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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번역]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마르 10,17) 부자였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달려왔습니다. 복음서들은 대부분 예수님께서 “여정 중에” 계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시고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우려와 질문들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한적하고 오염되지 않은 곳에 사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걸으시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때로는 험난한 인생 길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시노드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 모두, 곧 교황, 주교들, 사제들, 남녀 수도자들, 평신도 형제자매들 모두 다음과 같이 자문해 봅시다.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역사의 길로 나서시며 인류의 삶을 함께 나누시는 하느님의 방식을 구현하는가? 우리는 이번 여정의 모험에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시 “그건 쓸모없습니다”라거나 “우리는 늘 이렇게 해 왔습니다”라며 핑계 뒤에 숨으려 하는 건 아닌가?
시노드를 거행한다는 것은 같은 길을 걷는 것, 함께 걷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길에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런 다음 그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식별하도록 그를 도우셨습니다. ‘만나다, 경청하다, 식별하다’입니다. 저는 시노드를 특징짓는 이러한 세 동사에 잠시 멈추어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만나다’입니다. 복음은 한 만남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러한 중요한 질문은 관심, 시간,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꺼운 자세를 요구하며, 실존적 불안으로 인한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거리를 두지 않으십니다. 귀찮아하거나 성가셔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와 함께 머무십니다. 그분께서는 만남에 열려 계십니다. 아무것도 그분을 무관심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관심사입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시고, 눈빛을 교환하시며, 각 개인의 역사를 공유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까이 다가가심(친밀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의 만남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음을 아십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가득합니다. 다시 일으키시고 고쳐주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셨고, 만남을 빨리 끝내려고 시계를 쳐다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을 섬기셨으며, 그 사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이번 시노드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 역시 ‘만남의 기술’에 있어 전문가들이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행사를 조직하거나 문제들에 관한 이론적인 성찰을 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라, 무엇보다 시간을 내어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만남을 도모하는 전문가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내고,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기도인 성체조배를 위해 시간을 내고,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형제자매들의 질문에 감화되도록 하고, 은사(카리스마), 성소, 직무의 다양성으로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든 만남은 열린 마음, 용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 역사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도전을 기꺼이 마주하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형식적인 관계로 도피하거나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려고 합니다. 성직자 정신으로 무장하거나 궁정 사교의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버지라기보다 ‘몬시뇰’, ‘아빠스’ 같은 직함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만남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종종 우리가 가보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오늘 삼종기도 후에 저는 한 그룹의 멋진 노숙인들을 만날 예정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려는 사람들, 그저 자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인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청으로부터 그들은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경청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알려주시고, 우리의 찌든 습관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그리고 우리끼리 참된 만남을 이룰 수 있을 때 모든 것이 변합니다. 형식주의 없이, 겉치레 없이, 꾸밈 없이 말입니다.
두 번째 동사는 ‘경청하다’입니다. 참된 만남은 오직 경청하는 데서 생깁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질문과 그의 실존적이고 종교적인 불안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분께서는 관습적으로 답하지 않으시고, 미리 정해진 대책을 제시하지 않으시며, 단지 그 순간을 모면하여 자신의 길을 계속 가기 위해 친절하게 응답하는 체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그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서두르지 않으시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만 – 귀뿐 아니라 ‘마음으로 그에게 귀를 기울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대답은 부자의 질문에 단순히 대답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그 부자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를 털어놓게 하고, 자유롭게 자신에 대해 말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계명들을 떠올리십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고, 자신의 신앙 여정, 하느님을 찾으려 노력했던 자신의 방법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일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곧,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자신의 영적 여정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번 시노드 여정 동안 진지하게 자문해 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경청하고 있는가? 우리 마음의 “경청”은 어떤가?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표현하게 해 주는가? 우리는 그들이 비록 힘겨운 삶을 살았음에도 믿음으로 걸을 수 있게 해 주는가? 우리는 그들이 방해받지도 거부당하지도 판단을 받지도 않으면서 공동체의 삶에 기여하게 해 주는가? 시노드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람이 되신 말씀의 길과 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 다른 사람들의 말과 함께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과 같으신 성령께서 언제나 놀라운 방식으로 새로운 길과 새로운 언어를 제시하신다는 걸 경탄하며 발견하는 것입니다.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든 이,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인위적이고 피상적인 답변, 사전에 준비된 답변을 피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여서 배운다는 건 느리고 어쩌면 피곤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모든 교회, 모든 민족, 모든 국가의 질문, 고통, 희망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하십니다. 아울러 세상에,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의 도전과 변화에도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방음벽을 설치하지 맙시다. 우리의 확실성에 갇혀 있지도 맙시다. 우리의 확실성은 많은 경우 우리를 폐쇄적으로 만듭니다.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입시다.
