 시작된 것일 게다. 정확히 말한다면,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내게 부여된 삶은 맏이노릇과 다름없었다. (그런 형태는 종종 현재진행형이 되기도 한다.)
한글이나 익힌 상태에서 나는, 세 집안의 살림살이와 농사일을 할 것을 요구 받았다. 나는 그 요구에 순응했다. 아니 순응했다기 보다는, 고향산해에 대한 나의 집착증의 결과로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었다는 게 적확하다.
그 과정에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 어른들의 핍박과 비웃음에도 나 나름대로 지적 호기심(?)을 해소하는 방법을 멈추진 못했다. 그리고 대도시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대학입학 수능시험제도가 실시되었고, 그 첫 해에 시험문제가 일간신문에 실려 있어 심심풀이 땅콩으로 풀어 보았는데, 50문제 중에 41문제를 풀었다. 답을 맞추지 못한 부문은 수학과 과학 쪽이었다.
어떤 친구는 내게 간곡하게, 검정고시를 치라고 권하기도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질이 너무 아깝다고. 나 역시도 한 때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선천적으로, 심리학에 관심이 가기도 했거니와 자신도 있어서였다. 심리상담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었다.
나는 종종 주변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 얘기를 들어 주었는데, 그들은 한결 같이 나에게 얘기를 하면 마음이 홀가분하고 생각이 명료해 진다고들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한 밤중에도 그들은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얘기를 하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듣기 싫을 수 있는 얘기들을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얘기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의 삶과 그들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들을 사회적 관점에서 파악했으며, 그 관점에서 애기들을 풀어갔다. 그렇게 하여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갈등들에 대해 자기 자신을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써 인식을 넓혀 간다면. 그리하여 그들이 나아갈 삶의 방향 또한 자기 개인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를 탈피해서 사회참여로 유도할 수도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지극히 사적인 감정으로 인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객관성을 가질 수 있으므로 해서- 갈등 관계가 일정부분 해소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그건 이미 나의 성장과정에서도 여러 번 실증해 본 경험이 있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쪽 계통에 자격을 취득하려면 학력이 필수였다.
그 놈의 학력이라는 게, 지성 및 인성이나 인격형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게 나의 확고한 생각인데. 만일 내가 뭔가를 하기 위해 학력을 취득한다면, 내 확고한 의지(신념)를 져버리는 게 된다는 거다. 학력을 가지고 인간차별을 하는 세상에 순종 내지는 정당성을 부여해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거다.
나의 그런 고집의 결과로 인해, ㅅ림기능사 시험접수 때도 한바탕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응시자격요건에 분명히 학력무관이라 명시했으면, 아예 시험접수지에 학력기재 란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던가? 그런데도 학력기재 란이 있었고, 무학이라는 카테고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인터넷이 안 되어 직접 창구로 가서 접수했었는데, 접수 할 때 무 학력이란 내 코멘트에, 창구 직원은 아주 대놓고 노골적으로 비웃음과 야유를 가득 보내 주었다. 접수창구 문을 나서는데도, 그 눈빛 그대로 유지하고 배웅(?)해 주는 걸 보았다.(대단히 감사하게도!)
그리고 1차 필기와 2차 실기를 단 번에 통과해서 증을 발급 받으러 찾아갔더니만, 어지간히도 계면쩍어 한다고 해야 하나?
(나무를 좋아하는데다, 촌에 살게 되면 농지가 없으니 산림이나 나무에 관계된 일을 해 보려고 했던 것인데. 쓸모가 없는 ‘증’이 되어 버렸다.)
시험을 치르게 되는 내용에 대해 인지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설령 응시를 했다 해도 시험(문제)을 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왜 굳이 ‘학력’을 고집하는가? 그건 바로 ‘학교장사’를 위해서 인 것이다. 그에 따른 자본주의적 상업(참고서 및 기타 등등의)성의 결과이다.
만일 우리나라 학교에서 ‘인성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나마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니던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지 무 학력이라는 이유 하나로 온갖 방법의 수모와 멸시를 당한 걸 기록한다면 아마도 만만치 않은 분량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 또한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내 신념(의지)을 꺾는 짓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20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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