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이 진심으로
글 淑川 강동구 수필가
군 복무시절의 빛바랜 희미한 기억을 들추어 본다.
우스갯 소리로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은 남자들의 군대 생활이야기와 축구 이야기라고 한다. 남자들에게는 군대생활 3년이 사회생활 30년보다 이야깃거리가 더 많을 것 같다.
피 끓는 젊은 시절 군 복무를 위하여 처음으로 집과 부모를 떠나 전혀 생소한 곳에서 고된 훈련을 받으며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하니 좌충우돌하는 이야깃거리가 돼지 저금통에 동전 쌓이듯 차곡차곡 쌓여 간다.
육군 훈련소에서 6주간의 기본 군사훈련을 마치고 모두가 선망하는 카투샤에 선발되어 카튜사 교육대에서 3주간 교육을 마치고 미 8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윤 병장이 속한 본부 중대에 진입하면서 윤 병장과 만남이 시작되었다.
윤 병장은 군에 오기 전 일류대학 영문과에 재학중 입대를 하였다. 그의 뛰어난 영어 실ㄹ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그는 요즘 말로
재능기부 형식으로 일과 후에 카투사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관으로 활약하였기에 그의 위상은 선임병을 넘어 우상처럼 여겨졌다.
휴일 아침 미군들과 함께하는 사병 식당에서 전입 동기들과 아침식사하던 중 윤병장이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옆을 지나가니 동기들이 벌떡 일어나 윤 병장에게 거수 경례를 붙인다. 나는 순간적으로 상황 파악이 안되어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아무리 선임병이라도 눈인사나 목례 정도는 모르지만, 식사 중에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은 아닌 것 같기에 순간 망설이다가 그만 경례를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와 동기들은 선임병으로부터 거의 세뇌가 될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 너희들은 이 부대에서 제일 졸병이니 선임들에게 경례를 잘해야 한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강조한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라도 눈앞에 뭐가 어른거리면 경례를 붙이라고 귀에 못박히도록 교육을 받은지라 동기들이 무의식 중에 벌떡 일어난 것 같다.
윤 병장은 엉거주춤하는 나를 쳐다보더니 " 너 오늘 저녁 내 방으로 와"(당시 미군 부대는 병장이 되면 간부 대우를 하기에 2인 1실의 방을 사용하였다)하고 횡 가버렸다.
내 행동이 윤병장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 말단 졸병 이등병이 하늘 같은 선임병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다 그날 저녁 그에게 가지 못하고, 이틀 후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윤병장의 방을 노크하니 예상한 대로 안색이 편치 않아 보인다.
"너 내가 오라고 할 때 왜 바로 안왔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노한 표정이 역력한 모습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기에 더욱 기가 죽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위기를 모면하고자 의도하지 않은 거짓말이 떠올랐다.
"사실은 제가 윤 병장님을 선임병으로서가 아닌 선생님으로 존경해 왔는데 저를 부르시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이제야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배움이 많이 부족하여 윤병장님을 다른 선임병님들보다 더 어렵게 여겨온지라 선뜻 오려는 마음이 많이 주저했습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윤 병장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서 있지 말고 앉으라고 한다. 윤병장은 나의 거짓말에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나도 강 이병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마음이 쓰여 부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운ㅅ는 얼굴에 침못뱉는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기왕에 이렇게 된 것 그가 최고의 무기로 삼는 그의 자존심엔 영어 실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윤 병장님 제가 무좀이 있어 병원에 가야 하는데 영어를 몰라 병원을 목가고 있습니다. 윤 병장님이 동행해 주시면 안될까요?"
" 그래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아! 군대 생활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 그 후 윤 병장은 나으 적극적인 후원자요 멘토가 되어 주었다.
나도 그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최선을 다하다보니 거짓으로 시작된 윤 병장과 나의 관계는 진심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걱정해 주고 살펴주는 절친 브로멘스(bromance)가 되어 그의 보살핌으로 군 생활이 더욱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 지 알 수가 없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도 있다.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고 다시 안 먹는다고 우물에 침뱉지 말라는 옛말이 있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기에 진심으로 다가서면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듯이 선을 베풀면 반드시 선한 열매가 열린다.
성경 말씀이 떠오른다. " 선을 베풀고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되면 거두리라" 윤 병장님! 지금 어느 하늘아래에서 무얼 하시고 사시는지 모르지만 정말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거짓으로 사직된 우리의 관계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부디 건강하게 행복한 노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종합문예지 한국문인 2024. 8.9월호182p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