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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유곡(栗里遺曲)
조선시대의 문인 16세조 문정공(文貞公) 김광욱(
01. 도연명(陶淵明) 죽은 후에 또 연명이 나닷 말이
밤마을 옛이름이 맞추어 같을시고
돌아와 수졸전원(守拙田園)이야 긔오 내오 다르랴
• 도연명(陶淵明) : 중국 진나라 때의 대시인
• 나닷 말이 : '났더란 말인가'의 옛 말투
• 밤마을 : 시골 동네 이름. 율리(栗里)
• 맞추어 : '우연히도 맞아들어
• 수졸전원(守拙田園) : 자기의 옹졸함을 지키고자 전원으로 돌아가 은거함
• 긔오 내오 : 그이(그 사람)이나 내나
「 진나라 때의 대시인 도연명이 죽은 다음에, 여기 다시 도연명이 태어났더란 말일까?
그가 벼슬을 팽개치고 한가롭게 여생을 즐겼다는 율리(栗里)라는 옛마을 이름과, 내가 이제 숨어 사는 밤마을과 우연히도 맞아들었구나!
벼슬을 버리고서라도 자기의 옹졸한 성격을 애틋이 여겨, 시골로 돌아가 숨어 삶은 그 사람이나 내나 다를 바가 있으랴 」
02. 공명(功名)도 잊었노라 부귀(富貴)도 잊었노라
세상 번우(煩憂)한 일 다 주어 잊었노라
내 몸을 내마저 잊으니 남이 아니 잊으랴
• 공명(功名) : 나라에 공훈을 세우고 이름을 드날림
• 부귀(富貴) :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음
• 번우(煩憂)한 일 : 번거롭고 시름겨운 일
「 나라에 공훈을 세워 이름을 드날리는 것도 나는 잊어버렸다.
그리고 재물을 모으고 벼슬이 높아지는 것도 나는 역시 잊어버렸다.
내가 자기의 존재마저 잊고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 내가 있음을 잊지 않겠는가? 」
03. 뒷집에 술쌀을 꾸니 거친 보리 말 못 찬다
즈는 것 마구 찧어 쥐빚어 괴어내니
여러 날 주렸던 입이니 다나 쓰나 어이리
• 말 못 찬다 : 말(斗)이 차지 못한다
• 즈는 것 : 낱말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해동가요>에는 '즌오아'로 되어 있다. 학자에 따라 뜻이 다르니, 보리쌀을 '능그는 것'이라든가, '주는 것'이라든가, 또는 '짓노나'로 보아 '아무렇게나 혜쳐서'로 새기고들 한다.
• 쥐빚어 : 손으로 쥐어서 빚어
• 괴어내니 : 술이 그릇에 고이도록 받아 모아서
• 어이리 : '어이하리'의 준말
「 뒷집에 부탁해서 술쌀을 꾸어 왔더니 애벌밖에 능그지 않은 거친 보리가 채 한 말도 못 되더라
주는 것을 대는 대로 찧어 가지고, 이것을 손으로 쥐어 빚어서 술이 그릇에 괴게 해 내니
여러 날 술에 굶주렸던 입이라, 술이 맛있던 맛없던 아니 먹고 어찌하겠는가? 」
04. 강산 한아(閑雅)한 풍경 다 주어 맡아 있어
내 혼자 임자ㅣ라 뉘라서 다툴소냐
남이야 숨궂이 여긴들 나눠 볼 줄 있으랴
• 한아(閑雅)한 : 고요하고 아담한
• 숨궂이 : '심술궂게'의 옛 말투
• 나눠 볼 줄 : '줄'은 '까닭'의 옛 말
「 강과 산이 벌려 있는, 고요하고도 아담한 풍경을 모두 다 나에게 주었기에, 이것을 맡아 가지고 있으니 내가 홀로 임자라, 그 누가 이 사실을 다툴 수 있겠는가?
남들이야 심술궂다고 생각하든 말든, 이 아름다운 자연의 풍치를 어찌 나눠서 볼 까닭이 있을 것이랴? 」
05. 질가마 좋이 씻고 바위 아래 샘물 길어
팥죽 달게 쑤고 이리저이 끄어내니
세상에 이 두 맛이야 남이 알까 하노라
• 질가마 : 흙으로 구어서 만든 가마솥
• 좋이 : 깨끗이
• 저리저이 : 남부지방에서 김치와는 달리 만들어 먹는, 채소를 소금에 절인 것이다.
• 끄어내니 : 꺼내니
「 질가마를 깨끗이 씻어 놓고 바위 밑 옹달샘 물을 길어다가 팥죽을 쑨 다음
채소를 절여서 익힌 저리저이를 꺼내어 먹으니
희한한 이 두 맛이야말로 남이 알고 달려들까 염려하는 바로다 」
06. 어와 저 백구(白驅)야 무슨 수고 하나슨다
갈숲으로 바장어며 고기 엿기 하는고야
날같이 군 마음 없이 잠만 들면 어떠리
• 어와 : 아!와 비슷한 감탄사
• 백구(白驅) : 갈매기
• 하나슨다 : '하는가?'의 옛 말투
• 바장어며 : 부질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 엿기 : 엿보기를, 노리기를
「 어허 저 갈매기야 무슨 일을 그다지 괴로이 하고 있느냐?
