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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 시장
선생의 휘는 집(集)이고, 자는 사강(士剛)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신라(新羅)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도망하여 백성이 되었으므로 자손이 광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8대가 계속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기 때문에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는데, 이때부터 벼슬이 계속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문(問)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고, 그 배위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절행(節行)으로 정문(旌門)이 섰는데, 그 사적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 그로부터 2대를 내려와서 휘 국광(國光)은 좌의정으로 적개 공신(敵愾功臣)과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책록(策錄)되어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극뉴(克忸)를 낳았는데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고, 헌납(獻納)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회간(懷簡 덕종(德宗)의 시호)을 추숭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강력히 간쟁하니, 당시의 의논이 옳게 여겼다. 이분이 휘 종윤(宗胤)을 낳았는데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바로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 휘 계휘(繼輝)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황강 선생(黃岡先生)이라 부른다. 고(考) 휘 장생(長生)은 형조 참판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사계 선생(沙溪先生)이라 부른다. 황강공은 재능과 책략, 지식과 도량이 당시에 으뜸이었으므로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매양 공보(公輔)의 그릇으로 칭찬하였다. 사계 선생은 도덕과 학문으로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비(妣) 정부인(貞夫人)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첨지중추부사 대건(大乾)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 6월 6일에 서울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선생을 출산하였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특이하여 영명(英明)하고 순수함이 매우 뛰어났다. 겨우 말을 배울 나이에 손가락을 입에 넣고서 “이것이 바로 중(中) 자이다.”라고 하니, 황강공이 크게 기특하게 여겨 항상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5, 6세 때에 글을 읽을 줄 알고 대자(大字)를 썼으며, 7, 8세 때에는 문리(文理)가 갑자기 통하였는데, 간혹 천곡(泉谷) 송공 상현(宋公象賢), 귀봉(龜峯) 송공 익필(宋公翼弼)에게 가서 배우기도 하였다. 일찍이 대부송(大夫松)에 대해 시를 지었는데,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그 시를 보고는 문장의 솜씨라고 크게 칭찬하였다.
임오년(1582)에 황강공이 별세하여 노선생(老先生 사계를 이름)이 연산(連山) 묘려(墓廬)에서 거상(居喪)의 예제(禮制)를 지킬 적에 선생은 바야흐로 10여 세의 어린아이로 좌우에서 모시면서 제수(祭需)를 올리고 축문(祝文)을 읽는 등의 일을 삼가 예대로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병술년(1586)에 조 부인(曺夫人)의 상을 당하여서는 성인(成人)처럼 집상(執喪)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몸이 파리해 병이 생겼다. 무자년(1588)에 복을 벗었다. 신묘년(1591)에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때 선생은 20세 이전이었으되, 문장과 글씨가 무리에 뛰어나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김씨 집안에는 대대로 인물이 있다.”라고 칭찬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 겨울에 성균관의 추천으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을 마치고는 즉시 사면하였다. 계축년(1613)에 부임하는 노선생을 따라 철원부(鐵原府)로 갔는데, 마침 무고옥(誣告獄)이 일어나서 선생의 두 서숙(庶叔)이 잡혀가 고문을 받다가 죽으니, 간당들이 광해(光海)를 꼬드겨 육시(戮屍)의 형(刑)을 추가하고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여 선생의 가문 전체를 연좌시켰다. 그때 마침 법관(法官)이 “법률에 의거하면 연좌시키는 것이 부당하다.”라고 하고, 대신의 의논도 그와 같았기 때문에 일이 잘 풀렸다. 선생은 드디어 노선생을 모시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천지가 꽉 막혀 인간의 도리가 끊어지니, 선생은 종적을 감추고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평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계해년(1623)에 인조대왕께서 반정(反正)하신 뒤에 노선생이 첫 번째로 부름을 받았다. 연신(筵臣)이 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이 상례(常例)를 뛰어넘어 발탁할 만하니 대헌(臺憲)의 직책을 맡기소서.”라고 하였으나, 이때 이조 판서로 있는 상촌(象村) 신 문정공(申文貞公 신흠(申欽))이 선생의 표숙(表叔)이었으므로 선생은 헌직(憲職)을 간곡히 사양하고서, 어버이를 봉양하기에 편리한 고을을 청하여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다. 부여에 부임하여서는 먼저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軍政)을 다스리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모든 조처를 빈틈없이 처리하니, 몇 년이 지나 정사가 이루어져 온 경내가 편안해졌다. 그러므로 선생은 날마다 고을의 젊은이들과 종일토록 글을 강독(講讀)할 뿐이었다. 정묘년(1627, 인조5) 가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니, 고을 백성들이 추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무진년(1628) 겨울에 임피 현령(臨陂縣令)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버리고 돌아왔다. 경오년(1630)에 익위사 위솔(翊衛司衛率), 전라 도사(全羅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신미년(1631)에 노선생이 별세하니, 선생은 60에 가까운 나이에도 음식과 거처를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따라 행하였으되 질병이 생기지 않으니, 사람들은 특이하게 여기며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해서이다.”라고 하였다. 계유년(1633) 10월에 복을 벗었다. 갑술년(1634) 봄에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에 제수하였다가 여름에 사헌부 지평으로 제수하니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을해년(1635) 가을에 다시 지평에 제수하자 또 사양하였다. 병자년(1636) 가을에 장령에서 집의(執義)로 두 번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간혹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과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12월에 변방의 급보가 이르러 대가(大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니, 선생은 달려가 문후할 요량으로 채비를 차려 천안(天安)에 당도하자 길이 막혀 갈 수 없었다. 그러자 선생은 동지들과 군사와 군량을 모와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적의 기세가 성대하여 사람들이 놀라 흩어지니 다만 북쪽을 바라보며 속을 썩일 뿐이었다.
이듬해 2월에 서울로 가서 성상께 위로의 말씀을 올리고 돌아왔다. 무인년(1638) 가을에 집의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여 체직(遞職)되었다. 겨울에 서동생〔庶弟〕 고(杲)가 남의 무고를 당하여 화(禍)를 예측할 수 없자, 선생은 병든 몸을 가마에 싣고 서울로 가서 아우 참판공(參判公)과 함께 대명(待命)하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고가 진실로 말을 함부로 한 죄가 있으나, 그 부형이 모두 현자(賢者)이므로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다.” 하셨다. 이에 선생의 형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기묘년(1639) 4월에 집의의 벼슬로 부르니, 선생은 억지로 가서 사은하고서 누차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5월에 승급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에 제수되었다. 두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하니, 성상께서 지극히 위로하셨다.
