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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로서의 외길인생, 행복한 삶과 수필철학
-수필가 김학 선생의 수필세계-
오경옥 시인
1. 수필에 대한 애정과 헌신, 수필문학사의 산맥을 형성하다
존D. 록펠러3세는 행복으로 가는 길은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은 다음, 거기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가진 에너지(열정)나 야망 그리고 타고난 재주를 하나도 남김없이 바치는 것 말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끼고 기쁘고 즐겁게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떤 대가나 결과보다도 오로지 그 일이 좋아 최선을 다하며 집중하고 지속할 수 있는 힘, 그 과정을 즐기고 감사하며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보람 내지는 기쁨, 그것이 바로 행복이며, 행복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 사람은 누가 보아도 선망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수필가 김 학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수필가 김 학 선생은 수필이 좋아 수필에 열정을 바치고 56년 넘게 수필이라는 외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도 그 길에 지친 기색 없이 오히려 그것을 감사하게 인식하며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김 학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20여 년 전, 군산문협 문학세미나에서 그 분의 문학 강의를 듣고 그의 프로필을 훑어보던 중, 그 분의 고향과 나의 고향이 이웃 동네이며, 나의 중학교 대 선배님이라는 걸 알게 되어 인사를 드리면서였다. 하지만 그 분과 가깝게 알게 된 것은 인터넷으로였다.
김 학 선생은 <마로니에 샘가>라는 우리 문학 동인게시판을 먼저 찾아주시고 인사를 건네며 좋은 정보들을 알려주셨다. <한국문학도서관>에 회원가입을 하면 개인홈페이지처럼 문학공간을 꾸려갈 수 있다는 것과 <고도원의 아침편지>나 <좋은 생각>과 같은 좋은 글들을 메일로 날마다 받아볼 수 있는 유익한 사이트 등을 추천해주셨다. 그 <한국문학도서관>을 통해서 선생의 수필들을 읽기 시작했고, 서재에 찾아오는 그 분의 지인들도 알게 되었다. 한 작가의 작품이나 그 사람과 교류하는 주변인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프로필을 굳이 안 보아도 어떤 사람일지, 또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지, 대략적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수필가 김 학 선생은 1962년 대학 1학년 때「아웃사이더의 사랑 이야기」라는 작품을 대학신문에 발표한 후 군산서해방송국에 입사하여 <밤의 여로>라는 프로그램을 맡음으로써 2년 반 동안 매일 수필 한 편씩을 써서 발표하며 수필과의 인연을 깊이 다지기 시작한다. 말이 쉽지 일주일에 한 편도 어려울 텐데 하루에 한 편씩 수필을 쓴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웠겠는가? 애청자들에게 수필을 발표해주기 위한 사명의식으로 고뇌하며 사색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였을지 생각만으로도 참 대단한 분임을 알 수 있다. 그 뒤 <밤의 여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의 많은 수필가들에게 수필을 발표할 기회를 줌으로써 수필쓰기의 해방과 함께 많은 수필가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고 그것을 계기로 그들과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단하여 오늘날 <전북수필>의 명맥을 견고히 이어가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선생은 <밤의 여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발표했던 수필들을 모아 방송수필집을 두 권이나 상재했으면서도 1980년 중앙지인 <월간문학>에「전화번호」라는 수필을 통해 정식 등단을 한 후, 수필에 대한 애정과 지속적인 성실함으로 수필을 창작하여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수필집 외에도 10권의 수필집과 『가을앓이』외 1권의 수필선집, 그리고 『수필의 맛 수필의 멋』외에 1권의 수필평론집 등 총 15권의 저서를 출간 할 정도로 왕성한 필력을 생활화 하고 있다.
