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나라는 구한 스님들 임진왜란은 1592.4.13일 일본군이 부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40일이 되어 평양까지 점령하게 된다. 일본군이 부산에서 한양까지 쳐들어 올 때 군인들은 도망갔고 그 유명한(?) 장군들은 머릿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평시에 백성 앞에 군림하던 그 기풍당당한 기세는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 거녕 출행랑을 친 것이다. 또 공자를 신처럼 떠받들며 사서삼경을 앞뒤로 외우며 과거에 급재하여 천재라 불리던 자들과 불교를 철저하게 배척하던 유생들 하나 같이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천민으로 취급받던 스님들이 힘없는 농부들과 힘을 합쳤다. 전쟁이 터지고 넉달이 지날 무렴 청주성을 탈환한 이가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영규 스님이다. 충청도 백성들이 새우젓 담듯이 죽어나가자 영규 스님은 목탁을 버리고 가사장삼을 버리고 대나무 지팡이을 들고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스님800명이 힘을 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한 것이다. 이 탈환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최초의 승리였다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 서산대사의 격문을 보고 영동의 영규(靈圭) 스님, 호남의 처영(處英), 관동의 유정(惟政), 해서의 의엄(義嚴) 등 수 많은 제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했다. |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
■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서유린(徐有隣)이 글을 짓고 정동준(鄭東浚)이 글씨를 쓰고 심이지(沈頤之)가 전서(篆書)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이며 서산(西山)은 그 호이며, 혹 청허자(淸虛子)라고도 한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이며 안주(安州) 사람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열 살에 부모를 여의고서 출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宣祖)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임명하자 제자인 유정(惟政)과 처영(處英) 등과 함께 승병(僧兵) 5천여 명을 규합하여 공을 세웠다. 1604년(선조 37년)에 세수(世壽) 85세로 입적하였으며, 7세 법손 천묵(天黙) 등이 1788년(정조 12년)에 전라도 대둔사(大芚寺) 남쪽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자 정조가 표충(表忠)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1970년대로 추정된다
■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명(西山大師表忠祠紀績碑銘)
숭정대부(崇政大夫)행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行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서유린(徐有隣)이 글을 짓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의금부사 규장각 검교직각(兵曹參判兼同知春秋館義禁府事奎章閣檢校直閣) 정동준(鄭東浚)이 글씨를 쓰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평안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관서관향사 평양부윤( 行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關西館餉使平壤府尹) 심이지(沈頤之)가 전서(篆書)를 쓰다.
■ 내용
한자(韓子)는 사람 중에 명색은 묵자(墨子)의 사상을 표방하는 묵자(墨者)이면서 유자(儒者)의 행실을 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세인들은 늘상 부도씨(浮屠氏 : 승려를 가리킴)가 삭발을 하고 먹물을 들인 승복을 입고서 농사도 짓지 않고 베도 짜지 않으며 천륜(天倫)을 저버린 채 백성의 재물을 좀먹는다고 헐뜯고 있으니 이런 비판은 명색이 묵자인 사람에 해당될 뿐이다.
오늘날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은 사람 중에 인걸이 있어 능히 그 무리를 고무(鼓舞)시키고 군부(君父)가 환란에 봉착해 있는 때에 병기(兵器)를 잡고 사직(社稷)을 보위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유자(儒者)의 행실을 하였다 말하지 않더라도 유자라는 말을 얻은 것이니, 녹봉을 받았더라도 그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릇 여러 관리(官吏)들 가운데 백 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자들은 모두 먹는 것이 관(官)에서 나오는 것이니 녹봉이 있으면 직함이 있는 것이고 직함이 있으면 책임이 있는 것이니, 책임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을지언정 책임을 구차히 모면하려 들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산에 사는 승려로서 구름과 물 사이에 거처하며 바리때에 밥을 먹으며 세상에 대해 경영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고 책임도 없으며, 인사(人事)에 있어 득실을 따지기 어려운 사람이 만약 그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화살과 돌이 나는 전장터에 무릅쓰고 나가서 말고삐를 잡고 대열 가운데서 분주히 움직이며 오직 후미에 처질까 봐 걱정한다면 그것은 역시 유자도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송운대사(松雲大師: 사명당)의 풍도에 대해 들었으니 송운은 남다른 인물이다. 한 번 뛰어오르면 -몇 자 판독 불능- 백만의 군대를 대적하였으니 그 충렬(忠烈)이 더 이상 성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송운의 스승이 또 있으니 이른바 서산대사로 의리는 더욱 높고 공은 더욱 크며 커다란 업적은 더욱 기이하니, 송운의 풍도가 비롯된 바가 멀다 하겠다.
