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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부군 묘표〔先府君墓表〕
선군(先君)의 휘는 이중(履中)이고 자는 시가(時可)이다.
우리 김씨는 본관이 안동(安東)이니,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휘 선평(宣平)이 실로 비조이다.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文正公) 휘 상헌(尙憲)에 이르러 학자들이 존경하여 ‘청음(淸陰) 선생’이라 하였다. 화의(和議)를 배척하다가 심양(瀋陽)의 감옥에 억류되어 전후로 5년 동안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청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돌려보내니 의로운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다. 이분이 바로 선군에게 6대조가 된다.
고조는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휘 수항(壽恒)이니, 단정하고 반듯하며 정직하여 사림(士林)을 이끌었으며 기사년(1689, 숙종15)의 화에 순절하였다. 증조는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휘 창집(昌集)이다. 성상의 계책을 도와 영종(英宗 영조)을 세제(世弟)로 세우려 하다가 간사한 자들의 무함을 받아서 아들과 장손(長孫)까지 화가 미쳐 신임(辛壬)의 옥사에 목숨을 잃으니,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건저사대신(建儲四大臣)’의 영수이다. 조부의 휘는 제겸(濟謙)이니, 승지를 지냈고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부친의 휘는 달행(達行)이니, 학생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재주와 덕행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니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후손이요 감사 휘 집(潗)의 딸이다.
선군은 영종(英宗) 병진년(1736, 영조12) 3월 23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숙부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섬기는 일에 법도를 어기지 않으니, 선생이 다른 조카들보다 더 아껴주었다. 얼마 뒤에는 명성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자자해지니 사람들이 모두 재상감으로 기대하였고, 선군 역시 세상을 경륜해 볼 뜻을 지녔다. 그러나 운수가 불우하여 36세(1771, 영조47)에 비로소 진사가 되었고 음직에서 벼슬을 마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내직으로는 홍릉 참봉(弘陵參奉), 내자시 봉사, 순릉 직장(順陵直長),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 세마(洗馬), 동몽교관, 인의(引儀), 호조와 공조의 좌랑,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 광릉 영(光陵令)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용인 현령(龍仁縣令), 고양 군수(高陽郡守), 평양 서윤(平壤庶尹), 과천 현감(果川縣監), 서흥 부사(瑞興府使)를 지냈다.
계축년(1793, 정조17, 58세) 9월 29일에 서흥의 임소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8세이다. 용인에는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고, 평양에는 거사대(去思臺)가 있다. 아! 슬프다.
선군은 세 살 때 부친을 여의었고, 열두 살 때 모친을 여의어 형인 광주 부군(光州府君)의 집에서 자랐는데, 형과 형수를 섬기며 부모처럼 엄숙히 공경하였고 늙어서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소에 술 마시기를 즐기고 책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술이 얼근해지면 흉금이 더욱 호탕하게 드러나고 글 읽는 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마치 석경(石磬)을 치고 옥경(玉磬)을 울리는 듯하니, 듣는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다.
선을 좋아하고 의리를 중시하였으며 재물을 다스리는 데는 더욱 소탈하여 천금을 해진 신짝처럼 여겼다. 밖으로는 너그럽고 안으로는 곧고 반듯하였으니, 남을 대할 때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두루 좋게 지냈으나 가정에서는 남녀의 구별을 신중히 하고 귀천을 엄히 따지기를 마치 치조(治朝)처럼 엄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초(不肖)는 늦게 본 자식이어서 다치기라도 할세라 특별히 사랑하면서도 작은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엄하게 꾸짖고 벌을 내렸다.
불초가 내각(內閣)의 벼슬을 얻게 되자 선군이 일찍이 종제(從弟)인 송원공(松園公)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너는 내가 대교(待敎)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자, 송원공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선군이 말하기를 “저 아이가 올바른 도리로 성상을 섬긴다면 비록 뜻을 거슬러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길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하여 패망에까지 이른다면 내가 무슨 통곡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항상 불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뜻을 살펴보니 대체로 준칙이 없다. 나는 비록 성취한 바가 없지만 어려서부터 공자孔子를 준칙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위대하도다! 그 말씀이여. 불초가 어찌 감히 잊겠는가. 아! 슬프다.
선군의 원배(元配)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니 목사를 지낸 휘 사적(思迪)의 딸이다. 엄하고 순수하며 자상하고 어질어 선군이 매우 존중하였다. 계축년(1733, 영조9)에 태어나 계사년(1773) 7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계배(繼配)는 함평 이씨(咸平李氏)이니, 진사 휘 형옥(衡玉)의 딸로, 병자년(1756)에 태어나 경술년(1790, 정조14) 5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온화하고 유순하여 부덕(婦德)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전배(前配)의 자녀들을 보고 부인의 소생이 아닌 줄을 몰랐다. 불초가 귀하게 되어 선군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두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신 부인(申夫人)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차남이 불초 조순이다. 딸 셋을 낳았으니, 장녀는 음직으로 도정(都正)을 지낸 이장소(李章紹)에게 출가하였다. 이 부인(李夫人)은 딸 둘을 낳았으니, 차녀는 생원 홍희명(洪羲命)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의 아들 평순(平淳)은 유복자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였고, 딸은 심능극(沈能極)에게 출가하였다.
