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는 개국하여 중국을 섬기교 매년 사신을 보내며 사대정책을 폈다. 그리고 주자학을 지도이념으로 설정한다. 양반계급은 사당을 만들고 4대조의 제사를 지내야 하였다. 불교는 국교 정책에서 불교탄압으로 돌아섰으며 양반계급 층은 사장파와 성리학파로 양분되고 사사건건 대립하며 각종 사화를 일으키고 당쟁을 심화시켰다. 불교탄압으로 신앙을 잃은 백성들은 원시신앙으로 돌아 서거나 정감록, 토정비결에 등에 빠져들었다. 이럴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연이어 일어나 외침을 받으며 국가 존폐 위기 까지 처했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이러한 환경에서 마침 예수회 소속 마태오 릿지 신부가 마카오로 입국하여 걸어서 중국의 문물들을 익혀가며 북경에 입경하게 된다. 그는 서양의 학술서적과 종교 관련 서적 등을 한문으로 번역 간행해 가며 천주교 전에 매달린다. 이런 국제적 정세의 흐름 안에서 우리나라 사신으로 중국을 오가던 사람들에 의하여 국내로 반입된 책을 당파적으로 남인 이었던 지식인들이 접함으로써 강학을 시작하고 점점 종교화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천주교를 설립하는 중심인물이 된다.
마태오 릿지 신부가 만든 세계지도 만국여도가 1603년 사신 이광정에 의해 반입되고 뒤를 이어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서적이 들어와 남인 학자들은 인생관과 세계관이 급변하게 된다. 공리공론으로 당쟁을 격하시키던 주자학을 떠나 현실과 관련된 역사, 지리, 경제, 정치 등을 연구하는 실학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여러 차례 강학을 통해 이어진 학습은 결국 천주교를 믿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중심에는, 양근, 경안 한강변에 살고 있던 남인 학자들이었다. 실학 운동의 선구자였던 지봉 이수광(1563-1628)은 조선을 개국한 이태조의 8대 후손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벼슬을 하고 1590, 1597,1611년에 사신으로 북경에 다녀오면서 동서고금의 348종의 서책을 읽은 후 개요를 부분별로 수록하여 1614년 20권으로 된 지봉유설(芝 峯 類 說)이라 하는 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그 안에 마태오 릿지 신부가 간행한 만국여 도와 천주실의 등의 내용이 소개되었는데 그의 친구 김현성은 이 책을 빌려 읽은 후 서문을 지어 말하기를 장님이 눈을 얻은 것과 같다 할 정도였다.
지봉 이수광은 마태오 릿지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과 1603년에 유변, 심은기가 지은 속이담(續 耳 譚) 6권 등등을 읽고 그 내용을 소개하여 실학을 일으키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런 종교서적들이 후손들에게 전승되어 180년이 지난 후 8대 후손인 이윤하에 이르러 자녀 이경도, 순이 누갈다, 경언 삼 남매는 순교를 하게 된다. 그리고 홍길동전 작가로 유명한 허균도 천주교를 믿게 된다. 지봉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서 이조판서를 지낸 유몽인은 1623년 형 집행으로 죽은지만 그의 저서인 어우야담(於 于 野 談)에서 천주교를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허균(1569-1618)이 처음으로 천주교를 믿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구라파는 방언(方言)으로 태서(太西)라는 말로서 그 나라에 있는 종교를 바로 크리스천(기리단(伎 利 檀)이라 말한다. 이것은 방언으로 하늘(天)을 섬기다는 뜻이다. 그 도(道)는 유교(儒敎)도 아니고 선(仙)도 아니며 석도(釋道)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부처를 숭배하더니 기리단이 들어오니 부처를 버리고 요(妖)라 하였다. 앞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부처를 존중하였었다. 이미 동남아 여러 나라들은 자못 믿는 사람이 참 많다. 홀로 우리나라만 이것을 알지 못하더니 허균이 중국을 오고 가며 지도와 제12장 12단 경문(經文)을 얻어 가지고 들어왔다.
어우야담에서 허균은 제 12장 12단을 외우며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백육십여 년에 나타나는 유명한 실학자 안 정복, 박 지원, 이 규경이 시인하고 있다. 이 규경은 본인의 저서 오주연문 장전산고(五洲衍文 長箋散槁)의 사교변증조(邪交辨證條)에서 이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허 균이 천주교서를 얻어 학습하며 말하되 나는 天을 따르고 성인(聖人)을 따르지 않겠다 - 하였다.
