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CHEON, KOREA
☆ [3.1절 102주년] 일제 식민잔재를 찾아서
■ 광복 후 철거된 사천의 일제 침략신사 삼천포신사
"일제는 점령지역이면 어느 곳이나 신궁이나 신사를 세우고, 일본인의 단결과 타민족을 동화ㆍ지배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1876년 한일통상조약(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종교의 해외포교는, 일본인의 해외이주 및 식민지배에 기본적으로 호응하는 관계에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와 동시에 한국에는 일본인들이 다수 이주하였으며, 그들에 의하여 일본불교, 일본기독교, 신도(神道)가 전개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868년 조선에는 일본신사가 이미 2 곳이나 있었다. 이후 일본신사는 계속 늘어나서 1900년에는 7 곳, 1910년에는 40 곳에 이른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 조선에는 1141 곳의 크고 작은 일본의 침략신사가 세워졌다. 사격(社格)으로 구분하면, 관폐대사가 2 곳, 국폐소사가 8 곳, 神社가 69 곳, 작은 규모의 神祠가 1062 곳, 모두 1141 곳이다.
또한, 한국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불교는 진종 대곡파로 1877년 부산에 별원을 설치하였고, 이후 1881년 일연종과 정토종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의 초기 포교활동은 이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후 일본종교들은 한국 식민지정책에 준하여 교세를 확대해가며, 한국을 식민지 황국민화하려는 정부정책을 돕는 목적으로 종교적 포교활동을 실행하였다.
이들 신사는 도시의 심장부이자 도시 어디서나 우러러볼 수 있는 산중턱에 세워졌는데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 대부분 부지는 현재 공원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서울 남산공원과 부산 용두산공원, 진주 진주공원(촉석루), 삼천포 망산공원 등이 모두 일제의 대표 신사가 자리했던 곳이다.
사천에는 일본의 불교의 종파의 하나인 정토진종 대곡파(淨土眞宗 大谷派, 통칭 히가시혼간지)의 혼간지포교소(本願寺布敎所, 선구동)가 1910년에 세워졌고, 1935년 8월 22일에는 神明神祠(慶南 泗川郡 三千浦邑)인 와카미야신사(若宮神社)가 삼천포초등학교 뒷편 선구동 망산공원 입구에 설치되었다.
일본의 조선신사 자료에 따르면 삼천포신사의 설립청원자는 장응상(張鷹相) 관료‧교육가로 창씨 개명한 이름은 덕산교후(德山喬厚)이다. 1895년(고종 32) 삼천포에서 광명의숙을 세웠고, 1904년(광무 8) 경상남도 통영(統營)에서 일어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융희 2) 사립보흥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17년 삼천포 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경상남도 사천군 참사 및 삼천포 면장을 지냈다. 1924년 민선으로 경상남도 도평의회원에 당선되었으며, 1926년 경상남도 농회 특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일본 정부로부터 소화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3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가 되어 약 3년간 조선총독부의 자문에 응하며 사회교화 활동을 하였다. 소작품평회 위원‧사천군 학교평의원으로도 활동하는 한편, 제국농회와 일본산업협회에서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1932년 조선 나병예방협회 경남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33년 삼천포신사 건설대표자회의 대표위원을 지냈다. 1934년 경상남도 농회 평의원과 남강 치수 기성동맹회 위원을 지냈다. 1935년 삼천포 항만수축 기성회 고문과 신명신사 설립 대표로 활동하였다. 1937년에 조선총독부로부터 교육효적자로 선정되어 금배1조를 받았다. 같은 해 관선으로 경상남도 도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38년 삼천포 산업조합 조합장을 지냈고, 1940년 삼천포 금융조합 조합장을 역임하였다. 1941년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위해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결국 신사 참배는 조선인에게 '억압'의 상징이었고, 광복 직후에 경성의 조선신궁과 지방 주요 도시의 신사는 철거했지만 나머지 대다수 신사는 광복 직후 빠르게 민중들의 손에 파괴되었다. 일본 신사와 종교들은 패전(敗戰)이라고 하는 시대의 변동을 초월하지 못하고,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를 통하여 국권을 침탈하고 얼마나 많은 횡포를 일삼았는지, 나라 잃은 고난과 슬픔으로 조상들이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았을까하는 마음을 우리 모두 3.1절 102주년을 맞아 다시한번 가슴깊이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사진) 1920년대 진주공원(촉석루)의 진주신사
참고문헌 : 사천시사, 조선총독부관보(1913.2.12.), 일본에 있어서의 불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첫댓글 늘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입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