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종(대한제국)[편집]
2.1. 적출[편집]
이름 | 익성군(翼成君) → 고종 태황제(高宗) 1852년(철종 4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 |
아내 | 왕비 민씨(閔氏) →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책봉) 1851년 9월 25일 ~ 1895년 8월 20일 |
자녀 | 1남 | 이름(??) | 대군 (1871년): 4일 만에 사망[1] |
1녀 | 이름(??) | 공주 (1873년): 222일 만에 사망 |
2남 | 이름(이척) | 황태자 척(皇太子 坧) → 순종 효황제(純宗) 1874년 3월 25일~ 1926년 4월 25일 |
3남 | 이름(??) | 대군 (1875년): 13일 만에 사망 |
4남 | 이름(??) | 대군 (1878년): 107일 만에 사망 |
2.2. 서출[편집]
후궁 | 영보당 귀인 이씨 1843년 ~ 1928년 12월 17일 |
자녀 | 1남 | 이름 | 완효헌친왕 선 (完孝憲親王 墡), 완효헌왕(完孝憲王), 완화군(完和君) 1868년 5월 31일 ~ 1880년 2월 21일(향년 11세) |
1녀 | 이름 | 옹주 1871년 ~ 1872년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생몰년도 미상 |
자녀 | 1남 | 이름 | 의친왕 강 (義親王 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 |
후궁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 ~ 1911년 7월 20일 |
자녀 | 1남 | 이름 | 영친왕 은(英親王 垠) → 황태자 은(皇太子 垠)[2]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
후궁 |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 이완덕(李完) 1887년 ~ 1967년 11월 11일 |
자녀 | 2남 | 이름 | 이육(堉) 1914년 ~ 1916년 |
후궁 | 보현당 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 1882년 2월 23일 ~ 1943년 |
자녀 | 1남 | 이름 | 이우(1915)(堣) 1915년 ~ 1916년 |
후궁 | 삼축당 상궁 김씨(三祝堂尚宮 金氏) 김옥기(金玉基) 1890년 ~ 1970년 9월 24일 |
3. 순종황제[편집]
이름 | 황태자 척(皇太子 坧) →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 ~ 1926년 4월 25일 |
아내 | 순명비 민씨(閔氏) →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추존) 1872년 11월 20일 ~ 1904년 11월 5일 |
아내 | 황태자비 윤씨(尹氏) →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년 9월 19일 ~ 1966년 2월 3일 |
순종은 아이를 갖지 못 했는데, 그냥 몸이 약해서 아이를 갖지 못했다고도 하고, 김홍륙의 커피 독살 미수사건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면서 성불구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에 사망했고, 이후 1906년 두 번째 태자비로 순정효황후가 입궁하였다. 따로 후궁은 두지 않았다. 순종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왕실이 끊길 것을 우려한 명성황후는 고종과 귀인 장씨에게서 1877년 태어난 왕자 이강을 입궁시켜 의화군으로 봉하고, 간택을 통하여 연원군부인 김씨와 가례를 올렸다. 의화군 이강의 후견인이 된 명성황후는 의화군 이강(후에 의친왕)이 아들을 낳으면 순종의 양자로 봉하여 왕실의 적통을 잇고자 하였으나,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시해를 당하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4. 의친왕계[편집]
4.1. 적출[편집]
의친왕은 적자녀를 갖지 못하였고, 후궁과 첩을 통해 12남 9녀의 자녀를 가졌다. 이 중 일제 이왕직 사무소에서 이건과 이우만을 인정하여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자녀들은 의친왕가를 잇는 6남 이곤과 의친왕비 호적에 입적된 5녀 이해경을 제외하고 종친들에게 입적되었다.
