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감사 선생안의 뒤에 쓰다 題江原道監司先生案後
옛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으면 지나간 세월을 상고하여 그 행적을 알 길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제명기(題名記)를 짓는 이유이다.
강원도는 우리나라의 동쪽에 위치하여 전 왕조 때에는 교주도(交州道)와 강릉도(江陵道)로 나뉘어 있었는데 지금은 합하여 하나의 도가 되었다. 비록 토질이 단단하고 척박하며 백성과 물산이 매우 적기는 하지만 넓은 산천과 빼어난 선경은 우리 동방에서 으뜸이다. 게다가 소송을 제기하는 첩정(牒呈)도 아주 드물다. 그래서 마음대로 유람을 해도 업무가 모여들 걱정이 없기 때문에 조정의 중신들이 모두 이곳에서 관찰사를 지내고 싶어 한다.
내가 외람되이 성상의 권우(眷遇)를 입어 선정의 뜻을 품고 이곳 원주(原州)에 도착하여 영중(營中)에 있는 선생안(先生案)을 가져다 열람해 보니 지원(至元)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간에 걸쳐 안렴사(按廉使)와 관찰사가 수백 명이었는데 우리 집안 출신이 가장 많았다. 홍무(洪武) 17년(1384, 고려 우왕10) 갑자일에 증조 휘(諱) 석연(石珚)이 선공감 부령으로 있다가 교주도에 안렴사로 왔고, 홍무 29년(1396, 태조5) 병자일에 증조의 형님이신 휘 석용(石瑢)이 도평리사사(都評理司使)로 있다가 관찰사로 왔으며, 영락(永樂) 1년 계미(1403, 태종3)에 증조가 다시 관찰사가 되었고, 영락 17년 기해(1419, 세종1)에 조부 휘 엄(揜)이 관찰사가 되었으며, 성화(成化) 7년 신묘(1471, 성종2)에 숙부 휘 순조(順祖)가 관찰사가 되었다. 나까지 모두 5대가 된다. 아아, 성대하도다.
지금 집을 짓는 어떤 사람이 밤낮으로 애써 재물을 모으고 석재를 운반하여 하루아침에 건물을 짓고 단청을 하여 자손에게 남겨 지키게 하는데, 그 자손이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훼손하기까지 한다면 후손에게 덕행을 남겨 주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선조를 계승하는 것도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창녕 성씨의 문벌이 성대한 것은 후인들의 안목을 놀라게 하고 영원히 빛을 드리우는 일이 될 것이니, 어찌 지난 일을 상고하여 그 행적을 아는 데서 그쳐서야 되겠는가.
갑진년(1484, 성종15) 3월 상순에 손자 아무개는 삼가 발문을 쓴다.
[주1] 강원도 감사 선생안(江原道監司先生案)의 뒤에 쓰다 : 1484년(성종15), 역대 강원도 관찰사의 명단을 정리한 선생안에 붙인 발문이다. 성현이 1483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기존의 선생안에서 증조 성석연(成石珚), 그 동생인 성석용(成石瑢), 조부 성엄(成揜), 숙부 성순조(成順祖)가 이미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것을 보고 자신의 가문이 번성함을 기리는 의미에서 발문을 쓴 것이다. 현재 《관동지(關東誌)》 권1에 〈방백제명록(方伯題名錄)〉이 있는데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조항에 후임 관찰사로 부임한 창녕 성씨 자손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해 놓은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주2] 제명기(題名記) : 일반적으로 해당 관서(官署)의 벽에 그 관서에 출사(出仕)하였거나 출사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이력 등을 쓰고, 그 관사의 내력이나 관원에게 권계할 내용을 함께 기술하여 걸어 놓는 목판(木板)을 말한다. 여기서는 강원 감사 선생안(江原監司先生案)을 말한다.
[주3] 선정의 뜻을 품고 : 원문은 ‘남비(攬轡)’로, 말고삐를 잡는다는 뜻이다. 난세를 구할 뜻을 품고 부임지로 출발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범방(范滂)이 기주(冀州)로 떠날 즈음 말고삐를 잡고서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을 품었는데,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탐관오리들이 그 풍도를 듣고는 인끈을 풀어놓고 떠나갔던 고사가 전해 온다. 《後漢書 卷97 黨錮列傳 范滂傳》
[주4] 선생안(先生案) : 중앙과 지방 관청에서 전임(前任) 관리를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의 명단을 선생안이라고 한다. 관청별로 선생안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다. 현재 각 읍지에 지방 수령의 선생안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름만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고 재임과 이임, 특기 사항을 적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주5] 지원(至元) : 지원이라는 연호는 역사상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1264년(고려 원종5)은 남송 이종(理宗) 경정(景定) 5년에 해당하여 다른 연호가 있고, 1335년(고려 충숙왕4)에는 원나라가 중원을 장악하여 단일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아마도 이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6] 후손에게 …… 것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의 “의로 일을 바로잡고 예로 마음을 바로잡아 후세에 덕행을 남겨 주소서.〔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라는 구절에 나온다.
題江原道監司先生案後
不錄古人之名。則無以考已往之歲月而知其蹟。此題名記之所以作也。江原道在國之東。前朝。分爲交州,江陵二道。今則合爲一。雖土地磽瘠。民物尠少。而山川謗礴。神區勝跡。甲於東方。加以訟牒罕少。可以縱遊覽而無叢務之虞。朝廷宰執。皆欲觀風於是道。余謬承聖眷。攬轡來到原城。閱營中先生案。自至元以訖于今數百載之間。而按廉觀察者數百人。而吾宗最多。洪武十七年甲子。曾祖諱石珚以繕工副令。按廉交州道。二十九年丙子。曾祖之昆諱石瑢以都評理司使。來爲觀察使。永樂元年癸未。曾祖復爲觀察使。十七年己亥。祖諱揜爲觀察使。成化七年辛卯。叔父諱順祖爲觀察使。逮余凡五代。嗚呼盛哉。今有作室者晝夜拮据。鳩財輦石。一朝堂搆而丹雘之。以遺子孫而守焉。其子孫非惟不能守。又從而毀之則非徒垂裕後昆之爲難。而似續妣祖者尤爲難也。然則我昌寧門閥之盛。可以聳後人之目而垂耀無窮。豈徒考已往而知其跡而已耶。甲辰三月上澣。有孫某。謹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