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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글쓰기 - 수필문학 강좌 - 최원현
[6강] 무엇을 쓸 것인가 ②
최원현/수필가.문학평론가
무엇을 써야 할까?
이 시간에는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수필을 썼을까, 과연 무엇을 나타내려 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썼는가를 한 번 예를 들어봅니다. 자료실의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에서 최소한 3 작품은 읽으셨을 것으로 믿고 강의를 진행 합니다. 혹시 아직 못 읽으셨다면 너무 강의 순서 및 시간에 구애 받지 마시고 수필을 먼저 읽으신 후 이 제5강을 수강 하시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입니다. 수필 공부는 자기를 쌓아가는 일입니다.
[자료]
[나의 수필론] - 내 그리움의 구체화, 형상화
- 최원현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을 중심으로 -
1. 1인칭 문학
문학이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특히 우리 삶의 이야기를 사건화 시키고, 위기감을 부여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들이 산문문학이다.
그중 수필은 1인칭 문학으로써 허구가 아닌 실제 체험한 자기만의 이야기요, 설혹 직접적인 자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의미화 되다보면 나로 귀결되어 독자는 결국 나를 통해서만 나와 동화되고, 감동하고, 공감하게 된다.
내 수필의 주제는 그리움이다. 그리고 이 그리움은 두 개의 갈래로 분류된다.
하나는 구체화되지 못한 채 강물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는 이미지만의 그리움이고, 하나는 어린 날의 추억에서 발아(發芽)하여 현재라는 텃밭에서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이를테면 정착된 공간을 확보한 상당히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그리움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相思花)처럼 현실화 될 수는 없으되 그렇다고 떨쳐버릴 수도 없이 사고(思考)의 영역 속에서만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이고, 후자는 현실 속에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을 말한다.
하지만 구체적(사실적) 형상화도 내게 큰 이미지로 존재하면서 무수히 많은 또 다른 형태의 그리움으로 살아나는 것처럼 독자에게도 형질은 나와 같되 형상은 독자의 것으로 새롭게 구현되어 읽는 이의 몫이 되어질 수 있도록 배려하려는 것이 내 수필적 의도이기도 하다.
어차피 삶이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실현되고 반추(反芻)되며 또 그 삶의 맛이나 향기도 독자나 작자의 개인차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고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비슷한 삶이라도 렌즈의 초점을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맺히게 되는 사상(事象)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한 곳에서의 체험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받는 느낌은 꼭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수필도 형상화(形象化)하고, 의미화(意味化)하고, 사실화(事實化)된 그리움의 실체들이 독자와 만났을 때 개인차 내지 환경에 따라 감동을 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필은 분명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로 돌아오는 1인칭 문학이다.
2. 공감(共感)과 만남의 문학
수필은 그 출발로부터 도착까지 사이에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나-독자-를 새롭게 포섭하고, 확충하면서 함께 절대 공감하는 문학이다.
수필을 본격적으로 써온 지 20여년, 그 동안 수필집도 몇 권 내었고 작품도 꽤 많이 썼다. 그러나 아직도 '수필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하고 얼마큼이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으니 이를 어쩌랴. 내 재주 없음인가, 아니면 워낙 수필이 그렇게 쓰기 어려운 장르의 문학이어서 인가 쉽게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나는 수필을 수많은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 만남의 상황과 감동들이 '나'라는 대롱(관)을 통과하여 나오는 동안 형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맛깔스러움과 멋스러움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수필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 글이 아니라 깨닫게 하는 글이다. 그래서 읽는 이가 맛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속으로 스며들며 가슴속에 물줄기를 내는 글, 그런 글이 수필이다.
나의 수필은 한 겨울의 꽁꽁 언 땅 밑 속으로 깊이 깊이 흐르는 따스한 물줄기가 되고 싶다.
화려하기보다는 단정함을, 강하지 않으면서도 약하지는 않은, 수수하면서도 정갈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들꽃 같은 모습에, 나름의 향기를 가득 품은, 그래서 못 견디게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도 어쩌다 한 번씩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그런 수필이고 싶다.
사실 수필이란 거울을 보며 그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나'와 '나'의 만남일 수 있다. 허나 그 거울 속의 모습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조금은 색다른 만남이랄 수 있겠다.
자기의 생활이나 사상과 감정들을 글 솜씨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수필이라면 그 사람의 생활이나 사상이나 감정은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언가를 남겨야 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작자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공감대가 아닐까.