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이며 서산(西山)은 그 호이며, 혹 청허자(淸虛子)라고도 한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이며 안주(安州) 사람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열 살에 부모를 여의고서 쓸쓸하고 비통하게 부모를 그리다가 불서(佛書)를 읽던 중 사생(死生)의 설(說)에 감화되어 홀연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하여 마침내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시를 짓고 왕왕 경책(警策)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宣祖)가 그 이름을 듣고서 시고(詩稿)를 가지고 오라고 불러들였으니, 이미 감옥에 구금될 위험에서는 벗어났으며 연이어 임금이 직접 지은 시와 그림, 묵죽(墨竹)을 하사하여 총애하였다.
왜구가 쳐들어와 임금의 수레가 용만(龍灣 : 의주(義州)의 옛 이름)으로 파천하자 대사는 무장(武裝)을 하고 행재(行在)로 뒤쫓아가 알현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왜구가 깊숙이 쳐들어왔다. 어떻게 나를 돕겠는가?”하니, 서산대사가 울며 말하기를, “나라 안의 승려들을 신이 다행히 알고 있습니다. 병이 들어 책임을 맡지 못할 사람들은 불전에서 향을 사루어 복을 빌게 하고 그 나머지 장정은 청컨대 모두 항오(行伍)에 편입하게 하소서. 오직 상께서 명령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하였다. 이에 상이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삼았다. 대사는 물러 나와서 그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 등과 함께 의로운 무리를 규합하니 무려 5천여 명이 되었다. 유정이 곧 송운(松雲)이다.
순안(順安)의 법흥사(法興寺)에서 모여 명나라 병사와 훈련하던 중 왜적과 맞닥뜨려 목단(牧丹)까지 몰아내고, 평양(平壤)을 탈환하고, 개성(開城)을 수복하였다. 용사 700명을 선발해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한양(漢陽)으로 돌아오니 한양 사람들이 감탄하고 명나라 장수도 더욱 공경하였으나 대사는 물러나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
얼마 후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늙었습니다. 근력(筋力)으로는 보탬이 되지 못하니 어찌 병사들을 조정에 맡기고 묘향산의 옛 거처로 돌아가서 수행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가엾게 여기고 허락하였다. 이에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하사하고 예를 다하여 떠나보내 주었으니, 표연히 거취(去就)를 구분할 줄 알았다고 하겠다.
대사의 행적에 관해서는 월사(月沙) 이선생(李先生 : 이정귀(李廷龜))과 계곡(谿谷) 장상국(張相國 : 장유(張維))의 비명(碑銘)에 다 갖추어져 있다. 지금 그 가운데 대절(大節)에 관한 것만 가져다가 기록하는 바이다. 대사는 갑진년(선조 37, 1604년) 맹춘(孟春)에 입적하였으니 세수(世壽)로는 85세, 법랍(法臘)은 65세였다. 임종 시에 그 제자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의발(衣鉢)을 반드시 해남(海南)으로 보내 맡도록 해 다오. 그 고을에 두륜산(頭崙山)이라는 산이 있고 대둔사(大芚寺)란 절이 있으니 남쪽으로는 달마산(達摩山)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월출산(月出山)을 바라보며 동쪽으로는 천관산(天冠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선은산(仙隱山)이 있으니 내가 참으로 즐기는 곳이다. 또 해남은 황폐한 고장이라 국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여 백성의 풍속이 어리석고 미혹스러우니,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보고 감화되어 충(忠)에 흥기되는 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열반한 지 185년이 지난 금상 즉위 12년 무신년(정조 12, 1788년)에 대사의 7세 법손(法孫)인 천묵(天黙) 등이 대둔사(大芚寺) 남쪽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대사의 화상(畵像)을 걸어서 스승의 영령을 편안히 하기 위하여, 서로 이끌고서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걸어와 편액을 써 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상께서 중흥(中興) 공렬(功烈)의 아름다움을 생각하시고 휴정(休靜)이 바친 충성을 가상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표충(表忠)이라 사액(賜額)하고 증직(贈職)을 더 높여 주었다.