선생은 경(經)을 강론함을 인하여 글 뜻을 드러내어 친절히 규간(規諫)한 바가 많으니, 성상께서 주의 깊게 들으시고, 이어 전교하기를, “그대가 시골에서 왔으니 품은 생각을 다 말하라.” 하셨다. 선생이 사례하고서 이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임금의 한 마음이 만사의 근원이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진실로 본원(本原)을 맑게 하고 드러나는 감정을 살펴서, 반드시 도심(道心)이 항상 주인이 되고 인심(人心)이 도심의 명을 따르게 한다면 일상 사이에 천리(天理)가 유행하여 인욕(人慾)이 천리를 따르게 되어, 사물마다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서로 전한 것도 오직 이 심법(心法)뿐이었다. 진술한 바가 매우 타당하니 내 깊이 체념하겠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것과 정사(政事)를 다스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을 요체로 삼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는 경(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정사를 다스림에는 성실이 가장 중요하니, 성상께서 착실히 공부하시어 경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성(誠)으로 일을 처리하여, 말하고 침묵하며 행동하고 정지하는 것이 성(誠)과 경(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며 근심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성상께서 훌륭하다고 칭찬하셨다.
얼마 되지 않아 우부승지로 승진하니, 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마침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니, 성상께서 즉시 의원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문병하도록 하셨다. 선생은 상소하여 사례하고서 거듭 체직을 청해 허락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선생을 만류하려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못난 내가 종전에 나오기를 어렵게 여겼던 것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며, 지금 올라온 것 또한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겠는가. 다만 성상의 은명(恩命)을 끝내 저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와서 사은하기로 생각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미 사은하였으니 오직 돌아가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세도를 만회할 책임은 세상에 따로 사람이 있으니 못난 내가 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고서, 즉시 귀향하였다. 연달아 승지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계미년(1643) 가을에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에 제수하고서 소명(召命)을 내렸다. 선생이 상소하여 간절히 사양하니, 성상께서 “그대는 경전(經傳)에 밝고 덕행(德行)을 수양하였으니, 실로 이 직임에 합당하다.”라고 비답하였다. 재차 상소해 사직을 거듭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부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선생을 도로 이 직임에 제수하고서 전지(傳旨)를 내려 속히 올라오라고 부르니, 선생은 또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갑신년(1644) 가을에 공조 참의,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을유년(1645, 인조23) 겨울에 금상(今上)께서 세자에 책봉되시자, 대신이 말하기를, “김집(金集)은 일생 동안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니, 정성을 다해 부탁하고 예를 다해 초빙하여 세자를 모시고 강독하게 한다면 훈도(薰陶)에 도움되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상께서 전지를 내려 부르니 선생은 세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병술년(1646) 3월에 이산(尼山)의 적(賊) 유탁(柳濯) 등이 변란을 모의하며 그 무리에게 “김 승지의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성상께서 이 말을 듣고 연신에게 “흉도(凶徒)도 현자(賢者)를 존경해 두려워함이 이와 같다.” 하셨다.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차자를 올려, 방정(方正)하고 독학(篤學)한 사람들을 널리 선발하여 따로 관명(官名)을 정하여 주연(冑筵 서연(書筵))에 입시시키기를 청하였다. 정해년(1647) 4월에 선생을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으로 삼으니 두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무자년(1648) 겨울에 다시 이 직임에 제수하니 또 사양하였다.
기축년(1649) 봄에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5월에 인조가 승하하시니 금상이 즉위하시어 전지를 내려 특별히 불렀는데, 그 전지에, “지금 국가가 망극한 슬픔을 당하고 보니 전고(典故)에 밝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더욱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는 과거 선왕조(先王朝) 때에 누차 부름을 받고서도 하루도 조정에 머문 적이 없었는데, 더구나 부족한 나의 성의로 어찌 올라오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선생은 즉시 서울로 가서 빈전(殯殿)에 곡림(哭臨)하고서 이어 신명(新命 새로 명한 관직)에 사은하였다. 성상께서 특별히 쌀과 반찬을 제급(題給)하게 하시니,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특별히 선생을 가선대부 예조 참판에 제수하자, 이비(吏批)가 격식을 벗어난 것이라고 아뢰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전고에 밝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부른 것만으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부당하다.” 하셨다. 그러자 선생이 상소하여 개정해 주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이 직임에 맞는 사람을 선발함에 있어 경을 버리고 누구를 선발하겠는가. 나의 정성을 헤아려 속히 나아가 직무를 살피라.”라고 비답하셨다. 재차 상소하여 사양하니, 성상께서는 또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으셨다. 세 번째 상소하여 사양하니, 그 문제를 해조(該曹)로 내려보내어 의논해 처리하게 하셨다. 해조가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법전(法典)에 예조의 당상관은 반드시 문관을 등용하라는 말이 없는데, 무엇 때문이 이의를 제기하는가? 체차하지 말라.” 하셨다. 네 번째 상소하니 또 허락하지 않으셨다. 질병으로 관직을 맡을 수 없다고 두 차례 고하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것도 현자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억지로 경의 뜻을 따른다. 하지만 참으로 한탄스럽다.” 하시고서, 즉시 공조 참판에 제수하셨다.
봉사(封事)를 올려 상례(喪禮)의 이동(異同)과 시무(時務)에 대해 논하고서 직질(職秩)의 개정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생각건대 천서(天序)와 천질(天秩)은 본래 상도(常道)가 있는데, 고경(古經)과 우리나라 제도에 인습과 개혁이 계속되었습니다. 대체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대부분 《개원례(開元禮)》를 따랐으므로 단상(短喪 복상(服喪) 기간을 줄임)의 오류에 구애되고, 혹은 세미한 것은 거론하고 중대한 것은 빠뜨리기도 하였으며, 혹은 형식은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는 허술하게 여기기도 하였으니, 예를 강론하는 선비들이 매우 부족하게 여긴 바였습니다. 얼마 전의 초종(初終 인조의 승하) 때에 사정이 급박하여 《국조오례의》를 준용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기왕의 잘못은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변제(變除)에 대한 절문(節文)은 조용히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례(古禮) 및 《국조오례의》의 초종으로부터 상제(祥祭), 담제(禫祭), 길제(吉祭)까지의 조목마다 아무 조항은 같고 아무 조항은 다르며, 아무 조항은 빠지고 아무 조항은 지나치게 번거로움 등을 아울러 기록하고, 간혹 찌를 붙여 그 줄거리를 대략 논하고서,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들어 상소문과 함께 올리오니, 전하께서 특별히 지시하시어 한 시대의 정제(定制)로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천하의 큰 근본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전하의 한 마음이고, 오늘의 급선무가 여섯 가지인데, 어진 도량을 넓히고 기강을 떨쳐 일으키고 궁위(宮闈)를 엄중히 하고 현량(賢良)을 등용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고 실효를 구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또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호(諡號)를 정하는 일과 자강책에 대하여 논하고, 끝으로 섬에 귀양 가 있는 손자들을 일찍 석방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말하였다. 이 봉사에 대해 성상께서는 수찰(手札)로 비답하기를, “올린 일곱 조항의 일은 진실로 오늘날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다. 경의 절실함에 탄복하고 경의 권념(眷念)에 감동하여 잊지 않고 마음속에 깊이 새기겠다. 그러나 모두 문제만 제기하고 해답을 말하지 않았으니, 경은 분명하게 들어 나를 가르쳐 주기 바란다. 내 어찌 직접 실행하여 조종(祖宗)께서 맡겨 주신 중기(重器 중요한 어보(御寶))를 보호하지 않겠는가. 끝의 한 조항은 나도 항상 마음에 걸려 염려하면서도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었던 바이다. 다시 헤아려 처리하겠다. 그리고 또 상례를 논한 한 권의 책은 매우 완비되었으니, 예관(禮官)과 대신들로 하여금 충분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경은 또 수부(水部 공조(工曹))의 직임마저 사양하니, 나는 놀라 말할 바를 모르겠다. 사양하지 말아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원소(原疏)는 좌우에 두고서 항상 보고 싶기 때문에 계하(啓下)하지 않는다.” 하셨다.