4.2. 서출[4][편집]
측실 | 수관당 정씨(修觀堂 鄭氏) |
자녀 | 1남 | 이름 | 황손 이건(李鍵) 1909년 ~ 1990년[5] |
측실 | 수인당 김씨(修仁堂 金氏), 김흥인(金興仁) |
자녀 | 1남 | 이름 | 황손 이우(李鍝)[6] 1912년 ~ 1945년 |
자녀 | 장남 | 이청(李淸)[7] 1936년 4월 23일 ~ |
자녀 | 차남 | 이종(李淙) 1940년 11월 9일 ~ 1966년 12월 25일 |
2남 | 이름 | 황손 이주(李鑄) 1917년 ~ 1982년 |
3남 | 이름 | 황손 이곤(李錕) 1919년 ~ 1984년 의친왕 후계자 |
자녀 | 장남 | 이준(李準)[8] 1961년 9월 11일 ~ |
측실 | 수현당 정씨(修賢堂 鄭氏), 정운석(鄭雲石) |
자녀 | 1남 | 이름 | 황손 이방(李鎊) 1914년 ~ 1951년 |
측실 | 조씨(曺氏), 조병숙(曺秉淑) |
자녀 | 1남 | 이름 | 황손 이창(李鎗) 1915년 ~ 미상 |
측실 | 수덕당 이씨(修德堂 李氏), 이희춘(李喜春) |
자녀 | 1녀 | 이름 | 황손녀 이령(李玲) 1918년 ~ 1981년 |
2녀 | 이름 | 황손녀 이진(李珍)[9] 1919년 2월 24일 ~ 2020년 2월 8일 |
측실 | 수완당 김씨(修完堂 金氏), 김정완(金貞完) |
자녀 | 1녀 | 이름 | 황손녀 이찬(李瓚) 1920년 ~ 2009년 |
측실 | 수길당 박씨(修吉堂 朴氏), 박영희(朴英喜) |
자녀 | 1녀 | 이름 | 황손녀 이숙(李琡) 1920년 ~ 미상 |
측실 | 송씨(宋氏) |
자녀 | 1남 | 이름 | 황손 이광(李鑛) 1921년 ~ 1952년 |
측실 | 수경당 김씨(修慶堂 金氏), 김창희(金昌熙) |
자녀 | 1남 | 이름 | 황손 이현(李鉉) 1922년 ~ 1996년 |
측실 | 김금덕(金今德) ? ~ 1975년 |
자녀 | 1녀 | 이름 | 황손녀 이공(李玜)[10] 1930년 ~ |
측실 | 함씨(咸氏), 함개봉(咸開鳳) |
자녀 | 1남 | 이름 | 황손 이갑(李鉀) 1938년 ~ 2014년 |
자녀 | 장남 | 이원(李源)[11] 1962년 9월 23일 ~ |
측실 | 김혜수(金蕙洙) |
자녀 | 1남 | 이름 | 황손 이환(李鐶) 1944년 ~ |
1녀 | 이름 | 황손녀 이장(李璋) 1940년 ~ |
2녀 | 이름 | 황손녀 이민(李玟) 1953년 ~ [12] |
측실 | 홍정순(洪貞順) |
자녀 | 1남 | 이름 | 황손 이석[13](李錫) 1941년 ~ |
2남 | 이름 | 황손 이정(李錠) 1947년 ~ |
1녀 | 이름 | 황손녀 이용(李瑢) 1944년 ~ |
2녀 | 이름 | 황손녀 이현(李現) 1950년 ~ |
5. 영친왕계[편집]
이름 | 영친왕 은(英親王 垠) → 황태자 은(皇太子 垠)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
아내 | 마사코 여왕 → 자행황태자비(이방자 여사)(紫行皇太子妃/李方子) 1901년 11월 4일 ~ 1989년 4월 30일 |
자녀 | 1남 | 이름 | 원손 이진(元孫 李晉) 1921년 8월 18일 ~ 1922년 5월 11일 |
2남 | 이름 | 회은황세손 이구(李玖)[14] 1931년 12월 29일 ~ 2005년 7월 16일 |
아내 | 줄리아 멀록, 이주아(李珠亞) 1923년 3월 18일 ~ 2017년 11월 26일 |
자녀 | 양녀 | 이은숙(李恩淑)[15] 1959년 ~ |
자녀 | 양자 | 황사손(皇嗣孫) 이원(李源)[16] 1962년 9월 23일 ~ |
순종의 다음 황실 직계적통은 바로 아래 동생인 의친왕이었으나, 당시 이미 성인이고 항일정신이 투철한 의친왕을 껄끄럽게 여긴 일본과 자신의 아들 영친왕이 황통을 잇길 바라던 엄귀비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영친왕은 형인 의친왕보다 20살 정도 어린 동생이지만, 순종이 황태자(皇太子)로 봉하였기에 일단 영친왕으로 황실 적통이 이어졌다. 그 후 영친왕은 일본인 이방자 여사와 강제 결혼을 하면서 침략자 일본인이 부인으로 들어오면서 대한황실의 적통이 흔들린다 하여 원칙대로 의친왕으로 황실의 법통이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흐지부지 되었다.
영친왕과 일본인 이방자 사이에서 낳은 아들 회은황세손(사시) 이구는 자식을 갖지 못했고, 줄리아 멀록과는 1982년 이혼했다. 양녀로 이은숙(李恩淑, Eugenia Unsuk, 1959년 ~ )이, 사후 입적으로 황사손 이원(李源)이 있다.