이듬해(정조 13, 1789년) 4월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재계하고 향축(香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이보다 앞서 영남(嶺南)에 표충(表忠)이라는 이름의 사당이 있으니, 송운(松雲)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제 스승의 사당 역시 표충이라 이름 붙었으니, 아, 충(忠)이란 아름다운 이름이요 성대한 절조(節操)로다. 사람의 신하 된 자로 그 누가 그 아름다운 이름을 뒤따르고자 하지 않겠으며 그 성대한 절조를 지키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충성이 지극함에 이르지 못하고 혹 충성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여 후세에 알려지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대사와 같은 분은 승군(僧軍)의 한 사람 대장이었던 것이다.
시대를 만나 한번 떨쳐 일어나 이름을 드날리고 앞서서는 성조(聖祖)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고 후일에 이르러서는 밝은 군주로부터 가상하게 여기는 포장(襃獎)을 받으니, 그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성대하게 사당에 향사(享祀)되고 영남과 호남(湖南) 천 리 안에서 서로 우러러 받들어지고 있으니, 예부터 신하 된 자로서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로되 대사는 능히 이런 대우를 받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대사가 나라에 보답한 것과 국가가 충을 권장한 것이 가히 칭송할 만하니, 아, 대사는 우뚝하고 호걸스러운 불세출의 위인이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건대 또한 그럴 것으로 여겨지니, 일찍이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서 대사의 영정(影幀)을 보았는데 미목(眉目)이 시원하고 체격이 수려하였으며 화폭을 통해서도 맑은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공을 이루고서 몸은 물러났으니 옹용(雍容)하고도 단정한 처신이 유자(儒者)의 기상(氣像)에 자못 가까우니, 어찌 어렸을 적 경사(京師 : 한양(漢陽)을 말함)에서 유학을 공부할 때 마음으로 기뻐하고 사모하는 바가 있어 오도(吾道)에서 뽑아내어 체득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대사는 서산(西山) 사람이다. 승병을 모집하고 왜적을 죽이고 공명(功名)을 세운 곳도 역시 서주(西州)에 있다. 그런데 그가 입적하고 나서 그곳에 사당을 세우지 않고 여기에다 세우려는 것은 어째서인가?”한다.
아, 이것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인연 따라 머무는 의리가 있기 때문일 터이니 대사의 은밀한 뜻을 어찌 족히 알 수 있겠는가. 천묵 등이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해 알려 주고 비석에다 그 일을 기록할 것을 부탁하기에 마침내 시(詩)를 지어 붙인다. 시는 다음과 같다.
▶서악(西嶽)에 금정(金精)이 성대하여라.
천길 이름난 재목은 얻지 못하리.
여기 신인(神人) 있어 맨발로 일어서니 봉(鳳) 깃에 기린의 털, 그 덕을 받았도다.
향로봉(香爐峰)서 승복 입고 종을 울릴 제 호걸들은 굽어보고 웃으며 닭고기 뜯었도다.
남쪽 오랑캐가 침공해 오니 동토(東土)가 바야흐로 백육(百六) 위기 만났구나.
자비(慈悲)로 적을 물리치길 서원하고서 용만(龍灣)에서 눈물 흘리며 붉은 충정 보였네.
벽력같이 울려서 승군을 규합하니 번개같이 모여들어 산골짜기 가득했네.
재빨리 적을 몰아내고 임금 수레를 옛 도읍에 영접하였네.