갈대 숲으로 오락가락하면서 고기 엿보기를 하고 있구나!
나처럼 별다른 생각 없이 잠에만 취해 있으면 어떠냐?(좋지 않겠느냐?) 」
07. 모첨(茅詹) 기나 긴 해에 하올 일이 아주 없어
포단(浦團)에 낮잠들어 석양(夕陽)에 지자 깨니
아희야 날 찾는 벗님이란 요지목산(遙指木山) 하여라
08. 삼공(三公)이 귀(貴)타 한들 이 강산(江山)과 바꿀소냐
편주(扁舟)에 달을 싣고 낚대를 흩던질 제
이몸이 이 청흥(淸興) 가지고 만호후(萬戶侯)-ㄴ들 불으랴
• 삼공(三公) : 영의정·우의정·좌의정의 삼대신. 중국 고대에는 태사·태전·태보였으며, 한대에는 대사도·대사마·대사공을 가리킨다.
• 귀(貴)타 한들 : 고귀하다고 할지라도
• 강산(江山) : 여기서는 작자가 살고 있는 고장
• 바꿀소냐 : 바꿀 수가 있겠는가?
• 편주(扁舟) : 조각배
• 흩던질 제 : 흩여 던진 적에
• 청흥(淸興) : 맑은 흥취, 깨끗한 멋
• 만호후(萬戶侯)-ㄴ들 : 만호후는 만호나 되는 광대한 지역의 장(長)이 되는 벼슬.
• 불으랴 : 부러워하랴
「 신하의 몸으로서는 삼공이 가장 귀한 벼슬이라 하더라도, 어이 이 아름다운 강산과 바꿀 수가 있겠는가?
조각배에 달빛을 가득 받으면서 낚싯대를 훌훌 던질적에,
내가 맛보는 맑은 흥취야말로 그깢 만호후의 부귀영화를 부러워 하겠는가? 」
09. 추강(秋江) 밝은 달에 일엽주(一葉舟) 혼자 저어
낚대를 떨쳐 드니 잠든 백구(白驅)ㅣ 다 놀란다
어디서 일성 어적(一聲漁笛)은 좇아 흥을 돕나니
• 추강(秋江) : 가을철의 강물
• 일엽주(一葉舟) : 조각배, 편주(扁舟)
• 백구(白驅)ㅣ : 갈매기가
• 일성 어적(一聲漁笛) : 한 곡조의 고기잡이의 피리 소리
• 좇아 : 따라서
「 가을철 강물에는 달이 비치어 밝은데, 조각배를 홀로 저어 나가면서
낚싯대를 흔들어 울리니 잠자던 갈매기들이 모두 놀라 날겠구나
어디서 들려 오는지 한가락 어부의 피리 소리가 곁들여 이 흥취를 돋구어 주느냐? 」
09-1. 추강(秋江) 밝은 달에 일엽주(一葉舟) 혼자 저어
낚대를 떨쳐드니 잠든 백구(白鷗) 다 날거다
저희도 사람의 흥(興)을 알아 오락가락 하더라
10. 헛글고 싯끈 문서(文書) 다 주워 후리치고
필마(匹馬) 추풍에 채를 쳐 돌아오니
아무리 매인 새 놓이다 이대도록 시원하랴
• 헛글고 : 흐트러지고 '헛글다'는 '흐트러지다'의 옛말
• 싯끈 : 시끄러운. '싯끌다'는 '시끄럽다'의 옛말
• 문서(文書) : 관용서류
• 필마(匹馬) : 한 필의 말
• 채 : '채찍'의 준말
• 이대로록 : 이렇게까지, 이다지도
「 가려내기 힘들게 흐트러지고, 또한 말썽 많은 서류를 다 집어 던지고서
홀로 가을 바람에 스치며 채찍질로 말을 재촉하여 시골집으로 돌아오니
아무리 매어져 있던 새가 놓였다한들 이다지도 시원할 수가 있으랴? 」
11. 대막대 너를 보니 유신(有信)하고 반갑괴야
나니 아흿 적에 너를 타고 다니더니
이제란 창 뒤에 섰다가 날 뒤세고 다녀라
• 유신(有信)하고 : 믿음직하고
• 반갑괴야 : 반갑구나!
• 나니 : 아아! 감탄사
• 아흿 적에 : 어렸을 때에, 소년 시절에
• 너를 타고 다니더니 : 죽마(竹馬)를 타고 다니더니
• 이제란 : 이제는, 지금은.
• 날 뒤세고 : 나를 뒤세우고
「 대막대야, 너를 보니 믿음직하고 반갑구나!