선생이 명을 받들어 《소학(小學)》의 주(註)와 《중용혹문(中庸或問)》의 구두(句讀)를 정하여 올렸다. 7월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때 성상께서 유신(儒臣)이 일을 논한 것으로 인하여 엄한 비답(批答)을 내리니, 선생은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면서 진계(進戒)하기를,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는 도리는 오직 마음을 비우고 포용해 받아들이는 데 있을 뿐이니, 비록 비위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응대하는 사이에 반드시 조용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온화한 기색을 잃지 않아야 하고, 절대로 갑자기 불평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어 뭇 신하로 하여금 군심(君心)의 천심(淺深)을 비평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경이 이렇게 말하니 나도 후회가 된다.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나를 가르치고 보좌한다면 국가의 다행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답하셨다. 재차 사직하니 또 허락하지 않고,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연달아 약물을 하사하셨다. 세 번째 사직하니 해조(該曹)에게 의론해 체직시키라고 하셨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특별한 소명(召命)을 받고 김경여(金慶餘), 신천익(愼天翊) 등과 함께 입대(入對)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오래전부터 경들을 보고 싶었는데, 경들이 선왕조(先王朝)의 은총을 잊지 않고, 지금 와서 나를 만나 주니 말할 수 없이 기쁘다. 나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없고 오직 경들을 보배로 여기니, 부디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 달라.” 하자, 선생이 사례하고서 이어 아뢰기를, “임금의 거상(居喪)은 사대부의 거상과 같지 않으니, 반드시 위로 종사(宗社)를 생각하고 아래로 자전(慈殿)을 위로하기 위해 성상의 몸을 보호하시어 임금의 대효(大孝)를 극진히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한 마음은 만사의 본원(本源)이니, 본원이 맑아서 털끝만 한 인욕(人慾)도 마음속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도심(道心)이 주인이 되고 인심(人心)이 도심의 명령을 순종하여 사물마다 저절로 과불급(過不及)의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왕년에 선대왕(先大王)의 소대(召對)를 받았을 때도 신은 이와 똑같은 말을 진달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이 밖에는 다른 도(道)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인재를 얻는 데 있고, 인재를 얻는 요령은 실로 임금의 정확한 감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전(傳)에 ‘순(舜) 임금이 고요(皐陶)를 등용하니 백성들이 모두 감화되어 불인(不仁)한 사람이 없어졌다.’라고 한 말이 어찌 거짓이겠습니까. 전일에 신의 소(疏)에 대해 내리신 비답에 ‘문제만 제기하고 해답을 하지 않았다.’라고 분부하셨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오늘의 모든 폐단이 오늘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전하께서 잠저에 계실 때부터 이미 자세히 아셨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대략만을 들어 진술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에 진력하신다면 모든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니, 감히 문제만 제기하고 해답을 하지 않은 것이 이닙니다. 지금 전하께서 비록 상중에 계시지만 잠시도 치도(治道)에 대한 마음을 늦추지 마시고, 때때로 신료들을 접견하시어 치도의 일을 강론하시면 서로 토론하는 사이에 슬프고 답답한 마음도 조금은 풀리실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이 이렇게 말하니 내 감히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셨다.
또 아뢰기를, “일전에 송시열(宋時烈)의 일이 조용하지 못한 잘못은 있으나, 그 사이에 좋은 의사가 담겼으니, 전하께서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시골로 내려갔으니 다시 올라와서 벼슬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장령으로 입대(入對)를 청하였다가 허락을 받지 못하자 즉시 물러나 시골로 돌아갔기 때문에 선생이 이렇게 아뢴 것이다. 성상께서는 모두 마음을 비우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때 산릉(山陵)과 혼전(魂殿)의 조석제(朝夕祭)에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신위(神位)를 함께 모시는 일로 선생에게 수의(收議)하니, 선생이 의논 드리기를,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병행해서는 안 되니, 병행하면 곳곳에 곤란한 일이 생긴다고 한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논의가 실로 정확한 말입니다.”라고 하고, 또 반곡(反哭)한 뒤에 안신제(安神祭)를 지내는 일로 수의하니, 선생이 의논 드리기를, “고례(古禮)와 《국조오례의》에 모두 의거할 만한 글이 없으니, 다시 명색(名色)없는 전(奠)을 올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더구나 반곡의 뜻은 장사를 지내고 신주를 모시고 돌아왔으나 사자(死者)의 모습을 볼 수 없으므로 산 사람들이 슬피 우는 것뿐이니, 안신(安神)의 뜻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8월에 또 대사헌에 제수하니, 선생은 병으로 직무를 볼 수 없었으나, 성은에 감격하여 일마다 규간(規諫)하였다. 그리고 사직소 말미에 “삼가 보건대 요사이 관원을 임명하시는 사이에 어떤 자는 성상의 뜻에 거슬린다 하여 오래도록 결재하지 않으시고 어떤 자는 친밀하다 하여 등급을 건너 뛰어 제수하시니, 이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대성인(大聖人)의 덕이 아닙니다. 그리고 소장(疏章)을 오랫동안 유중(留中)하고 정부로 내려보내지 않는 것도 언로(言路)를 넓히고 불휘(不諱)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닙니다. 사방에서 눈을 닦고 새로운 교화를 바란 지가 지금 몇 달입니까. 그런데도 조정의 불안은 더욱 심하고 공의(公議)가 펴지지 않음은 여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러러 믿고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하의 마음뿐인데, 지금 만약 사람을 정확히 살피지 못하시어 혹 호오(好惡)가 바름을 잃으신다면 국사는 다시 가망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일신의 사욕을 제거하고 지공(至公)의 도리를 따르시어, 모든 언행이 한결같이 중정(中正)에서 나오게 하소서.” 하니, “경은 나를 사랑하여 이처럼 할 말을 다하니 매우 가상하다. 바로 이 점이 내가 경을 잊을 수 없어서, 대사간에 앉히려는 이유이다.”라고 비답하셨다.
