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내면 덜꽃 농장 체험기 #4
목도 축였으니 이제는
이곳 농장에 온 본분에 충실할 때이다
동생이 인부 다섯 명이 갈테니
적당한 일감을 준비하라고
형에게 미리 귀뜸을 한 모양이었다
이들 부부 농장 작물의 종류는
이제 수확을 끝내고
출하를 기다리는 양파와
지금 밭에 심겨져 있는
양상추 양배추 브로콜리 그리고 풋고추
모두 삼천오백 평 노지에서 재배하는데
대개 이모작을 하니까
결국 칠천 평 밭을
두 부부 손으로 해내는 셈이다
사실 이곳 내면에서 삼천오백 평이면
소농 축에 든다
여기는 만 평은 기본이고
웬만하면 대개가 이삼 만 평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네들은 일반 관행농이고
이들 부부는 유기농이라
이 정도도 아마 벅찰 게 분명하다
게다가 남들처럼 품을 사는 일은
일 년에 며칠 안 되고
두 부부의 손에만 의지하는데
그나마 가끔 이렇게 지인들이 와서
도와주는 게 많은 도움이 된단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감은 양파 선별작업
수확한 지 조금 지난 듯한 양파가
대략 삼사십 평 비닐하우스 창고 바닥에
하나 가득 널려서 선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사 자매로부터
구체적인 작업지시가 떨어졌다
일단 양파 머리 꼬랑지를
적당하게 가위로 자르고
딴딴하고 잘생긴 놈
(이놈들은 바로 출하할 놈이고)
조금이라도 물컹하고 못생긴 놈
(이놈들은 즙으로 짤 놈들이고)
아예 버릴 놈
이렇게 놈놈놈 셋으로 선별하면 끝
사실은 완전 끝은 아니고
포장 단계에서 다시 농장주 부부의
마무리 검사와 손질을 거쳐야 한단다
우린 바로 두 세 명씩 흩어져서
작업을 시작했다
워낙 손이 모자라는 수확철이라
며칠간 손대지 못하고 방치된 탓인지
못생긴 놈과 버릴 놈이
제법 많이 나와서 안타까웠다
농장주 부부는 작업지시를 끝내고
각자 자신들 일 찾아 가고
우리는 작업지시에 맞춰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입은 아무말 대잔치에 돌입했다
군대 얘기는 으레 무용담처럼
빠지지 않았고
성당 뒷담화 또한 끝도 없이
비닐하우스 창고를 가득 채우고 넘쳐났다
조금 있으니 로사 자매가
오랜만에 농장에서
건강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좋다면서
새참으로 막걸리와
안주로 배와 사과를 깎아서 내왔다
그런데 이 막걸리가
보통 막걸리가 아니었다
경상도 봉화에서 나는
청량주라는 막걸리인데
참치 형제가 공장에 특별히 주문해서
시판되는 막걸리에서
아스파탐 감미료를 빼고
제조한 막걸리란다
햐~ 이집 부부의 독특한 취향은
대체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가
막걸리에서 단맛이 싹 가시고 나니
막걸리 본연의 텁텁한 맛이 살아나서
내 입맛에는 딱이었는데
몇몇은 별로였는지 그냥 시판되는
막걸리를 마셨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
슬슬 배가 고파지니
작업 끝내고 밥먹으러 오라는
반가운 소리가 들려온다
둘러보니 그래도 전체량의 삼분의 일은
처리한 듯했다
우리 같은 신참내기들이
이 정도 일을 해내도록
인부들 수준에 맞는 적당한 일감을 준
농장주들이 참으로 지혜롭게 느껴졌다
우리들도
이 정도면 밥값은 한 셈이라고 자부하며
비닐하우스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오랜 시간 쭈그려 앉은 탓에
걸음걸이가 다들 어그적거린다
저녁 식사의 메인 쉐프는 시몬
그는 쉐프 임무에 충실코자
아까부터 미리 주방에 와서
준비해온 닭과 전복을 손질했었나보다
쉐프의 야심찬 일품 요리
해신탕이 먹음직스럽게
식탁에 올려졌고
주인 내외는 밭에서 막 따온
유기농 풋고추와 양상추 브로콜리를
깨끗이 씻어서 상에 올리고
간장에 절인 명이 나물과 김치를 곁들이니
푸짐한 상차림이 완성됐다
여기에 아까 작업장에서
새참으로 맛 보았던
청량주가 반주로 어우러지니
푸짐함은 점차 행복함으로 빠져든다
이 행복한 만찬장을 더욱 흥겹게 빛낸
신의 한 수가 있었으니
바로 내가 집에서 나올 때
마지막으로 차에 실었던 기타였다
사실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이 자리와 분위기에
기타가 어울릴 거라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같이 온 일행과 농장주 부부를
보는 순간 잘 가져왔다고 확신했고
그 확신은 적중했다
술이 있고 노래가 있고
그 안에서
좋은 사람들과의 정담이 오가니
어찌 아니 흥겹고 행복하지 않으리오
하룻밤새 우리가 마신 막걸리가
몇 병인지는
솔직히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만 로사 자매는 혼자서
소주를 세 병이나 마신 걸로 확인됐다
정확하게는 전에 마시다 남긴 반 병까지
합하면 세 병 반인데
그것도 참이슬이나 처음처럼이 아닌
특이하게도 제주 산 한라산 소주였다
술 취향도 내외분 모두 독특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분들의 진짜 독특한 취향은
따로 있었으니 그건 잠시 후 공개하겠다
모두들 돌아가면서
노래 한 자락씩 뽐내던 중에
비닐하우스 주방 한쪽 벽에
눈에 띄는 뭔가가 걸려 있었다
농장 이름을 수놓은 헝겊 천이었는데
아주 낡아 보였다
그 안에 쓰인 글자는
첫눈엔 달꽃 농장로 보였는데
로사 자매가 덜꽃 농장이란다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 줬지만
이미 술이 거나해진 상태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고
다만 뭔가를 덜어놓고 내려놓는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듣는 순간 달꽃 농장보다
예쁜 이름이라고 여겨졌다
놀라웠던 건 그 농장 이름 옆에 걸린
뜻밖의 그림이었다
그건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뭔가 "부조화의 조화"의 느낌이랄까?
어지간히 취한 사람 순서대로
자정 무렵부터 취침하러 자리를 떴다
나도 새벽 두 시쯤
마지막으로 침실로 향했다
대충 손발을 씻고 자려는데
갑자기 변의가 느껴졌다
그런데 상황이 아주 급했다
화장실 위치를 미리 파악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까 작업했던 비닐하우스 지나서였다
급하게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달도 없는 그믐날
안개마저 자욱한 밤길이 쉽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별 사고 없이 일을 마쳤다
그런데 이 화장실이
바로 생태 화장실이었다
일을 보고 재를 덮는 방식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파리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고
물 한 방울 쓰지 않아도
믿을 수 없이 깨끗했다
이 집 주인장 내외의 독특한 취향 중
내게 가장 감동을 줬던 취향은
바로 이 생태 화장실이었다
나는 이 생태 화장실에 반해서였는지
오밤중에 한 번 더 다녀왔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녀오고서도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무려 서너 번은 더 들락날락한 듯하다^^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