법의 얼음 금강(金剛) 같아 바다의 배를 저주하니 총탄과 화염이 차례로 멎었다네. 널리 중생 구해 극락으로 가려고 했더니 향산(香山)에서 옷깃 떨치고 본 모습으로 돌아왔네. 법신(法身)이 충만하여 남북(南北)이 없고 방장산(方丈山) 봉래산(蓬萊山)이 모두 내 집일세. 해남(海南) 땅 신월록(新月麓)에 우뚝한 사당을 천묵(天黙)이 세우니 어이하면 의발(衣鉢)을 간직할 수 있으리오.
유리와 벽옥으로 첩첩이 둘러서 천향(天香)이 은은하길 축원하노니 밝으신 조정에서 편액을 내리시어 표충(表忠)이라 이름하고 영백(英魄)에 보답하고 영광되이 어명 내려 오색(五色)으로 밝히시니 기둥을 천주(天柱)처럼 떠받치고 지축(地軸)을 감싸 영원토록 그 풍모가 거친 풍속을 경계하게 하노라.
아, 그대 남쪽 고을 사람들아 이 비석을 보게나 승려이면서도 유자(儒者)의 옷을 입었다네.
■ 음기(陰記)
대비전하(大妃殿下) 을축생(乙丑生),
혜경궁(惠慶宮) 을묘생(乙卯生),
수빈(綏嬪) 경인생(庚寅生)
경수궁(慶壽宮) 을유생(乙酉生) 각각 축(祝)하다.
주상전하(主上殿下)
주비전하(主妃殿下)
용루(龍樓 : 태자궁(太子宮))가 만세토록 계속되고 성자신손(聖子神孫)이 면면히 이어지며 보위(寶位)와 국계(國界)가 무강(無疆)하소서.
충갈(忠碣 : 충신을 기리는 비석)을 받드노니 억만년토록 무궁하라.
상궁(尙宮) 을묘생 이씨(李氏) 상궁 병오생 차씨(車氏) 상궁 병진생 이씨(李氏) 상궁 기미생 김씨(金氏) 상궁 경인생 유씨(劉氏) 상궁 병자생 최씨(崔氏) 상궁 임자생 차씨(車氏) 상궁 정유생 김씨(金氏) 신해생 김씨(金氏) 경술생 김씨(金氏) 기미생 이씨(李氏) 신미생 김씨(金氏) 임인생 송씨(宋氏) 을사생 노씨(盧氏) 갑진생 최씨(崔氏) 임술생 홍씨(洪氏) 병진생 강씨(姜氏) 을묘생 이씨(李氏) 임자생 인씨(印氏) 을축생 김씨(金氏) 임자생 임씨(林氏) 계축생 박씨(朴氏)
통훈대부(通訓大夫) 전(前) 현감(縣監) 서유제(徐有悌)가 음명(陰銘)을 적었다. 우리 법조(法祖)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풍비(豐碑)가 네 곳에 있어 공덕이 뚜렷이 드러나매, 나 소자(小子)가 췌언(贅言)할 필요가 없으니, 다만 여기 새로 사우(祠宇)를 세우고 비석을 세워 큰 글자로 서상(徐相)의 글을 새기고 -몇 자 해석 불능- 누가 이 귀두(龜頭) 앞에서 공경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나는 그 음기(陰記)에 새겨 천추 후세에 알리노라.
