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카페
진한 연꽃향이 코끝에 와닿는 듯하다. 힘들게 올라온 보람이 있다. 동장대 성곽을 조금 비켜선 곳에 천도복숭아와 자두가 발갛게 익어가고 있다. 무인 찻집을 알리는 간판도 보인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의 왕래도 없다.
산비탈로 난 조붓한 길을 5분여 따라가니 청정수가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보였다. 목마른 사람들이 쉬 마실 수 있게 플라스틱 파이프 시설까지 해놓았다. 일명 ‘다랑이 옹달샘’, 뼛속까지 시원하게 느껴진다. 먹다 남은 물을 모두 버리고 물병을 가득 채웠다.
송림이 우거져 햇빛도 들지 않는다.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라면 그까짓 세 시간쯤 걷는 것은 그리 문제 될 일도 아니다. 인적도 드물고 연못에 붉은 연꽃이 두둥실 떠 어서 오라는 듯 반기니 그야말로 천상의 화원이다.
누가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등산이라고 대답했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조금 걸으면 숨이 차고 힘이 든다. 그렇다고 달리 노는 재주도 없으니 시간이 나면 걷는 게 일이다. 하지만 높은 산이나 먼 곳 등은 쉬 걸음 하지 않는다. 이제 그만큼 세월의 켜가 쌓였다는 의미일 것 같아 억지가 아닌 순리로 받아들인다.
집에서 어정거리다 아까운 시간 다 보내고, 아니 그보다도 올여름은 너무 더워서 산에도 다니지 못했다. 아침 해뜨기 전 시원한 시간에 동네 주변만 산책하다 보니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서부터 청주의 자랑인 천년 고성(古城) 산성이 있는 곳까지는 10km 조금 넘는 거리이고 이 산성의 축성에 대해서는 궁예가 쌓았다는 설도 있고, 그 외 다른 설도 있지만, 도심 가까이 그런 고성이 있다는 게 우리 소시민에겐 무척 행복한 일이다. 걸어서도 2시간 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어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걸어서 올라갔다가 되짚어 내려오곤 했지만, 이제는 그곳까지 걸어서 올라가면 거의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오곤 한다. 오늘도 땀이 비 오듯 흐른다. 혹여 탈수 증세나 온열 질환 같은 것은 오지 않을까 염려하며 가지고 간 물을 자주 마시고 봄이나 가을에 걷던 습관은 저만치 돌려세우고 쉬엄쉬엄 걸었다.
어느 날 걸어서 산성에 도착했을 때 목이 말랐었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이 ‘무인 카페’를 발견했다. 말이 카페이지 농막 하우스에 비닐 덮개로 하늘을 가리고 탁자 몇 개 놓은 곳이었다. 농막 가장자리에는 개복숭아 엑기스통이 즐비하게 놓여있고 그 효험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흔히 카페 하면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선남선녀들이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는 곳쯤으로 생각하지만, 이곳 산성 ‘연꽃 피는 다랑이’ 카페는 아름다운 음악도 선남선녀도 아닌 울긋불긋한 원색의 등산 재킷을 걸친 남자 서넛이 난로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것도 세월의 풍상을 몸으로 느끼고 물리친 흔적이 뚜렷한 사람들로 보였다.
촌닭 장에 나온 듯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어서 오세요.” “무엇을 드시겠어요?” 묻는 상냥하고 넉넉한 여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난롯가에 둘러앉아 한담(閑談)을 즐기던 한 사내가 내 모습을 보고서는 “이곳은 무인 카페입니다. 드시고 싶은 것은 타 드시고 저곳에 돈을 넣어주시면 됩니다.”라며 벽 쪽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기부금은 이곳에 넣어주시면 됩니다.”하는 문구가 붙어있는 통이 놓여있었고 봉지 커피, 쌍화차, 그 외 몇 종류가 담긴 통이 놓여있었다.
그렇게 맺은 인연은 이곳 산성에 올라와 목이 마르면 이곳 무인 카페로 발길을 돌리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커피나 율무차 같은 것을 타 먹고 천 원짜리 두 장, 또는 한 장을 넣을 때도 있었지만,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누가 오고 가는지 전혀 그런 것에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카페 주인은 교인이거나 사회사업을 하는 분으로 느껴졌다.
이곳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 와서 차를 마셨을까. 나 같이 산에 홀로 왔다가 목이 말라 차를 마시고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조용한 곳을 찾다가 우연히 이곳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저께까지 쓰다가 둔 글을 떠올리며 이곳에 하염없이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일어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제 일어서야겠다. 뻐근하던 다리에 힘이 실린다. 머리도 한껏 맑아진 듯하다.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수필가 박순철
Profile
충북 괴산출생. 월간 『수필문학』 등단(1994년)
한국문협· 충북수필회원.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충북수필문학상. 제30회 수필문학상 수상 외 다수
수필집 『달팽이의 외출』 외 3권
이메일: tlatks102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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