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안의 블루
지난 주말은 일 때문에 쉬지 못했다. 게다가 어제, 오늘은 윗분들이 해외 출장을 가면서 회사가 평일과는 달리 한가해졌다. 그런데 나는 무기력하다. 너무 오랫동안 스스로를 '착취'해왔던 관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직장인은 바쁜 게 정상이고 바빠야 활력이 돋는다. 일각에서는 '존재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단골로 방문하는 카페에서 진한 커피로 긴급 '수혈'을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냥 몸이 알아서 못 쉰 시간을 뺏어오려고 하는 것만 같다. 에라, 책이나 읽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도의 우울감이나 무기력을 느낄 때 책에 비견할만한 친구도 없다. 나는 우울하면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쓴다. 나의 일기장은 블로그이다. 사적인 글은 '비공개'로 저장하니 나만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블로그를 쓰는 건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
나는 말수도 적지만 채팅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그냥 수다 떨기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흥미를 느끼지 않은 한 입을 다물고 산다. 시끄러운 세상에 나라도 말을 줄이자, 여서가 아닐 원래부터 눌변이고 말주변이 없으니 말을 더 줄이게 되었다. 게다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에 대해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말이 문장이 되어야 한다는 자체 검열의 딜레마에 빠지다보니 말을 더 안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심심할 때에는 지인의 블로그를 방문해 살며시 근황을 알아보거나 최근에 올려놓은 글들을 '눈팅'하고는 슬며시 도망쳐나온다. 물론 댓글을 남기거나 공감을 누를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자제해왔다. 블로그 친구 중에는 여러 번 수필 대상을 수상한 작가 한 분이 계시는데 그녀는 공황장애 등으로 문단에서 활동이 뜸하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녀의 블로그를 방문하곤 한다. 어제는 회사도 한가하고 대놓고 독서를 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녀의 블로그를 방문했다. 혹시 최근에 쓴 글이 있나 싶어서. 아니나 다를까 산뜻한 작품이 블루 배경의 사진과 함께 올라와 있었다. 작품에 대한 느낌은 물론 각자의 입맛에 따라 다들 수 있겠지만, 난 그녀의 글을 좋아한다. 그녀의 글은 약간 씁쓸한 맛이 나면서도 상큼한 겨자나 무싹 같은 맛이 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문학에 대해, 문학인이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문학이란, 우선 예술이어야 한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글이든 우선 예술로서 인정받아야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에도 정의되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력 및 그 작품"이다. 창조력에 의해 아름다워진 작품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좋은 수필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녀의 글에 몹시도 끌리는 이유는, 독특한 문체의 역할도 있지만 그녀의 글에는 늘 영감이 번뜩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술과 음악에 대해 박식하고 예술작품을 보는 탁월한 눈과 감수성이 있다. 그 감수성이 그녀의 펜 끝에서 피어나면 명작 영화나 미술 작품을 보는 듯한 몽환을 선사한다. 그러나 두 번 이상은 읽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혹시라도 나의 무의식이 그녀의 텍스트를 흉내낼까 봐서다.
그녀의 글은 몽환이 버무러져 있어 사뭇 시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서정과 서사를 초월한 어느 지점에서 시적인 텍스트가 흘러간다. 탁한 듯 맑고 내밀하여 호기심을 자극하며 발칙하면서도 우아한 은유가 담겨 있다. 세련된 표현에 풍부한 어휘력에 할애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 블루로 이끄는 그의 글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쉽게 알고 덤비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줄 수도 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그녀의 오빠처럼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오리지널 창작이라는 이런 것이다. 똑같은 일상을 가져와도 신선하다. 룰을 파괴하는 일탈이나 발칙함도 통쾌하다. 그녀가 자주 쓰는 '창졸간'이라는 낱말은 유독 그녀의 글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그녀는 창졸간 비애를 휘감아다 소낙비처럼 쏟아붓는다. 그럼에도 그녀의 글은 묘한 치유력이 있다. 말수 적은 아류의 사람이 '수다'를 떨게 만든다. 목적이 없어야 예술이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녀의 블루에 나는 창졸간 포로가 되고 만다.
우울이 나쁜 것인가? 어떤 작가는 우울은 매력적인 성격의 일부분이라고 했다. 우울한 사람이 자신의 기질을 인지하고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살 때, 우울한 성격이 매력으로 다가온다는 의미인 듯하다. 그녀의 글이 매력적인 것은 그녀가 앓고 있는 공황장애, 또는 현재도 앓고 있는 우울증 때문일 수도 있다--물론 나는 그녀가 쾌유하여 젊은 시절의 왕성한 글쓰기로 복귀하기를 기대한다--. 그녀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은 일그러진 사진들은 마치 그녀의 상태를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사실 많은 예술가드이 우울증을 앓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며, 생명붙이들은 지난한 생존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우울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다. 우울증을 앓았던 대표적 인물이 반 고흐이다. 헤밍웨이, 이상, 전혜린 등은 천재적 작가들 대부분이 블루 계열이다.
매일 웃고 있다 하여 행복한 것도 아니요, 매일 울고 있다 하여 불행한 것도 아니다. 물론 매일 웃고, 매일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다. 결핍과 우울은 예술가의 우물과도 같다. 예술가는 결핍과 우울을 마중물 삼아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고통, 분노, 연민, 비정(悲情)을 길어 올리고 문학이나 예술로 승화시켜 다시 시름 많은 인간들을 치유한다. 다소 안쓰럽지만 나는 그녀의 작품을 읽으면 그녀의 통증 부위를 단박에 진단할 수 있다. 그녀는 지금도 앓고 있다. 스스로 '텅 빈 창고'여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나, 나는 안타까워 이런 글을 썼다. 독은 독으로, 우울은 우울로 치유한다. 나는 그녀의 글들이 작품집으로 탄생할 그날을 기다린다.
아무리 화려한 패션도, 아무리 뛰어난 글재주도 묵혀두면 늙는다. 예쁜 옷도 늙고, 날카로운 사고력도 녹슨다. 나는 그녀에게 '텅 빈 창고'여서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했다. 글을 쓰지 않더라도 자신이 문학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기를. 아니 문학을 통해 치유되기를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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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김채영의 수필집 『벽 속의 나비』(문학과 사람)가 탄생했다. 늦었지만 작가님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 글은 절차탁마를 거친 그녀의 수필집이 세상에 나오기 3년 전, 그녀의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읽고 쓴 감상문이다. <파랑, 늑대의 시간>은 『벽 속의 나비』 "색을 입히다"파트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