아아! 어릴 적에는 너를 가지고 대말(竹馬)을 만들어 타고 다녔거니와
이제는 창 뒤에 서 있다가, 지팡이가 되어서 나를 앞세우고 다녀다오! 」
12. 세상(世上) 사람들이 다 쓸어 어리더라
죽을 줄 알면서 놀 줄란 모르더라
우리는 그런 줄 알므로 장일취(長日醉)로 노느라
13.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산 이 보았는다
왔노라 한 이 없고 돌아완을 본 이 없다
우리는 그런 줄 알므로 살아신 제 노노라
• 보았는다 : 보았는가?
• 돌아완을 : 돌아온 이를
• 살아신 제 : 살아 있을 때에
「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만일 뿐, 다시 살아난 사람을 보았는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노라 하면서 나타났던 사람 없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을 본 사람도 없다
우리는 미리부터 그런 줄을 알고 있으므로, 살아 있을 때에 실컷 노는 바로다 」
13-1사람이 죽어가서 나올지 못나올지
들어가 본 이 없고 나왔단 말이 없다
들어가 못나올 인생(人生)이 아니 놀고 어이리
14.
초야 군현(草野群賢)이 다 일어나단 말가
어즈버 강산풍월(江山風月)을 누를 주고 이거니
•
• 초야 군현(草野群賢) : 재야(在野)의 현인(賢人)들. 관계(官界)를 떠나 민간에 파묻혀 있는 여러 어질고 슬기로운 사람들
• 일어나단 말가 : 일어났다는 말인가?
• 어즈버 : 아! 시조 종장 첫머리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 강산풍월(江山風月) : 맑고 아름다운 대자연을 통털어 일컫는 말이다.
• 이거니 : 가는고? 가는가? 가느냐?
「 황하에 강물이 맑아졌다고 하더니 성인이 태어나셨구나!
초야에 묻혀 남모르게 살아 가던 여러 어질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모두들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자 일어났단 말인가?
아! 이 강산의 청풍명월, 아름다운 풍경을 누구에게 돌려 주고 다 떠나갔는가? 」
15. 세(細)버들 가지 꺾어 낚은 고기 꿰어 들고
주가(酒家)를 찾으러 단교(斷橋)를 건너가니
온 골에 행화(杏花) 져 쌓이니 갈 길 몰라 하노라
• 세(細) 버들 : 가는 버들
• 주가(酒家) : 술집
• 단교(斷橋) : 허물어져서 짧아진 다리
• 온 골 : 온 골짜기
• 행화(杏花) : 살구꽃. 한시에서는 주가(酒家)와 행화(杏花)를 아울러 쓰는 경우가 많다.
• 져 쌓이니 : 꽃이 져서 길 위에 쌓이니
「 가느다란 버들가지를 꺾어, 낚아 잡은 고기를 꿰어 들고서
술집을 찾아가려고 허물어진 다리를 건너가 보았더니
아뿔사! 온 골짜기에 살구꽃이 바람결에 져서 마구 쌓이는지라 어디를 가야할 지 잘 모르겠구나! 」
16. 동풍(東風)이 건듯 불어 적설(積雪)을 다 녹이니
사면(四面) 청산(靑山)이 예 얼굴 나노매라
귀밑에 해묵은 서리는 녹을 줄을 모른다
17.
닭찜 개찜 오려점심 날 시키소
매일에 이렁성 굴면 무슨 시름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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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동갑(趙同甲) : 동갑(同甲)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
• 쑥달임 꽃달임 : 진달래와 국화의 꽃잎이나 혹은 쑥잎을 따서 전을 부치며, 또는 떡에 넣어 여럿이 먹으며 즐기는 놀이
• 오려점심 : '오려'는 '올벼'의 옛말. 일찍 읽는 벼
• 이렁성 : 이렇듯이
「
닭고기찜이다 개고기찜이다, 올벼로 짓는 점심일랑 통틀어 날 시키시오!
매일을 이렇듯이 지낸다면야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까보냐? 」
『 율리유곡 17수는 형식상 전편의 구조가 다른 연시조와는 달리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내용면에서도 그 주제가 다른 것이 섞여 있어 작자가 은둔생활을 할 때 틈틈이 지어 놓은 것을 그의 유족 또는 시가집 편찬자가 적당히 배열해 놓은 것이라고 추측한다. 작자는 진나라 시인 도잠(陶潛)을 사모하여 세상의 부귀공명과 온갖 번거로움을 잊고 시골에 묻혀 한가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을 많이 읊었다. 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오랜기간 가난하고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 정치적 실의에 따른 자연에 안주하겠다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이랄 수도 있지만, 작품에서 특기할 것은, 시조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송강이나 노계 고산관는 달리 작품에서 연군(戀君)의 냄새가 없고, 더군다나 아첨의 냄새가 전혀 없기 때문에 한결 값진 정신적 유산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