이때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차자를 올려 전관(銓官)의 잘못을 논한 데 대하여 삼사(三司) 관원들의 논의가 매우 과격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또 두 번째의 상소에서 이에 대해 논하니, 비답하기를, “소관(小官)이 방자하게 원로대신을 능멸하니 나는 매우 놀랍노라. 대신을 존경하는 나의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닌지 경은 숨김없이 다 말하라.” 하셨다. 세 번째 상소하여 더욱 간절히 사면을 비니, 비답하기를, “이렇게까지 간절히 사직을 청하니 특별히 경의 뜻을 윤허한다. 경은 한가로운 곳에서 몸을 정양(靜養)하며 다시 더욱 진언(進言)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라.” 하셨다.
9월에 궁박한 처지를 구휼한다는 명이 내리니, 선생이 상소해 사양하였다. 다시 공조 참판에 제수하니, 선생은 대행 대왕의 발인일(發靷日)이 박두하였으므로 부득이 나아가서 사은하고는 졸곡(卒哭)이 지나자 즉시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성상께서 수찰(手札)로 비답하기를, “경의 소장(疏章)을 보니 너무 서운하여 탄식이 일었노라. 전일에는 나에게 과실이 있을 때마다 상소해 간하였기 때문에 매우 다행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오랫동안 간하는 상소를 보지 못하겠으니, 세상을 피해 은거(隱居)를 계획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이 상소를 보니 참으로 나를 버리려는 것이다. 아, 어찌 선왕께서 알아서 예우하신 은혜를 생각지 않는가.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조금 더 머물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시고는 이내 옷감을 하사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선생은 상소해 사례하였다. 또 대사헌에 제수하자, 상소하여 산소의 수축을 위해 돌아가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으셨다.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자, 성상께서는 《중용(中庸)》 서문을 강독하면서 반복해 어려운 뜻을 물으셨다. 선생이 자세하고 친절하게 대답해 올리고서, 이어 사치의 풍습이 실로 근래의 고질이니, 절약과 검소의 교화를 궁중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자 성상께서 “이 폐습은 선왕께서도 일찍이 개탄하신 바이니 내 감히 노력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앞서 대사간 김경여(金慶餘)와 집의 송준길(宋浚吉) 등이 김자점(金自點)의 죄상을 논하면서 그 무리 몇몇 사람까지 탄핵하니, 이로 인해 조정이 시끄러웠다. 성상께서 선생에게 이르기를, “송준길 등이 선한 자를 찬양하고 악한 자를 징계하는 일을 하고자 하였으니, 죄를 입은 자들은 원래 중한 죄가 아니므로 달게 받아들여 잠자코 엎드려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데, 도리어 논죄(論罪)한 자를 배척하였다. 조정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하시고서, 신면(申冕) 등 다섯 사람에게 귀양을 명하셨다. 그러나 선생이 귀양 보내는 것은 처벌이 과중하다고 논하여 마침내 처벌이 경감되었다.
선생은 물러가기를 더욱 간절히 청해 세 차례 고하고 거듭 상소하니, 교체하여 부호군(副護軍)으로 삼으셨다.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고서 전에 청하였던 산소 수축의 일을 다시 청하니, 휴가와 말을 주라고 명하셨다. 이에 영의정 이공 경석(李公景奭)이 정원ㆍ옥당ㆍ태학의 제생(諸生)들과 함께 번갈아 상소하여 선생을 만류하라고 청하였다. 김 문정공도 선생이 돌아가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에게 자제를 보내어 만류하기를, “옛날에 사마공(司馬公)은 병으로 물러날 때 국사를 여회숙(呂晦叔)에게 부탁하였는데, 지금 공(公)은 떠나면서 국사를 누구에게 부탁하려 하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상차(上箚)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김집(金集)은 유림의 두터운 명망을 지닌 사람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단아하고 성실하므로 사림이 모두 앙모하며, 성상께서 그를 초치(招致)하셔서 한 조정에 벼슬하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신의 뜻에는 떠나기를 청하는 그의 청원을 구치히 따르지 마시고 새로운 정화(政化)를 돕게 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성상께서 재차 근신(近臣)을 보내어 유지(諭旨)를 내려 머물기를 권면하니, 선생은 황공하여 사례하고서 명년 봄에 다시 올라오겠으니 이번에는 떠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성상께서 수찰을 내려 전교하기를, “무덤에 흙을 더 쌓는 일은 경의 자제들이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부디 내려가지 말라.” 하셨다.
그러나 선생이 청파(靑坡)로 나아가 머물면서 거듭 상소해 돌아가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특별히 선생의 조카 좌부승지 김익희(金益熙)를 침전(寢殿)으로 불러들여 선생이 올린 상소문을 앞에 펴 놓고서 전교하기를, “비답을 내리는 것은 형식이 될 것 같으니, 그대가 가서 나의 뜻으로 깨우쳐 머물도록 권하라. 자제를 보내는 것은 그대가 나의 뜻으로 잘 깨우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시므로 선생이 부득이 우거(寓居)로 돌아오니, 성상께서 내관(內官)을 보내어 안부를 물으시고 연달아 약재와 신탄(薪炭) 등의 물건을 하사하셨다. 선생은 재차 상소하여 더욱 간절한 말로 물러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경을 머물도록 권한 것은 대신이나 근신들의 말 때문이 아니라 실로 눈 내리는 추운 겨울에 노인이 길을 가는 어려움을 염려했기 때문이니, 돌아갈 생각을 접고 나를 위하여 잠시 머문다면 국가에 도움이 되고 사림이 존경하여 모범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셨다.
