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將軍) 임경업전(林慶業傳)
장군 임경업은 자가 영백(英伯)이다. 충주(忠州) 달천(達川)에 살았는데 젊어서부터 궁마(弓馬)를 업(業)으로 삼았고, 대장부(大丈夫)라는 세 글자는 항상 입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글 읽기도 좋아하였다. 일찍이 개연히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가 천지(天地)의 기(氣)를 타고나서 어떤 물건이 되지 않고 사람이 되었으며, 사람 중에도 여자가 되지 않고 남자가 되었건만 이 편방(偏邦 외진 나라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말함)에 태어나 장차 좁은 곳에 구속되어 일생을 보낼 일이 안타깝다.”
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조정이 오랑캐와 강화하여 군대를 물리치자 장군은 이때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터였는데 매우 분격(憤激)하여 말하기를,
“조정에서 나에게 정예(精銳)한 포병(砲兵) 4만 명만 준다면 가서 저 오랑캐를 섬멸하고, 압록강(鴨綠江)에서 창검(鎗劍)을 씻어가지고 돌아오겠다.”
하였다. 숭정 정축년(1637, 인조15)에 노(虜)가 우리 왕세자(王世子)를 심양(瀋陽)으로 붙들어 가고, 또 척화(斥和)한 사람으로 장령 홍익한을 잡아가서 죽이려 할 때 연로(沿路)의 수재(守宰)들은 두려워서 감히 말 한마디도 못하였으나, 장군은 이때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길에 나와 홍익한을 영접하고 손을 잡고서,
“사대부가 죽을 곳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공의 이름은 장차 태산(太山)ㆍ북두(北斗)와 높이를 겨룰 것입니다.”
하고, 매우 풍족하게 대접하고 또 노자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냈는데, 담소(談笑)하면서 송별하였고 노고를 슬퍼하는 말은 전혀 없었다. 때에 노추(虜酋)가 장군의 명망을 듣고 꼭 그를 쓰기 위해, 무릇 가도(椵島)를 공격할 때와 명 나라를 침범할 때는 반드시 우리 조정으로 하여금 그를 장수로 임명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계책을 써서 노(虜)를 속였지만, 노는 전혀 장군의 계책에 빠져서 속는 줄도 몰랐다.
개주(蓋州)의 해중(海中)에 이르러서는 명 나라 군사와 서로 만나게 되자 노가 가장 가까이 믿는 자 두어 명으로 하여금 한 배[船]에 같이 타고서 사정(事情)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또한 기미를 따라 기계(奇計)를 내어, 한창 싸울 때에 포병(砲兵)을 시켜 은밀히 토환(土丸 흙으로 만든 포탄)을 쓰게 하였고, 명 나라 군사도 활을 쏘면서 또한 고의로 이쪽 진영에 미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양군(兩軍)이 한 명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장군은 갑자기 수영(水泳)을 잘하는 병졸 두 명을 시켜 본국(本國)의 충정(忠情)을 명 나라 장수에게 전하고 인하서 노인(虜人)이 기밀(機密)과 정형(情形)을 통지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탄식을 하면서 동지(同志)에게 말하기를,
“평소에 먹었던 마음이 정작 오늘날에 달려 있다.”
