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교터널위에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고...철망 바깥쪽으로 약간의 잡목을 뚫고 올라간다.
▲울타리 끝 봉우리에 올라 반가운 시그널을 만나 촤측으로 올라간다.
▲금암마을 휴먼시아 아파트에서 올라오는 잘 정비되어 있는 산책로를 만나고...산책로 우측의 여계산으로 오른다.
▲여계산(如鷄山:159m): 오산시 금암동·지곶동·세교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의 형세가 닭의 벼슬처럼 생겼다하여 여계산(如鷄山)이라는 이름이 었으며 조선 중기의 무신인 이괄(李适 1587~1624)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군터라는 장소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정상에는 비교적 넓 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다. 경기 남부지역에 있는 오산시의 산 정상에는 그 어디에도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여계산 정상에서 약1분쯤 내려오면 정자와 돌탑. 정자 좌측 애기바위 쪽으로 내려간다.
▲애기바위 갈림길. 정자 좌측 애기바위 쪽으로 내려간다. 우측은 독산성 가는 길이다.
▲"경기도 삼남길" 이정표와 잘 쌓아올린 돌탑도 있고...과천1길부터 평택10길까지 10구간 총 길이 90.1km라고 하는데 언제 걸어볼 기회가 될려는지...
▲애기바위 유래 안내판: 금암동 애기바위: 금암동은 예로부터 물이 많은 동네로 돌에 얽힌 전설이 많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에서 가슴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산꼭대기의 애기바위는 듣는 사람들을 안타 깝게 한다. 금암동의 서북쪽 산꼭대기(여계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칼로 잘 려진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모양새를 갖게 된 다음과 같은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선조 25년 조선은 당파싸움과 동시에 일본의 침략으로 수도 한양을 버리는 지 경에 이르고 말았다. 조선팔도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은 왜구들은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약탈지에 대한 노략질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어느 날 왜군을 이끌고 온 장수가 노략질을 위해 금바위골(금암동)에 들어와 금바위 골의 지세를 보고, 앞 으로 범상치 않을 인물이 태어날 예감에 위협을 느낀 왜장은 부하들을 시켜 금바위골에서 조곶이(지곶동)로 넘어가는 고개에 길을 내어 산의 기 운을 끊어 놓고, 모든 젊은 남자와 아이들까지 몰살시키고 말았다. 한편, 남편을 왜군의 손에 잃은 젊은 아낙이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는 이상하게 양쪽 어깨 죽지 밑에 새의 깃과 같은 작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것을 본 젊은 아낙은 아 기가 커서 백성들의 장수가 될 것이라 믿고 아기의 출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마침 아기의 집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밑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도 아 기가 태어난 것을 알지 못했다. 젊은 아낙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바가지를 옷 속에 넣어 만삭의 배를 만 들고 아기를 뒷산 꼭대기에 있는 큰바위 틈에 몰래 갖다 놓고 매일 밤 몰래 산에 올 라 가 아기에게 젖을 주었다. 마을 안의 남자란 남자는 모두 죽인 왜장은 안심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마을을 빠져나 가다 가 만삭의 몸을 하고 있는 젊은 아낙을 발견했다. 왜장은 배속에 들어있는 아기 가 후환이 될 염려에 젊은 아낙을 잡아와 배를 갈랐다. 그런데 있어야 할 아기는 나 오지 않고 바가지 만 깨져 나온 것이다. 아기를 피신시킨 것을 안 왜장은 몹시 화를 내며 젊은 아낙에게 아기 를 숨긴 곳을 대 라고 고문했다. 그러나 아기 엄마는 끝내 말하지 않고 고문을 못 이겨 숨 을 거두고 말았다. 왜군은 마을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기는 발견할 수 없었다. 아기 엄마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새벽, 마을 뒷산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왜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울음 소리가 나는 곳 엔 큰바위가 있어 바위 주변을 뒤져보았지만 아기를 찾을 수 없었다. 왜장은 직접 큰 톱으 로 바위를 자르기 시작했고 금바위골에서 태어난 아기장수는 왜군의 손에 죽고 말았다. 왜 장의 손에 잘려진 바위를 이때부터 애기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애기바위는 톱으로 잘려진 몸뚱이를 가지고 안타깝게 자리하고 있다
▲애기바위와 정자를 뒤돌아본다.
▲잘 되어 있는 등로를 빙빙돌아 내려간다.
▲가야할 석산을 바라본다. 안개로 인해 시야가
흐리다.
▲석산골재사거리. 임도 따라 올라간다.
▲지맥은 우측이나 좌측으로 약100m지점에 석산삼각점이 있어 잠간 다녀온다.
▲석산(石山:135.2m). 정상석은 없고 삼각점만 있다. 갈림길로 뒤돌아 내려간다.
▲석산정상 4등삼각점(용인452/1987복구)
▲다시 돌아온 석산갈림길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석산정상으로 간다. 우측은 여계산
▲126m봉: 정상에는 쉼터, 운동기구와 정자, 현위치석산정상표지판이 있는데 오산시는 이곳을 석상정상이라 부른다.
▲이정표(은빛개울공원): 궐리사 방향으로 내려가면 오산시 신장동이다. 오산시 신장동은 1899년(광무 3)에는 수원군 문시면·초평면 지역이었고, 1914년 문시면·초평면 외에 어탄면 지역도 일부 포함되었던 매우 복잡한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오산시의 다른 동과 마찬가지로 1989년 궐리 일부와 수청리·금암리·내삼미리·은계리를 통합하여 신장동으로 개편되었다. 행정동인 이 동은 법정동인 수청동·금암동·은계동·내삼미동·궐동(일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금바위·안삼미·건너마을·독골 등이 있다. 법정동인 궐동은 궐리사(闕里祠)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궐동의 범위는 매우 넓어 오산천변의 북쪽을 경계로 하여 남촌동 관할인 대호밭·궁터마을까지 이른다. 궐리가 문헌상에 등장한 것은 1792년(정조 16)이며, 지금도 궐동을 비롯하여 오산시에는 곡부 공(孔)씨가 많이 살고 있어 궐리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산림환경연구소(구 임업시험장), 농촌지도소 등이 있으며, 경부선 철도와 1번 국도가 지난다. 그러나 전형적인 전원도시로 상업지역은 적고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주의* 좌측으로 가지 말고 우측 노적봉2.4km 방향으로
간다.
▲126m봉에서 내려서니 목책이 처져있는 묘지 아래로 오산산업단지가 보이고 그 너머로 가야할 지맥능선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