재미없고 철학이 담겨있지 않은 신변잡기 같은 생활이야기를 이 바쁜 세상에 누가 무엇 하러 읽어줄 것인가. 최소한 읽는 이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읽은 이가 어느 정도의 맛과 멋은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구성과 표현을 치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평범 속에서 비법을 드러내는 글이 수필이라지 않는가.
가능한 한 어렵고 전문적인 표현보다는 쉽고 아름답고 친근감이 있는 순수한 우리말 표현을 애용하고, 강한 주장이나 제시보다는 내 생각을 우회적으로 부드럽게 펼쳐내어 읽는 이가 자신도 모르게 그 짧은 한 편의 글 속에서 작가의 생각에 동화(同化)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필을 쓰는 사람의 자세일 것 같다.
[자료1] 나이 값(수필/최원현)
불혹의 나이에 다가들면서도 나는 짐짓 내 나이를 잊곤 한다.
사람이란 영원한 미완의 존재이긴 하겠으나 나의 이런 어른스럽지 못함은 때로 나를 불안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사람은 어렸을 때는 나이 많은 어른이 부럽고, 정작 나이가 많아지면 젊어지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동안(童顔)을 가진 것도 아닌데 주위의 사람들은 내 나이를 두세 살에서 대여섯 살까지 낮춰 보기도 한다.
거기다 결혼을 빨리 하기도 했지만 아이들 나이를 얘기하면 더더욱 믿을 수 없다는 듯 새삼 나를 쳐다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었다는 말은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의미일 테고, 그만큼 매사를 자기 경륜에 맞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의미인 것처럼, 공자도 나이 사십이 되면 흔들림이 없다고 했으니 모든 일을 경망함 없이 원만하게 잘 처리할 수 있음이리라.
헌데 내게는 어른스러움보다는 아이스러움이 더 많은 것 같으니 이를 어쩌랴.
문학 동인인 B시인은 나의 그런 면이 좋다고 하지만 애늙은이나 늙은 아이나 거부감을 주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옛날에는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장가를 못 가면 상투를 하지 못했고, 또 어른 취급을 받지 못했다. 반대로 나이가 어리더라도 장가를 가면 상투를 틀고 어른 대접을 받았다.
그것이 한 형식에 불과할 지는 모르나 내 나이는 마치 장가 못간 늙은 더벅머리 총각처럼 생각이 됨은 이 나이에 맞게 내 할 일을 못하고 있음에 대한 자격지심은 아닐까.
또한 남들이 나의 나이를 그렇게 낮게 보는 것도 그만큼 내가 나이에 맞는 어른스러움을 갖추지 못하고 있고, 내 외형적으로 발산되는 체모가 나이 이하란 얘기도 될 것 같다.
사실 사람이 나이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언젠가 모 방송국에서 한국인의 표준을 찾는다고 했다.
나이, 학력, 월수입, 자녀수, 직업 등을 컴퓨터가 계산하고,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나는 그걸 보면서 그 조건에 나를 대입해 보았다.
그런데 나는 1차 조건인 나이에서부터 맞지가 않았다.
그 조건은 나의 나이보다 한참이나 아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의 경우는 또 다르다.
우리 부부가 모두 직장생활을 하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부모가 해 줘야 하는 일도 저희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던 터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워져 버렸다. 생각도 깊어져 큰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엔 담임 선생이 우리 아이를 보면 섬뜩한 느낌이 들더라는 얘기까지 했었다.
아이가 아이스럽지 못하고 너무 어른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을 환경의 동물이라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말에 '나이 값'이란 말이 있다.
어찌 나이에 값을 매길 수 있으랴만 이 나이 값이란 말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벼가 익으면 이삭의 무게에 의해 수그러드는 것 같이 사람도 나이가 들면 우선 겸손함이 생기는 것 같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는 익지 않은 벼 포기처럼 젊었을 때는 곧곧하게 목을 세우고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좌충우돌하며 쉽게 화를 내고, 쉽게 감동도 하지만 연륜이 깊어지면 참음과 다스림을 배우게 됨이리라.
그런가 하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노련해졌다는 얘기일 것 같다.
어둠 속에서도 정연하게 떡을 썰었다는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하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어떠한 경우에서건 원만히 처리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음이리라.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할 줄 아는 사람일 것 같다.
무릇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미련이지만 죽음은 가장 진실한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어긋나지 않는 자연의 질서요, 이 질서는 참으로 엄숙한 삶의 예식으로 그리고 가장 자연스런 자리 찾기로 우리를 찾기 마련이다.
¹아이가 현관에 꽂아둔 마른 억새꽃 다발을 본다.
