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문(祭文)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송시열(宋時烈) 등]
숭정 4년 세차(歲次) 신미년(1631, 인조9) 10월 신축삭(辛丑朔) 14일 갑인일에 문인(門人) 송준길(宋浚吉)ㆍ이유태(李惟泰)ㆍ송시열(宋時烈) 등은 삼가 술과 과일로 전(奠)을 올리면서 선생의 영연(靈筵)에 영결(永訣)을 고합니다.
아, 선생께서는 도(道)는 땅이 만물을 지고 있는 것과 같이 중하였고, 덕(德)은 봄기운이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것처럼 두터웠습니다. 그러니 어찌 한두 마디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연세는 공자(孔子)보다 11년을 더 사셨고, 또 말씀하기를, “나는 자손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는 도(道)와 덕(德)과 수(壽)와 복(福)에 있어서 유감스러운 바가 없습니다. 그런 데다가 장차 태사씨(太史氏)의 시장(諡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자들이 무어라 진술하겠습니까.
생각건대 소자들은 일찍이 의지할 바를 잃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의지하여 돌아갈 바를 얻었는데, 얼굴빛을 우러러봄에 좋은 옥과 같이 따스하매 기뻤고, 자리에 나아감에 봄바람같이 화창하매 즐거웠습니다. 공부의 방법을 물으면 거경(居敬)과 치지(致知)를 말씀하셨고, 더 말씀해 주기를 청하면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말씀하셨습니다.
태극(太極)을 논할 때면 주자(朱子)의 학설을 옳다고 하고 육상산(陸象山)의 학설을 그르다고 하셨으며, 이기(理氣)를 변론할 때면 퇴도(退陶)의 학설을 버려두고 율곡(栗谷)의 학설을 취하셨습니다. 종례(宗禮)의 대경(大經)을 강론하실 때는 수사(洙泗)의 은미한 뜻을 위주로 하고 하남(河南)의 적확한 논변을 참작하여 세밀하게 분석해서 도탑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봄 산에 꽃이 피는 아침이나 가을 집의 고요한 밤이면 임천(林泉)에서 즐겁게 노닐면서 정서를 펴기를 너그럽고 광대하게 하셨고, 물음에 조용히 답하시되 가르쳐 주기를 정녕스럽게 하셨습니다.
이에 유연히 무우(舞雩)의 즐거움이 있었고, 편안히 흥국(興國)의 아취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해가 다 되어 저녁이 되고 하룻밤이 다 지나 새벽이 되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런즉 세상의 취향(趣向)이 비록 다르고 세속의 비방(誹謗)이 비록 들끓더라도 의지할 곳을 알아서 그칠 바를 얻었기에 다른 것은 일체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를 비유해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기고 나면 성난 우레나 사나운 호랑이의 환난조차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끝나고 말았습니다. 다시 어디로 돌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아 비통스럽습니다.
소자들은 타고난 기질이 용렬하고 우매하며, 품고 있는 재기(才氣)가 범상하고 고루합니다. 그런 데다가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나 좋은 풍속을 본 적이 없고, 과거에 합격하는 데에만 뜻을 길러서 세상의 비루한 습속에 빠져 들었으므로, 기량이 보잘것없어서 조금도 칭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람스럽게도 장려하고 허여해 주시면서 가르칠 만하다고 하셨는바, 그 은애(恩愛)의 도타움은 대개 보통보다 훨씬 더 깊은 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친 음식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앞에서 나누어 먹게 하셨고, 기거(起居)와 침식(寢息)을 반드시 곁에서 하도록 하셨습니다.
준길(浚吉)에게 일찍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경계하신 것은 학업에 방해될까 염려해서 그런 것이었고, 유태(惟泰)와 시열(時烈)에게 과문(科文) 짓는 법을 가르치신 것은 저희들에게 늙은 모친이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오면 온 것을 기뻐하셨고, 물러가면 떠나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셨으며, 절하고 떠날 때에는 반드시 다시 올 날짜를 물으셨고, 편지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서로 생각하는 뜻을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또한 저희들이 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하나라도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는 표정을 안색에 나타내셨고, 나 때문에 꺼릴 것이 없이 각자의 뜻을 말하라고 하실 때면 반드시 그 말에 기뻐하시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 선생께서는 소자들에게 학문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대하셨고, 소자들은 선생에 의해 학문을 이룰 것을 우러러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매번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선생께서 춘추(春秋)가 이미 높으시나 기모(氣貌)가 더욱 강성하셨으므로, 백세의 상수(上壽)를 누리시어 길이 이 즐거움을 보존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저희들을 가르쳐 주시는 것을 다 끝내지 못하신 채 후학을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듯이 하실 줄을 어느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 비통스럽습니다.
