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배씨족보》 서〔大丘裵氏族譜序〕
영남(嶺南)의 사인(士人) 배군(裵君) 맹유(孟裕)와 배군 계현(啓賢)이 그 파보(派譜)를 만드는 일로 500리 길을 고생스럽게 찾아와서 나에게 서문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또 그 성씨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말하였다.
“우리 배씨는 신라 육부(六部)에서 성씨를 하사받은 날에서 기원합니다. 육부 외에는 우리나라에 배씨가 있지 않았습니다. 고려 초기에 무열공(武烈公)이 다시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었고, 무열공의 뒤로 씨족이 크게 번성하여 봉지를 받고 관향을 나눈 것이 무릇 오가(五家)였는데, 달성군(達城君) 휘 운룡(雲龍)을 중조(中祖)로 삼은 가문이 바로 우리 대구 배씨입니다. 인가(人家)의 씨족이 비록 한 근원에서 함께 나왔을지라도 세대가 멀어질수록 조상의 계보를 더욱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관향이 나뉜 뒤에 씨족의 정의(情誼)를 서로 강명하는 사람이 적은데, 관향이 나뉜 뒤에도 계보가 어긋나지 않고 족의를 서로 강명하는 것은 오직 우리 배씨만 그러합니다. 이 때문에 지난 정해년(1827, 순조27)에 다섯 관향이 족보를 합쳐서 ‘경주보(慶州譜)’라고 이름하였으니, 우리 배씨의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30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파보(派譜)를 만드는 일에 반드시 서두르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달성군에서 5세가 밀직공(密直公)이 된다는 이 말은 가첩(家牒)에 전한 바 정해년 이전의 구보(舊譜)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해년 11년 뒤인 무술년(1838, 헌종4)에 밀직공 묘소에서 돌에 새긴 광명(壙銘)이 출토되었는데, 곧 고려 명신 익재(益齋) 이 선생(李先生)이 찬한 것이었습니다. 보첩(譜牒)의 세차(世次)를 서로 비교해 보니 2세가 더 많았는데, 이렇다면 위로 달성군과는 7세의 거리가 있습니다. 《익재유집(益齋遺集)》을 살펴보니 과연 그러했습니다. 아, 인간세상의 낡은 가첩이 중천(重泉)에 비장된 글의 신빙성만 못하고, 사문(私門)에서 전수(傳守)된 것이 선정(先正)의 유문으로 질정한 것만 못하니, 가첩이 과연 그 양세(兩世)를 빠뜨린 것인가. 정해년의 족보도 과연 가첩을 따라 오류를 답습한 것인가. 바라건대 이것을 책에 갖추어 써서 금일 수보(修譜)하는 사연(事緣)을 밝히고 뒷사람으로 하여금 참고가 되게 해주십시오.”
내가 천천히 그 석각이 세상에 나오게 된 연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묘소는 개성부(開城府)에 있는데, 자손이 지키지 못한 지가 오래되어서 금성파(金城派)의 족인(族人)이 무열공(武烈公)의 묘라고 여기고 있다가 광중(壙中)을 열고 지석(誌石)을 얻어 보니 곧 밀직공의 묘소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금성파는 밀직공을 조상으로 하지 않는데 이 석각을 얻었으니 이 일을 더욱 믿을 만하네. 제공(諸公)들이 하는 금일의 보역은 마땅하네.”라고 하였다. 숭정(崇禎) 뒤 네 번째 병진년(1856, 철종7) 9월 모일에 쓰다.
[주1] 익재(益齋) :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호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ㆍ학자ㆍ문인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ㆍ역옹(櫟翁)이다.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술로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 2권이 있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고 한다.
[주2] 중천(重泉) : 땅 속의 깊은 곳을 이르는 말로, 구천(九泉), 저승을 뜻한다.[주-D003] 선정(先正) : 전대(前代)의 현인(賢人), 현신(賢臣)을 말한다.
大丘裴氏族譜序
嶺南士人裴君孟裕,裴君啓賢。以其有派譜之役也。繭足半千里。命正鎭以弁卷。且道其姓系之詳曰。吾裴氏原於新羅六部。錫姓之日。六部之外。東國未有裴也。至松京初。武烈公復爲開國元勳。武烈之後。族大以蕃。受封分貫者凡五家。而其以達城君諱雲龍爲中祖者。卽吾大丘之裴也。人家氏族。雖或同出一源。世愈遠而先系愈失。故貫分之後。族誼鮮有相講者。貫分而系不差。族誼相講者。獨吾裴爲然。是故頃 年丁亥。五貫合譜。名之以慶州譜。吾裴之盛事。今纔三十年。吾之所以必汲汲於派譜者有說焉。達城君五世而爲密直公。此家牒所傳丁亥以前舊譜所錄也。而丁亥後十一年戊戌。密直公墓所。石刻壙銘出焉。乃高麗名臣益齋李先生所撰也。以譜牒世次相較則多二世。若是則上距達城七世矣。就考益齋遺集則果信。噫。人間殘牒。不如重泉秘藏之可信。私門傳守。不如先正遺文之可質。家牒果逸其兩世歟。丁亥譜果因家牒而襲謬歟。願以此備書于卷。以明今日修譜之事緣。俾後來者有所攷焉。正鎭徐問其石刻出世之由。答曰。墓所在開城府。子孫失守蓋久。金城派族人以爲武烈公墓也。而開壙得誌石。乃密直公也。正鎭曰。金城不祖密直公。而得此石事尤可信。諸公今日之役當矣。崇禎四丙辰九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