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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 교수.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강화도 고려산의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 설립자인 종교학자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가 8일 노환으로 인천 강화도비에스종합병원에서 소천했다. 향년 80.
길 교수는 크리스찬이면서도 불교를 전공해,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한 종교학자였다. 고인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으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원을 지낸 고인은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뒤 2011년부터 사재를 털어 지은 강화도 고려산 자락 ‘심도학사’에서 영성적 고전공부를 이끌어왔다.
고인은 목사였던 외조부를 비롯해 목사와 장로들이 많은 집에서 태어난 크리스찬으로, 1987년엔 한완상 교수 등과 함께 평신도공동체인 새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고승인 보조국사 지눌의 선사상을 연구했다. 서강대 교수를 하던 1980년대엔 보조국사의 본찰이던 전남 송광사에서 법정 스님, 김지견 박사 등 당대 최고의 승려 및 불교학자들과 함께 ‘보조국사전집 편찬위원회’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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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예수’나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같은 다원주의적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개인적으로는 부드러운 성품이었으나, 독선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예언자처럼 매섭게 비판하며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고인은 청년시절 영락교회에 다니며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으나 전혀 감동이 없어 기성교회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 개신교 주류를 복음주의라고 하는데, 말로는 죄인 죄인 하지만, 실제로는 죄의식이라는 게 없고 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승리주의에 젖어 타종교를 무시하고 미국을 할아버지쯤으로 여겨 역사의식이라는 게 없어서 기본적 이성과 상식을 무시해 세속적 휴머니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하곤 했다. 고인은 또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을 만큼 신학적 상식조차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곤 했다. 성경에서 하느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상징이어서, ‘저 친구는 곰이다’는 말은 ‘인간이 아니고 진짜 곰’이라는 게 아닌데도, 한국 개신교 목사와 신자들은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에 빠져 성서에 그렇게 쓰여있다고 ‘진짜 곰’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길희성 교수.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고인은 불교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초기불교의 공(空·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사상이 대승불교의 불성(佛性)사상으로 발전한 것은 공사상만으로는 부족해 불성사상이 나온 것인데도, 초기불교를 공부한 이들이 불성사상은 붓다가 말한 게 아니라며 배타하는 것은 학문의 발전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는 것이다. 그는 또 “기독교적 선악 이분법도 문제지만, 불교가 선악시비를 넘어서는 것을 지향하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돼 윤리의식이 약해지고, 초월만 중시한 채 불교적 윤리관을 확고히 하지 못해 사회 참여에 뒤쳐진 것 아니냐”며 비판하기도 했다.
고인은 2021년 최후의 역작인 ‘영적 휴머니즘’을 썼다. 무려 900여쪽의 이 책을 쓰면서 수년간 책상을 떠나지 않아 몸에 무리가 온 것으로 보인다. 고인은 ‘기독교와 종교적 문제점을 주로 비판해오다가 왜 말년에 영적 휴머니즘을 들고 나왔느냐’는 물음에 “목욕물이 더럽다고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릴 수는 없다”며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온 내가 도착한 종착역”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영적 휴머니즘’에 대해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영적 인간관은 불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유교 등 세계 모든 주요 종교 전통의 공통적인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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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이 책에서 대표적인 영적 휴머니스트로 꼽은 인물은 예수와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 독일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등 4명이다. 그는 “예수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곧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준 참된 인간이었고, 에크하르트는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 우리 인간들 사이에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대담하게 가르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임제는 불교 냄새도 풍기지 않고 어떤 특정한 이념과 관념조차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이 당당하게 사는 벌거벗은 참사람이었고, 해월 최시형은 경천, 경인에서 나아가 경물까지 가르쳐 슈바이처보다 훨씬 먼저 인간중심주의까지 넘어섰다”고 평가했다.
유족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빈소를 마련하지 않고, 조문은 심도학사에서 10일 오후 3~6시에만 받으며 이어서 오후 6시 추모예배를 갖기로 했다. 유해는 화장 뒤 심도학사 한 켠에 모시기로 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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