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 리 말 한국전쟁은 2차 대전 이후 최초로 발발한 국제적 내전(an international civil war)의 성격을 띤 전쟁
이었고, 미·소가 대립한 냉전 상황에서 전개된 최초의 열전이었으며, 그리고 유엔 창설 이래 발동한
집단안전보장조약에 의해 유엔군이 파견된 첫 번째 전쟁이었다. 또한 최대 지원국인 미국이 역사상
최초로 선전포고 없이 시작한 전쟁이었는가 하면, 건국 이후 약 200여개의 국제분쟁전쟁에 개입한
이래 미국이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당사국인 한민족에게는 반만
년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동족상잔의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최대의 피해를 안겨준 전쟁이
었다. 특히, 남북한 모두에게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뼈아픈 전쟁의 상흔과 함께 냉전의 유산으로
흉물스런 휴전선만을 안겨다 준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을 깊이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도 몇 가지 눈에 띤다. 남북한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이 20∼
30대의 젊은 장군들이었고, 북한군 전선사령부 총참모장 강건과 한국군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이
전쟁중에 戰死하였는가 하면, 남북한 공히 개전 초기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 병력과 인천상륙
작전 이후 38도선으로 넘어간 북한군 병력의 숫자가 각각 25,000∼30,000여명이라는 점이다. 또한
한국전쟁은 과거 광복군 및 일본·만주 출신 장교들이 지휘한 한국군과 중공 및 소련 출신 장교들
이 지휘한 북한군의 대결이었는가 하면, 월남(越南)한 북한 출신 장교들이 장악한 한국군과 대부
분 국공내전(國共內戰)에 참가한 장교들로 구성된 북한군이 장소를 달리하여 한반도에서 싸운
전쟁이기도 하였다. 또 남한의 군사영어학교 및 육사 출신의 장교와 북한의 평양학원 출신의 장교
들 간의 결전적 성격도 띠고 있는 전쟁이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의 개입과 중공의 개입은 공히 피지원국인 남북한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각각 구원해
줌으로써 오늘날까지 '혈맹의 우정'을 과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미국과 중국은 남북한을
각각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유엔군사령부와 조·중연합군사령부에 남·북한군을 편입시킨 채,
이후의 전쟁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이끌고 갔다는 점이다.
결국 한국전쟁은 외형상 남한과 북한과의 전쟁이지만, 전쟁지도 및 전쟁 수행의 주체와 무기체계,
장비, 지휘관들의 면면을 고려해 보면, 이는 미·소의 대리 전 성격이 강한 전쟁이었다. 전투의 전
개양상도 밀물과 썰물처럼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가 38도선으로 퇴각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가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37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가 다시
반격으로 올라가는 등 쫓고 쫓기는 가운데 진행된 이른바 목숨을 건 '술레잡기식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전선 교착 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시 유럽전선에서' 1,000㎞에 달하는 서부로의 행진'
을 연상하듯, 한국전쟁에서도 300㎞에 달하는 38도선을 중심으로 피아 150여만명 이상의 군대
가 첨예한 대치상태 속에서 진지전과 고지쟁탈전의 전투양상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인지 전투
는 1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진지전에 의한 무제한의 소모전이 진행되면서 '핵전쟁을 치른 미국'
이나 '핵보유국인 소련'을 비웃듯, 고전적 제한전쟁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또한 작전지도 및 지휘관계면에서도 남한에게는 개전 초기 전투를 제외하면 미국과의 연합전선
을 형성하여 치룬 전투였고, 북한에게는 중공군 개 입으로 편성된 조·중간의 연합전선이 형성된
가운데 치러진 전투가 정전 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인지 3년여 동안 치러진 커다란 전투만 해도 154개에 달하고, 작은 전투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233개에 이른다. 이 중 미국을 비롯한 유엔 16개국이 참가한 주요 전투만도 49개에 이른
다. 이들 전투는 모두가 단순히 전투국면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1개 전투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 짓을 정도로 중요한 전투도 있었다. 그러기에 한국전쟁기 주요 전투 10개를 선정하는 데에
는, 이에 합당한 기준과 원칙이 절대로 필요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다음과 같은 기준을 선정
의 준거로 삼았다.
첫째, 전술 작전 면에서 전쟁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투 둘째, 군사·정치면에서 전쟁의 진행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전투 셋째, 피·아의 주력이 지향된 전장의 전투 넷째, 작전단계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투 이외에도 작전 지속능력과 전투력 보존력,
그리고 차후작전에 대한 기여도를 고려하여 균형 있게 선정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에 의해 선정된 주요 10대 전투로는 춘천 전투, 오산 전투, 다부동 전투, 인천상륙
작전, 평양탈환작전, 초산 전투, 장진호 전투, 지평리 전투, 현리 전투, 그리고 백마고지 전투 등
이 있다. 이중 국군이 실시한 전투가 6개였고, 유엔군이 실시한 전투가 4개였다. 또 방어 전투가
7개이고, 공격전투는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반격작전에서 치러진 3개 전투, 즉 인천상륙작전, 평양
탈환작전, 초산전투 등이다. 한국과 유엔군이 북한군 및 중공군과 싸운 전투는 각각 5개로 동수를
이루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외에도 한국전쟁에서 중요한 전투가 많이 있음에도 시기별, 작전
흐름별, 중요도별을 고려하다보니 누락된 전투가 더 많다. 이점 많은 양해를 구한다.
이들 전투결과 양측이 입은 인명피해로는 유엔측이 24,000여명인데 비해 공산측은 약 80,000여명
으로 유엔군 보다 3배가 넘는 피해를 당했다. 이는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 이후 전개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식 무리한 공세와 화력의 열세에서 오는 병력 손실이 주요 요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기술함에 있어서는 새로운 연구를 제시하기 보다는 기존의 연구성 과물을 중심으로 각 전투
별로 전투내용과 전투가 담고 있는 전사적 의의를 균형 있게 잘 정리하여 그 속에서 교훈과 의미
'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기존의 한국전쟁사에 나타난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차후 연구에 도움
을 주고자 하였다. 내용 전개는 국군과 유엔군을 구분하지 않고 전투 개시 일자 순으로 정리하였다.
2. 국군 제6사단의 춘천전투(1950. 6. 25∼30) 춘천 전투는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중동부 전선의 춘천과 홍천 북방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6사단
이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 제 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을 받고 춘천, 어론리, 현리,
말고개 일대에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과 말고개
의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5일 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북한군 2개 사단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북한군 2군단은 춘천-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따라
서 춘천전투는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의 안시성 전투에 비유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군 선제타격계획에 커다란 타격을 준 전투였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중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은 춘천에 제7연대를, 홍천 북동쪽
에 제2연대를 각각 배치하고 제19연대는 사단예비로서 원주에 집결 보유하여 적목리로부터 진흑
동까지 84㎞의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은 방어지역 서측의 북한강과 전방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소양강을 이용하여 제7연대는 소양강 북안에, 제2연대는 소양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편성
하였다. 하지만 좌일선의 제2연대는 6월 20일에 사단에 예속되어 가까스로 이곳에서 제8연대와
진지교대를 마쳤으며, 예비인 제19연대도 5월 1일에 예속된 바 이들의 방어 및 전투태세는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미 1/3병력이 외출·외박한 상태이지만 사단은 6월 19일에 생포한 포로진술과 정찰대
를 화천과 양구에 파견하여 확인한 정보에 따라 적의 전면적 또는 국지적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체로 경계조치를 취해두고 있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제2군단으로써 북한군의 조공으로 중·동부지역 공격을 담당하여 공격 당일에
춘천을 점령할 계획하에 그 예하 제2사단을 주공으로 화천-춘천 축선에 투입하고, 인제-홍천
축선에는 독립전차연대로 증강된 제12사단을 투입하였다. 이들은 조기에 춘천·홍천을 점령하고,
서울 포위를 위해 이천-수원으로의 우회기동을 할 계획이었다.
6월 25일 북한군 제2사단과 제12사단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와 제2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춘천
북방과 인제 남방지역을 동시에 공격해 왔다. 북한군 제2사단은 아군 제7연대지역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일부병력을 북한강 계곡으로 침투시켜 아군 제7연대의 퇴로를 차단하여 춘천북방
에서 섬멸하려고 하였다. 제7연대는 제1대대를 북한강 계곡에 투입하여 병력과 장비의 열세
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면서 지지를 고수하였으며,
포병은 화력을 집중하여 전진해 오는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한편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제12사단의 주력은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관대리 남쪽에 위치한
38교를 지키고 있던 1개 소대병력에 의해 2시간이나 전진을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제2연대는
예비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자은리(自隱里)에서 전방으로부터 지연전을 펴온 제1대대와 방어
선을 구축하고 적의 전차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리 정면을 방어하고 있던 제3대대가
후퇴함에 따라 6월 26일 오후부터는 자은리 방어선을 포기하고 한계리와 북창을 잇는 말고개
로 철수하게 되자, 제6사단 퇴로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적 제2군단장 김광협은
춘천을 공격하던 제2사단의 공격이 부진하자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를 제외한 주력을 춘천의
동측방 공격에 가담케 하였다. 제2사단의 서울 동남방의 진출이 지연될 경우 북한군의 전반적
인 작전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적 제2군단장의 조치였던 것이다.