하였으니, 대체로 범순(犯順, 반역(叛逆)과 같은 말로, 청 나라가 명 나라를 범한 것을 말함)을 매우 원통하게 여겨 명 나라 조정으로 들어가려는 뜻이었다. 어떤 이가,
“명 나라 조정에 들어가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마는 본조(本朝)에 화(禍)가 미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하니, 장군이 마침내 탄식하면서 중지하였다. 처음 노가 명 나라 공격 계획에 꼭 믿었던 인물은 곧 장군이었다. 그러나 장군이 명 나라와 싸울 때마다 후퇴하여 마침내 퇴군(退軍)할 계획을 하고 있음을 보고는 장군으로 하여금 수로(水路)를 따라 귀국(歸國)하도록 하였으니, 대체로 우리 군사가 저들의 지경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장군이,
“우리가 본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하루가 급하니 어찌 수로를 따라 빨리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다만 선박들이 모두 부서졌고 양식도 없으므로 육로(陸路)를 거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하니, 노장(虜將)이 그 말을 믿어줌으로써 마침내 노지(虜地)를 거쳐서 돌아왔다. 이윽고 노가 자기들이 속은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고, 또 장군이 명 나라 장수와 몰래 통했던 일이 발각되어, 노가 우리 조정을 협박하여 장군을 잡아 보내게 하였다. 장군은 그 말을 듣고 즉시 행장(行裝)을 꾸려 칼 한 자루를 짚고 길을 떠나면서 탄식하기를,
“하늘이 남자를 내었을 때는 반드시 쓸 데가 있을 터인데, 이제 공연히 노정(虜庭)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중도(中道)에서 탈출하였다. 노가 그 말을 듣고 더욱 노하여 본조(本朝)를 힐책(詰責)하자, 본조가 대대적으로 수색하였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장군은 강호(江湖) 등지를 왕래하면서 장사꾼들과 섞여 일을 하기도 하고, 중들과 어울리기도 하며 성시(城市)에 드나들었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장군이 장사꾼의 배를 타고 몰래 명 나라에 들어가 명 나라 장수에 의해 장직(將職)에 임용되었는데, 이후의 일은 그 일록(日錄)에 상세히 기재되었다.
갑신년(1644, 인조22)에 북경(北京)이 함락되어 노인(虜人)이 그곳에 웅거함으로써 온 천하가 그들의 영역이 되자, 장군은 마침내 그들에게 체포되었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절의로 대항하므로 노가 끝내 장군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드디어 본조(本朝)의 사신(使臣) 편에 내보내었는데, 장군은 명 나라의 의복을 그대로 입었고 머리도 깎지 않았었다. 이때에 적신(賊臣) 김자점(金自點)이 국사(國事)를 담당하여 그를 죽였다. 장군은 죽음에 임하여 큰소리로,
“천하의 일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나를 죽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장군이 죽은 뒤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장군을 의롭게 여겨 슬퍼하였다. 이산(尼山)의 적(賊) 유탁(柳濯)이 장군의 성명(姓名)을 빌어 난(亂)을 일으키면서,
“노(虜)를 토벌해서 치욕을 씻을 것이다.”
하자, 어리석은 백성에서부터 승도(僧徒)에 이르기까지 일시에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므로,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은 금병(禁兵)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기를 청하였다. 이윽고 난민(亂民)들이 장군이 아님을 알고 즉시 해산하였으므로, 역수(逆豎)들은 도신(道臣)에게 체포되어 주멸(誅滅)되었다.
상고하건대, 숭정 병자년(1636, 인조14)에 노인(虜人)이 제호(帝號)를 참칭(僭稱)하고 사신(使臣)을 우리에게 보낸 것이 금로(金虜)가 강남(江南 송(宋) 나라를 말함)을 조유(詔諭)한 것과 같다. 몽고(蒙古) 사람도 노를 함께 제(帝)로 존숭하려고까지 하였다. 우리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이 궐하(闕下)에 모여서 소를 올려 두 사신을 베죽일 것을 청하니, 두 사신은 두려워서 도망가 버렸다. 조정에서는 이를 명 나라 조정에 주문(奏聞)하고 격문(檄文)을 군문(軍門)에 전하였다. 때에 장령 홍익한이 시골에 있으면서 소를 올리기를,
“신은 듣건대, 노사(虜使)가 베죽일까 두려워하여 도망갔다 하니,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의기(義氣)가 백 배나 더합니다.”
하고, 인하여 호담암(胡澹菴)이 진회(秦檜)를 배척한 것보다 더 엄격하게 주화신(主和臣)을 배척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화의가 성립되자 노가 본조를 위협하여 공을 잡아갔는데, 때에 국가가 막 패전한 터라서 모두가 홍공(洪公)에게 화의를 배척하여 노병(虜兵)을 불러들였다고 나무랐으며, 또 노를 겁내어 홍공을 감히 위문하지도 못하였다. 그러자 임 장군(林將軍)만은 홍공을 매우 탄상(歎賞)하고 그가 죽을 곳을 얻었음을 매우 기뻐하였으니, 의기(義氣)가 서로 투합한 것이 이와 같았다. 홍공은 끝내 오달제ㆍ윤집 두 학사와 함께 의(義)를 취하고 인(仁)을 이루었으니 나라를 빛냄이 어떠한가.