대사헌에 제수하고서 특별히 상규에 얽매이지 말고 매양 경연에 들어와 참석하라고 명하셨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에 제수하자, 연달아 세 차례 상소하여 간절히 사양해 마지않으니, 비답하기를, “천위(天位 관위(官位))와 천직(天職 관직(官職))을 함께하지 않는 것은 왕공(王公)이 현자를 존경하는 도가 아니다. 국가의 치란은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 달렸으니, 내가 경에게 마음을 둔 지 오래이다. 경의 사직소에 이른바 ‘염치(廉恥)’라는 말을 나는 실로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세 차례 고하고 거듭 상소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으셨다. 선생은 성은에 감격하여 억지로 나아가 사은하고서 힘과 정성을 다하여 지우(知遇)에 보답하려고 생각하니, 조야(朝野)가 기대하며 치적(治績)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형세가 크게 어긋남이 있으니 선생이 입대하여 사례하고서 이어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도 이미 반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치국의 법도가 확립되지 않아 나라의 형세가 점점 쇠퇴하고 있으니, 신은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마음으로는 노력하지만 재주가 미치지 못해서이다.” 하셨다. 선생이 아뢰기를, “선왕 초년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노인들이 관직을 맡은 것이 오늘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처음에는 훌륭한 정치를 바랐으나 끝내 공적이 없었던 것이 천고의 한입니다. 혹시라도 오늘이 다시 전일처럼 될까 염려스러워 신은 기우(杞憂)를 금할 수 없습니다. 부견(苻堅)의 일은 진실로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만 그 또한 반드시 당시의 인재를 얻어 당시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을 믿고 맡기지 않으시니, 이것이 치국의 법도가 확립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하자,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이 전관(銓官)의 자리에 있으니, 인재를 살펴 선발하여 인재를 얻게 되기를 나는 매우 기대한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전조(銓曹)의 장관은 사람을 등용하는 것을 주관하는 자리이고, 헌부(憲府)의 장관은 풍기(風紀)를 단속하는 것을 주관하는 자리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니, 이 두 자리에 적임자를 얻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신처럼 무능한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어찌 일을 망치지 않겠습니까. 근자에 보건대 문재(文宰 2품 이상의 문관(文官))가 매우 부족하여 주의(注擬)할 때 구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생각건대 성상께서 반드시 유능자와 무능자를 감별하고 계실 것이니, 무엇 때문에 쓸 만한 자를 골라 품계를 올려 등용하지 않으십니까? 옛날에 진 목공(秦穆公)은 소를 먹이던 백리해(百里奚)를 등용하여 정승으로 삼았으니, 이미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엇 때문에 자급(資級)에 구애되십니까?” 하자,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하셨다.
또 아뢰기를, “임금의 도량은 넓어야 합니다. 그런데 근자에 보건대 성상의 뜻을 거스른 사람에 대하여 드러나게 마음에 담아 두고 잊지 못하시는 뜻이 있으시니, 이는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하는 도가 아닙니다. 유계(兪棨)로 말하면 그 재주가 쓸 만하여 버리기에는 아깝습니다. 그리고 대동법(大同法)은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법이니, 그 뜻이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러나 치국의 법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 먼저 시행할 절목(節目) 사이의 일이겠습니까. 만약 지레 이 법을 시행하여 민심부터 먼저 잃는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후일에 만약 호패법(號牌法)의 시행을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가벼이 시행하지 마소서. 호패는 전국 시대 진(秦)나라의 상앙(商鞅)이 만든 법입니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먼저 기강부터 세워야지 무엇 때문에 호패를 일삼겠습니까.”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의 말은 모두 덕이 높고 경륜이 풍부한 사람다운 말이라 나를 즐겁게 한다.” 하셨다. 마침 조카의 상(喪)을 당하여 겨우 성복(成服)을 끝냈을 때 대신의 계청(啓請)으로 패초(牌招)하여 대정(大政 도목정사(都目政事))을 열라고 하였다. 선생은 병으로 소명(召命)에 달려갈 수 없어서, 세 차례 상소하여 대죄하면서 체직을 청하니, 성상께서 위로하는 유지(諭旨)를 내리시고,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셨다. 경인년(1650, 효종1) 1월에 대정을 마치고는 또 세 차례 고하고 한 차례 상소하여 면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때 우상(右相) 김공 육(金公堉)이 호서(湖西)에 대동법의 시행을 매우 강력히 청하였는데, 선생의 의논과 서로 어그러지자 교외로 물러가 있으면서 올린 소(疏)에 미안한 말이 매우 많으니, 선생은 부득이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기를, “일전에 우상 김육이 신에게 와서 대동법의 편부(便否)를 물을 적에 신의 본의는 지레 이 법을 시행하면 인심을 잃게 될 것을 크게 곤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법의 시행을 찬성하지 않았고, 어전(御前)에서도 신중히 생각해야지 서둘러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진달하였습니다. 옛날에 사마광(司馬光)과 범진(范鎭)은 출처와 영욕을 함께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악률(樂律)을 논함에는 끝내 의견이 합치하지 않았고, 범중엄(范仲淹)과 한기(韓琦)는 어전에 올라가서는 구차히 찬동한 적이 없었으나 어전을 내려와서는 우호(友好)의 기색을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옛날의 군자들은 서로 화합(和合)하되 뇌동(雷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언제 한마디가 서로 맞지 않는다 하여 바로 불편한 기색으로 상대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상의 소(疏) 가운데 ‘시대의 금기(禁忌)에 저촉되었으니 죽음을 구제하기에도 부족하다.’라고 한 말을 읽고 나자 등골이 오싹하여 스스로 안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잠시인들 체류하여 신의 죄를 보태겠습니까.”라고 하고서, 즉시 강외(江外)로 나아가 머물렀다.
성상께서 이에 대해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매우 서운한 마음을 형용할 수 없다. 우상도 경에게 섭섭한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로에 떠도는 비방을 혐의쩍게 여긴 것이니, 경은 부디 이와 같이 하지 말고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안심하고 다시 머물라.” 하시고서,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踰)하여 다시 돌아오도록 권하셨다. 그러자 선생이 사례하기를, “소신(小臣)의 처사(處事)가 불민(不敏)하여 대신이 그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게 하였으니, 아랫사람의 도리로 어찌 감히 편안히 체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상소하여 사정을 진달하고는 드디어 시골로 돌아가니, 성상께서 수찰로 비답하기를, “경이 국사는 생각지 않고, 무엇 때문에 이처럼 자기 한 몸만 깨끗이 지키기 위해 세상을 피하려 하는가? 국사가 비록 위태로워도 믿는 바는 오직 한두 대신과 경뿐이다. 옛날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전국 시대의 전사(戰士)였으되 오히려 모욕을 참고 서로 몸을 낮추어 국사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고사(故事)를 현명한 경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니 부디 국사의 중대함을 생각하여 속히 들어오라.” 하셨다.
이때 김 문정공이 또 차자를 올려 선생의 소환을 청하고, 태학생들도 상소하여 청하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종일토록 기다렸으나 이조 판서가 들어온다는 기별이 없으니 나는 매우 염려스럽다. 내일 새벽에 다시 사관을 보내어 나의 뜻을 전하고 돈유(敦諭)하여 돌아오도록 권하겠다.” 하였다. 사관이 갈원(葛院)까지 뒤쫓아가서 유지(諭旨)를 전하니, 선생은 도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으로 고하였다. 성상께서는 선생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시고는 해조(該曹)에 명하여 말을 주어 전송하게 하시고서, 특별히 우상을 교체하셨다. 선생은 시골로 돌아온 뒤에 상소해 사정을 진달하기를, “신과 우상 김육은 오랜 벗으로 서로 불화할 혐의가 없고, 다만 대동법의 논의로 의견이 맞지 않아 한바탕 시끄러운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퇴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므로 신이 물러난 것이고, 애당초 염파와 인상여처럼 서로 사이가 나빴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상 또한 무슨 불편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후일에 서로 만나면 당연히 평소처럼 담소할 것입니다. 신이 물러나야 할 이유는 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죽을 나이에 가깝고 병 또한 심하여 조그마한 도움도 드릴 수 없으니, 어찌 여관(旅館)에서 죽어 천고에 비난을 남겨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가기 전에 대신이 성상께 “김집이 이미 내려갔으니 현자를 대우하는 도리로 볼 때 그의 관직을 벗겨 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아뢰니, 성상께서 윤허하셨다.