바람을 다스리기보다 다스림 당하며 살다 어느 날 아이의 손에 의해 내 집으로 옮겨진 억새꽃 다발처럼 무언가 사람도 생명이 떠난 후에라도 살았던 흔적은 남겨야 할 것 아니냐는 자기 각성이 하나의 숙제가 되어 가슴 한 쪽을 차지한다.
그렇다.
살아갈 날 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은 사람. 뒤돌아보며 참으로 이 땅에 살면서 남기고 싶은 삶의 모습을 준비하는 사람, 그 사람들의 땀이 배인 저마다의 삶의 향기, 그게 나이 값이 아닐까(1989)
-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에서
위 '¹아이가 현관에 꽂아둔 마른 억새꽃 다발을 (중략) 저마다의 삶의 향기, 그게 나이 값이 아닐까 ' 는 수필 <나이 값>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장보다는 나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이끌어내 놓고 결론은 내가 아닌 읽는 이가 내리는 것처럼 하되 내 생각 쪽으로 슬쩍 유도함으로 거부감을 없애려 해 본 것이다.
수필은 체험과 사색에서 나오는 글이다. 그래서 사상과 철학,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우러져 읽는 이의 가슴속에 새로운 감동으로 와 닿을 때 그의 삶은 한여름 더위 속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등산길 돌샘에서 물 한 그릇을 들이켰을 때의 신선함과 상쾌함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수필은 가슴을 때리며 울리는, 그리고 때로는 저 가슴 밑바닥까지를 시원케 해주는 생명의 감동이나 후련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 감동이 클 때 독자는 그걸 잊지 못하며 그것이 곧 문학성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수필의 문학성은 작가의 체험 곧 눈물, 고뇌, 슬픔, 아픔, 고통, 기쁨, 절망들이 작가에 의해서 인생의 통찰 내지 달관으로 이미지화 되는 것으로써 잘 익은 포도주와 같이 읽는 이에게 전혀 거부감이 없이 부드럽게 받아들여지고, 감동되고, 동화될 때 좋은 수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뿐 아니라 모든 문학이 다 그렇겠지만 수필은 특히 독자와 공유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나 논리적 타당성을 요구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의 체험과 지식, 나와 반대되는 사상이나 의견까지도 수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엔 문장력이라는 기술적 수단이 우선되어야 하겠고 그것은 수필을 쓰는 사람의 기본이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찮은 자기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하더라도 작품이 되기 위해선 그것이 특별한 글감이 되도록 기술적(뛰어난 문장력)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隨筆은 곧 作家'란 말을 쓴다. 수필가는 참다운 인격체가 되지 못하면 좋은 수필을 쓸 수 없다는 말인데 수필은 머리로 쓰는 글이 아니고 마음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얘기하되 자기의 인격, 품격, 지식, 연륜 등에 의해 재 조형(再造形)된 새 모습 그것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체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느낌과 의미를 형상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수필의 생명인 체험과 진실이 읽는 이에게도 절대적으로 공감될 수 있을 때 '작가와 독자의 수필 속 여행' 곧 둘이서 함께 하는 체험여행이 공감의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3. 수필에 있어서의 재미와 감동
수필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를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의 수필은 전환을 많이 한다. 때로는 사건을 역순으로 도치시켜 전개해 가기도 하고,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급작스런 전환을 시도하되 그 전환이 혼란을 초래하는 게 아니라 신선함을 줄 수 있게 한다.
물론 혼란의 우려도 없진 않겠지만 의미 있는 변화, 작지만 신선한 충격으로 그런 극적 전환이 독자에게 전달될 때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료 2] 수필/발뒤꿈치/최원현 작
아내가 어디에선가 봉숭아꽃과 이파리를 한 웅쿰 가져왔다.
아이들은 봉숭아물을 들여 준다는 제 엄마의 말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서로 먼저 하겠노라 수선들을 떤다.
약국에 가서 백반을 사 오고 싸맬 비닐 종이며 묶을 실을 준비하고 꽃잎을 으깨기 시작했다. 금새 방안이 상큼한 봉숭아 내음으로 가득 찬다.
봉숭아꽃으로 손톱에 물을 들이는 풍속은 백여 년 전부터 성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 각지에 봉숭아가 퍼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란다.
