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감사(金監司) 성적(盛迪) 에 대한 만사 2수
위대하신 문충공과 문정공 두 선생은 文忠文正兩先生
절의가 일월처럼 밝으신 분이었네 節義吾東日月明
한 시대의 명문으로 망세와 같았었고 一代名門如望歲
같은 시대 인재들과 명성을 겨루었지 同時諸子競蜚英
이제 막 덕업(德業) 계승하는 모습 보는 차에 方看袞袞追前武
어찌 바삐 머나먼 길 가 버릴 줄 알았으랴 何意悤悤輟遠程
온 조정이 한탄하고 놀란 것은 두고라도 未說同朝共驚惋
임금님도 슬픈 심정 금하시지 못했으리 九重還復愴宸情
백씨가 별세한 지 사 년이 채 못 되는데 伯氏云亡未四朞
어찌하여 그대가 또 이렇게 가 버리나 如何君又至於斯
미원의 새 명 미처 받들지 못하였고 薇垣不及趨新命
당발만이 뒷사람의 그리움 남겼어라 棠茇空令寄後思
누추한 집 찾아 주던 의리에 감격했고 義感每來尋陋巷
영전 찾아 곡 못 하니 정리가 부끄럽네 情慙無計哭靈輀
멀리서 만사 한 수 엮어서 보내는 때 蕭歌一曲遙相送
공사를 위해 거듭 눈물을 떨구누나 重爲公私淚兩垂
[주1] 김 감사(金監司) : 김성적(金盛迪 : 1643 ~ 1699)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혜(仲惠), 호는 일한재(一寒齋)이다. 증조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 1561 ~ 1637), 부친은 현감 김수민(金壽民)이며 351쪽 주 1)에 나온 김성달(金盛達)의 동생이다. 승지 등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대사간으로 임명되어 부임 도중 죽었다.
[주2] 문충공(文忠公)과 문정공(文正公) : 문충공은 병자호란 때 강화(江華)에서 순절한 김상용이고, 문정공은 당시 예조 판서로서 주전론(主戰論)을 폈던 그 아우 김상헌(金尙憲 : 1570 ~ 1652)이다. 김성적이 김상용의 증손이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을 언급한 것이다.
[주3] 망세(望歲)와 같았었고 : 망세는 농부가 풍년을 바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김성적이 조야(朝野)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주4] 미원(薇垣)의 …… 못하였고 : 미원은 사간원의 별칭이다. 김성적이 충청도 관찰사로 제직하고 있다가 숙종 25년(1699) 2월 5일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미처 부임하지 못한 채 3월 9일 죽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肅宗實錄 25年 3月 9日》
[주5] 당발(棠茇) : 주(周)나라 때 소백(召伯)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면서 정사를 펼 적에 간혹 감당나무 아래 머물기도 했는데, 그 뒤에 백성들이 소백의 덕(德)을 그리워하여 그가 머물렀던 나무를 소중하게 다루면서 “무성한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이 초막으로 삼았던 곳이다.〔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고 하였다. 《詩經 召南 甘棠》 여기에서는 김성적이 펼쳤던 혜정(惠政)을 뜻한다.
<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