6월 27일 적은 제12사단 병력으로 증강된 제2사단을 투입하여 춘천 탈취를 위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홍천 북방 말고개에도 맹렬한 공격을 계속했다. 이에 제7연대는 병력부족
으로 춘천 남쪽 원창고개에 제2대대 병력을 배치한 후 홍천으로 철수하였으나, 원창고개에
있던 제2대대는 거짓 항복해 오는 적군을 환영하다가 기습을 받고 고개를 빼앗겼다. 또 말고개
를 지키고 있던 제2연대도 제19연대의 지원을 받아 적을 막아내다가 명에 의하여 6월 29일 밤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개전 이후 3일간이나 춘천을 확보하며 선전했던 국군 제6사단은 비교적 사단의 편제를
유지하면서 홍천, 횡성, 원주, 제천을 거쳐 7월 1일 충주로 철수하였다. 5일간에 걸친 춘천지구
전투에서 제6사단은 적 제2사단의 서울 진출을 봉쇄하였으며, 적 제2, 제12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또한 김일성은 춘천전투의 패전을 물어 7월 초에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을 최현
(崔賢) 소장으로, 12사단장 전우 소장을 최충국(崔忠國) 소장으로 교체하고 2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해임하고 김무정(金武亭) 중장을 후임으로 임명하는 인사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전투
에서 국군 제6사단은 적 살상 6,800명, 포로 120여명, 전차와 자주포 18대를 파괴한 반면, 아군
은 전사 200명, 부상 350여명, 그리고 1,300여명의 실종자가 나왔으나, 이들은 대부분 부대로
복귀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수도권을 포위하기 위하여 2개 사단을 춘천-홍천-이천-수원 축선으로 우회
기동시키려던 당초의 작전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3. 스미스특수임무부대의 오산전투(1950. 7. 5) 오산전투는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한국군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국에 최초로 파병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남하중인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4사단 소속 2개 연대와 오산 북방 죽미령 일대에서 교전을
전개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밀려드는 북한군의 보·전부대를 맞아 보·포 협동으로
6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적의 전차부대를 막지 못하고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으
로 철수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미 지상군부대가 한국전에서 최초로 싸운 전투로 기록
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큰 충격이었다. 1949년 6월 30일 주한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한국 땅에서 철수한지 불과 1년만에 미국은 한국에 대규모의 군대를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냉전 하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a noise far
away)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이익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공산권의 자유세계 전체에 대한
선전 포고였던 것이다. 이에 따른 미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조치는 신속하고, 치밀하였다.
유엔 안보리의 소집과 북한에 대한 침략자로 규정한 결의안 채택, 한국에 대한 지원 결정,
유엔군 파견 등 일련의 조치는 미국이 건국이래 약 200여개의 전투 및 분쟁에 개입하였지
만, 한국전 개입처럼 신속하면서도, 적극적이며 단호한 조치를 내린 적은 거의 없었다. 미
국의 이러한 조치와 의지는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의 한강전선 시찰과 미 전방지휘소 설치
로 가시화 되었다.
이후 맥아더의 전선 시찰 결과에 따른 건의에 의해 미 지상군 파견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 주둔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선발대로 지정되어 한국 전선에 파견됨으로써
개전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긴 한국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고, 미국의 참전은 없을 것이
며, 있다 하더라도 미국이 파병 절차를 밟는데 최소한 2개월이 소요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세
워진 북한군의 남침계획에는 개전 초반부터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선견대로 지명된 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Charles B.Smith) 중령은 대대의 B, C중대를
중심으로 밤새 스미스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부대는 7월 1일 08:45에 부산에 도착
하였으며 부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다시 20:00에 기차로 부산을 출발하
여 7월 2일 08:00에 대전에 도착하였다. 스미스 중령은 전방지휘소에 도착하여 처치 장군에
게 신고하고 상황설명을 들은 후 오산 북방 죽미령까지 지형정찰을 실시하고 대전으로 복귀
하였다. 그는 처치 장군으로부터 평택·오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날 밤 기차로 다시
부대이동을 하여 오산과 평택에 1개 중대씩 배치하고 대대지휘소를 평택에 설치하였다. 그리
고 4일에는 사단포병 제52포병대대장 페리(Millero Perry) 중령이 A포대를 인솔해와 합류하게
됨으로써 보포를 통합한 하나의 특수임무부대가 구성되었다.
이처럼 스미스부대가 한국전선에 투입됨으로써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서 한미연합전선의
형성이라는 하나의 큰 전환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평택-안성선에 전개한 미지
상군이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한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국군은 그 이동에서 동해안까지 전선
을 분담하여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는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부산
에 전개한 7월 1일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이 미 극동군사령부 전방지휘소장 처치 준장과의
작전협의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스미스 부대는 7월 4일 시흥방어사령부가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하자, 서부전선의 최전
선부대가 되어 수원을 점령한 적이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한 전투준비를 서둘렀다. '가능한 북쪽
에서 적을 지연하라'는 임무에 따라 2회의 정찰까지 실시한 후 평택을 출발, 7월 5일 03:00에
죽미령 고개에 도착하였다.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부대는 B중대가 경부국도를 가로 타고 90
고지와 117고지를, C중대가 92고지를 점령하고, 105㎜포대(탄약 1,200발)는 죽미령후방 수청
리에 포진하였고 그중 5번포 1문은 대전차고폭탄 6발과 함께 죽미령까지의 중간지점으로 추진
하였다.
이 무렵 북상한 국군 제17연대도 제2대대를 포병진지 우측 88고지에 배치하였다. 07:00경 수원
부근에서 북한군 제4사단이 제107전차연대를 앞세우고 1번 국도를 따라 남진하는 것이 관측
되었다. 8대의 전차를 선두로 죽미령고개 1.8㎞까지 접근하자 스미스특수임무부대는 105㎜
곡사포의 포격을 개시로 선제공격을 가하였으나 적전차는 계속 전진하였다. 전차가 보병진지
전방까지 들어왔을 때, 75㎜ 무반동총이 전차를 향해 공격을 가하였으나, 적전차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5번포로부터 발사된 대전차고폭탄에 명중된 선두전차 2대가 정상에서
정지하였다. 09:00경 후속하던 적전차는 파괴된 전차를 길옆으로 밀어 치우고 미 보병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4대씩 무리를 이룬 가운데 도합 33대가 모두 죽미령을 통과하여 포대 쪽으로
내려갔다. 이에 포병들은 각 포를 도로방향으로 돌려 적전차에 직접 조준사격을 가하고 2.36
로켓조도 대전차사격에 가담하였으나 적전차를 저지하지는 못하였다.
선두 전차군이 응사를 하며 오산쪽으로 내려간 10여 분 후 더 많은 전차가 접근해 오자, 포병
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장공포증으로 진지를 이탈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복귀
하여 후속전차와 사격전을 벌였다. 포진지를 정확히 발견하지 못한 적의 전차가 모두 오산쪽
으로 내려갔을 때 궤도에 포탄을 맞아 파괴된 전차 2대 가 도로변에 서 있었다. 11:00경 전차
3대를 선두로 긴 차량종대가 뒤따르고 또 그 뒤에는 수 ㎞에 늘어선 도보부대로 된 적주력
부대의 선봉이 보병 진지전방 900m까지 접근해 왔다. 대대장의 사격명령으로 야포, 박격포,
기관총 및 소화기 등 각종사격이 집중되자 적의 보병은 산개하고 선두전차가 능선 200m까지
다가와 전차포와 기관총사격을 가하였다. 그동안에 적 보병부대의 일부가 반월봉에서 북으로
뻗은 능선을 점령하고 지원사격을 하는 동안 주력부대는 죽미령 좌우로 우회하였다.
