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화는 폭망과 같은 길이다.
3416 한건희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만 세우고 실행하지 않는다. '나중에 날 잡아서 한 번에 하자.', '아직 시간 많으니까 오늘은 쉬자.'와 같이 합리화만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런 합리화를 통해 계획을 한 번이라도 미루게 되면 시간이 나에게 벌이라도 주는 걸까. 시간은 나도 모르게 시험 코앞까지 도착해 있다. 그런 식으로 시험을 말아먹고 후회를 하며 다음 시험 때부턴 미루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고 텅 빈 다짐을 한다. 속이 텅 빈 다짐이라서 그런 걸까 며칠만 지나도 금세 잊어버리고 게임을 하는 내 모습, 피곤하다는 핑계로 잠이나 자는 내 모습이 정말로 실없다고 느껴진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던 나는 학업 스트레스라는 거짓된 가면으로 가족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한다. 노력도 안 하면서 투정만 부리는 나를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합리화라는 변명으로 내가 책임지지 못해 생긴 결과를 날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가장 고마운 은인에게 탓하는 걸까. 이 글을 쓰면서 숨기고 있던 나의 잘못이 드러나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1학년 처음 시험 때는 다음 기말고사라는 거짓된 도피처로, 1학년 마지막 시험 때는 2학년 시험이라는 도피처로 항상 도망만 다니면서 위안을 느꼈던 나는 더 이상 위안을 느낄만한 도피처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능이라는 시험은 내가 도피처라고 합리화하기엔 너무나도 벽이 높다. 계속해서 미뤄왔던 것들이 뭉친 결과랄까.
내 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공부뿐만 아니라 내 생활 자체에서도 항상 합리화를 한다. 평소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나는 그만큼 보고 싶은 작품들도 많기에 리스트를 만들어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 계획이 최소한으로도 이루어졌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작품을 다 봄으로써 내가 여태 쉬지 않고 달려와 다 읽어냈다는 성취감을 단 한 번도 만족스럽게 느꼈던 적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취미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거 보면 정말 내가 얼마나 게으른 놈인지 새삼 깨닫게 해 준다. 그래도 취미에서 만큼은 시간이 제약이 없기에 꾸역꾸역 목표를 늦춰 달성하기는 한다. 하지만 목표 달성이 늦어짐으로써 다른 계획들도 함께 늦춰져 실행하지 못한다. 시험기간 전에 미리 봤어야 할 작품들을 미루고 미루다 시험기간 때 보고 있다. 우선순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척 전에 세웠던 계획을 이루려는 핑계이기에 이것도 합리화 중 하나이다. 이런 일이 있음으로 느낀 반복되는 후회 속에서 제대로 된 깨달음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는 게 한탄스럽다. 취미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난 친구들과 맺은 약속을 어기며 합리화를 통해 거짓된 성찰을 해왔다. 모두 시간을 내고 사비를 들여 결성된 파티에서도 나 혼자 나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하며 약속을 파토를 냈었다. 난 한 평생을 합리화만 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도망만 치고 있는 거 같다. 앞으로 직면해야할 벽들은 훨씬 더 크고 넘기 힘든데 벌써부터 항상 도망만 치고 다니니 걱정하고 고민하면서도 생각만 할 뿐이지 그걸 직접 실행해본적은 없다.
합리화는 공부와 같은 특정 분야에서만 독이 되는 게 아니라 내 삶 자체를 나태하고 게으른 방향으로 안내한다. 과거로 돌아가 합리화만 하고 있던 나 자신을 때려 패 주고 싶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거에 얽매여 전진하지 못할 바에 지금부터 내 삶을 계획적이고 순서 있게 살아가고자 한다. 늦었어도 쉬지 않고 꾸준히 달려가면 현재 내 삶보다 확실히 더 좋아진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공부나 미리 세웠던 취미 관련 계획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맺은 약속들을 자율적으로 행하는 의지가 아니라 의무를 갖고 앞으로의 삶을 더 계획적이면서 순서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더 이상 도망갈 길은 없다. 죄를 씻어낼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일부터가 아닌 지금 이 순간부터 삶을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게끔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반드시 행할 것이다. 설령 그 계획으로 인해 얻은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삶보다 좋을 것이다. 인생을 더 의미 있게 보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