선생이 떠난 뒤에 시사(時事)가 더욱 혼란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김자점 등이 송준길 등에게 원한을 품고서 반드시 원한을 갚고야 말고자 하여, 안으로는 역란(逆亂)을 모의하고 밖으로는 북인(北人 청(淸)나라)과 내통하여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서, 김 문정공과 선생이 영수라고 참소하였다. 이에 북사(北使 청나라 사신) 여섯 명이 함께 나오니, 중외(中外)가 크게 놀랐으나, 이공 시방(李公時昉), 원공 두표(元公斗杓), 이공 경석(李公景奭)이 선후해서 주선하고, 성상께서 또 친히 미봉(彌縫)하심을 힘입어 일이 잘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선생은 더욱 세상에 뜻이 없었다.
5월에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연사(練事 소상(小祥))에 참제(參祭)하기 위하여 병을 참고 서울로 와서, 김 문정공과 대궐에서 만나 감개에 젖어 흐느껴 울고는 손을 잡고 이별하였다. 돌아올 때에 임해 상소하기를, “우로(雨露) 같은 성은이 미쳐 마른 풀처럼 죽게 된 신이 되살아났습니다. 이미 일이 드러나서 예측할 수 없는 화(禍)를 당하게 된 신을 너그럽게 처리해 주기까지 하셨으니, 그간의 일을 묵묵히 생각건대 하나하나가 모두 성은입니다.” 하고, 이어 겸직한 제조(提調)의 체직을 청하니, 성상께서 “대궐 지척까지 왔다가 나도 만나지 않고 서둘러 돌아간다면 돌아간 뒤에 그리운 마음 반드시 간절할 것이다. 내가 경을 만나고 싶으니 경은 헤아려 처신하라.”라고 하는 비답을 내렸으나, 선생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또 상소하여 대죄하고, 제조의 교체를 거듭 청하니, 대사헌에 제수하셨다. 이때 유계를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이 내리니, 선생은 상소해 사직을 청하면서 “신이 작년에 올린 소(疏) 가운데 망녕된 소견을 진술하였고, 탑전(榻前)에서도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유계가 이미 중한 견책을 받았으니 신 혼자만 죄를 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하자, 성상께서는 수찰로 비답하기를, “경이 나간 뒤로 내 어찌 하룬들 경을 잊었겠는가. 다만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 뜻대로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는 서쪽의 일이 약간 풀렸는데도 경의 사직은 여전하니 서운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봄 날씨가 따뜻하니 마음을 고쳐먹고 올라오기를 나는 날마다 바란다.” 하셨다. 재차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올린 소장(疏章)을 연달아 보니, 경의 얼굴을 대한 듯하여 마음이 위로되었다. 봄 날씨가 따뜻해지면 올라오겠다는 경의 말이 나는 매우 기쁘므로 억지로 경의 뜻에 따라 잠시 체직을 허락하는 바이니, 경은 그 말을 잊지 말라. 아,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렀으니, 노성인(老成人)을 등용하려는 생각이 마음에 간절하다.” 하셨다.
신묘년(1651)에 연달아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임진년(1652) 4월에 시독관(侍讀官) 이태연(李泰淵)이 아뢰기를, “김집은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금년에 나이가 80이니, 성상께서 노인을 대우하는 은전(恩典)을 미루어 철마다 안부를 물으시면 사림(士林)이 의지해 존중할 바를 알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 즉시 가자(加資)하고 음식물을 하사하라고 명하셨다. 이윽고 이조 판서에 제수하셨다. 실은 이때 선생의 나이가 79세였으므로 이태연이 즉시 잘못 아뢴 일로 스스로를 탄핵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80세가 머지않았으니 내린 가자를 고치지 말라.” 하셨으나, 선생은 연달아 네 차례 상소하여 잘못 내려진 가자의 삭제를 청하기를, “군자는 마음을 구차하지 않은 데에 두기 때문에 비록 작은 부정(不正)에도 잠시도 처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그 가자를 함부로 받아들인다면 이 한 가지 일로 위로 성상과 아래로 신이 함께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고, 또 새로 발령한 이조 판서와 음식물의 하사를 간절히 사양하니, 성상께서 온화한 비답을 내려 면부(勉副)하고, 음식물은 그대로 영수(領受)하라 하고, 가자는 명년 봄을 기다려 거행하겠다고 하셨다.
겨울에 전교하기를, “김집의 나이가 이미 80이 되어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제급(題給)하여 나의 뜻을 표하도록 하라.” 하셨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성상께서 수찰로 비답하기를, “내가 경의 높은 나이와 높은 덕을 그지없이 사모하면서도 서울로 불러올려 아침저녁으로 인의도덕(仁義道德)의 말을 듣지 못하고, 또 사림의 모범이 되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우니, 변변치 못한 이 음식물을 말할 것이 뭐 있는가.”라고 하셨다. 그러자 선생은 그 음식물을 종족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향리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밤새도록 잔치를 벌여 즐기면서 모든 사람과 성은(聖恩)을 함께 누리는 뜻을 다하였다.
계사년(1653) 봄에 전일의 전교를 실행에 옮겨 선생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급시키자, 대신이 관등(官等)을 무시하고 올려주는 은전을 사용할 것을 청하니, 성상께서 즉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리라고 명하셨다. 선생이 두 차례 상소하여 개정하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답하기를, “이는 선왕조(先王朝)로부터 내려오는 법도이고 내가 경에게 사사로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하셨다. 겨울에 의정부 좌찬성에 제수하자, 선생이 두 차례 사양하니, 성상께서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갑오년(1654) 가을에 판중추부사에 제수하자, 두 차례 사양하니, 온화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으셨다. 을미년에 연달아 세 차례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으셨다. 조가(朝家)에 중대한 논의가 있으면 성상께서 혹 낭리(郞吏)를 보내어 자문하기도 하셨다.