상국(相國) 김이주(金㶊柱)
참판(參判) 성천주(成天柱)
참판 윤사국(尹師國)
장상(將相) 김지묵(金持墨)
병사(兵使) 이윤국(李潤國)
군수(郡守) 성운주(成雲柱)
군직(軍職) 서영보(徐英輔)
동지(同知) 윤동우(尹東瑀)
도화주(都化主) 신녀(信女) 신찰(信察) 한덕징(韓德徵) 신향(信香) 신행(信行) 윤성관(尹成寬) 임술생(壬戌生) 박씨(朴氏) 신사(信士) 지형(智瑩) 처경(處炅) 백화보명(白花寶明) 도암정신(道菴淨信) 신녀(信女) 채운(采雲) 담화(曇華) 대명각(大明覺) 법설(法說) 정신(定信) 보영(寶榮) 처인(處仁) 법행(法行) 보경(寶鏡) 상신(尙信) 혜령(慧拎) 천대근(千大根) 한명길(韓命吉) 김씨(金氏)박시중(朴時重) 현씨(玄氏) 이문욱(李文旭) 이씨(李氏) 갑자(甲子) 이씨(李氏) 정광하(鄭光夏) 홍우택(洪宇澤) 성우석(成禹錫) 김정오(金鼎五) 병자(丙子) 김씨(金氏)
원장(院長) 응운징오(應雲憕旿) 총섭(摠攝) 영파성규(影波聖奎) 도유사(都有司) 학봉익탄(鶴峰益綻) 주관(主管) 운담 일(雲曇鼎馹) 승통(僧統) 한붕(翰鵬) 행유사(行有司) 섭천(攝天) 전곡(典穀) 봉오(奉悟) 신 총섭(新摠攝) 월화상조(月華詳照) 도유사(都有司) 풍계천영(風溪天永) 동지(同知) 윤학수(尹學洙) 구종정(舊宗正) 낭규(朗奎) 천봉태흘(天峯泰屹) 묘화(妙和) 청파원혜(淸波苑惠) 위잠(偉岑) 연담유일(蓮潭有一) 신사(信士) 허곡성심(虛谷性心) 법영(法榮) 금주등혜(錦洲等惠) 정련(淨蓮) 관성(寬性) 법한(法閑) 각환(覺幻) 도징(道澄) 등린(等獜) 여경재(呂敬載) 장혜(壯惠) 김씨(金氏) 정해(淨海) 양계태(梁繼太) 성인문(成麟文) 절충(折衝) 정태세(鄭泰世) 장우세(張禹世)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 이정인(李廷仁) 자(子) 천득(千得) 변청대(邊淸大) 인득(仁得)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득만(金得萬)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
본사종사(本寺宗師) 대인(大仁) 포일(包一) 득주(得珠) 필훈(弼勳) 채훤(采暄) 유명(有暝) 채식(采式) 탁현(卓賢) 찰해(察海) 재의(再宜) 화인(華印) 보관(普觀) 도연(道衍) 인우(仁佑) 전잠(典岑) 치계(致戒) 새수(璽栦) 석훈(釋訓) 새헌(璽軒) 윤우(允佑) 여원(呂垣) 10년 동안 고심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상언(上言)하다.
전함(前銜) 찰원(察垣) 재한(再閑) 총적(摠積) 재심(再心) 왈관(曰寬) 필겸(弼兼) 재엄(再嚴) 총념(摠念) 출옥(出玉) 창적(暢迪) 신찰(愼察) 감역(監役) 봉흔(奉欣) 봉명(奉明) 포학(包學) 척잠(陟岑) ▨밀(▨密) ▨선(▨善) 재오(再悟) 최한(最閑) 금탄(錦綻) 계홍(戒洪) 화주(化主) 서악 여관(瑞岳與寬) 전(前) 종정(宗正) 대공덕(大功德)
함경도에서 돈 240냥을 내놓아 비석을 샀다.
황성주(黃成柱) 이관성(李觀性) 이상해(李尙海) 강운성(姜運成) 갑진생 홍씨(洪氏) 기미생 서씨(徐氏) 강덕신(姜德新) 조연(助緣) 설월 낙겸(雪月樂謙) 도훈(道訓) 낭민(朗敏) 환관(幻觀)
주지(住持) 재철(再徹)
삼망(三網) 민철(旻喆) 낙종(樂宗) 면성(沔性)
지사(持事) 만옥(萬玉) 금균(錦均) 새옥(璽玉)
석(運石) 김성후(金成厚) 최덕병(崔德兵) 최덕기(崔德起)
서기(書記) 장우(壯愚)
간사(幹事) 평관(平寬) 제율(禔栗) 긍성(亘誠)
전자(鐫字) 김석재(金碩才) 이광보(李匡輔) 이광덕(李匡德) 강기주(姜起周) 이동진(李東珍) 이동채(李東彩) 이동근(李東根) 이동운(李東運) 최창득(崔昌得)
조역(助役) 원한옥(元漢玉) 이동빈(李東彬) 이동영(李東榮) 최득세(崔得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