또한 <전북수필문학회>를 비롯하여 여러 문학단체에서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과 대한문학회 회장 등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문학 활동을 하며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수필문학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수필에 대한 애정과 헌신, 나름의 수필철학을 몸소 실천하였기 때문인지 학계의 인정을 받아 한국수필상을 시작으로 전라북도문화상, 펜문학상, 신곡문학 대상, 목정문화상 등 16개가 넘는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또한 1989년 1월 미국 동부와 서부, 하와이 시찰을 시작으로 17회 정도 세계문화와 역사 등 세계문학기행을 다니면서 폭넓은 견문과 깨달음으로 사고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게 되고,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통찰력을 수필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김 수필가는 방송국에서 33년 근무하고 정년퇴직을 한 후, 곧이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 전담교수로 14년간 강의하다 지금은 신아문예대학에서 수필창작을 지도하고 있다. 그 외에도 10년 가까이 두 군데에서 수필 창작반을 개설하여 현재까지도 많은 제자들과 수필가들을 양성하고 있다.
이렇듯 선생은 수필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칭찬하며 이끌어주는 등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다. 꽃이 있으면 벌이 모여들 듯 훌륭한 사람 곁에는 따르는 사람이 많은 법이다. 그래서인지 한 학기에 수필 강의를 수강하는 제자들이 전국에서 모여 네다섯 개의 반에 그 인원만 무려 100여명에 이른다. 그들이 쓴 수필이 메일로 배달되면 매일 새벽4시면 일어나서 첨삭하여 보내준다. 제자들이 많으니 메일로 배달되는 양 또한 많을 텐데 한결같이 그 일을 감사하게 행복하게 해낸다. 그 중에서 좋은 작품들은 지인들의 이메일과 각 문학 사이트에 게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게 하고 평가를 받게 한다. 이는 창작자(작가)에게는 작품을 발표하는 계기도 되면서 작품 홍보도 되고, 좀 더 작품을 잘 써야겠다는 사명의식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그 지속적인 성실함과 헌신 덕분인지 제자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신춘문예나 인지도 높은 문학상들을 수상하기도 하고, 수필집들을 출간하여 수필문학의 중견작가로서 왕성하게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선생은 오직 수필이라는 외길을 걸어가며, 그 수필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수필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며, 성공적인 전문수필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선생의 개인사적으로나 전북의 수필문학, 더 나아가서는 한국수필, 한국문학사를 융성·발전하게 하는 모멘트가 되어 큰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긍정적인 삶의 인식, 행복한 삶과 수필인생을 견인하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기 원한다. 그것이 대부분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목표이자 삶의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한 것일까?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당신이 잘하는 일이라면 무엇이건 행복의 근원이 된다”라고 했고, 괴테는 “기쁘게 일하고, 해 놓은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했으며, 톨스토이 역시 “참된 행복은 자기 내부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 선한 삶에 존재한다”라고 했다.
자신이 잘 하는 일, 또는 소망하는 무엇인가의 이상적인 욕구의 실현, 그것을 위해 긍정적으로 기쁘게 인식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과정, 거기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물론 행복은 각 개인마다 주어진 현실적인 상황과 입장이 다르기에 정도의 차이와 종류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주어진 현실적인 상황과 입장에서 소망하는 그 이상적인 욕구(꿈)를 위해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열정을 다하며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희열, 그 일련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며 감사할 때, 그것이 곧 행복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예문은 수필가 김 학 선생의 등단 30주년 기념 수필집으로 엮은『수필아, 고맙다』의 머리말 일부이다.