선생에게는 평소 한열증(寒熱症)이 있었는데, 병신년(1656) 봄에는 더욱 심해져서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앉고 누울 수 있었는데도 단정하고 엄숙하게 몸을 단속하는 것이 건강하던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제생(諸生)에게 이르기를, “나는 사생(死生)의 이치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 동요가 없으니, 이것은 거의 옛사람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별세하시기 수일 전에 조카 판서공(判書公 김익희(金益熙))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과 전형(銓衡 이조 판서)을 혼자서 겸직한 것은 우리 선대에 없었던 바이므로 사람들은 영화로 여기지만 나는 너를 위하여 두려워하니, 십분 조심하도록 하여라.” 하였다. 윤5월 13일 진시(辰時)에 별세하였다. 문인 윤선거(尹宣擧) 등이 병시중을 들 때로부터 염빈(殮殯)에 이르까지의 일을 한결같이 예에 맞게 시행하였으며, 가마(加麻)한 사람도 5, 60인이나 되었다. 원근에서 달려와 조상(弔喪)하며 “사문(斯文)이 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부고가 알려지자 성상께서는 매우 슬퍼하시며 전교하기를, “판중추부사 김집은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의 중망(重望)이었는데, 지금 갑자기 서거하였으니 나는 매우 놀라고 슬퍼하노라. 해조(該曹)에 일러 특별히 예장(禮葬)을 내리고, 근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라.” 하셨다. 8월 병신일에 연산읍(連山邑)의 동쪽 천호산(天護山)에 있는 고운승사(孤雲僧舍)의 북쪽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회장(會葬)한 자가 수천 인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의 단정하고 세심하며 온화하고 순수함이 정금미옥(精金美玉) 같아서 맑으면서도 지나치게 맑지 않고 굳으면서도 지나치게 고상하지 않았다. 여러 대 동안 적선(積善)한 뒤를 이었고 시(詩)와 예(禮)의 연원을 전해 받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입신(立身)의 근본으로 삼고, 궁리거경(窮理居敬)을 진덕수업(進德修業)의 방법으로 삼아서, 그 규모와 절도를 한결같이 가학(家學)을 준칙으로 삼았다. 어려서는 화려한 사조를 좋아하였으나 조금 자란 뒤에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간혹 어버이 명에 따라 과장(科場)을 출입하기는 하였으나, 즐기는 바가 이에 있지 않았고, 오직 성리서(性理書)에 전심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실천하여 공경하고 겸양하니, 그 언어동작이 묻지 않아도 쇄소응대(灑掃應對)의 학(學)에서 얻은 것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간에 도(道)가 소멸된 세상을 만나서는 다시 당세에 뜻을 두지 않고, 날마다 가친(家親)을 모시고서 도리를 강론하였다.
그리고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 반드시 힘과 분수를 다하여, 매일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복장을 정제하고 용구(用具)를 찬 다음 노선생(老先生)의 처소로 가서 문안 인사를 올리고는 즐거운 낯빛과 유순한 용모로 곁에서 모시면서, 중요한 보옥(寶玉)이나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든 것처럼 모든 일에 조심하여 그 물건을 제대로 들지나 못할까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걱정하듯이 정성을 다해 섬겼고, 저녁이 되면 잠자리를 펴 드리고서 노선생이 취침하기를 기다린 뒤에 또 절하고 물러났다. 이렇게 하기를 시종 하루같이 하니, 노선생도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부자간에 스스로 지기(知己)라고 하였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하고 “이런 아들을 두었으니 노선생은 행복하다.”라고 감탄하였다. 노선생이 별세한 뒤에도 한결같이 가법(家法)을 따라 날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서 새벽에 가묘(家廟)로 가서 배알한 뒤에 정사(精舍)로 물러나와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았는데, 종일토록 앉은 자세가 단정하여 등이 꼿꼿하였다.
사람을 대함에는 온화하기가 봄바람이 사람을 엄습하는 것 같았으나, 비속한 말을 내지 않고 태만한 기색을 짓지 않으니, 비록 사납고 오만하고 해학을 즐기는 사람이거나 취향을 달리하여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선생을 대하면 모두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선생은 몸이 말라 옷도 이기지 못할 것 같고, 성품이 겸손하여 말도 겨우 하는 것 같았으나, 사변(事變)을 응대함에는 의리로 결단하여, 정세(精細)하고 치밀하며 굳세고 과감함이 칼로 자른 듯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선생은 보고 들을 수 없는 경지에 더욱 힘써 마음을 맑게 하고 묵묵히 앉아 신명(神明)을 대하듯이 조심하였다. 가정이 엄숙하고 화목하여 사람의 소리가 고요하였으나 모든 일이 저절로 다스려졌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아 드러난 곳이나 드러나지 않은 곳이나 한결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도둑의 무리일 뿐이고 말하는 앵무(鸚鵡)일 뿐이다. 옛사람이 이른바 ‘혼자 걸을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혼자 잘 때에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다.’라는 말이 참으로 경계해 깨우치는 말이다.” 하고서, 만년에 서재(書齋)의 호를 신독(愼獨)이라 하였으니, 대개 자신의 실제를 표현한 것이다.
세상의 학자들이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높은 자리를 엿보고 함부로 잘난 체하여 얻음이 없는 것을 매우 근심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차라리 낮을지언정 높지 말고 차라리 얕을지언정 깊지 말고 차라리 서툴지언정 공교롭지 말라. 우리 유가(儒家)의 법은 본래 이와 같다. 정주(程朱) 이후로 은미하고 심오한 뜻이 다 드러나고 밝혀져서 다시 풀리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학들은 마땅히 삼가 준수하고 힘써 행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혹시 어떤 사람이 새롭고 신기한 학설을 만들어 선유(先儒)의 학설에 이론을 세우는 것을 들으면 매우 옳지 않게 여겼다. 더욱 예학(禮學)에 밝아 반복해 연구하여 자세하고 광범위하게 통달하였다. 노선생이 문인 및 친지들과 난의(難疑)를 문답한 《의례문해(疑禮問解)》가 쌓여 책을 이루었는데, 선생이 이를 종류에 따라 나누고서 참고하고 정정하여 초록(抄錄)해 4책으로 만들었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대해서도 노선생이 추가로 보충할 것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선생이 그 유지를 받들어 다시 참고하고 정정하여 중간(重刊)하여 배포하였다. 선생은 집안에서 행하는 길흉의 예를 모두 이 두 서적의 예를 준행하였는데, 세상에서도 따르는 자가 많았다.
종당(宗黨)을 어루만져 구휼함에는 은혜와 사랑이 두루 미쳐 사상(死喪)의 화(禍)에 슬픔과 예를 지극히 하였고, 원근 친구의 부고를 받으면 반드시 영위(靈位)를 배설(排設)하고서 곡을 하였으며, 비록 크게 늙은 뒤와 심한 병을 앓는 중에도 반드시 며칠 동안 소찬(素餐)을 들었다. 아래로 천한 비복(婢僕)이 죽었다는 말을 들어도 반드시 고기 반찬을 물리쳤으니, 대개 이른바 평생토록 예를 행하는 데 몸을 수고롭힌 분이다.
평소의 뜻이 온화하고 검소하여 세상 재미와 화려한 것에는 담박하였다. 중년에 비록 어버이 봉양을 위해 잠시 뜻을 굽히고서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어버이가 별세한 뒤에는 가난을 편히 여기고 도를 즐기는 본래의 절조가 더욱 굳어 한 발짝도 문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만년에 밝으신 임금을 만나 은례(恩禮)에 감격하여, 알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반드시 사리에 맞았으니, 그 지극한 정성과 고고한 충성은 귀신이 증명할 수 있다. 비록 시대가 맞지 않았으나 진퇴에 의리가 있었고, 조정에 벼슬하여 직무를 본 것이 반월(半月) 미만이었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항상 간절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하여 다름이 있지 않았다.