보병전투가 벌어진지 약 1시간이 지났을 때 B·C중대가 또 위험하게 되자, 스미스 중령은 철수
를 결심하였다. 부대는 포위될 상황에 있고 적전차의 남진시 보·포통신망의 두절로 포지원도
못받고 기상의 불량으로 항공 지원도 받을 수 없으며 더군다나 증원 희망도 없었다. 거의 12
시간 동안 진지를 지킨 스미스부대는 14:30 죽미령에서 철수를 개시하였다. 대대는 B중대의
엄호하에 철수 순서에 따라 92고지를 경유 오산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스미스 중령은 B중대와
같이 철수하다가 포병과 합류하여 오산으로 철수하였고, 국군 제17연대는 평택을 경유하여
철수하였다. 죽미령에서 철수시 스미스부대는 동측방으로부터의 적 공격에 병력은 분산되었
고 모든 공용화기를 유기하는 등 많은 인원, 장비의 손실을 입었다. 이 부대들이 안성을 거쳐
천안에 집결했을 때 스미스 대대원의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하여 총 손실은 150여명에 달하였
다. 적의 손실은 전사 42 명, 부상 85명, 전차파손 4대였다.
오산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로, 북한군으로서는 미 지상군의 참전이 처음으로 확인
된 전투였다. 북한군은 그때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미국의
참전 가능성에 관해서 생각지도 않았는데, 오산에 있는 미군을 보고 몹시 놀랐다. 미군도 이
전투를 통해 비로소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식하고 적을 바로 알게 되었 다.
4. 국군 제1사단의 다부동전투(1950. 8. 3∼30) 다부동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한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제3, 13, 15사단)의 8월공세를 27일간에 걸쳐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전개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다부동 전투는 1차 세계대전시 프랑스 수도의 관문으로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릉(Verdun) 전투에 비유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동양의 베르덩 전투라고도 한다.
북한군의 8월 공세시 주공부대의 목표는 당시 한국의 임시수도인 대구와 부산 교두보였다. 적은 대구공격을 위해 투입된 5개 사단중 제1, 제13, 제 15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구축선에 집중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3개 사단, 즉 중앙에 국군 제1사단(왜관-낙정리)을, 우측에 제6사단(낙정리-의성)을, 좌측에 미 제1기병사단(현풍-왜관)을 대구북방에 배치하였다.
제1사단은 7월 31일 미 제25사단의 엄호하에 낙동강을 건너 새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런데 8월 1일 마산이 위협받게 되고 미 제25사단이 그쪽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미 제25사단의 책임구역을 제1사단이 맡게 되었다. 1사단은 이 때부터 9일간에 걸쳐 낙동강 연안지구 방어전투에서 적 3개 사단과 맞서 적 사살 6,867명, 각종 포 23문, 전차 파괴 10대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육군은 8월 11일부로 그동안 계획 중이던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이동하여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이 강변전투를 종결짓고 12일 야간에 철수를 개시하여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제1사단의 다부동지역은 좌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우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군으로 둘러싸여 대구에 이르는 관문에 해당되는 전술상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1사단은 13일 다부동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제15연대가 328고지일대, 제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로, 제11연대가 신주막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하였다. 적도 13일 제3사단 일부병력이 약목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미처 제11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의 중앙돌파와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대구 정면의 적은 당초 '남한 해방'을 목표한 날인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전개 중이었고, 제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 하였으며 제11연대도 전차 7대를 앞세운 적 연대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 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대구 방면에서 적의 공세가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인 8월 16일 11:58∼12:24분에 대구전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일대 5.6×12㎞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 해옴으로써 국군 제1사단은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서 놓여 있었다. 이에 제8군은 사단 병력만으로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8월 17일 군예비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적이 사격한 박격 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와 같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군 제1사단은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미 제27연대는 대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부대와 협조된 공격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정면의 적도 전차를 새로이 보충 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풀이 되었다. 제27연대는 천평 전방에서 3.5 로켓트포로 적전차 2대를 파괴하였으나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적은 도로상의 지뢰로 인해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하였고, 제12연대는 쌍방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19일 수암산을 재차 피탈당하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반전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제8군명령에 따라 미제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전동에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하였다.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외같이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개가 지원될 만큼 위급하였다.
그러나 20일 밤 적측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적은 더 이상 다부동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유학산 일대에 전개한 제15사단을 의성 방면으로 이동시킨 후 국군 제8사단 정면 영천방면으로 공격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으며, 이로써 적은 제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제13사단이 유학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되어 공격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적 제1사단의 위협이 가중되어 다부동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은 점차 호전되어 갔다. 이날 야간 특기할 것은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조공을 제11연대로, 주공을 미제27연대 정면으로 지향하여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하였다.
미 제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하여 적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전차를 추진하여 적에 대응하였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불꽃을 튀기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 공이 맞은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하였다.
더구나 다음날 오전에 적 제13사단 포병연대장(정복욱 중좌)이 제11연대 지역으로 작전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의지는 극도로 저하되었고, 그의 진술에 따라 유엔 전폭기 편대가 대거 출격하여 122㎜곡사포 7문과 76㎜곡사포 13문이 은폐되어 있는 적의 포진지와 집결지를 강타함으로써 적 제13사단의 화력지원을 무력화시켰다. 제12연대는 그동안 8차례의 공격 끝에 이날 밤 최초로 야간기습을 시도하여 마침내 유학산 탈환에 성공하였다.
제1사단은 마침내 주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였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거의 접촉을 단절하였으며, 귀순한 포병연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이 전사상되고 총 3,000명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26일부터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의 갖추면서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또 28일에는 수암산을 피탈 10일만에 탈환하였다. 결국 제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되어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서야 점령한 결과가 되었다. 제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하여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 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결국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 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다른 유엔군 부대들과 함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5. 미 제10군단의 인천상륙작전(1950. 9. 15∼16)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9월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전개한 작전으로서, 이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특별히 편성된 유엔 해군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의 대 함대를 동원하여 미 제10군단(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17연대)을 인천으로 상륙시킨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의 제90공격부대는 인천을 방어하는 북한 인천경비여단과 제18사단 및 제31사단을 격파하고, 당일 월미도와 인천시가를, 다음날에는 인천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여 서울로 진격할 발판을 구축한 다음 미 제10군단장에게 인계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7월 첫주에 맥아더 장군이 그의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하달한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계획을 고려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는 지시와 더불어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은 맥아더 장군의 작전참모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블루하트(Blue Hearts)라는 암호명칭이 부여되었다. 연구된 상륙작전의 개략적인 개념은, 남부전선에서는 미 제24, 제25사단이 정면에서 반격을 가하고 이와 병행해서 해병연대 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함으로써 적을 38도선 이북으로 구축 한다는 것이었다.
7월 4일 맥아더 장군 참석하에 극동군사령부에서 가진 이에 관한 첫 작 전회의에서, 공격부대는 해병 1개 연대전투단 외에 육군으로서는 주일(駐日) 미 제1기병사단을 운용하기로 논의하였고, 상륙일자는 합동작전으로서 준비과정을 고려하여 7월 22일로 정하였다. 이에 미 해병기지에서는 7월 7일 해병 제1사단 예하 제5연대를 주축으로 제1임시해병여단을 창설하고 제1기병사단이 훈련에 들어가는 등 지상군의 상륙준비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블루하트계획은 7월 10일 이 단계에서 포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국군과 이미 전장에 투입된 미군이 적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상륙 작전보다는 현 전선을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하게 되어 제1기병사단도 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한군의 신속한 전진으로 블루하트계획은 취소되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선상황이 악화될수록 적의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상륙지역으로 인천을 강조함과 동시에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연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연구를 재개하게 된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해안지역을 상륙 대상지역으로 검토하고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이름 아래 인천상륙계획(100-B), 군산상륙계획(100-C), 주문진상륙계획(100-D) 등 3개 안을 작성하여 그 개략 계획을 7월 23일 미극동군사령부의 관계참모부에 회람하였다. 이중에서 인천을 상륙지역으로 하는 계획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계획은 이미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이동중에 있는 미 제1임시해병여단과 미국에서 일본으로 출발하도록 계획되어 있는 미 제2보병사단을 상륙공격부대로 운용하고 이들 부대의 상륙과 동시에 지상군이 남에서 반격으로 전환한다는 작전개념으로 되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같은 날인 7월 23일에, 9월 중순경 이 계획대로 상륙작전을 실시하겠다고 육군성으로 통보하였다. 그러나 8월초, 북한군의 공세로 낙동강방어선의 서측이 붕괴직전에 이르자 상륙부대로 지정한 2개 부대가 도착과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 투입됨으로써 상륙작전계획의 실현은 어려운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미 제1해병사단의 지원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게 되자, 이 사단과 일본에 남아있는 마지막 사단인 미 제7보병사단을 가용부대로 하여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은 작전계획 100-B(인천상륙)를 완성하여, 8월 18일 예하 및 관련부대에 하달하였다. 이 계획은 본질적으로 그동안 추진되어온 상륙작전의 기본개념과 동일하나 미 제1해병사단은 돌격상륙부대로, 인천-서울을 목표지역으로 결정하고 상륙부대와 낙동강전선의 미 제8군과의 협조된 작전을 동시에 실시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다만 이 계획은 후속 상륙부대가 아직 명시되지 않은 채 극동미군사령부 예비 병력이라고만 언급 되었으며 잠정적인 상륙일은 9월 15일로 결정하였다. 또한 맥아더 장군은 8월 15일에는 계획된 상륙작전을 추진하기 위하여 러프너(Ruffnur) 소장 주도아래 '특별계획참모단본부'(Headquarters Group of the Special Planning Staff)라는 새로운 참모진을 구성하였다. 이 기구는 '크로마이트' 작전계획을 보다 구체화하여 극동미군사령부의 훈령을 작성, 하달하기 위한 작업을 전담하였으며 이들은 후일 미 제10군단사령부 창설시 핵심 참모요원이 되었다.