그후에 장군이 성취한 것은 더욱더 우뚝하고 위대하여 고금에 찾아보아도 실로 장군과 짝할 이가 드물다.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어 만세에 법(法)을 드리웠는데, 《춘추》를 끝마친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천 년 동안에 걸쳐 이 글을 읽은 자는 많지만, 빛나는 그 대의(大義)를 능히 아는 자는 대체로 적었다. 지금 장군은 해외(海外)의 배신(陪臣)으로서 존주(尊周)의 한 마음이 끝내 동(東)으로 흐르는 물과 같아, 비록 노의 흉포(凶暴)로도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으니, 실로 천백년 만에 하나나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적신(賊臣 김자점을 말함)이 그를 끝내 죽이고야 말았다. 그리고 삼학사(三學士)의 대절(大節)은 온 천하가 다 아는 것인데도 허적(許積)은 의사(義士)가 아니라고 배척하였으니 유독 무슨 심술인가. 권순장(權順長)ㆍ김익겸(金益兼)은 관직(官職)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차마 예의(禮義)를 가진 몸으로 짐승 같은 오랑캐의 무리가 되기를 달게 여길 수 없어 죽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더욱 가상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제 소위 유자(儒者)라는 명칭을 가진 자가 감히 그들을 반드시 죽을 만한 의(義)가 없었다고 배척하니, 그 이치에 어그러지고 풍화(風化)를 손상시킴이 더욱더 심하였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그를 추장(推奬)하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천상(天常)과 민이(民彝)가 그 얼마나 진멸(盡滅)되기에 이르렀는가.
옛날 주 부자(朱夫子)는 송(宋) 나라가 남도(南渡)한 세대에 태어나서 사설(邪說)과 폭행(暴行)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것을 매우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러므로 만일 의리에 죽은 사람만 있으면 비록 그가 산승(山僧)이나 천졸(賤卒)일지라도 모두 표장(表章)하였다. 이는 대체로 쇠퇴한 세상의 뜻이니, 진정 슬프다 하겠다. 이제 주자(朱子)의 도(道)는 적휴(賊鑴 역적 윤휴라는 뜻)로 인하여 여지없이 어두워지고 파괴되어, 감히 그 도를 빙자해서 만분의 하나라도 사설ㆍ폭행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아, 한심하기 그지없다. 옛말에,
“세상이 어지러우면 법도(法度)를 고치지 않는 군자를 생각한다.”
하였는데, 내가 임 장군(林將軍)의 가전(家傳)을 읽고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이미 전(傳)을 만들어 야사(野史)를 집필하는 자에게 고하고 인하여 그 당시 의리에 죽은 선비들을 언급하였다.