수필은 다정한 나의 친구요, 정신적 동반자다. 수필이 있기에 나는 늘 행복하다. 수필은 나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아둔한 내가 열한 권의 수필집을 낼 수 있었던 것도 수필이 베풀어준 시혜다. 또 수필집을 출간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KBS에서 정년퇴직을 한 내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서 후배들을 모아 유능한 수필가로 양성할 수 있게 된 것도 수필이 마련해준 혜택이다. 수필은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나에게 기쁜 일만 제공해주고 있다. <중략> 나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수강생들에게 신문이나 방송이 10대뉴스를 선정하여 발표하듯 누구나 <우리 집 10대 뉴스>를 기록으로 남기도록 종용하곤 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 집안의 가족사를 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2001년부터 <우리 집 10대 뉴스>를 썼다. <중략> 이렇게 가족사를 정리하면 회사나 기관 단체들이 <50년사> <백년사>를 책으로 묶어내듯 언젠가는 족보를 편찬하는 심정으로 <우리 가족 30년사>나 <우리 가족 50년사>를 책으로 묶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수필아, 고맙다』의 머리말의 일부 ―
존 밀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가 감사함을 느끼는 깊이에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수필가 김 학 선생은 “수필을 다정한 친구요 정신적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수필이 작가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것이 많은 데 그 중 수필집을 11권(현재는 저서가 총 15권임)을 출간한 것과 여러 문학상을 받게 된 것, 평생교육원과 노인복지관에서 후배(제자)들을 모아 유능한 수필가로 양성할 수 있는 것, 그 제자들이 신춘문예나 지명도 높은 문학상을 받거나 좋은 수필집들을 출간하여 중견수필가로 성장·발전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등 이 모두가 수필이 베풀어준 시혜요 은혜라고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이것은 곧 수필가 김 학 선생의 행복한 삶과 글쓰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지 유추가 가능한 단초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삶의 자세는 “행복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일치할 때 찾아온다”라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선생은 늘 행복을 말과 글로 시인하고 행동함으로써 작가 스스로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또한 작가는 해마다 연말이면 <우리 집 10대 뉴스>를 기록하여 가정의 역사를 기록·정리해봄으로써 행복을 다짐하고 화목한 가정을 위해 작가와 가족들 스스로 가족과 가정에 충실하도록 노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가정사도 잘 챙기도록 당부를 잊지 않는다. 이것은 톨스토이 말처럼 “가장 큰 행복은 한 해의 마지막에서, 지난해에 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자신을 느끼”도록 하게 함이 아니겠는가.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처럼 집안이 화목하고 편안하면 모든 일들이 다 잘 되어 성공적인 삶이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것은 누구나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겠지만 행복한 삶이 가족과 가정 챙기기에 있음을 선생은 스스로 손수 제자(후배)들과 독자들의 본이 됨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하며 심어주고자 한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남을 복되게 하여 자신의 행복도 원대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 예문 한 편을 보자.
아들아 딸아,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할 것이다. 옛날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부부가 있었더란다. 그런 부부가 다행히 아들을 낳게 되었지. 얼마나 기뻤겠니? 어떤 노인이 그 아이의 엄마에게 소원 한 가지를 말해보라고 했단다. 그러자 그 엄마는 그 아이가 앞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게 해달라고 했지. <중략> 남의 사랑을 받을 줄만 알고 남을 사랑할 줄 몰라서는 안 되지. 사랑은 받을 때보다 줄 때 삶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는 법이라고 하지 않더냐?
아들아 딸아, 너희 자녀들에게, ‘사랑은 받는 것보다 나누어 줄 때 그 기쁨이 커지고 행복해진다.’는 점을 일깨워주기 바란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10이라면 사랑을 줄 때의 기쁨은 그 열배 이상이라고 하더라. 이 사랑의 비밀을 아이들에게 꼭 알려주기 바란다.