이러한 글을 견주었을 때 허 균이 최초의 선비로서 천주교를 믿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허균은 허 엽의 세째 아들로 두 형이 바로 허 성, 허 봉이며 누나는 그 유명한 여류시인 난설헌으로서 형제들 모두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들이었다. 특히 허 균은 국문소설인 홍길동 전을 지었으며 그는 1614년, 1616년 사신으로 북경을 다녀왔다. 첫 번째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에서 가지고 온 학해(學海), 촌거만록(村居漫錄) 외 중국서적을 광해군에게 진상 한다. 천주교 12가지 기도문도 이때에 갖고 들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허 균는 한때 불교에 심취하여 연구한 적도 있었는데 이에 반하여 천주교도 심취하여 믿음을 갖은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허 균은 1618년 반역죄로 몰려 능지처참 형을 받는다.
지봉 이 수광이 단초를 제공한 실학은 일백 여년이 지난 후 한강유역 경안(현 경기도 광주)에서 은거하며 살던 남인 학자 이 익(李瀷. 1681-1763)과 문인들 사이에서 크게 실학이 일어나게 하였다. 이 익은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숙종 8년. 1682년) 대사헌 이 하진의 아들로 태어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광주(廣州) 성호리에 칩거하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익은 마테오 릿지 신부의 천주실의와 아담 샬 신부의 주제군징(主制群徵), 이탈리아 판토하가 저술한 칠극(七克)을 읽은 후 발문을 작성한 후 제자들과 토론하였다. 특히 그는 천주실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평 한다
- 그 학은 오로지 천주를 존중하고 있다. 천주는 곧 유가의 상제(上帝)인데 그를 공경하고 섬기며 두려워하고 신앙함은 불교의 석가와 같다. 그러나 그가 인도의 불교를 배척하는 바는 오히려 다 같이 환망(幻 妄)에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칠극(七 克)을 읽은 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칠극은 예수회 소속 판토하(Pantoja, D., 龐迪我) 신부가 저술한 7가지 죄악의 근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7가지 덕행에 대해 1614년 북경에서 저술한 천주교서로 천주교수덕서이다.
-칠극은 서양의 판토하가 지은 바로 우리의 유가(儒家)의 극기설이다. 일곱 가지 가운데 다시 절목(節目)이 많아서 조관(條貫)이 차례 지어 있고 비유가 간결하며 그 속에는 우리 유가에서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데가 있으니, 이는 자기 욕망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일을 돕는 공(功)이 따른다. - 라 하며 천주교의 공(功)을 인정하고 있다.
이 익은 제자 안 정복(安鼎福.1712-1791)과 천주교에 대한 토론을 자주 가졌다. 안 정복도 경안(京案) 덕곡에 칩거하면서 이 익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실학자로서 동사강목(東史綱目), 광주지(廣州誌) 등 수많은 책을 지어내고 만년 영조의 부름을 받아 정조의 스승의 되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정조 때 벼슬을 얻게 된다. 안 정복은 1757년 46세에 마테오 릿지 신부의 저서 변학유독(辨學遺牍)을 읽은 후 스승 이 익에게 이 책을 읽으셨습니까? 묻는다. 이러한 일을 보아 사제지간에 지속적으로 천주교 토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기술하기를 명경석유(名卿 碩儒)로서 천주교 책을 보지 않는 자 없다 하였으니 1760년경 천학(天學) 또는 서학(西學)이라 부르던 천주서적이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 정복은 그의 사위인 직암(稷庵) 권 일신 일파들이 천주교 믿음의 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또한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줏단지를 불살라 버림을 보고 이것이 장차 당쟁의 불씨 거 될 것임을 직감하고 천 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 술하여 개심하도록 유도하였으며 1784년에는 그들에 좌장 격인 권철신에게 다음의 글을 보내 경고한다.
- 이제 또 듣건데 서토(西土)의 학을 그대로 면치 못하여 떠들어 대니 모든 젊은이들의 창도 하는 바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요? 또 듣건대 모모배(某某輩, 이가환, 정약전, 이승훈, 이벽)가 서로 결약하여 신학의 설을 고습하고 어지럽게 말한다 하니 이 모두 그대의 절실한 친구들이며 문도(門徒)로다. -
이처럼 이무렵 성호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이라 하여 서학(西學) 또는 천주님을 믿는 학문이라 천학(天學)이라 불렀으며 서양에서 흘러 온 학문이라 하여 신학(新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