지난 초가을 초순에 준길과 시열에게 보내 주신 편지에 이르시기를, “너희 두 사람이 함께 거처하면 반드시 서로 간에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나는 부종병(浮腫病)을 얻어서 숨이 몹시 가쁘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선생의 필력(筆力)이 쇠하지 않았고 사어(辭語)가 착란되지 않았으므로 기뻐하면서 무망(无妄)의 병이니 반드시 약을 쓰지 않아도 낫는 기쁨에 이를 것이니 깊이 염려할 것이 못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찌 예전의 병이 낫지 않은 데다가 새 병이 도져서 한 장의 종이에 남기신 필적이 마침내 영원히 작별하는 글이 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아, 돌아가실 징후는 이미 편지를 보내시던 날에 나타났는데, 달려가서 문안드림이 남들보다 뒤늦어서 촛불을 잡는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돌아가시는 즈음에 비로소 문에 다다랐으나 또한 곧바로 종종걸음으로 들어가서 얼굴을 뵈옵고 영결의 말씀을 받들지 못하였습니다. 유태는 또한 저희 두 사람보다 더 늦어서 이미 염습(斂襲)을 다 마쳐서 의용(儀容)이 완전히 가려진 뒤에 왔으니, 평생 동안 지극히 애통스럽게 여기는 그 마음이 죽는다 한들 어찌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가슴속으로 더욱더 통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생께서 일찍이 소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정시회(鄭時晦)가 지은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는 잘못된 곳이 많고, 정한강(鄭寒岡)이 지은 예설(禮說)은 빠진 것이 있는바,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너희 세 사람이 함께 거처하면서 뜻을 모은다면, 잘못된 것을 정정하고 빠진 것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셨으므로, 소자들이 공경히 그러겠다고 말씀드리고서 물러 나왔는데, 그 뒤로 혹은 질병이 있거나 혹은 세상일에 골몰하느라고 끝내 우러러 성대한 뜻에 부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일찌감치 선생께서 이렇게 되실 줄 알았더라면 어찌 감히 하루인들 선생 곁을 떠나 다른 데로 가서 저희들을 가르쳐 주신 뜻을 저버려 영원토록 종천(終天)의 한이 맺히게 했겠습니까.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간이 녹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합니다. 아, 비통스럽습니다.
태산이 무너졌으니 저희들은 누구를 본받아야 합니까. 가언(嘉言)과 의행(懿行)은 날이 갈수록 멀어지고 날이 갈수록 잊혀질 것이며, 공리(功利)의 유혹과 비리(鄙俚)의 잡설만이 좌우에서 시끄럽게 쏟아져 들어올 것이니, 어찌 그 처음에 먹은 마음을 변치 않아서 가르쳐 주신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데다가 질병은 점차 몸에 더해지고 구습(舊習)은 그대로 몸에 감겨 있으며, 세월은 멈추게 하기 어렵고 갈림길은 어긋나기가 쉬운 법인데, 평소에 배운 공부는 있는 듯 없는 듯하여 어느 한 가지도 분명하게 드러난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한밤중에 일어나 몸을 어루만지매 비록 슬퍼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선생께서 저희 세 사람에 대하여 걱정하신 것은 실로 능히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할까 하는 것이었는데, 오늘날 저희들이 저희 자신들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또한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가까운 장래에 한 언덕을 정하여 세 채의 집을 짓고 살면서 서로 생각하고 서로 도우면서 한결같이 선생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이(鯉)가 시(詩)와 예(禮)를 듣고 배워서 선생의 덕음(德音)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문(師門)이 텅 비지 않게 하여, 선생의 전형(典刑)이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선생을 섬기던 도리로 그를 섬기겠습니다.
또한 선생께서 근거를 밝혀서 바로잡아 놓으신 유고(遺稿)가 책을 이루어 상자에 가득한바, 도(道)가 있는 분께 나아가 바로잡고자 한다면 이분을 놓아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소자들의 발자취가 군자(君子)의 문정(門庭)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아마도 다시금 소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생의 혼령께서는 긴긴 밤에 더듬거리면서 바른길을 찾고자 애쓰는 저희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에 돌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아, 비통스럽습니다.
소자들이 선생을 섬긴 지가 지금 여러 해가 되었으나 이미 받들어 모시기를 두루두루 하지 못하였으며, 가르침에 부지런히 따르기를 죽음에 이르도록까지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간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하고자 하였으나, 그것마저도 처음에 먹었던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 선생께서는 소자들을 자식같이 보았는데, 소자들은 선생을 아버지같이 여기지 못하였으니, 뒷날 지하에 가서 선생을 대할 적에 뵐 낯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 이제는 모두 끝났습니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선생의 의용(儀容)이 영원히 격절되었고, 학업을 마칠 날은 기약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바람과 우레의 변화와 같으신 선생의 의절과 해와 달의 광채와 같으신 도학을 어디에서 보겠습니까. 그리고 삼천 조목의 곡례(曲禮)와 삼백 조목의 경례(經禮)는 일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 수없이 다르고 일관된 도리는 매우 정미하여 그 의리가 무궁합니다. 그런데 이제 실마리가 끊어져 망망하게 되었으니, 넓고 넓은 진원(眞源)을 어느 곳에서 찾겠습니까. 길이 생각하매 슬픔으로 인해 가슴이 불타는 것과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저희들이 슬퍼하는 뜻을 알지 못합니다. 아, 비통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