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마침내 죽음에서 위안을 찾았고 서로의 몸 위로 포개지며 쓰러졌다. 여자의 입술이 남편의 목으로 가서, 카미유가 물어뜯은 상처에 닿았다." 『테레즈 라캥』 에밀졸라/윤미연 역/윌북(p.380)”
“『테레즈 라캥』에서 나는 인물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고자 했다. 이 책 전체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자유의지 없이 자신의 신경과 피에 완전히 지배당하는 인물, 억제할 수 없는 육체적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나는 이 짐승들이 드러내는 욕정의 은밀한 작용, 본능의 충동, 신경 발작에 이어 느닷없이 일어나는 정신적 혼란 같은 것을 하나하나 따라가고자 했다. 나의 두 주인공들에게 사랑은 욕구의 충족이다. 살인은 그들이 저지른 간통의 결과이며, 그들은 마치 늑대가 양을 죽이듯 살인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후회는 단순한 기질적 이상 현상이자 생물학적 혼란 상태, 즉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체계의 반란이라 명명할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전히 부재한다. 나는 그것이 내가 의도한 점이라는 사실을 시인한다.” 『테레즈 라캥』 작가 서문 중에서
에밀 졸라는 일종의 유머와 위트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것은 슬픈 유머이며 위트이다. <테레즈 라캥>을 통해 에밀 졸라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자유의지 없이 자신의 신경과 피에 완전히 지배당한 인물, 짐승들이 드러내는 욕정의 은밀한 작용, 본능의 충동, 신경 발달에 이어 느닷없이 일어나는 정신적 혼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신체가 뿜어내는 욕망의 정체와 그 욕망의 운동과 그 욕망의 좌절, 실패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어떤 서사시를 품고 있으나 또한 그것은 하나의 슬픈 콩트이기도 하다. 욕망의 연대기로서의 서사와 욕망의 미시적 흐름으로서의 콩트. 도대체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것은 어떤 인물들의 전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미시 정치에 대한 이야기다.
1.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윤미연역/윌북 여는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소설이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욕망하기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금지되었기에 욕망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가린 눈을 억지로 뜨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때초에 금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욕망이 있었다. 동물에게는 금지가 없다. 금지란 도덕, 법, 질서, 대타자인 아버지, 신의 질서이다. 그 아버지-신은 욕망의 무한 발산을, 그 미치도록 흘러넘치는 욕망의 흐름을 홈 패인 공간- 아버지-신의 질서, 제도, 규범 안으로 흐르도록 해야 한다. 욕망이 그것을 넘어설 때 인간의 문화는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말해야 한다. 태초에 욕망이 있었다. 아담과 하와의 욕망이.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금기를 만들어 낸다. 금기야말로 미친 듯이 생성하는 욕망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여 대타자의 질서에 복속하고자 하는 대타자의 욕망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테레즈와 로랑이, <박쥐>의 상현이 결국 부딪히고 좌절하는 지점은 결국 이 대타자의 욕망 앞에서이다. 테레즈와 로랑은 뱀파이어가 되지 못하고, 상현은 박쥐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죄짓기 전에 벌 받은 존재로 붕괴한다.
2. 다혈질적 남자와 신경질적 여자 - 『테레즈 라캥』에는 아름다운 사랑도, 눈물겨운 순애보도, 교훈적인 도덕도 없다. 신경과 피의 결합. 이곳에는 다혈질적인 남자와 신경질적인 여자가 만나 자신의 욕망을 무한히 발산하는 이야기만 있다. 이곳에 주인공은 신경질적인 여자인 테레즈와 다혈적인 남자인 로랑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이다. 욕망이 어떻게 생성되고 자라며 굴절되고 소진되는지를 보여주는 욕망의 역사를 보여준다. 『테레즈 라캥』에서 욕망이 멈추는 곳은 도덕, 법이라는 금기의 질서 앞이 아니다 이곳에서 금기는 어떤 질서로서의 힘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들의 욕망 앞에 아버지-신의 질서는 무기력하다. 테레즈와 로랑이 자신을 혐오하고 서로에 대해 무기력해지고 무능력해지는 것은 자신들이 발산하는 욕망에 대한 죄의식이 아니라 오직 욕망이 자신을 생성하지 못하고 멈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욕망은 자신을 무한하게 복사하며 자신만의 생성 운동을 전개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 자신의 생존과 확장을 위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멈추게 하고 그것을 소진하게 하고 그것을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욕망에 덧씌어진 죄의식-양심이 아니라 욕망의 그 자체의 힘의 무능력 때문이다.