상륙작전의 기본계획을 확정한 맥아더 장군은 즉각 상륙군 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다. 그는 상륙부대를 제10군단으로 편성하고 8월 26일에 참모장 알몬드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하고 극동군사령부에서 차출된 참모장교들로써 군단사령부를 편성하였다.
군단에 편성된 주요부대로는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 국군 보병 제17연대, 그리고 지원부대로 구성되었다. 상륙군 부대는 총 70,000여명에 달하였고, 상륙군의 기동개념은 해·공군의 포격 및 폭격으로 상륙지역의 적을 무력화 시킨 다음, 돌격부대인 미 해병 제1 사단으로 하여금 인천시가지를 점령하고 해안교두보를 확보한 후, 가능한 한 신속히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고, 한강남안의 적을 소탕하며, 한강을 도하 서울을 탈환하고, 그 북쪽 고지군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미 제7사단은 후속 부대로써 해병사단의 우측방(남쪽)으로 기동하여 서울 남쪽 고지군과 한강 남쪽 제방을 점령하고 일부부대는 수원방면으로 진출하여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해 오는 미 제8군과 연결작전을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북한군은 월미도에 제226독립육전연대 제3대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연대 예하부대가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인천 시가지에는 신편 제9사단 예하 제87연대(연대장 대좌 김태모)가 8월 12일부터 인천지역 방어임무를 인수하여 담당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월미도 지역에는 제884군부대 예하 1개 대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또한 서울지역에서 경계 중이던 제9사단(-)은 8월 12일에, 그리고 제18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서울을 출발, 낙동강전선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서울지역의 적의 병력은 김포지역의 500명을 포함하여 약 5,500명이었고, 그밖에 9월 4일까지 추가로 증원된 2,500여 명을 합하면 서울-인천지역에서 활동중인 적의 총병력은 약 10,000여 명으로 판단되었다.
인천상륙일자가 다가오자 제7합동기동부대는 9월초에 부산, 일본의 사세 보(佐世保), 고오베(神戶), 요꼬하마(橫濱)에서 상륙군 적재를 시작하여 9월 10일부터 인천으로 출항하기 시작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보병 제7사단은 각각 고오베와 요꼬하마에서 9월 11일에 출항하였으며, 도중에 부산에서 출항한 국군 해병 제1연대와 국군 제17연대 등과 합류하였다.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 스트러블 중장은 기함 로체스터호로 9월 12일 사세보에서 출항하였고, 맥아더 장군은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 그의 작전참모 라이트 준장, 태평양함대 해병사령관 세퍼드 해병 중장 등과 같이 제 90공격기동부대 사령관 도일 해군 소장의 기함인 마운트 맥킨리호에 승선하여 이날 밤 사세보항을 출항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든 함정들이 9월 14일까지는 서해 중부 해상의 약정된 집결지인 덕적도 근해(Point Califor nia)에서 총집결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은 9월 15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02:00, 월미도에 상륙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先遣攻擊隊)가 인천수로로 진입하기 시작하여 얼마 후 미 해군정보장교 크라크(Clark) 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무난히 인천항에 이르렀다. 이들은 05:00 고속항모부대의 함재기들이 월미도와 인천 내륙지역에 맹렬한 공 중폭격을 실시하고, 이어 구축함과 로켓트포함에서 포탄을 퍼붓는 동안 상륙주정(LCVP) 7척에 분승, 제1파를 구성하여 해상에 설정된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 제1해병사단은 D일 아침 만조시간에 맞춰 월미도를 탈취한데 이어, 오후 만조시간에 맞춰 인천시가지에 상륙하였는데, 이날 인천에 상륙한 병력은 약 13,000명에 달했으며 450대의 차량을 포함한 다량의 장비와 보급품도 양륙되었다. 해병 제1사단은 상륙한지 24시간 만에 해안두보를 확보하였다. 해병 제1사단장은 사단지휘소를 인천시가지 동쪽에 설치하고 18:00시에 공격함대사령관으로부터 작전지휘권을 인수하였다.
이처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자, 미 제10군단은 공격 다음날에 인천지역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서울로 진격하여 9월 27일에는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 작전과 더불어 실시된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작전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미 제7사단의 제31연대는 수원비행장을 확보하고 수원비행장 남쪽고지에 차단진지를 형성, 임무를 수행중 9월 26일 22:26분에 오산 북쪽에서 미 8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린치(Lynch)특수임무부대와 연결을 이룸으로써 남침한 북한군의 전력을 일시에 무력화 시킬 수가 있었다.
이 작전은 개전 이후 그때까지 수세 일변도였던 한국군 및 유엔군의 입장을 공세적으로 전환시키게 된 획기적인 작전이었다.
6. 미 제1군단의 평양 탈환작전(1950. 10. 15∼20) 평양탈환작전은 북진 당시 서부전선으로 진격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 기병사단이 중부전선으로 진출한 국군 제7사단 제8연대와 함께 평양을 포위공격하여 북한군 제17사단과 제32사단으로 주축으로 편성된 8,000여명의 혼성부대를 격퇴하고 평양을 탈환한 공격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국군 제1사단은 평양 동측방으로 진입하고 미 제1기병사단은 남쪽에서 흑교리로 진격하였으며,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는 북쪽으로 진입하여 3면에서 포위공격을 가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이 때 국군 제1사단은 맨 먼저 평양시내로 돌입하여 평양 첫 입성의 영광을 안았다.
10월 9일 38선을 돌파한 미 제8군의 최대 목표는 적의 심장부인 평양 탈환이었고, 이 임무는 미 제1군단에게 주어졌다. 이에 따라 평양을 목표로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이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10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만은 국군이 먼저 점령해야한다"라는 지시에 따라 제 7사단과 제8사단도 뒤늦게 평양 점령 경쟁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평양탈환적전 부대는 미 제1기병단과 국군 제1사단이었다.
국군 제1사단은 서부전선에 투입된 단 하나의 국군부대로서 미 제1군단 예하의 다른 부대들과 더불어 북진경쟁을 벌였다. 10월 11일 뒤늦게 고량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국군 제1사단은 보·전·포 협동작전부대로 지정된 사단예비 제12연대(연대장 김점곤 중령)는 한순화(韓順華) 소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를, 연대에 배속된 미 제6전차대대 C중대에 탑승시키고 고랑포 북방 14㎞ 지점인 구화리를 목표로 진격하게 되었다. 보·전·포 협동부대는 10월 12일에 사미천(沙尾川) 하안(河岸)을 따라 일거에 구화리로 진출하였다. 이 보·전·포 협동작전은 상호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데다 협동작전의 경험이 없었던 까닭에 처음에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날 오후부터는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사단의 좌일선인 제11연대는 작일 가장 멀리 서두정장까지 진출한 제2대 대가 적의 저항이 뜸해진 01:00에 행동을 개시하여 8㎞를 더 진격한 다음 고미성(古美城)에서 사미천을 이용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우측의 연대(-1)는 구화리를 거쳐 두곡리로 진출하였다.
10월 13일 국군 제15연대의 선봉 제1대대가 토산리로부터 시변리를 목표로 우회기동을 계속하여 시변리 동쪽 끝부분을 점령하였고, 제15연대(-1)는 제2대대가 시변리 서쪽 구성리(龜城里)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제12연대는 이날 보·전·포 협동작전으로 주간에 25㎞를 주파하여 오후 일찍이 시변리에 도착 제15연대와 연결하고 시변리 북쪽을 차단하기 위하여 외곽으로 진출, 야간 급편방어에 들어갔다. 사단예비가 된 제11연대도 제12연대를 후속 이 날 시변리에 도착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그 이튿날 배속된 미군 M-46패튼 전차에 병사들을 분승 시킨 제12연대를 선봉에 세우고 그 뒤를 제11연대가 초월공격이 가능하도록 후속하게 하였으며, 제15연대는 사단예비로 후미에서 진격하도록 하였다. 사단은 신계-곡산 쪽으로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시변리 북서쪽 미우동 일대에서 T-34전차 6대를 위시한 각종포의 지원을 받는 연대규모의 적을 격퇴하고 이날 밤 신계까지 급속도로 진출하였다.