林將軍慶業傳
林將軍慶業字英伯。居忠州達川。少以弓馬爲業。大丈夫三字。常不絶於口。亦好讀書。常慨然自歎曰。吾稟天地之氣。不爲物而爲人。不爲婦人而爲男子。惜乎生此偏邦。將局束以送一生也。丁卯虜變。朝廷與
媾。以却其兵。將軍時不甚知名。奮曰。朝廷與我精砲四萬。則將往殲彼虜。洗劍鴨水而歸耳。崇禎丁丑。虜以我王世子入瀋陽。又執斥和人洪掌令翼漢以去。將殺之。沿路守宰。恐懼莫敢與語。將軍時爲義州府尹。出迎執手曰。士大夫死得其所難矣。公名將與太山北斗爭高矣。供奉甚豐。又資送極厚。談笑送別。絶無嗟勞語。時虜酋聞將軍名。必欲用之。凡擊椵島及西犯。必使朝廷爲將而送之。將軍以計誑虜。虜一切墮將軍計中而不覺也。至蓋州海中。與天兵相遇。虜使其親信者數輩。同載一船。以察事情。將軍亦
隨機出奇。方其戰時。使砲兵密用土丸。天兵發矢。亦故使不及。故兩軍一無所傷。將軍忽使善水者二卒佯墮水。潛傳本國忠悃於天將之船。因通虜人機密情形。一日喟然謂同志曰。平生素心。正在今日。蓋以犯順。爲至痛極冤。欲投入天朝也。或曰。豈不好乎。奈禍及本朝何。將軍遂歎息而止。始虜所恃以爲西犯之計者。將軍也。及見將軍屢戰輒退。遂爲退軍計。使將軍由水路歸國。蓋不欲我師涉其境也。將軍曰。我之思歸。一日爲急。豈不欲由水路速歸。但舟楫皆傷敗。且無糧食。不由旱路。無以得達。虜將信之。遂由
虜地而歸。旣而虜追覺其見欺之狀。又潛通天將之事發露。虜脅我朝執送將軍。將軍聞卽束裝杖劍就道。歎曰。天生男子。必有所用。今乃無端就死於虜庭乎。遂於中路逃躱。虜聞之益怒。詰責本朝。本朝大索。終不能得。將軍往來江湖間。或與商賈雜作。或混跡僧徒。或出沒城市。而人莫能知也。年月日。得商賈船。潛入大明地。爲天將所任用。此後事詳載其日錄。甲申北京破。虜人入據而天下爲其區域。將軍遂被執。抗節矢死。虜終不能屈。遂付本朝使价出送。身猶漢衣服而頭不剃矣。時賊臣金自點當國殺之。將軍
臨死大言曰。天下事未定。不可殺我矣。旣死。國人無不義而哀之。尼山賊柳濯。假將軍姓名作亂曰。將討虜雪恥。愚民以至僧徒。一時雲集。李延陽時白。自請率禁兵往討。已而亂民知非將軍。卽解散。故逆豎被擒於道臣而誅滅之。
按崇禎丙子。虜人僭號。遣使於我。有同金虜之詔諭江南者然。蒙人亦至。欲共尊爲帝。館學諸生。大會闕下。上疏請斬二使。二使懼而逃去。朝廷奏聞天朝。傳檄軍門。時掌令洪翼漢。在鄕上疏曰。臣聞虜使懼誅逃去。曲踊距踊。義氣百倍。仍請斥主和臣。不翅
如胡澹菴之於秦檜。丁丑媾成。虜威脅本朝。執公以去。時國家新破。無不咎洪公以斥和招兵。又畏虜不敢慰問。獨林將軍深加歎賞。喜其死得其所。其氣義之相感如此。洪公竟與吳,尹兩學士。取義成仁。其爲國家之耿光何如哉。其後將軍之所成就。尤卓犖奇偉。求之古今。實罕其儔。孔子作春秋。垂法萬世。自獲麟以至于今二千年。所讀此書者多矣。而能知其大義炳然者蓋寡矣。今將軍以海外陪臣。尊周一心。始終如水。雖以虜之凶暴。終不能屈。可謂千百年一人而已。賊臣之必殺而後已。及如三學士之大節。天下
皆聞之。而許積斥以非義士。獨何心哉。權順長,金益兼。不論有官無官。不忍以禮義之身甘爲犬羊之類。視死如歸。尤可尙矣。而今有以儒爲名者。乃敢斥之以無必死之義。其悖理傷化抑又甚矣。而世方推奬之不暇。天常民彝。幾何不至於盡滅也。昔朱夫子生乎宋朝南渡之世。邪說暴行。肆行無忌。蓋甚傷之也。故苟有死義之人。則雖山僧賤卒。無不表章焉。蓋衰世意也。可謂戚矣。今朱子之道。因賊鑴而晦剝無餘。將不敢憑藉其道以拒邪暴之萬一矣。嗚呼。可勝寒心哉。古語曰。世亂思君子不改其度。愚讀林將軍家
傳而有感焉。旣爲之立傳。以告于野史之秉筆者。而仍及其當時死義之士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