불초는 아들 여섯을 두었으니, 장남 유근(逌根)은 출계하여 종형(從兄 김용순(金龍淳))의 후사가 되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였고 지금 참판이다. 원근(元根)은 지금 현령이다. 좌근(左根)은 생원이다. 딸 다섯을 두었으니, 삼녀는 남구순(南久淳), 사녀는 이겸재(李謙在), 오녀는 이긍우(李肯愚)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중궁(中宮) 전하는 형제의 순서로 첫 번째이니, 우리 동궁 저하와 두 공주를 낳았다.
이장소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이헌기(李憲琦)는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참판이다. 이헌위(李憲瑋)는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정자(正字)이다. 딸 하나를 두었으니 족제(族弟)인 김운순(金運淳)에게 출가하였다. 홍희명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홍일모(洪一謨)와 홍열모(洪說謨)이고, 딸 셋을 두었는데 장녀는 민달용(閔達鏞)에게 출가하였다. 유근의 딸은 이인기(李寅夔)에게 출가하였다. 그 외 내외의 손자와 증손은 모두 어리다.
처음에 신 부인은 여주 추읍산(趨揖山) 아래 향곡리(香谷里)의 찬성부군(贊成府君 김달행) 묘소의 왼쪽 산등성이 신향(申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고, 이 부인은 찬성부군의 묘소 오른쪽 산기슭에 장사 지냈으며, 선군은 양주(楊州)의 정토(淨土)에 장사 지냈다. 정종(正宗) 을묘년(1795, 정조19) 10월에 불초가 세 분 묘소 가운데 길지를 점쳤는데, 술자(術者)들이 모두 신 부인의 묘소라고 하기에 마침내 신 부인의 묘소에 합봉하였으니, 오른쪽에 선군을 받들고 이 부인은 왼쪽에 모셨다. 아! 슬프다.
아! 선군께서 성대한 덕을 지니고도 세상에 그다지 크게 드러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불초가 어찌 하늘에 대해 유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선군께서 덕을 쌓아 남겨 주신 복으로 불초처럼 재주 없는 자가 영광스럽고 귀하게 되어 인신(人臣)의 최고 자리에까지 오르고 자손이 번성하며, 도신(塗莘)의 휘음(徽音)을 이을 분을 집안에서 길러 내어 성군(聖君)의 후손을 낳아 국가 만년(萬年)의 기틀을 열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돌아가신 선군을 위해 보답해 주신 것일 것이리라. 그러니 불초는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다. 아! 슬프다.
불초는 글재주가 없지만, 또 감히 과장된 말로 우리 선군의 가르침을 실추시키지 않았다.
[주1] 선부군 묘표 : 부친 김이중(金履中, 1736~1793)에 대한 묘표이다. 이 묘표의 뒷부분에 나오는 자손록에 ‘유근은 지금 참판이다.’, ‘원근은 지금 현령이다.’, ‘좌근은 지금 생원이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풍고의 나이 55세 때인 1819년(순조19)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김유근은 1819년 1월에 병조 참판을 지냈고, 김원근은 1818년 11월부터 1820년 1월까지 의성 현령(義城縣令)을 지냈다. 또 김좌근은 18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承政院日記 純祖 18年 11月 3日, 19年 1月 17日》 《外案考 卷3 慶尙道 義城縣令》
[주2] 기사년의 화 :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남인(南人)이 재집권하자, 김수항은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주3] 아들과 …… 잃으니 : 아들은 김제겸(金濟謙)이고, 장손은 김성행(金省行)이다. 신임의 옥사는 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에 걸쳐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말한다. 경종 때 왕위 계승과 대리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벌어졌던 사화로,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한 노론사대신, 즉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頥命)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가 처벌을 받아 희생되었다.
[주4] 거사대(去思臺) : 감사나 군수 등 지방 장관이 떠난 뒤에 그 지방 백성들이 치적을 사모하여 세운 누각이나 비석을 말한다.
[주5] 광주 부군(光州府君) : 김이기(金履基)를 말하는데, 1787년(정조11)에 광주 목사를 지냈다. 《楓皐集 卷12 伯父牧使府君行狀》
[주6] 치조(治朝) : 천자나 왕이 두는 삼조(三朝) 중 하나인데, 노문(路門) 밖에 있으며 매일 조회를 보는 곳이다. 여기서는 조정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주7] 불초가 …… 되자 : 뒤에 이어지는 문맥으로 보아 풍고가 1788년(정조12)에 규장각 대교가 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8] 송원공(松園公) : 김이도(金履度, 1750~1813)로, 자는 계근(季謹), 호는 송원이다. 풍고의 종숙부이다. 1800년(정조2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순조가 즉위한 뒤 시파(時派)로 몰려 영암(靈巖)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후 경기도 관찰사, 병조와 공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주9] 중궁(中宮) …… 낳았다 : 중궁 전하는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동궁 저하는 효명세자(孝明世子)를 가리키며, 두 공주는 명온공주(明溫公主)와 복온공주(福溫公主)이다.