-「밥상머리교육 유언 (46)-사랑받을 줄도 알고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의 일부-
가난한 시골출신인데도 어머니는 나를 대학까지 보내주셨다. 그 덕에 대학에서 ROTC 훈련을 받고 장교로 임관하여 <중략> 어느 통계를 보니 퇴직자 가운데 정년퇴직자는 14%밖에 되지 않는다는데 나도 그 테두리 안에 들어갔으니 어찌 행운아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중략> 재직 중에는 월급이 많은 편이어서 좋았지만 퇴직하고 나니 연금이 없어 어깨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중략> 네 반으로 불어나 100여 명의 수강생들이 모여들어 신바람이 났었다 <중략> 수필가로서 13권의 수필집과 2권의 수필평론집을 출간했고, <중략> 여러 가지 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행운이라 할만하다. / 나는 2남1녀를 두었다. <중략> 모두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저마다 결혼하여 자녀를 둘씩 낳아 손자손녀가 여섯이나 된다. <중략> 그런데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거나 오래 입원을 해 본 일이 없으니, 이 역시 행운이 아니겠는가? 튼튼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싶을 뿐이다. - 『김학 행복 통장』「 (41) 나도 행운아」중에서 -
위 첫 번째 예문은 최근 수필가 김 학 선생이 「밥상머리교육-유언」이라는 주제로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을 꾸준하게 기록·정리하여 책으로 출간하여 물려주려고 집필 중에 있는 글 중 한 편이다. 마치 백범 김 구 선생이 두 아들 인과 신에게 쓴 서간문 형태의 자서전인『백범일지』나 영국의 필립 체스터필드의 『아들아 후회없는 인생을 살아라』라는 책을 보는 듯 부모로서 자식이나 손주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깊고 진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대부분 집안에 어진 부모가 있어 자녀가 바르게 학문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 가르쳤던 것처럼 김 학 선생의 수필집 곳곳에서는 자녀나 손자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표현하여 그들도 아버지(할아버지)처럼 스스로의 삶을 건실하게 개척해가기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만은 선생의 수필 곳곳에는 가족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 심중의 깊이를 잘 가늠해볼 수 있으며, 그 심중 안에 자녀들과 손주들의 이야기가 행복한 글꽃으로 피어나고 있음을 선생의 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예문인『김학 행복 통장』이라는 글 역시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대학까지 나올 수 있었고, 그 덕에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33년이나 근무한 직장에서 무사히 정년퇴직한 것과 좋아하는 수필을 가르치며 연금 대신 수강료를 받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많은 수필집 출간과 문학상 수상, 그리고 2남 1녀가 모두 장성하여 결혼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며 각각 두 명의 손주들이 있음과 지금껏 병원에 입원한 적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글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의 결과일 텐데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일들이 근심걱정 없이 소망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고 있음에 감사하게 생각하는 긍정적인 현실인식과 겸손한 삶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3. 작가(수필가)와 작품(수필)의 세계, 그 경계에서
에이브럼즈(M.H Abrams)는 문학작품을 설명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문학(작품)을 작가와의 관계로 귀착시키면서 ‘표현론적 비평’을 내세웠다. 즉 작가의 삶(생애)과 작품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고 전기적인 접근법을 활용하여 작가의 인품을 통해서 작품의 품격을 확립하려 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문학자 생뜨 뵈브는 작가의 성향이나 기질, 환경, 교육, 교우에 이르기까지 조사하여 작가의 내면적 초상화를 그려내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작가의 저작물인 작품은 작가의 삶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반영하기 마련이므로 그 작품 속에 작가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표현될 수밖에 없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특히나 수필이라는 문학 장르는 자기 고백적인 특성이 강함으로 세상을 지각하고 인식하여 수용하는 관점과 그 시선과 감정처리 기법, 그리고 사물을 포착하여 수필로 승화해내는 재능과 그 작품(수필) 속에 투영된 작가의 사상 내지는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표출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작가(문학적인 삶)와 그 작품(수필)은 더불어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수필가 김 학 선생의 수필 세계를 탐색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수필가 김 학 선생이 수필과의 인연을 맺은 것이 56년이 넘다보니 지금까지 쓴 수필과 수필평까지 합하면 약 700여 편이 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필자가 그 많은 작품들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후반기 그의 수필의 경향을 보면 한 가정의 어른으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행복, 수필창작지도교수로서 수필창작과 수필가의 자세, 사학자로서의 역사의식과 전통에 대한 온고지신, 방송인으로서 다양한 매체를 통한 건강한 사회의 미담과 인간학, 여행에서 깨달은 높은 식견, 창의적인 발상과 비유로 승화한 작품 등이 주를 이룬다. 그 대표적인 예문 속으로 걸어 가보면 다음과 같다.