선생은 성품이 본래 겸손하여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만년에 나이가 더욱 높아질수록 덕이 더욱 높고 학문이 더욱 진전되니, 원근의 학자들이 모두 종사(宗師)로 여겨 변례(變禮)에 의문이 있으면 모두 선생에게 나아가서 시비를 질정하였다.
시문을 지음에도 그 내용이 단아하고 긴요하여 필요없는 말이나 군소리가 없었다. 유고(遺稿) 몇 권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필법도 힘이 있고 방정하여 왕희지(王羲之)의 해서체(楷書體)를 깊이 터득하였으나, 실은 심획(心劃)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년에는 더욱 오묘한 경지에 이르니, 글씨를 평론하는 자가 “근세의 명가(名家) 중에는 이런 글씨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우리나라의 도학은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에서 비롯하였고, 조선조의 제현(諸賢)이 크게 천명하였다 하니, 문운(文運)의 왕성으로 제현이 배출한 것이 성대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노선생은 실로 이 문성공(李文成公)의 적전(嫡傳)을 물려받은 제자로 오로지 소박과 진실에 공력을 들였고, 선생은 그 정신을 계승하여 학문의 길이 매우 발랐으니, 율곡 선생의 학문을 전하는 데 거의 폐단이 없었다고 하겠다.
부인 유씨(兪氏)는 좌의정 홍(泓)의 따님으로 병이 있어 정신이 맑지 못하였다. 측실은 바로 율곡 선생의 서녀(庶女)로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익형(益炯), 생원 익련(益煉)이고, 딸은 생원 김태립(金泰立), 정광원(鄭廣源)에게 시집갔다. 익형은 6남 3녀를, 익련은 4남 1녀를, 김태립은 3남 2녀를, 정광원은 1남 3녀를 두었다.
나 준길은 유소년(幼少年) 때부터 노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또 내외종(內外從)의 정의(情義)까지 겸하였으므로 선생은 나를 동생으로 기르며 매우 지극히 인도해 권면하였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기대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한없는 은혜’라는 것이다. 이에 감히 참람하고 외람함을 잊고 그 행적을 대략 추려서 이상과 같이 태사씨(太史氏)에게 고한다.
[주1] 집상(執喪) : 부모의 상사(喪事)에 예절에 따라 상제 노릇을 하는 것이다.
[주2] 무고옥(誣告獄) : 광해군(光海君) 5년에 대북(大北)이 일으킨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말한다. 박응서(朴應犀)는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庶子)로 시문에 능하고 학문이 높은 문사(文士)였으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출세의 길이 막히자, 이에 불평을 품고 같은 명문(名門)의 서출인 심우영(沈友英), 서양갑(徐羊甲), 허홍인(許弘仁), 박치의(朴致毅), 이경준(李耕俊), 김경손(金慶孫) 등과 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조령(鳥嶺)에서 은상(殷商)을 죽이고 은을 강탈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일당이 검거되었다. 이때 대북의 이이첨(李爾瞻) 등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군자금(軍資金)을 조달하기 위해 은을 강탈했다고 거짓 자백하였다. 이 허위 자백으로 인해 영창대군을 강화(江華)로 유배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기타 소북(小北)을 숙청한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는 무고한 대가로 용서를 받고 벼슬에 올랐으나, 인조반정으로 체포되어 주살(誅殺)되었다.
[주3] 이산(尼山)의 …… 모의 : 이산 사람 유탁(柳濯)이 서울에 사는 진사 권대용(權大用) 등과 반역을 공모하여, 임경업(林慶業)이 반군(叛軍)의 대장이 되었다고 사칭(詐稱)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인하고 군사를 모아 거사(擧事)하려 했던 역모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24年 3月 28日》
[주4] 이비(吏批) : 이조에서 임금에게 주청(奏請)하여 윤허를 받는 벼슬, 또는 그에 관한 문건인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
[주5] 천서(天序)와 천질(天秩) : 천연(天然)의 질서라는 말로 천서는 군신(君臣), 부자(父子), 형제(兄弟), 부부(夫婦), 붕우(朋友)의 순서이고, 천질은 존비(尊卑), 귀천(貴賤)의 등급을 말한다. 《書經 皐陶謨》
[주6] 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소추(蕭樞) 등이 칙명(勅命)을 받고 편찬한 책명이다.
[주7] 변제(變除) : 상복(喪服)을 바꾸어 입는 일로, 소상(小祥) 뒤에 연복(練服)으로 갈아입고, 대상(大祥) 뒤에 상복을 벗는 것을 말한다.
[주8] 손자들 :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들을 가리킨다.
[주9] 계하(啓下) : 상소문이나 일반 안건을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이 본 뒤에 계(啓) 자를 새긴 도장을 찍어서 해당 부서로 내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주10] 유중(留中) : 상주(上奏)한 안건이나 상소문을 승정원으로 내려보내지 않고 궁중(宮中)에 그대로 두는 것이다. 안건이나 소(疏)가 올라가면 임금은 반드시 3일 이내에 그 문건을 승정원으로 내려보내야 한다. 만약 비답(批答)이 없을 경우에는 계(啓) 자를 새긴 도장을 찍어서 내려보낸다.
[주11] 불휘(不諱)의 문 : 숨김없는 직언(直言)이 들어오는 문을 말한다.
[주12] 면부(勉副) : 내키지는 않지만 요청이 하도 간절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따른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조 판서의 사직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주13] 가마(加麻) :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주14] 정금미옥(精金美玉) : 정제된 금과 아름다운 옥이라는 뜻으로, 고결하고 아름다운 인품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주15] 궁리거경(窮理居敬) : 독서하여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는 정주학(程朱學)의 수양법을 말한다.
[주16] 진덕수업(進德修業) : 도덕을 증진하고 학업을 닦음을 말한다.
[주17] 쇄소응대(灑掃應對)의 학(學) : 유가교육(儒家敎育)의 기본이 되는 학습으로, 주자(朱子)는 《대학(大學)》서문에서 “삼대 때에는……사람이 8세가 되면 왕공 이하로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교에 입학시켜 집안을 청소하고 어른의 명에 응대하고 나아가고 물러서는 예절을 가르친다.〔三代之隆……人生八歲 則自王公以下 以至於庶人之子弟 皆入小學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라고 하였다.
[주18] 보고 …… 경지 : 마음이 사물에 느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드러나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이발(已發)이라 하고, 사물을 접하지 않아 사려(思慮)가 일어나지 않아서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미발(未發)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미발의 상태를 말한다. 《中庸章句 第1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