[주10] 도신(塗莘)의 …… 내어 : 풍고의 딸이 순원왕후(純元王后)에 오른 것을 말한다. 도신은 황후나 왕후를 가리키는 말로, 우(禹) 임금이 도산(塗山)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문왕(文王)이 신국(莘國)의 태사(太姒)를 후비로 삼은 데서 유래하였다. 휘음(徽音)은 아름다운 명성을 말하는데, 《시경》 〈사재(思齊)〉에 “태사가 그 아름다운 명성 이으시니, 아들이 백 명이나 되도다.[太姒嗣徽音, 則百斯男.]”라는 구절이 보인다.
先府君墓表
先君諱履中。字時可。我金籍安東。高麗太師諱宣平。寔爲鼻祖。至左議政文正公諱尙憲。學者尊之曰淸陰先生。斥和拘瀋獄。前後凡五年不屈。淸人禮而歸之。義聲聞天下。於先君爲六世祖。高祖領議政文忠公諱壽恒。端方正直。領袖士林。殉己巳之禍。曾祖領議政忠獻公諱昌集。贊策建英宗爲世弟。爲羣壬所誣。及子若長孫。死辛壬之獄。卽世所稱建儲四大臣之首。祖諱濟謙。承旨贈左贊成。考諱達行。學生贈左贊成。有才德早世。妣韓山李氏。牧隱先生之後。監司諱潗之女也。英宗丙辰三月二十三日。先君以降。幼而穎悟。受學于叔父渼湖先生。服事無違度。先生亟愛之。視他子姪有加。旣而聲名藉士友間。人皆以公輔期之。先君亦自負當世之志。然奇不利。三十六。始成進士。終於蔭途。嗚呼痛哉。內則弘陵參奉,內資奉事,順陵直長,掌苑奉事,洗馬,童蒙敎官,引儀,戶工兩曹佐郞,濟用判官,司䆃僉正,光陵令。外則龍仁縣令,高陽郡守,平壤庶尹,果川縣監,瑞興府使。癸丑九月二十九日。歿于瑞興任所。享年五十八。龍有善政之碑。平有去思之臺。嗚呼痛哉。三歲而孤。十二歲而失恃。育于兄光州府君。事兄及嫂。嚴敬如父母。至老不少衰。平居喜飮而好書。飮酣則襟懷愈磊落著見。書聲淸越瀏亮。如擊石鳴球。聞者不厭。樂善重義。尤疎於財。千金視弊屩也。外坦蕩而內直方。與人淸濁無所失。而閨門之內。謹男女。嚴貴賤。斬斬如治朝。然不肖晩生。奇愛若不保。然小有過。譴罰必峻。及不肖忝內閣。嘗從容語從弟松園公曰。爾謂我愛待敎乎。公對曰。然。不然歟。曰。渠以直道事上。雖忤旨而死。吾猶爲榮。反是而及於敗。我何哭焉。常詔不肖曰。察汝志。大抵無準。吾雖無成。自幼未嘗不以孔子爲期也。大哉言乎。不肖何敢忘。嗚呼痛哉。元配平山申氏。牧使諱思迪之女。莊粹祥仁。先君甚敬重焉。生癸丑。癸巳七月十五日卒。繼配咸平李氏。進士諱衡玉之女。丙子生。卒於庚戌五月二十三日。和順有婦德。人之視前配子女者。不知其非己出也。不肖貴贈先君領議政。兩夫人貞敬夫人。申夫人二男。次不肖祖淳。三女長李章紹蔭都正。李夫人二女。次洪羲命生員。側室男平淳遺腹也。武科及第。女沈能極。不肖六男。長逌根出爲從兄后。文科今參判。元根今縣令。左根生員。五女三南久淳,四李謙在,五李肯愚。而今中宮殿下。於序居第一。誕我東宮邸下及二公主。章紹二男。憲琦。文科今參判。憲瑋。文科今正字。一女適族弟運淳。羲命三男。一謨,說謨。三女長適閔達鏞。逌根女李寅夔。其餘內外孫曾。並幼。初申夫人葬于驪州趨揖山下香谷里贊成府君墓左岡向申之原。李夫人葬于府君之右麓。先君葬于楊州之凈土。正宗乙卯十月。不肖筮吉于三兆。術者皆言申夫人兆。遂合封于申夫人兆。奉先君於右。李夫人於左。嗚呼痛哉。嗚呼以先君之盛德。不大顯於世。豈非命歟。不肖烏能無憾於天。以先君之積慶。不材如不肖。榮貴極人臣。子姓蕃衍。而塗莘之徽。毓于其門。克誕聖嗣。啓國家萬年之基。此天之所以報先君於身後歟。不肖其庶無憾歟。嗚呼痛哉。不肖不文又不敢爲溢辭。以墜我先君之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