큰아들 정수는 LGT+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러니 2년마다 핸드폰을 새로운 기기로 바꾸어주곤 했었다. <중략> 아내의 핸드폰도 스마트폰으로 바꾸어주니 아내도 몹시 기뻐한다. <중략> // 디지털시대를 맞아 지난 10월에 아들 딸 3남매를 대상을 제1회 가족사진 컨테스트를 마련했었다. 금상은 20만원, 은상은 10만원, 동상은 5만원의 현상금까지 걸었다. 스마트폰으로 각자 가족사진을 찍어서 「카카오톡 3남매 그룹채팅」에 올리도록 했었다. 심사는 나와 아내 그리고 전주 홈플러스 사진관 주인 등 세 명이 맡았다. <중략> 내가 이 가족사진 컨테스트를 마련한 것은 4촌 형제자매 끼리 자주 만날 수 없으니, 이렇게 가족사진을 찍어서 3남매가 저마다 세 집의 가족사진을 인화하여 각자 액자에 넣어서 거실에 나란히 전시하면 좋겠다 싶어서다. - 『何如歌 & 丹心歌』 중 「2014년 우리 집 10대 뉴스」중에서 -
두 번째 예문은 ‘가족사진 컨테스트’라는 명목이지만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 잘 함축되어 있다. 한 가정의 어른으로서 공정한 심사를 하기 위해 자녀들의 행복한 삶의 모습과 우애를 선의의 경쟁으로 도모하고 있으며, 장남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한 글로벌시대에 바쁜 현대 도시인 가족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더욱 친밀한 가족애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카카오톡이라는 IT매체의 그룹채팅방을 활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글로벌시대에 정보화를 이용한 행복한 가정만들기라고 볼 수 있다.
수필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만큼 더 열심히 칭찬거리숙제를 잘 했습니다. 칭찬거리 찾기는 바로 좋은 수필소재 찾기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이런 사회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강의실에서 칭찬거리 찾기 운동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칭찬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일종의 사회운동입입니다. <중략> 지금은 칭찬 잘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입니다. 이 칭찬운동은 가정에서 출발하여 학교와 직장과 사회로 번져나갔으면 합니다. 그 칭찬바이러스를 우리 수필가들이 이웃으로 전파하는데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수필가들이 솔선수범하여 자기 가족, 자기 직장, 자기가 참가하는 단체로 칭찬바이러스를 전파한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즐거운 삶터로 바뀌지 않을까요? -『수필아, 고맙다』중 「수필가는 칭찬바이러스의 전파자가 되어야」의 일부 -
수필가 김 학 선생은 2001년부터 현재까지 수필창작지도교수로서 수필가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수필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남다르다. 선생은 수강생들에게 첫 강의 때부터 지금까지 강의시간에 항상 칭찬거리를 소개하게 한다. 이는 곧 좋은 수필소재 찾기 훈련이 되기도 하지만 칭찬의 생활화를 수필가들로부터 시작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문인과 문인들이 서로를 칭찬하는 분위기로 바뀌면 문학단체가 화기애애하게 발전할 것이고 수필문학뿐만 아니라 한국문학 역시 세계 속의 문학으로 성숙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칭찬할 줄 아는 마음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라는 그 분의 메일 꼬리말의 서명처럼 김 학 선생은 달콤한 말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칭찬하기를 좋아한다. 칭찬운동이 생활화되면 인간관계가 좋아져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슈바이처 말처럼 성공이 행복의 열쇠는 아니지만 행복은 성공의 열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정과 직장, 우리 사회, 우리나라가 아름답고 가슴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선생의 속 깊은 마음과 삶의 지혜요 긴 안목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최영록이 쓴 「기록의 나라, 조선」이란 글을 읽고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중략>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실록』『훈민정음해례본』『승정원일기』<중략> 등 13가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중략> 청와대비서실격인 조선왕조 승정원에서는 모든 걸 꼼꼼히 기록하여 『승정원일기』를 남겼는데, 지금의 청와대비서실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떤 기록을 남기는지도 모르겠다.” -「조선(朝鮮)이라는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일부-
