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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3장 14-16절. 본서를 기록한 목적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시무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속히 가고자 했으나 가지 못하고 있어서 본서를 기록한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am writing these things to you, hoping to come to you before long.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Ταῦτά σοι γράφω
these to you I write
직역하면 ‘(너희에게 속히 가기를 바라면서) 내가 이것들을 너에게 쓴다’는 뜻입니다.
‘내가 쓴다’(γράφω)는 현재형으로서(I write) 현재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ἐλπίζων ἐλθεῖν πρὸς σὲ τάχειον·
hoping to come to you quick
직역하면 ‘너희에게 속히 가기를 바라면서’란 뜻입니다.
‘가기를’(ἐλθεῖν)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come) 확실히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라면서’(ἐλπίζων)는 현재분사로서(hoping) 현재 바라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이것들을 너에게 쓰고 있다’(Ταῦτά σοι γράφω: these to you I write)에서 ‘쓰고 있다’ 것은 현재형이기 때문에, 지금 쓰고 있는 디모데전서를 가리키고, ‘이것들’이라고 복수로 말한 것은 앞부분 뿐만 아니라 뒤에 쓰는 디모데전서 전체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2. 바울 사도는 AD 64년 로마 감옥에서 석방된 후에, 65년에 서바나 전도와 지중해 그레데 섬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을 거쳐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이 에베소교회에 목회자로 디모데 목사를 세워놓고, 빌립보 데살로니가 교회를 거쳐 그리스 반도 남쪽 고린도교회로 갑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에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서 어렵게 목회하고 있는 젊은 디모데 목사에게 이 디모데전서를 써보내고 있습니다.
이때 디모데 목사는 디모데전서 5장 12절에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한 대로, 아직 목회경험이 적은 젊은 목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가서 디모데의 목회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고린도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헬라반도 서북쪽 달마디아 지역에 전도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디모데후서 4:10) 이 디모데전서를 써서 디모데에게 목회 지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후에 바울 사도는 달마디아 지역을 전도하여 교회를 세운 후에, 디도를 그 교회의 목회자로 세우고( 디모데후서 4:10), 다시 로마 감옥에 2차로 갇히게 됩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1차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어 서바나(스페인)와 지중해 그레데 전도와 그레데 교회 설립과 고린도교회 부흥과 달마디아 지역 전도와 교회 설립과 다시 2차 로마 감옥의 여정은 소위 바울의 4차 전도 행입니다.
바울 사도는 2차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를 기록합니다.
3. 바울 사도는 AD 66년에 헬라 반도 북서쪽 달마디아 지역을 전도하고(디모데후서 4:10) 67년에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다시 2차로 로마 감옥에 투옥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 21절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 목사에게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편지합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를 만나보고 이듬해인 68년 4월에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는 바울 사도의 마지막 서신이 되고, 유언처럼 믿음의 아들 디모데 목사에게 목회를 잘하라고 권면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마치 다윗 왕이 아들 솔로몬에게 왕으로서 사명 감당을 잘하면 성공적인 왕이 되리라고 한 것처럼 디모데 목사에게 목회를 잘하라는 유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서신은 후대 목회자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15절.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n case I am delayed, I write so that you will know how one ought to conduct himself in the household of God, which is the church of the living God, the pillar and support of the truth.
만일 내가 지체하면
ἐὰν δὲ βραδύνω,
if however I should delay
직역하면 ‘그러나 만일 내가 지체하면’이란 뜻입니다.
‘지체하면’(βραδύνω)은 현재 가정법 동사로서(I should delay) 현재 지체하고 있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ἵνα εἰδῇς πῶς δεῖ ἐν οἴκῳ Θεοῦ ἀναστρέφεσθαι,
so that you may have known how it behooves in household of God to conduct oneself
직역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는 뜻입니다.
‘행하는 것이’(ἀναστρέφεσθαι)는 현재 부정사형이고(to conduct oneself), ‘마땅한지’(δεῖ)는 현재형으로서(it behooves) 둘을 합하여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지’란 뜻입니다.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εἰδῇς)는 완료 가정법으로서(you may have known) 이미 아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ἥτις ἐστὶν ἐκκλησία Θεοῦ ζῶντος,
which is church of God living
‘살아계신’(ζῶντος)은 현재분사로서(living) 현재 살아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앞의 동사(ἐστὶν)는 현재형으로서(is)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στῦλος καὶ ἑδραίω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
pillar and base of the truth
1.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한 것은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집’이란 제사드리는 성전 건물을 가리켰으나 신약에서는 건물보다는 가족(household)을 가리키고,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가정으로 상징된 조직으로서, 하나님은 아버지요(로마서 1:7), 남편은 예수님이요(에베소서 5:24), 신자들은 형제들이고(요한일서 4:21),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디모데전서 3:15), 장차 천국은 아버지의 집(요한복음 14:2)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한 것은 목회자와 장로 집사 등 지도자들이 교회를 행복한 가정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송길원 목사는 “교회를 가정처럼, 가정을 교회처럼”이라는 표어를 쓰기도 했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란 표현은 교회를 건물로 비유했을 때, ‘진리’가 그 기둥이 되고 터가 된다는 뜻입니다.
‘터’는 집의 기초이고, ‘기둥’은 집을 버티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순전히 ‘진리’ 안에서 성립한다는 뜻입니다.
즉 진리가 무너지면, 교회로 모인 성도들의 모임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16-18)
그러므로 진리 없이는 교회가 성립될 수 없고, 진리는 교회 안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성령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성령님이 떠나 가시면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5절에는 예수님이 첫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에서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는데, 진리를 버리고 성령님이 떠나가시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리키며 인격적으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17).