국군 제1사단장은 10월 14일 신계(新溪)를 점령한 후 그날 밤 사단 작전 회의를 개최하고 상원(祥原)-율리(栗里) 축선 진격계획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제12연대가 우익에서 신계-수안-율리 축선으로 진격하고, 제11연대가 좌익연대로서 신계-능리(綾里)-상원 축선으로 진격하며, 제15연대가 사단예비로써 사단 사령부와 함께 제12연대를 후속하도록 하였다.
10월 15일 아침 사단은 계획대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신계 서쪽 2㎞ 지점인 삼거리로부터 신계-수안 도로를 따라 진격을 개시한 사단 우익의 제12연대는 보·전 협동부대의 선도하에 일몰직전까지 약 30㎞를 진격하여 수안 남쪽 하유리(下有里)까지 진출하였다.
그 이튿날인 16일 제12연대는 하유리를 출발하여 그 북서쪽 수안(遂安)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사단의 좌익인 제11연대는 이 날 일몰까지 좌인접 부대인 미 제1기병사단과의 전투지경선 가까이에 있는 능리로 진출하였다.
10월 17일 사단의 주공인 제12연대가 아침에 수안에서 율리를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율리를 점령한 제12연대 제2대대는 좌일선의 제11연대와의 연결을 위하여 미군 전차 10여대에 분승, 보·전 협동으로 율리 서쪽 17㎞ 지점인 상원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10월 17일, 국군 제1사단은 38도선 돌파이후 일일진출거리로 서는 최고기록인 42㎞를 진격하여 평양 동남쪽 26㎞ 지점 상원-윤리선을 점령한 것이다. 국군 제1사단은 기동력이 열세하고 2일이나 늦게 38도선을 돌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상원선에 도착함으로써 같은 날 황주까지 진출한 제1기병사단을 훨씬 앞질러 평양에 근접하고 있었다.
이 무렵 북한군은 평양 방위사령부(사령관:崔仁 소장)를 설치하고, 대동강 및 동평양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완강한 저항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적의 저항은 그들의 기관이 철수할 시간을 얻고 후퇴하는 부대를 엄호하기 위하여 국군 및 유엔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미 제8군 정보참모부는 인민군의 평양 방위부대 규모를 인민군 제17사단과 제32사단 소속의 잔류병 약 8,000여명 정도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평양 탈환작전은 10월 18일에 포위망을 압축한 미 제1기병사단, 국군 제1사단, 그리고 국군 제2군단에 의해 전개되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황주에서 비교적 기동로가 양호한 경의선 철도와 국도를 따라 북으로 진출하여 평양 남쪽방향으로 공격하게 되었다. 사단장은 황주의 미 제7기병연대를 주공으로 하여 평양공격을 재개하였다. 이날 여명을 기하여 진격을 개시한 미 제7기병연대는 제3대대를 선두로 황주천을 도하하고 평양 남쪽 12㎞ 지점인 흑교리(黑橋里) 근교(近郊)로 진출할 때까지 거의 적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선두가 흑교리 가까이 접근함에 따라 대대는 적으로부터 대전차포와 120미리 박격포사격을 받고 진출이 지연되었다. 이에 돈좌상황을 타개하고 공격기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날 제5기병연대가 투입되어, 5대의 전차와 공병 1개 소대 그리고 중기관총 1개 반으로 증강된 F중대(중대장 James H Bell 중위)를 선두로 흑교리에서 미 제7기병연대를 초월하여 평양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F중대는 평양남쪽으로 진출하여 대동강 지류인 무진천(戊辰川)을 도하하여 11:02분에 동평양을 점령하였다.
국군 제1사단도 10월 18일 아침 평양탈환을 위한 마지막 공격을 재개하였다. 사단의 주공인 제12연대는 배속 받은 미 제6전차대대 2개 중대와 보·전 협동으로 초귀동에서 제11연대를 초월하여 대동리를 목표로 진격하였다. 연대가 대동리 못미처 관음산과 반용산 사이의 애로지역을 막 통과할려고 할 때 2개 대대 규모로 예상되는 적의 사격을 받았다. 이에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급히 작전회의를 개최하고 교착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연대는 보·전 협동하에 야간공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23:00경 제1, 제2대대가 공격의 선봉에 나서 야음을 이용, 도섭으로 상원강을 도하하고 적의 진지가 있는 능선 하단부까지 진출하였으나 적의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날이 밝았다.
10월 19일, 사단의 주공 제12연대는 이날 여명을 기하여 각종 지원포병과 전차의 엄호하에 적진지에 돌격을 감행하여 목표를 점령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작일 강력히 저항하던 적진지에는 적이 이미 진지를 포기하고 도주한 후였다. 이리하여 제12연대는 인민군이 평양외곽에 구축한 3개의 저지선중 2개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제1, 제2, 제3대대 순으로 된 종대대형을 형성하여 낙랑평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연대의 선두부대가 동평양 못미처 오류리(五柳里)에 이르렀을 때 약 2개 대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아 연대는 진격이 돈좌되었다. 이곳이 평양 외곽에 설치한 인민군의 3번째 저지선이었다. 북한군의 3번째 평양 방어선을 돌파한 제12연대는 동평양까지 순조로운 진격을 계속하여 동평양의 선교리(船橋里) 로터리까지 진출함으로써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한 부대가 되었다. 또한 제11연대는 이 날의 최종목표인 문수리 비행장을 점령하였다. 제15연대는 전날 늦게 대동강 상류에 진출하여 도섭지점을 대대별로 확보하여 도강을 완료한 다음 본평양 모란봉과 김일성대학을 목표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미 제5기병연대 제2대대 F중대가 양각도로 진출하고 있을 때 제2대대의 잔여주력은 무진천을 건넌 다음, 우측으로 우회하여 대동교로 향하였다. 이때까지도 대동교는 폭파되지 않았으나 제2대대의 선두부대가 교량가까지 접근하는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교량의 중앙부분이 대동교 북쪽에 배치된 인민군에 의하여 폭파되었다. 이로써 대동교와 대동강 철교가 모두 절단되었다. 바로 이때 제5기병연대 제2대대는 이들보다 조금 앞서 대동교 동쪽 100m 거리인 선교리(船橋里) 로터리에 도착하여 도섭장소를 찾고 있던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와 만났다.
모란봉을 탈취한 제15연대는 본평양의 중심부로 진출하여 북한정권의 주요 행정기관을 점령하는 한편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패잔병의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연대직할대(교육대)는 전술한바와 같이 미림비행장을 거쳐 문수리 비행장을 점령하고 뒤이어 도착한 제11연대에 비행장을 인계한 다음 비행장 북쪽 1㎞ 지점의 나루터에서 대동강을 도하하여 기 점령한 모란봉에 진출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와 제12연대를 동평양에, 그리고 제15연대가 본(本) 평양을 점령함으로써 평양 탈환 주역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육군 작전명령 제218호에 의해 평양으로 공격하던 국군 제2군단 예하부대중 제7사단 제8연대(연대장 김용주 대령)도 제15연대를 후속하여 본 평양에 진출하였다. 제8연대는 10월 18일 아침 율리를 출발하여 21:00경 삼등(三登)에 도착하였다. 10월 19일 아침 제8연대는 삼등을 출발하여 이미 제15연대가 통과한 진로를 따라 삼산리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어 두팔로 소총을 머리위까지 떠받들고 도하하였으며, 13:00 조금 지나 도섭장 서북쪽 노산리(魯山里)로 진출하였다.
이곳은 평양-강동간 도로의 길목이며 제15연대가 오전에 통과한 곳이었다. 연대는 그곳에서 접적 없이 서쪽으로 진격하여 해질 무렵에는 김일성대학으로 진출하였으나 이곳도 제15연대 제 3대대가 점령한 지역이었다. 다시 그곳에서 모란봉을 향해 진격을 재개하여 모란봉-기림리(서평양역)선까지 진출하였다. 또다시 시내로 진입하였으나 이미 국군 제1사단이 주요시설을 점령한 뒤였으므로 모란봉으로 복귀하였다.
10월 20일 아침이 밝자 동평양에 있던 제11연대와 제12연대가 지난밤에 미군공병이 준비한 M-2 단정과, 대동교와 반월도 사이에 가설한 부교를 이용하여 대동강을 도하하였으며 전날 본 평양으로 진출한 제15연대와 합류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이날 10:00를 기하여 평양시를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국군의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가두를 메웠다.