끝으로 ‘식별하다’입니다. 만남과 상호 경청은 그 자체로 끝나고 마는 행위가 아니며, 모든 것을 예전처럼 남겨두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대화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문제를 끄집어 내고 여정을 계속 이어갑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예전과 더 이상 동일하게 남아있지 않고 변화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이 착하고 신앙심 깊으며 계명들을 잘 실천하고 있음을 꿰뚫어보시지만, 단순히 계명을 준수하는 걸 넘어서도록 그를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대화를 통해 그가 식별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사랑스럽게 그를 바라보셨던”(마르 10,21 참조) 그 사랑의 빛으로 그 사람이 내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고 이 빛 안에서 그의 마음이 정말로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식별할 수 있도록 권고하십니다. 부요함이란 하나의 종교적 계명의 준수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 곧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기 위해 자기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팔아 치워야 한다는 걸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시노드는 영적 식별의 여정이자 교회적 식별의 여정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만나는 가운데, 성체조배와 기도로 이뤄집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식별을 열어주고 여정을 비추어 줍니다. 하느님 말씀은 시노드를 인도합니다. 시노드가 교회의 ‘대회(convention)’, 연구 모임이나 정치 모임, 의회가 되도록 하지 않고, 은총의 사건, 성령께서 이끄시는 치유의 과정이 되도록 말입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나오는 부자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비우고, 세속적인 것, 우리의 닫힌 마음, 우리의 반복적인 사목적 모델에서 자유로워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그리고 어디로 우리를 이끄시려 하는지에 관해 자문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좋은 여정에 나섭시다! 우리가 복음과 사랑에 빠진 순례자들이 되어 성령의 놀라움에 마음을 열게 되길 바랍니다. 만남의 은총, 상호 경청의 은총, 식별의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동안에도, 그분께서 당신 사랑을 통해 가장 먼저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는 걸 아는 기쁨과 함께 말입니다.
[이태리어 원문]
Un tale, un uomo ricco, va incontro a Gesù mentre Egli «andava per la strada» (Mc 10,17). Molte volte i Vangeli ci presentano Gesù “sulla strada”, mentre si affianca al cammino dell’uomo e si pone in ascolto delle domande che abitano e agitano il suo cuore. Così, Egli ci svela che Dio non alberga in luoghi asettici, in luoghi tranquilli, distanti dalla realtà, ma cammina con noi e ci raggiunge là dove siamo, sulle strade a volte dissestate della vita. E oggi, aprendo questo percorso sinodale, iniziamo con il chiederci tutti – Papa, vescovi, sacerdoti, religiose e religiosi, sorelle e fratelli laici –: noi, comunità cristiana, incarniamo lo stile di Dio, che cammina nella storia e condivide le vicende dell’umanità? Siamo disposti all’avventura del cammino o, timorosi delle incognite, preferiamo rifugiarci nelle scuse del “non serve” o del “si è sempre fatto così”?
Fare Sinodo significa camminare sulla stessa strada, camminare insieme. Guardiamo a Gesù, che sulla strada dapprima incontra l’uomo ricco, poi ascolta le sue domande e infine lo aiuta a discernere che cosa fare per avere la vita eterna. Incontrare, ascoltare, discernere: tre verbi del Sinodo su cui vorrei soffermarmi.