3. 카미유, 혹은 홈 패인 공간 – 어쩌면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로랑이 카미유를 살해하는 순간 카미유가 로랑의 목을 물어뜯어 남겨 놓은 상처, 죽음 이후에도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그 흡혈의 이미지에 대한 매혹에서 시작된 영화가 아닐까? “테레즈는 부풀어 오르고 뻣뻣해진 로랑의 목덜미에서 카미유가 물어뜯은 상철르 입술로 더듬어 찾았다. 그리고 흥분한 자신의 입술을 그곳에 갖다 댔다. 너무나 생생한 상처였다. 상처가 아물면 두 사람은 평화롭게 참들 수 있을 터였다. 젊은 여자는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의 불같은 애무로 상처를 태워버리려 했다. 하지만 타오르는 건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입술이었다.(p.260)”카미유는 죽어서도 살아남은 뱀파이어가 아닌가? 살아서 너무나 무서운 오이푸스적 어머니 품에- 오로지 자기를 재생산하는, 유전하는, 계통을 발생하고자 하는 동일자의 욕망이 지배하는 오이디프적 가족- 유폐되었던 카미유는 죽어서 부활한다. 카미유는 로랑과 테레즈의 주변에서 이빨로, 입술로, 무엇보다 시선으로 출몰한다. 카미유의 물어뜯는 이빨이야말로 테레즈와 로랑에게 금지의, 금기의 이빨이다. 그것은 너무나 붉게 채색되어 있다. 그것은 욕망의 이편과 저편을 너무나 선명하게 자르고 홈패이게 한다. ‘피와 신경으로 사랑했던 테레즈는 이제 머리로 사랑하기 시작했다.(p.172)’ 다혈질과 신경증, 피와 신경의 만남, 그 접촉, 전염, 감염을 멈추게 하는 이빨. 그 상처는 죽어서도 자신의 형상을 넘실거리게 한다. 그리고 그 형상은 테레즈와 로랑의 정신의 활동, 피와 신경으로서의 접촉, 감염이 멈출수록 더욱 더 증식하고 그들에게 죽음의 선을 타게 만든다. 우리가 짓는 죄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체적인 것이 아니다. 누구도 죄를 짓지 않는다. 죄짓기 전에 처벌이 먼저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죄짓기 전에 처벌받는 존재인 것이다.
4.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박쥐가 되지 못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상현은 박쥐에 매혹되었으나, 그는 처벌이라는 그 거대한 정신-양심 앞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며, 서성이다 고립된 존재가 아닌가? 박쥐는 한 마리, 혹은 무엇보다 무리이다. 그것은 떼, 패거리이며, 군단이다. 박쥐는 서로에게 매혹되고 팽창, 전파, 점유, 전염된다. 그들은 진화, 유전, 계통의 발생, 계보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둠 속에 거꾸로 매달린 자세로 서로에게 매혹되고 감흥하며 촉발한다.(들뢰즈) 상현은 무리로서의 태주(김옥빈 분)에게 매혹된다. 서로에게 매혹된 그들은 그 어둡고 침울한 오이디푸적 가족, 그 죽음의 밤을 넘어 정오의 밝은 태양 아래에서 이글거린다. 그것은 흡혈의 카니발, 피의 대제전이라고 할만하다. 그리하여 이 영화 곳곳에 흘러넘치는 피의 이미지, 피의 넘침은 욕망의 무한한, 미친 듯한 생성이다. 그 생성은 피와 피의 결연(alliance)으로 시작될 수 있을 뿐이다. 피의 동맹, 피의 연합. 물론 이 피의 동맹은 수많은 장애를, 수많은 결핍을, 수많은 정신을을 견뎌내야 할 것이고 이겨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저항선 앞에서 그들의 동맹은 무참히 깨질 것이고 무너질 것이고 붕괴할 것이다. <박쥐>의 마지막 장면, 상현과 태주의 붕괴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라여사의 시선은 이 저항선의 완강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테레즈와 라캥> 혹은 <박쥐>의 곳곳에서 출몰하는 카미유의 존재야말로 탈주와 도주를 막는 홈 패인 공간으로서의 국가 장치-법, 제도, 윤리, 금지의 선들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니, 아니, 우리는 이미 죄짓기 전에 벌 받은 존재로 저 너무나 강렬한 태양- 그 일자의 눈, 신의 눈-시선, 그 원죄로서의 처벌-앞에 고스란히 노출된 자들로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상현이 태주와 함께 바닷가로 가기 전 자신을 불사의 존재로 숭배하는 집단에서 벌이는 강간의 연극, 그리하여 자신을 단두대 위의 죄수로 몰아가는 장면이야말로 죄짓기 전에 처벌받은 우리의 형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테레즈와 라캥> 혹은 <박쥐>의 곳곳에서 우리에게 처벌을 선고하는 심판자의 시선을 본다. 반신불수가 되어도 끈질기게 죽음은 선고하는 라캥부인의 시선, ‘난공불락의 요새에 자리 잡은 듯 마비환자의 무릎에 앉아 푸른 눈으로 빤히 노려보는’ 고양이 프랑수아의 시선, 죽어서도 끈질기게 출몰하는 카미유의 시선이야말로 욕망의 무한한 생성과 증식을 멈추게 만드는 신의 시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5. <테레즈 라캥> 혹은 <박쥐>는 뱀파이어 되기에 실패한 이야기이다. 테레즈-로랑, 상현-태주는 국가 장치의 끈질긴 저항 앞에서 붕괴하고 무너진다. 아니 어쩌면 국가 장치-신은 한번도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항한 것은 테레즈와 로랑, 상현과 태주 자신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의 어설픈 도덕이, 그들의 종교가 저항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를 단두대 위에 올려 세우고 스스로를 처형하였다. 스스로 처벌하는 자로서의 이 형상이야말로 인류의 지독한 병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테레즈-로랑, 상현-태주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어떤 죄의식도 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죄 지울 수 있을까?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첫댓글 <박쥐>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뿜는 고래의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상현-태주는 저 일자, 신의 작열하는 태양 앞에서 산산히 붕괴되었으나, 저 바다 깊은 심연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를 뿜는 고래에 의해 구원받았는가? 이생에서의 무거운 짐, 너무나 무섭고 자신들을 단두대의 사형수로 몰아가는 저 피로의 신발만을 남겨 두고 그 둘은 저 망망대해의 파도, 포말 속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구원일까? 절망일까? 이 장면에서 라여사의 비웃는 듯한 시선과 구두의 교차는 묘한 울림을 준다. 그러나 더 큰 울림은 그 사이에 배경처럼 깊게 놓여 있는 고래가 내뿜는 선연한 피빛 바다이다. 우리는 저 선연한 피빛 바다 속으로 상현과 태주처럼 고통스럽게 사라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