위 예문은「조선(朝鮮)이라는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라는 <한국디지털도서관>의 그 분의 문학서재에 올라와 있는 글로, 사학자로서 남다른 역사의식과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항상 다시 쓰인다는 점을 밝히면서 '역사는 역사가와 과거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정의했다. 그 분의 수필집들을 읽어보면 많은 글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나 전통문화에 관한 글임을 잘 알 수 있다. 이것은 선생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한국전통문화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 애착과 강한 역사의식을 잘 알 수 있다. 이는 제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고 있는 시점이지만 온고지신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준 전통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 않던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의식과 전통문화에 대한 중요성과 올바른 이해를 심어주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리고 기성문인으로서 잊지 않아야 함을 재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삼계리에서 태어났다. <중략> 나의 모교인 삼계초등학교는 지금까지 170여명의 박사를 배출하여, 내 고향 삼계를 박사고을로서 크게 이름을 떨치게 했다. <중략> 나 역시 둘째아들 창수를 미국의 3대 명문 공과대학의 하나인 카네기 멜론대학으로 유학을 보내 컴퓨터공학박사학위를 받게 했다. <중략> 중학교 때는 삼계에서 오수까지 8km를 3년 동안 걸어서 통학을 했었다. 눈이나 비가 와도 걸어서 다녔다. 걷기운동이 좋은 줄 몰랐던 그때는 무척 힘들었지만, 그 덕에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한 적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何如歌 & 丹心歌』 중 「나는 행복합니다(2)」의 일부 -
수필가 김 학 선생의 호는 “三溪”이다. 삼계는 그 분의 고향의 이름이다. 호를 고향의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만 보아도 그 분이 고향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그 애향심과 자긍심을 잘 알 수 있다. 그 분은 사용하는 언어나 외모에서도 정겨운 고향 사람 같이 푸근하고 편안하지만 심성 또한 선하고 순박하여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한번 인연이 되면 그 관계에 변함이 없다. 그 분의 수필집을 읽어보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그 지역사랑을 피력한 것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선생님, 선생님, 김동완 선생님!’ 꿈에도 잊지 못한 나의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김동완 선생님! 고희를 넘긴 늘그막에 나는 그 김동완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중략>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막문이 막히고, 눈물이 핑 돌았다. <중략> 그 선생님이 가르치신 역사 과목은 무척 재미가 있었고, 시험을 볼 때마다 점수가 높게 나오니, 더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을 본받고 싶어서 대학 진학 때 나는 상과대학이 아니라 인문대 사학과를 선택했다. <중략> 나는 5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있다.
-『何如歌 & 丹心歌』 중 「선생님, 선생님, 김동완 선생님」의 일부 -
위 예문은 수필가 김 학 선생이 우연히 알게 된 스승에게 수필집을 보내드림으로써 54년 만에 스승의 전화를 받게 되면서 너무도 감개무량하여 그 소회를 추억하고 있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이 재미있어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고 존경하게 되어 사학과를 진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살다보니 소식이 끊겼었는데 우연히 54년 만에 존경하는 스승에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반갑고 기뻤으면 ‘선생님, 선생님, 김동완 선생님’이라고 글의 제목을 반복법으로 강조하고 리듬감으로 존경하는 마음과 기쁨을 표현했겠는가.
최근에는 자녀를 하나나 둘만 낳아 기르고, 또 학교에서도 체벌이 금지되어 교권이 추락하고 스승에 대한 존경이 퇴색되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도 옛말이 되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런데 아흔을 넘긴 스승에게 고희를 넘긴 제자가 먼저 소식을 전해드리고 그 연로한 스승의 전화를 받고 감개무량해 하고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존경하는 마음과 스승의 만수무강을 비는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진한 감동과 함께 스승의 의미와 역할을 되새겨보게 한다.