그러므로 장로교회 정치처럼 교회가 회중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교회를 운영해야 하지만,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고, 기도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2. ‘교회’(ἐκκλησία)란 단어는 ‘어디에서’(ἐκ:from) ‘불러내다’(καλέω: call)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죄에서, 세상에서, 마귀에게서, 죽음과 저주에서 불러낸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요한복음 1:12), 하나님의 권속이 됩니다(에베소서 2:19).
교회가 가정으로 묘사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진리의 말씀을 먹고 사는 ‘밥상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과 성령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기 때문에, 칼빈은 교회를 어머니라고도 표현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14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젖과 밥과 단단한 음식으로 묘사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63, 사도행전 5:30)
실제로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을 나누는 식탁 교제가 중요한데, 이 식탁 교제는 설교 시간이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교회에서 점심을 나누는 식탁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 모델을 구역예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진리되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가장인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3.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디모데전서가 목회서신이라는 것이고, 오늘날 목회자들도 이 목회서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알고, 올바로 목회를 하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집(household)이라는 것과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과 장로의 선출은 3장 1-7절( 교회 헌법 5장 3절)과 집사의 선출은 3장 8-12절( 교회 헌법 6장 1조)에 말씀한 대로 하라는 것 등입니다.
4.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란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교회라는 큰 가정의 주인이시라는 것이고, 성도들은 목사나 장로나 집사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것과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잘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출장 가거나 입원하면, 직원들 통솔이 어렵듯이, 교회에서는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장하심을 받으며 살아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총회 석상에서 성찬식을 뒤집어 엎어버렸는데, 그 뒤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의 목사와 장로님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두려워했습니다.
광주 동명교회에서 건축을 하려고 하는데, 세탁소 사장이 집을 팔지 않고 방해하다가 급성 간암에 걸리자, 하나님의 손길임을 깨닫고 얼른 집을 팔았습니다.
전남 화순군 능주의 한 교회에서 고약한 장로가 교역자들을 괴롭히다가 박*원 목사를 쫓아내려 하니, 박 목사가 기도하자 그 장로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불신자들도 그 고약한 장로와 교통사고를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3천 명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다윗과 아비새가 비밀리에 침투하여 아비새가 당장 사울왕을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이 “하나님께 맡기고 가만두어라, 저가 혹 죽을 날이 오든지 혹 전장에서 죽으리라”고 했는데(사무엘상 26:10), 과연 사울 왕은 블레셋 사람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민수기 16장 1-2절에서는 고라당이 모세를 거슬렸으나, 땅이 갈라져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10장 30-31절에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인이 되셔서 그 자녀들인 성도들을 보살피십니다.
5.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말씀은 교회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회사는 돈의 터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공장은 기술이라는 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술집은 향락이라는 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식당은 음식이라는 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식당에 음식이 없으면 소용이 없듯이, 교회는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찬양도 중요하고, 봉사도 중요하고, 친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12절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도, 불과 지진과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 세미한 음성 가운데 주님이 임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변형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어도, 기이한 형상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y common confession,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 He who was revealed in the flesh, Was vindicated in the Spirit, Seen by angels, Proclaimed among the nations, Believed on in the world, Taken up in glory.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καὶ ὁμολογουμένως, μέγα ἐστὶν τὸ τῆς εὐσεβείας μυστήριον·
and admittedly, great is that of the godliness mystery
직역하면 ‘그리고 인정하건데, 경건의 비밀이 크도다’란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ὁμολογουμένως)는 의역이고, 직역하면 ‘인정하건데’(admittedly)란 뜻입니다.
‘경건의 비밀이 크도다’에서 동사(ἐστὶν)는 현재형입니다(is).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Ὃς ἐφανερώθη ἐν σαρκί,
who was revealed in flesh
‘나타나신 바 되시고’(ἐφανερώ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revealed) 틀림없이 나타나신 바 된 역사적인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ἐδικαιώθη ἐν πνεύματι,
was justified in Spirit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ἐδικαιώθη)도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justified) 틀림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역사적인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ὤφθη ἀγγέλοις,
was seen to angels
‘보이시고’(ὤφθη)도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seen) 천사들에게 보이신 역사적인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ἐκηρύχθη ἐν ἔθνεσιν,
was proclaimed among nations
‘전파되시고’(ἐκηρύχθη)도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proclaimed) 틀림없이 전파되신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ἐπιστεύθη ἐν κόσμῳ,
was believed on in world
‘믿은 바 되시고’(ἐπιστεύθη)도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believed on) 확실하게 믿은 바 되신 역사적인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ἀνελήμφθη ἐν δόξῃ.
was taken up in glory
‘올려지셨느니라’(ἀνελήμφθη)도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taken up) 틀림없이 올려지신 역사적인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경건의 비밀이여’에서 ‘경건’이란 ‘신앙’과 동의어이며, ‘비밀’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칭 대명사 ‘그는’(Ὃς: who)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고’에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은 성육신(incarnation)을 가리키고, 나타나시기 전에는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으로 계셨다는 뜻입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 육신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4).
‘영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셨다’는 표현은 원래 예수님은 성육신 하시기 전부터 죄가 없으시고 의로우신 분이였으나, 성육신 하신 후에 이 땅에서 늘 성령 충만하시므로, 육신적인 죄나 세상 허물이 침투할 여지가 없으신 분이셨음을 가리킵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 때(누가복음 2장)나 시험받으실 때(마태복음 4장)나 기도하실 때(누가복음 22:43-44)나 부활시에도(마태복음 28장) 천사들이 나타나 보인 것을 가리킵니다.
‘만국에서 전파되시고’는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예수님이 전도하신 것 뿐만 아니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이방나라에도 전파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음이라’는 예수님의 승천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모든 성도의 예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활동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교회의 주인 되심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도님들을 돌봐주시고,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