미 제1기병사단도 국군 제1사단에 이어 대동강을 도하하였다. 먼저 제5 기병연대가 공격단정과 부교를 통해 동평양에서 본평양으로 이동한데 이어 사단주력도 도하를 완료하였다. 제1기병사단은 본 평양에 진출 후 제5기병 연대가 평양시 남쪽외곽에, 제8기병연대가 평양시 북쪽 외곽에, 그리고 제7 기병연대가 이날 야간 강행군으로 진남포로 향하였다.
북한의 심장부 평양을 목표로 한 미 제1군단의 평양탈환작전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한 이래 만 11일만인 10월 19일 국군 제1사단의 제11연대와 제12연대,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제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그 뒤를 따른 국군 제7사단 제8연대가 본평양을 각각 점령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은 평양에서 후퇴하여 청천강 북쪽으로 물러서게 되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한·만 국경선으로 향한 진격작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심장부를 점령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지 못하였다. 즉, 북한의 주요 수뇌부는 이미 평양을 버리고 함경도나 중국지역으로 들어간 후 중공군의 지원을 요청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7. 국군 제6사단의 초산전투(1950. 10. 23∼26) 초산전투는 한·만 국경선으로 향한 진격작전이 개시된 후,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희천으로부터 초산으로 전진하던 중, 초산천 연변에서 북한군 제8사단 소속의 혼성부대를 격퇴하고 압록강연안의 초산을 탈환한 공격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제7연대는 10월 26일 고장을 출발하여 초산으로 향하던 중 초산천 연변에서 저항하던 북한군 연대규모의 혼성병력을 2시간 동안의 교전 끝에 격퇴시킨 후, 초산으로 돌입하여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한·만간 국경선에 도달한 최선봉부대가 되었다.
10월 24일 국군 제2군단 예하 제6사단장 김종오(金鐘五) 준장은 군단명령을 수령한 후 제7연대를 우, 제2연대를 좌, 제19연대를 예비로써 초산-벽동간의 국경선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제7연대는 초산을, 제2연대는 온정리를 경유 벽동을 탈환하라고 구두명령을 하달하였다.
제7연대는 사단작전 명령에 따라 초산을 점령하기 위한 최초 목표로 회목동을 향하여 24일 07:00 진격을 개시하였다. 희천을 점령했던 제1대대와 하행동에 있던 제2대대는 근거리 접근로인 산간도로를 따라 도보로 회목동(檜木洞)으로 전진하였으며 구장동에 있던 제3대대는 도로를 따라 하월림을 경유하여 역시 회목동으로 전진하였다.
한·만 국경선을 향한 제한 없는 총공격은 서부전선에서나, 동부전선에 서나 오직 누가 먼저 압록강이나 두만강에 먼저 도달하느냐에 초점이 집중되어 있어 부대간의 협조가 결여된 채 산간협로를 따라 진격의 속도를 재촉하고 있었다.
제6사단 제7연대는 희천을 떠나 35㎞ 북쪽인 극성령(棘城領)을 넘어섰다. 제7연대(-)는 극성령을 너머 10월 25일 오전에 회목동에 도달하였다. 제7연대는 계속해서 회목동에서 고장으로 향하였고 그 남쪽에서 1개 대대 규모의 인민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이날 18:30에 고장을 탈환하였다. 이제 국경선까지는 불과 30㎞ 밖에 되지 않았다.
이튿날 10월 26일 07:00 제7연대는 드디어 압록강을 향하여 마지막 진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날 새벽에 첫눈이 내려 산야가 하얀 눈으로 엷게 뒤 덮인 가운데 전 병력이 차량화된 제7연대 제1대대가 초산(楚山)을 향해 질주하였다.
이 무렵 초산 일대에는 연대규모의 북한군이 집결하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 제8사단을 지휘하던 오백룡(吳白龍) 소장이 남쪽에서 계속 밀려오는 패잔병을 수습하고 있었으며 그 병력이 연대규모에 달했다.
초산 남쪽 6㎞ 지점의 애로지형에 배치된 이들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대대는 차량에서 하차하여 공격을 개시하였고 대대의 전 화기로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제 더 물러날 땅이 없는 그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아 무려 한 시간 반에 걸친 교전 끝에 그들은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교전을 끝으로 인민군의 저항은 사라지고 제1대대는 지체 없이 초산읍으로 돌입하였다. 그러나 시가지는 텅 비어 있었고 압록강은 보이지 않았다. 초산읍에서 압록강까지는 6㎞를 더 전진해야만 했다. 대대는 국경선을 향하여 신속히 이동하였다. 신도장(新島場) 일명 앙토동(央土洞)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압록강의 푸른 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10월 26일 14:15 국군 제6사단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압록강에 다다른 것이다.
장병들은 지난 9월 16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지 41일 만에 조국통일의 최선봉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을 통틀어 가장 먼저 국경선에 도착 했다는 자부심과 긍지로써 온통 마음이 들떠 있었다. 대대는 신도장에서 만주 통천구(通川溝)로 통하는 뗏목나루가 있음을 발견하고 57미리 대전차포로 이를 파괴해 버렸다. 대대는 제일 먼저 국경선에 도달한 제1중대를 신도장을 중심으로 배치하여 압록강변 경계임무를 수행토록 하고 대대주력은 초산으로 일단 철수하였다.
이보다 하루 앞서, 제7연대가 고장으로 진격하던 10월 25일, 온정리에서는 제2연대가 벽동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여 북진(北鎭)으로 진격하던 도중에 동림산 기슭에서 적과 조우, 격전을 벌이었다. 이들이 북한군일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곧 중공군으로 밝혀졌다. 선두인 제3대대가 분산되자 예비인 제2대대가 투입되었으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이날 오후 포로가 된 중공군 병사는, "그들이 10월 17일부터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제2연대는 26일 중공군에게 온정리를 피탈당하고 퇴로가 차단되어 붕괴된 채 태평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41일 만에 국경선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국경선에 위치한 압록강변의 초산을 확보하여 북진통일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전 국민들에게 큰 감격을 안겨주었다.
9. 미 제23연대의 지평리전투(1951. 2. 13∼16)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의 1951년 2월공세 당시에 미 제2사단 제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 대대와 함께 원주 북방의 지평리에서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 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하게 됨에 따라 중공군 제39군의 사면 포위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병력을 전면방어태세로 배치하여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고립상태에서 4일 동안이나 막아 내었으며, 그 후 미 제5기병연대가 후방으로부터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그곳까지 진출함으로써 전선의 연결이 이루어 져 중공군의 2월공세를 막아 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엔군의 썬더볼트 작전과 라운드업 작전으로 서부전선에서 진격이 한강선에 육박하고 있을 무렵,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의 후퇴를 만회하기 위하여 미 8군의 예측을 뒤엎고 그 동안 주력을 중부전선으로 은밀히 이동시킨 후, 13일 횡성을 탈취하자 공격방향을 지평리로 지향하였다. 중공군은 2월13일 제39군 예하 3개 사단으로 지평리의 아군 진지를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적의 주요 목표가 된 지평리는 미 제9군단과 제10군단을 연결하는 지점으로서 중부전선에서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만약 이곳을 잃는다면 서부전선에 있는 아군 주력의 측방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평리는 2월 3일 이후 미 제2사단 제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대 대와 함께 미 제378포병대대, 미 제82대공포대대 B포대, 미 제503포병대대 B포대 지원하에 전면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총 병력은 5,600명이었다. 지평리 주위는 280미터 내외에 여러개 고지가 있어서 직경 5킬로미터의 사주방어를 편성하기에 적합하였다. 그런 3개 대대의 병력이 담당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하였으므로 연대장은 진지를 축소시켜 마을을 중심으로 1.6킬로미터의 방어선을 선정하였다.적이 지평리를 공격할 때 미 제10군단 주력이 횡성에서 철수한 뒤였기 때문에 미 제23연대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갔다. 이에 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여주로의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리지웨이는 지평리를 잘 선정된 전투장으로 보고 이곳에서 중공군의 병력을 최대한 흡수하여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을 집중함으로써 중공군을 격멸하려 하였던 것이다.
2월 13일 밤 지평리를 둘러싼 3-5개 사단의 중공군은 공격을 개시하였고, 제23연대는 전 화력을 집중하여 사주방어를 실시하는 치열한 전투가 15일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중공군의 진지돌파에 따른 백병전에 맞서 싸웠다. 특히 이 때 프랑스의 몽클라(Ralph Monclar) 대대는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싸움으로써 중공군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에 제23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예비로 확보했던 돌격중대까지 투입하면서, 적과 똑 같이 함성과 수류탄, 그리고 총검으로 적에 대항하였다. 이는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싸운 처절한 전투였다. 연대장인 프리만 대령도 병사들과 함께 백병전으로 싸우면서 입은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후송을 거부해 가며 전투를 지휘하였다.