Incontrare. Il Vangelo si apre narrando un incontro. Un uomo va incontro a Gesù, si inginocchia davanti a Lui, ponendogli una domanda decisiva: «Maestro buono, cosa devo fare per avere la vita eterna?» (v. 17). Una domanda così importante esige attenzione, tempo, disponibilità a incontrare l’altro e a lasciarsi interpellare dalla sua inquietudine. Il Signore, infatti, non è distaccato, non si mostra infastidito o disturbato, anzi, si ferma con lui. È disponibile all’incontro. Niente lo lascia indifferente, tutto lo appassiona. Incontrare i volti, incrociare gli sguardi, condividere la storia di ciascuno: ecco la vicinanza di Gesù. Egli sa che un incontro può cambiare la vita. E il Vangelo è costellato di incontri con Cristo che risollevano e guariscono. Gesù non andava di fretta, non guardava l’orologio per finire presto l’incontro. Era sempre al servizio della persona che incontrava, per ascoltarla.
Anche noi, che iniziamo questo cammino, siamo chiamati a diventare esperti nell’arte dell’incontro. Non nell’organizzare eventi o nel fare una riflessione teorica sui problemi, ma anzitutto nel prenderci un tempo per incontrare il Signore e favorire l’incontro tra di noi. Un tempo per dare spazio alla preghiera, all’adorazione – questa preghiera che noi trascuriamo tanto: adorare, dare spazio all’adorazione –, a quello che lo Spirito vuole dire alla Chiesa; per rivolgersi al volto e alla parola dell’altro, incontrarci a tu per tu, lasciarci toccare dalle domande delle sorelle e dei fratelli, aiutarci affinché la diversità di carismi, vocazioni e ministeri ci arricchisca. Ogni incontro – lo sappiamo – richiede apertura, coraggio, disponibilità a lasciarsi interpellare dal volto e dalla storia dell’altro. Mentre talvolta preferiamo ripararci in rapporti formali o indossare maschere di circostanza – lo spirito clericale e di corte: sono più monsieur l’abbé che padre –, l’incontro ci cambia e spesso ci suggerisce vie nuove che non pensavamo di percorrere. Oggi, dopo l’Angelus, riceverò un bel gruppo di persone di strada, che semplicemente si sono radunate perché c’è un gruppo di gente che va ad ascoltarle, soltanto ad ascoltarle. E dall’ascolto sono riusciti a incominciare a camminare. L’ascolto. Tante volte è proprio così che Dio ci indica le strade da seguire, facendoci uscire dalle nostre abitudini stanche. Tutto cambia quando siamo capaci di incontri veri con Lui e tra di noi. Senza formalismi, senza infingimenti, senza trucco.
Secondo verbo: ascoltare. Un vero incontro nasce solo dall’ascolto. Gesù infatti si pone in ascolto della domanda di quell’uomo e della sua inquietudine religiosa ed esistenziale. Non dà una risposta di rito, non offre una soluzione preconfezionata, non fa finta di rispondere con gentilezza solo per sbarazzarsene e continuare per la sua strada. Semplicemente lo ascolta. Tutto il tempo che sia necessario, lo ascolta, senza fretta. E – la cosa più importante – non ha paura, Gesù, di ascoltarlo con il cuore e non solo con le orecchie. Infatti, la sua risposta non si limita a riscontrare la domanda, ma permette all’uomo ricco di raccontare la propria storia, di parlare di sé con libertà. Cristo gli ricorda i comandamenti, e lui inizia a parlare della sua infanzia, a condividere il suo percorso religioso, il modo in cui si è sforzato di cercare Dio. Quando ascoltiamo con il cuore succede questo: l’altro si sente accolto, non giudicato, libero di narrare il proprio vissuto e il proprio percorso spirituale.
