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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수리 - 신성교사 독서 동아리
 
 
 
카페 게시글
2024 영화와 소설 사이 테레즈 라캥, 혹은 박쥐 - 죄짓기 전에 처벌받고
야간비행 추천 0 조회 33 24.11.06 10:19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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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11.06 12:01

    첫댓글 <박쥐>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뿜는 고래의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상현-태주는 저 일자, 신의 작열하는 태양 앞에서 산산히 붕괴되었으나, 저 바다 깊은 심연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를 뿜는 고래에 의해 구원받았는가? 이생에서의 무거운 짐, 너무나 무섭고 자신들을 단두대의 사형수로 몰아가는 저 피로의 신발만을 남겨 두고 그 둘은 저 망망대해의 파도, 포말 속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구원일까? 절망일까? 이 장면에서 라여사의 비웃는 듯한 시선과 구두의 교차는 묘한 울림을 준다. 그러나 더 큰 울림은 그 사이에 배경처럼 깊게 놓여 있는 고래가 내뿜는 선연한 피빛 바다이다. 우리는 저 선연한 피빛 바다 속으로 상현과 태주처럼 고통스럽게 사라질 수 있을까?

  • 작성자 24.11.07 09:37

    정말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저 말 없는 심판자들이 아닌가? 라캥 부인-<박쥐>의 라여사는 말을 잃어버렸을 때 무서운 심판자가 될 수 있었다. 평생 병들고 무능력했던 카미유(박쥐의 강우)는 죽어 자신의 말을 잃어버렸을 때 로랑-테레즈, 상현-태주의 삶에 끝임없이 출몰할 수 있게 된다. 로랑을 지켜보는 고양이 프랑수와의 시선이야말로 말 없는 자의 무서운-공포의 시선이다. 신은 말이 없다. 말 없는 자들은 그 없음으로 인해 금지의 선을 무한 방사하고 있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말-존재로 언어로 통해 쪼각나 있는 자신의 자아를 통합하고 대타자의 상징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자신의 자아를 통합하는 존재이다. 상징적 질서 속에서 인간은 파편화되어 있는 세계를 인식하고 표상하며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대타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대타자의 말은 빈칸으로 작동함으로써 우리는 그곳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오인이며 오독일 수 밖에 없다. 즉 우리의 말은 대타자의 말 없음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없는 심판자들에게 느끼는 공포의 정체다.

  • 작성자 24.11.07 09:47

    매주 목요일 저녁의 만남, 그곳에 모이는 인물들(미쇼-올리비에-그리베)은 너무 수다스럽다. 그들의 수다는 그들의 신체적 무능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체적 무능력-그들은 로랑과 테레즈의 욕망, 그 미친듯한 생성을 알 수 없고, 전신마비의 라캥 부인의 말 없음을 이해할 수 없다.-은 그들의 수다의 원천인 것이다. 말이 많은 자는 신체적 불구인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거대한 상징적 질서의 포로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없고, 자신의 욕망을 생성할 수 없다. 그러니 <박쥐>에서 그들의 죽음이란 삶의 무능력, 욕망의 불모 지대에 대한 사형 선고와도 같은 것이리라. 그들은 말-허깨비, 진정한 말을 가지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의 만남이 도미노 게임-마작 게임이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이미 선재(先在)하는 어떤 질서, 규칙에 사로잡힌 놀이이다. 그들은 사로잡힌 자들이며, 포획된 동물이며, 포로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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