리지웨이 8군사령관도 지평리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공군 지원 및 보급품을 공수해주었다. 그리고 14일 전투가 절정에 달하자 미 제9군단으로 하여금 증원부대를 지원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군단예비로 있던 크롬베즈의 제5기병연대가 2개 전차중대와 2개 포병대대를 배속받아 지평리에 투입되었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15일 적의 무차별 공격을 받으면서도 미 제 23연대와의 통로를 개척하였다.
따라서 사면초가 상태에서 악전고투하던 제23연대는 구원되었고, 중공군은 모두 퇴각하였다. 이 때 중공군이 물러간 미군진지 주위에 흩어진 확인된 중공군의 시체만 해도 2,000여구에 이르렀다. 지평리 전투는 1950년 중공군 개입이래 처음으로 중공군 대규모 공격에 물러서지 않고 싸움으로써 진지를 고수한 최초의 전투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어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몰아붙이는 공세가 실패한 것도 처음이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하여 자신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38도선 회복을 위한 작전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10. 국군 제3군단의 현리전투(1951. 5. 16∼22) 중공군 공세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현리 전투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5월 공세) 당시, 인제 남방 가로리에서 가리봉간을 방어 중이던 국군 제3군단(제3, 9사단)이 중공군 2개군(제1, 27군)과 북한군 3개 사단 (제6, 12, 32사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한 후,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하게 된 철수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은 국군 제3군단 정면에서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서측방으로 투입하여 군단의 주보급로인 오마치 고개를 점령함으로써, 퇴로를 차단당한 국군 제3군단은 전방의 압력에 밀려 현리에서 분산된 채 산악지대를 따라 70㎞를 후퇴한 후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4월 공세에서 막대한 7만명에 달하는 인명손실만 입었을 뿐, 미 제8군도 격파하지 못했고, 서울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공세를 그치게 되었다. 이틈을 이용하여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38도선 회복을 위한 반격을 결심하고, 5월 1일 모든 부대에 위력수색을 실시하면서 반격을 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유엔군의 위력수색결과 방어전면 15킬로미터까지 적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적의 대공세로 상실하였던 지역의 절반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5월 10일 이후부터 중공군이 전 전선에 걸쳐 활동을 강화하면서 공세준비를 하고 있는 징후들이 발견되었다. 적은 5개군(15개 사단)을 양구-인제지역에 집결하여 재공세를 준비하였다. 이에 유엔군 각 부대는 4월 공세중 설정한 서울방어선의 진지를 강화하고 그 전선을 고수하기로 결의하였다. 유엔군이 220㎞의 전 전선에서 진지방어를 고수하기로 결의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미 제8군은 국군 9개 사단, 미군 6개 사단, 영국군 2개 여단으로 주저항선을 점령하고, 군 예비로는 군단예비를 겸하던 미 제1군단의 미 제3사단과 미 제9군단의 제187공정연대를 두고 있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적의 공세가 개시될 무렵 주공방향을 간파하게 된 밴플리트 장군은 신속하게 미 제3사단을 중동부 전선으로 증원하였다.
적의 증원은 5월 15∼16일 밤 개시되었다. 중공군이 첫 돌파를 시도 한 것은 미 제10군단의 우일선인 인제지역의 국군 제5, 제7사단 정면이었다. 이곳에서 국군은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삽시간에 전선이 붕괴되었다. 우측에 인접한 국군 제3군단도 한계리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공군을 막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돌파는 의외로 신속히 전개되었다.
당시 현리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3군단은 사령부를 하진부리에 두고 좌전방에는 제9사단이 미 제10군단과 경계를 이루고, 우전방에는 제3사단이 국군 제1군단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지역내 현저한 도로망으로는 인제-현리-오마치-침교-창촌-속사리에 이르는 31번 국도로 유일한 보급로로 매우 중요한 작전의 생명선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 공산군이 중동부 지역에서 한국군 부대를 목표로 운용할 수 있는 부대로는 중공군 제9병단과 북한군 제2, 제3, 제5군단(18개 사단)이었다. 중공군은 신남-현리 일대에서 국군부대를 포위 섬멸하기 위하여 이들 18개 사단을 운용하여 3중 양익포위작전으로 국군 4개 사단을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5월 16일 18:00경 공격을 개시한 중공군은 국군 제7사단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제7사단 전방의 2개 연대를 붕괴시킨 후 계속 진출하여 국군 3군단의 퇴로가 되는 오마치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5월 17일 07:30경 중공군의 오마치 점령부대는 처음 1개 중대 규모였으나 계속 증강되어 오전에는 대대규모, 오후에는 연대규모, 야간에는 1개 사단규모로 확대되었다. 또한 이 날 오후에는 오마치 10㎞ 후방 침교에 대해서도 적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국군 제3군단은 5월 17일 오전 중에는 대책도 없이 전방부대들이 현리일대로 집결하는가 하면, 오후에는 군단장 상황보고 내용인 오마치 돌파방안에 대한 검토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후 국군 제3, 제9사단에서 1개 연대식을 차출하여 21:00 오마치 돌파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실기를 잃은 공격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오마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각 부대들은 통제를 상실한 채, 무질서한 철수를 하게 되었다. 철수하는 과정에서 일부 간부들이 계급장을 떼어버린가 하면, 병사들은 무기를 버린 채 도망가는 등 혼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제3사단장 김종오 준장과 제9사단장 최석 준장, 그리고 제9사단에 군단장 대리로 훈장수여식에 왔다가 미처 복귀하지 못했던 군단 참모장 심언봉 준장 등도 있었다.
이러한 국군 제3군단의 무질서한 후퇴와 이에 따른 적 부대들의 추격은 창촌-광원리-하진부리에 이르는 70㎞를 가서야 끝을 보게 되었다. 5월 19∼20일까지 하진부리에서 수습된 병력은 제3사단이 34%, 9사단이 40%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제3군단이 입은 피해는 중공군의 최초 계획에 비하면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만약 북한군 3개 군단이 정상적으로 진출하여 계획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면, 방대산 및 계방산 일대에서 대량의 살육전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 전투로 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계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을 뿐 아니라 주요 장비를 거의 파기 또는 유기하게 되었으며, 북한군과 중공군은 속사리와 강릉지역에 이르는 큰 돌파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국군 제3군단의 패퇴의 책임을 물어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5월 26일부로 제3군단을 해체하고 기존의 한국군 제1군단에 대해서도 육군본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통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도 이 전투를 통해 아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대부대를 포위한다는 것이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엔군사령부도 계속적인 북진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양측은 휴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하게 되었다.
11. 국군 제9사단의 백마고지전투(1952. 10. 6∼15)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 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이 전개되었던 시기인 1952년 10월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제38군 소속 3개 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아 이를 물리치는 동안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제1포병단의 화력지원과 유엔 공군의 항공근접지원하에 완강히 대항하여 중공군 10,000여명을 격멸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1952년은 교착된 전선에서 대체로 큰 변화가 없었다. 후반기에도 쌍방은전 전선에 걸쳐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으나 대규모의 전면공세를 실시할 태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휴전 회담장에서는 서로 유리한 휴전조건을 쟁취하려는 협상이 진행 중에 있었기 때문에 쌍방은 그 결과를 주시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6월초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지역에서 소규모 제한공격인 소위 카운터(Counter) 작전을 실시하여 미 제45사단이 진지정면의 주요 감제고지를 점하고 있는 적의 전초들을 탈취한 후 아군의 방어진지를 강화하였다. 그 작전 결과 아군은 역곡천 북안의 백마(White Horse, 395)고지, 화살머리(Arrowhead, 281)고지, 티본(T-Bone, 290)고지와 역곡천 남안구릉의 포크찹(Porkchop, 255)고지, 불모(Old Baldy, 266)고지 등 11개 목표를 장악하여 전초진지를 강화하였으며, 이로써 차후 보다 유리한 지형에서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적의 역습이 시작됨에 따라 이들중 중요 전초에서의 쟁탈전은 계속되었고 이어 전 전선에 걸친 전초진지 쟁탈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전투는 대체로 피아간에 주진지의 변동이 없는 가운데보다 유리한 전초진지를 장악하여 각기 방어태세를 강화하려는데 주안이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52년 10월 6일부터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 혈전을 수행한끝에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군단 좌익의 제9사단은 이 전투가 벌어지기 1년전인 1951년 10월 17일부터 철원지역의 주저항선에 투입되어 좌로는 백마고지, 우로는 중강리까지 11㎞의 철원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38군(江擁輝) 예하 제114사단 제340, 제324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제113사단이 좌인접 미 제2사단 정면에, 제112사단이 제38군 예비로서 수정덕산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왜식장총, 다발총, 기관단총, 중기관총, 무반동총, 박격포 등으로 장비되고 보급. 훈련 등도 양호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사단의 주저항선은 대부분 철원평야를 가로지르는 개활지였으며 다만 좌단의 395고지 부근만 구릉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적이 효성산(619)을 비롯한 유리한 고지들을 장악하여 사단 방어지역을 감제하고 있었으므로 전반적으로 아군은 방어에 취약하였다. 특히 주저항선 5㎞ 전방에 위치한 봉래호는 작전지역의 역곡천을 범람시킬 수 있어 작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사단장 김종오(金鐘五) 소장은 9월 22일부로 좌일선에 제30연대, 우일선에 제29연대를 배치하고 제28연대를 예비로 확보하는 한편, 그밖에 배속받은 제51연대도 대대단위로 운용하면서 주저항선을 방어하였다. 이중 백마고지 방어를 담당한 제30연대는 395고지에 제1대대를, 중마산 일대에 제2대대, 역곡천 남안에 예비 제3대대를 각각 배치하고 있었다.