Chiediamoci, con sincerità, in questo itinerario sinodale: come stiamo con l’ascolto? Come va “l’udito” del nostro cuore? Permettiamo alle persone di esprimersi, di camminare nella fede anche se hanno percorsi di vita difficili, di contribuire alla vita della comunità senza essere ostacolate, rifiutate o giudicate? Fare Sinodo è porsi sulla stessa via del Verbo fatto uomo: è seguire le sue tracce, ascoltando la sua Parola insieme alle parole degli altri. È scoprire con stupore che lo Spirito Santo soffia in modo sempre sorprendente, per suggerire percorsi e linguaggi nuovi. È un esercizio lento, forse faticoso, per imparare ad ascoltarci a vicenda – vescovi, preti, religiosi e laici, tutti, tutti i battezzati – evitando risposte artificiali e superficiali, risposte prêt-à-porter, no. Lo Spirito ci chiede di metterci in ascolto delle domande, degli affanni, delle speranze di ogni Chiesa, di ogni popolo e nazione. E anche in ascolto del mondo, delle sfide e dei cambiamenti che ci mette davanti. Non insonorizziamo il cuore, non blindiamoci dentro le nostre certezze. Le certezze tante volte ci chiudono. Ascoltiamoci.
Infine, discernere. L’incontro e l’ascolto reciproco non sono qualcosa di fine a sé stesso, che lascia le cose come stanno. Al contrario, quando entriamo in dialogo, ci mettiamo in discussione, in cammino, e alla fine non siamo gli stessi di prima, siamo cambiati. Il Vangelo oggi ce lo mostra. Gesù intuisce che l’uomo che ha di fronte è buono e religioso e pratica i comandamenti, ma vuole condurlo oltre la semplice osservanza dei precetti. Nel dialogo, lo aiuta a discernere. Gli propone di guardarsi dentro, alla luce dell’amore con cui Egli stesso, fissandolo, lo ama (cfr v. 21), e di discernere in questa luce a che cosa il suo cuore è davvero attaccato. Per poi scoprire che il suo bene non è aggiungere altri atti religiosi, ma, al contrario, svuotarsi di sé: vendere ciò che occupa il suo cuore per fare spazio a Dio.
È una preziosa indicazione anche per noi. Il Sinodo è un cammino di discernimento spirituale, di discernimento ecclesiale, che si fa nell’adorazione, nella preghiera, a contatto con la Parola di Dio. E la seconda Lettura proprio oggi ci dice che la Parola di Dio «è viva, efficace e più tagliente di ogni spada a doppio taglio; penetra fino al punto di divisione dell’anima e dello spirito e scruta i sentimenti e i pensieri del cuore» (Eb 4,12). La Parola ci apre al discernimento e lo illumina. Essa orienta il Sinodo perché non sia una “convention” ecclesiale, un convegno di studi o un congresso politico, perché non sia un parlamento, ma un evento di grazia, un processo di guarigione condotto dallo Spirito. In questi giorni Gesù ci chiama, come fece con l’uomo ricco del Vangelo, a svuotarci, a liberarci di ciò che è mondano, e anche delle nostre chiusure e dei nostri modelli pastorali ripetitivi; a interrogarci su cosa ci vuole dire Dio in questo tempo e verso quale direzione vuole condurci.
Cari fratelli e sorelle, buon cammino insieme! Che possiamo essere pellegrini innamorati del Vangelo, aperti alle sorprese dello Spirito Santo. Non perdiamo le occasioni di grazia dell’incontro, dell’ascolto reciproco, del discernimento. Con la gioia di sapere che, mentre cerchiamo il Signore, è Lui per primo a venirci incontro con il suo amore.
첫댓글 신부님...이 강론도 무지 궁금했었어요...
어찌 아시고... 사진과 함께 예쁘게 올려주시고... ㅜㅜ
정말 감사합니다.^^
<2021-2023 세계주교시노드>를 시작하는
저희들을 위한 교황님의 강론 말씀은~
이 <세계주교시노드> 여정의 안내서!네요.
사실 너무 중요한 말씀이라 아마도...백 번은 읽어봐야 할 것같습니다.^^
교황님 강론의 따끈따끈한~ 한글번역본을 본당 홈페이지에서 소유하게되어~ 너무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들을수있음에
교황님 강론 말씀을 들어서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쵸~~~ 저도 그러했어요.
아리님 마음처럼^^
감사합니다 ^^
교황님의 말씀을 이렇게 유려한 문장으로 번역하여 바티칸으로부터 멀고 먼 이곳까지 스며들게 해 주심은 은총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