다섯 살과 세 살짜리 이복자매가 서로 다른 보육원에서 자라다 미국의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헤어진 지 41년 만에 그 넓은 미국 땅에서 극적으로 만났단다. 이런 꿈같은 일이 진짜로 실화(實話)란 말인가? <중략> / “따로 입양된 형제자매의 극적 만남은 종종 있었지만 ‘40여 년 전 지구 반대쪽(한국)에서 태어난 두 자매가 미국에서 같은 직업, 같은 병원을 선택한 미스터리’는 어떻게 설명하나?”라고 보도했다고 한다. 이런 일은 신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일이」의 일부 -
위 예문은 2015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사진과 기사를 보며 41년 만에 극적으로 만난 한국의 이복자매가 같은 병원에서 같은 직업을 가진 동료였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사연에 깊이 공감하며 그 감동을 독자들과 같이 나누고 싶어 하는 글이다.
방송인으로서 우리 사회에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연들을 놓치지 않고 한 편의 작품으로 승화하여 가족의 소중함과 그 그리움이 얼마나 크고 애절한지 물질만능주의로 가족의 해체와 붕괴, 그로인한 패륜적 범죄가 가끔씩 일어나는 현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김 수필가의 수필집을 읽다보면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것들이 창의적인 발상과 독특한 비유로 의미를 부여하여 작품으로 승화된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몇 개만 들어보면 ‘비와 걸레’는 그 역할과 쓰임새로 동반자와 상부상조로, ‘살 송곳과 골풀무’은 옛시조에서 발견한 남녀의 성기표현으로, ‘하루살이’의 수명으로 죽음의 의미를, ‘갈치, 그 치마끈처럼 긴 고기’는 수필문장의 길이로, ‘방귀 세’는 뉴질랜드에서 대기를 오염시킨다하여 방귀 세를 걷으려 했다는 내용, ‘짝짝이 양말’에서 구멍 난 양말을 버리는 것을 순장으로, ‘참새는 어디서 잠을 잘까’는 초가와 기와집이 사라진 도시참새들의 보금자리를 걱정하는 내용 등이다.
그만큼 그는 수필의 소재 선택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생활의 주변과 다양한 매체들을 적극 활용하여 우주론적으로 오감을 열어놓고 다각도로 관찰하는 것이다. 현미경 같은 관찰력과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놀라운 창작력, 그 왕성한 필력이 부러울 정도다.
4. 수필가로서의 외길인생, 행복한 삶과 수필 철학
한 작가의 수필세계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 작가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다루어야 마땅하지만 김 학 수필가의 수필은 워낙 방대하여 총체적으로 다루기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의 후반기 수필세계를 작가의 삶과 연계하여 그 경계에서 탐색해보았다. 그의 후반기 수필의 경향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한 가정의 어른으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행복, 수필창작지도교수로서 수필창작과 수필가의 자세, 사학자로서의 역사의식과 전통에 대한 온고지신, 방송인으로서 다양한 매체를 통한 건강한 사회의 미담과 인간학, 여행에서 깨달은 높은 식견과 창의적인 발상과 비유로 승화한 작품 등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김 학 수필가 하면 ‘행복’이라는 단어와 ‘수필가’와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그 만큼 김 학 수필가는 56년 넘게 ‘수필’이라는 외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면서 말과 글과 행동으로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시인하고 ‘행복한 글쓰기’를 그의 수필철학으로 실천하며 생활화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만드는 법이며, 내 마음이 행복해야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지라고 했다. 김 수필가는 반백년 넘게 수필이라는 외길을 걸어오면서 수필에 대한 애정과 적극적인 열정으로 수필에 헌신하며, 근면 성실한 글쓰기, 칭찬과 격려로 더불어 행복하고자하는 따뜻한 마음, 그리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삶을 인식하였기에 스스로를 행복한 삶과 수필인생으로 견인하며 전문수필가로서 우뚝 서게 한 것이리라.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만들 듯 김 수필가의 행복한 삶도, 수필인생도 자신에게 주어진 수필이라는 길을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수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