사단은 당시 적의 기도를 백마고지를 탈취하여 철원평야를 제압하는 동시에 차기대공세를 위한 발판을 구축하며 철원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지역을 통제함으로써 중부전선에서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고 아군을 크게 위협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이무렵 전 전선에 걸쳐 적의 공세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정찰과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차 10월 3일에 중공군 군관 1명이 귀순하여 "중공군 제114사단이 10. 4∼6일 사이에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에 사단은 백마고지 방어병력을 2개 대대규모로 증강하고 사단예비로 하여금 즉각 역습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정찰활동을 강화하였다.
10월 6일 아침부터 국군 제9사단 정면에 포격을 집중하던 적은 봉래호뚝을 파괴하여 역곡천을 범람시키며 중공군 제38군 제114사단이 19:15 제 30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백마고지 일대로 공격해 들어왔다. 적은 제340연대가 1개 대대를 고지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연대는 이 날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중공군은 이날 밤 백마고지 공격에 앞서 좌인접 미 제2사단 방어지역이며 백마고지 서남방 3㎞ 지점의 화살머리고지(281)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는 백마고지에 대한 양동작전으로 판단되었으며, 이 고지에 배치된 프랑스대대는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근접전투를 벌여가며 적의 파상공격을 방어하였다.
다음날 밤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 중공군은 2개 대대로 전초진지를 포위하면서 계속 압력을 가하였으며, 국군은 제30연대가 일시 고지 정상으로부터 철수하였으나 약 2시간후 사단으로부터 탈환명령을 받은 제 28연대가 역습을 감행함으로써 이를 다시 탈환하였다. 연대는 탈환 즉시 중공군의 반격에 대비하여 진지를 강화하는 작업에 주력하였다.
10월 8일 새벽 고지일대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자 적은 제5차 공세를 재개하였다. 이날 적은 전날까지의 공격이 여의치 못하자 중공군 제38군 예비인 제112사단 제334연대를 투입하였던 것이다.
국군 제28연대 장병들은 사력을 다하여 이에 맞섰으나 짙은 안개로 포병 및 항공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08:10 주봉을 적에게 피탈당하고 말았다. 사단은 17:00 제28연대 제3대대를 투입 또다시 반격을 개시하였다. 대대는 적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장장 8시간여의 격전을 거듭한 끝에 23:05 마침내 주봉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 제30양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사단은 적포로의 진술을 기초로 적의 공격이 당분간 계속되리라 판단하고, 제 29연대를 백마고지에 운용할 복안으로 사단예비로 전환하였다. 9일밤 자정이 지나면서 중공군은 또다시 집요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근 3시간에 걸친 파상공격으로 밀어닥친 적은 새벽 03:00 고지주봉과 그 우측 능선의 일부를 다시 수중에 넣는데 성공하였다.
날이 밝자 사단은 적이 점령한 고지정상에 17,700발의 포탄과 항공기에 의한 화력을 집중투하하고 이 날밤 제29연대로 하여금 역습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자정 무렵 고지 주봉을 점령하고 적을 격퇴하였다.
중공군도 결코 이 고지만을 양보할 수 없다는 기세였다. 10일 새벽 적은 정상을 향하여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고 있었으며 04:00무렵부터 피아간에는 수류탄 투척전과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처절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나 국군 제29연대 제1대대가 주봉에서 9부능선으로 철수한 후 제2대대의 증원을 받은 후 역습을 감행, 이날 06:30 다시 정상을 탈환하였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 중공군 제38군은 예하 사단을 축차로 철수시켜 전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편 화살머리 고지의 프랑스대대도 많은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끝까지 진지를 확보하였고, 이로써 좌익으로부터 백마고지에 미치는 적의 위협을 차단하여 제9사단의 백마고지 방어에 기여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여일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중 7개 연대를 투입하여 그중 1만 여명이 전사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제9사단은 전투기간중 적시 적절한 예비대의 투입 및 부대교대 등으로 부대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목표 탈취를 위한 투지를 견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포병 및 항공화력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9사단은 철의 삼각지를 지배하기 위한 적의 전략적 기도를 꺾고 끝내 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철의 삼각지대의 좌변 일각인 철원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되었으며, 중공군 제38군은 그들 제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12. 맺 음 말 한국전쟁은 한국에게 있어 가장 준비가 안 된 최악의 상황에서, T-34전차 와 SU-76자주포를 비롯한
현대식 장비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부대로 편성된 북한군과 3년 1개월여 동안 싸운 처절한 전쟁이었
다. 이럴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개전 초기 한국군은 모든 분야에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치른 전쟁
이었다. 이로써 개전 초기 북한군은 기습의 효과를 최대로 달성하였고, 국군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일 전역으로는 어느 전쟁 못지않게 피해도 많았다.
이처럼 한국전쟁 초기 국군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첫째, 부대편제도 전투를 위한 편제가 아니라 평시 부대관리에 적합한 부대구조였다. 북한이 전쟁을 준비함에 있어 전쟁지도본부에 해당되는 민족 보위성(국방부)과 군단간에 전선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선사령부와 사단간에 군단사령부를 설치하여 작전통제의 효율성을 기하는데 비해 국군은 그렇지 못했다. 국군에게는 국방부와 육군본부, 그리고 사단이라는 부대구조로 편성되어, 당시 육군본부가 중간 사령부인 군단도 없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 8개 사단을 통제하는 것은 지휘의 폭이 너무 컸을 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작전통제를 하기에는 어려웠다. 이는 초기 전투 신속한 전황보고와 이에 따른 육본 조치가 신속한 전달되는데 커다란 걸림돌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에 전황을 파악하여 건전한 판단에 의해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될 총참모장이 전선으로, 경무대로, 국방부로, 국회로 뛰어 다녔지만, 결과는 개전 3일만에 서울 실함으로 나타났다.
둘째,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전쟁을 불과 몇 개월 내지는 며칠을 남겨놓고 군 수뇌부에 대한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4월 22일과 6월 10일 두 차례에 걸쳐 육군본부의 참모부장과 핵심국장(작전 및 인사), 그리고 사단장들을 교체하였던 것이다. 4월 22일에는 1사단장을(유승열에서 백선엽으로)을 교체하였고, 6월 10일에는 전방의 전선을 맡고 있는 4개 사단장 중 3개 사단 인 제8사단(이성가 대령), 제7사단(유재흥), 제6사단장(김종오 대령)을 교체하였다. 이로써 4월에 실시한 1사단장을 포함하면 전방 4개 사단장이 개전 2주 ∼2개월 사이에 전부 교체되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북한은 이미 사단급 훈련을 마친 상태에서 6월 10일 모란봉 극장에서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 회의를 열어 전쟁에 대한 마지막 점검을 하면서 최고사령부와 사단의 중간제대인 군단사령부를 설치하는 등 남한과는 대조적인 조치를 하고 있었다.
셋째, 북한군의 남침이 임박하다는 정보판단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에서는 4개 연대를 예속 변경시켜 재편성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제7사단은 개전 초 엄청난 전력손실을 보게 되었다. 6월 15일 7사단 제3연대를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변경시키고, 충남 온양에 있던 제2사단 제25연대를 제7사단으로 예속변경시킴으로써 제3연대는 즉시 서울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나, 25연대는 숙영지 문제로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까지 온양에 주둔해 있었다. 또 6월 20일 수경사 제2연대를 제6사단으로, 제6사단 8연대는 수경사로 예속 변경시켰으나 제2연대가 제8연대와 임무 교대하여 제6사단의 우일선 방어임무를 완전히 인수한 날자는 바로 전쟁 전날인 6월 24일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미 38선 일대에 부대 배치를 완료한 6월 23일과 비교하면 전쟁의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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