2005년 이구가 타계하자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대한황실 후손들이 회의를 거쳐, 서열상 가장 높았던 이준은 의친왕가의 종손으로 사동궁을 이어야 했기에 이준의 사촌동생 이원이 이구에게 입적되어 제사를 책임지는 황사손에 봉무 중이다.
6. 항렬[편집]
항렬자는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로 대표되는 오행상생법을 따른다. 다만, 원래 조선 왕실에서는 효종 - 현종 - 숙종 3대를 제외하면 작명에 오행상생법을 따르지 않았다.# 당장 고종의 법적 아버지인 문조(효명세자)의 휘는 '영(旲)'인데, 그 부수인 '日'은 불 '화(火)'로 간주된다. 그러나 주자 가문이 오행상생법 작명을 따랐던 선례로 인하여, 민간에서도 성리학이 교조화되는 조선 후기가 되면, 오행상생법 작명이 절대적 기준 수준으로 일반화되었고, 황실에서도 이를 재도입하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오행상생법 작명이 없던 건 아니었고, 그 후로도 오행상성법 외의 기준을 적용한 집안도 적지는 않았다.
초대 황제 고종의 휘는 '형(㷗)'으로 '불 화(火)' 변이다.
아들 순종의 휘는 '척(坧)', 영친왕의 휘는 '은(垠)', 의친왕은 '강(堈)', 완친왕은 '선(墡)'으로, '흙 토(土)' 변을 공유한다.
손자녀 '구(玖)', '건(鍵)', '우(鍝)', '곤(錕)', '광(鎤)', 진(珍)', '공(玜)', '갑(鉀)', '석(錫)' 등은 '구슬 옥(玉)', 또는 '쇠 금(金)' 변을 공유한다. 의친왕의 자녀들 중 아들들은 '쇠 금' 변, 딸들은 '구슬 옥' 변을 썼다. '玉'은 오행상 '金'에 해당한다.
증손자 '청(淸)', '종(淙)', '원(源)', '준(準)' 등은 '물 수(水)' 변을 공유한다.
현손자 항렬은 '나무 목(木)' 변을 공유한다.
특기할 점은, 황실 방계들이 공유하는 항렬자(1868년 이후 덕흥대원군의 후손 전체가 사용하게 된 항렬자)와 황실 직계 항렬자의 오행이 한 단계 씩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순종의 이름은 '흙 토(土)'가 들어간 '척(坧)'이나, 사촌형 이준용은 '흙 토(土)' 다음에 오는 오행 성질인 '쇠 금(金)'이 들어간 '용(鎔)' 자를 항렬자로 사용한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은 황실 직계에서 숙종의 아들(경종, 영조) 대의 이름부터 오행상생법을 적용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본래 효종 대부터 숙종 대까지 직계와 방계의 항렬 오행은 같았다. 그런데 경종이 태어날 때 신하들이 오행상생의 순서를 따라 작명할지 물었으나, 숙종은 단호히 거절하였다.[17] 그래서 이후 오행상생법은 적용되지 않았다가, 고종에 의해 재도입되었다. 고종은 양형 헌종의 휘 '환(烉)'의 '불화 발'을 따라 '火'를 자신 대 항렬의 오행으로 삼고, 이를 기준으로 자녀들과 후손들의 항렬 오행을 정하였다.
반면, 방계들은 직계의 항렬자와는 상관없이 계속하여 오행상생법으로 항렬자를 정하였다. 효종 대 항렬부터 이어진 오행 순서를 살펴보면, 효종 항렬(水)-현종 항렬(木)-숙종 항렬(火)-영조 항렬(土)-사도세자 항렬(金)-정조 항렬(水)-순조 항렬(木)-효명세자 항렬(火)-고종 항렬(土)-순종 항렬(金)이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의 이름(이하응: 李昰應)에 '화(火)'행인 '응(應)'이 들어갔고, 고종과 같은 항렬의 종친들 이름에 '토(土)'행인 '재(載)'가 들어간 것이다.[18] 즉, 방계는 효종 대부터 규칙을 끊김없이 지켰고, 직계는 규칙을 끊었다가 고종 대에 부활시켰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족보상으로는 방계인 흥선대원군의 일족은, 임금의 친생가라는 위치 때문인지 방계의 항렬자를 쓰면서도, 나머지 이름 글자에 황실 직계의 항렬 규칙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순종과 같은 항렬의 인물들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 항렬 대 방계의 항렬자는 'O용(鎔)'인데, 항렬자가 아닌 다른 이름 글자로 직계의 항렬 오행인 '흙 토(土)'가 들어간 글자를 사용했다.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埼鎔),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達鎔)과 이규용(李逵鎔),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址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 이문용(李𪣢(土 + 汶)鎔), 이관용(李土+灌鎔)의 이름이 그렇다.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