고려 충선왕 때 왕이 원나라에 가 있던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소녀를 보았다. 그런데 소녀는 가야금을 뜯고 있는데 줄을 뜯는 열 손가락마다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잠을 깼으나 마음이 스산했다. 해서 궁궐 뜰을 거닐게 되었다. 헌데 거기서 열 손가락을 하얀 헝겊으로 동여맨 눈 먼 궁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고려에서 공녀(貢女)로 붙들려 왔는데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너무 자주 울다 보니 눈이 멀어 버렸으며, 손가락은 봉숭아물을 들이는 중이라 했다. 자신의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손가락에 물을 들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녀는 자신의 충정을 가야금 곡조로 바쳤는데 왕은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에 돌아온 충선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찾아오게 했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왕은 그녀를 생각하며 궁궐 뜰에 봉숭아를 심게 하여 그녀의 넋을 위로케 했고, 그 때부터 봉숭아가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실부모한 나는 시골의 외조부모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딸만 셋을 두신 외조부모님께선 사위 복도 없으셨는지 맏딸과 맏사위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으셔야 했다. 거기에 둘째 딸까지 출가시킨 데다 막내딸마저 혼사 날짜를 받아 놨으니 허전함이 오죽 크셨겠는가. 해서 일손도 하나 늘릴 겸 큰집의 공허함을 조금이라도 메꿔 보자고 계집애 하날 데려왔다. 이름이 연실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일곱 살이었고, 연실인 나보다 두 세살 위였던 것 같다. 막내 이모가 시집을 가버린 집에서 연실이는 이모의 자리를 그런 대로 잘 메꿔 주었다.
우린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이듬해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집에 와서 연실에게 가르쳐 주면 그녀는 나보다도 훨씬 더 잘 알아버렸다.
그 해 여름이었다.
마당가에 심은 봉숭아꽃이 유난히도 아름답던 어느 날, 연실인 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겠다고 했다.
나는 남자가 창피하게 무슨 봉숭아물을 다 들이느냐고 펄쩍 뛰었지만, 빨갛게 물든 예쁜 자기 손톱을 보여 주며 내게도 들여주마고 성화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피해 숨바꼭질 아닌 숨바꼭질을 했다.
허나 그날 밤 내가 잠이 든 사이에 연실인 내 양쪽 새끼손가락 손톱에 빨간 봉숭아물을 들여놓고야 말았고, 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온종일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 버렸다.
울면서 집에 돌아온 나는 연실의 방에 뛰어 들어 그녀가 아끼는 반짇고리를 힘껏 내동댕이쳐 버렸다. 놀라서 뒤따라 들어온 그녀의 눈이 물동이만큼 커졌다. 그녀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자기는 다만 내 손톱도 그렇게 예쁘게 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더 이상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다음 해 봄, 우리 집을 새로 짓게 되었다.
십 리가 넘던 등교길이 반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녀가 더 신이 나 했다. 꿀벌처럼 부지런히 일꾼들의 새참과 점심을 날랐다.
상량이 올랐다.
그런데 그처럼 좋아하던 연실이 보이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어 나의 발은 어느덧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방에 누워 있었는데 온 몸이 펄펄 끓는 듯 열이 올랐고, 자꾸만 발뒤꿈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죽을 것이라고 했다. 발뒤꿈치가 아프면 죽는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만이 아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끝내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받아들이는 영악스러움은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이었을까?
꼭이 발뒤꿈치가 아파 죽은 것은 아니련만, 나는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새 신발을 사서 발뒤꿈치가 벗겨져 아프기만 해도 죽은 연실이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 발뒤꿈치의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다.
발뒤꿈치가 아프면 정말 죽는 걸까? 죽음의 신은 발뒤꿈치를 잡고 끌어가는 것일까? 사람은 태어날 때는 머리부터 나오는데 죽을 때는 발뒤꿈치부터 끌려가는 것일까? 나는 동네서 사람이 죽게 되면 죽기 전에 발뒤꿈치가 아프다고 했었느냐고 할머니께 묻곤 했다.
삼십 년도 넘게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봉숭아만 보면 곱디고운 연실의 마음과 항시 잃지 않던 맑은 웃음이 그녀의 넋이 되어 꽃으로 피어난 듯 싶다. 그래 한참 보고있노라면 꽃 속에서 연실이 성큼 튀어나와 내 손을 붙잡고 다시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겠다고 나설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그림자처럼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연실이는 내게 그리움과 외로움의 작은 파문을 던지고 갔다.
그 연실을 생각케 하는 봉숭아꽃을 한 움큼 가져온 아내. 아내는 아이들에게 봉숭아물을 다 들이고는 꽃잎이 조금 남는다고 이젠 내게까지 손가락을 내밀란다.
²새끼손가락 손톱 위에 백반 섞은 봉숭아꽃을 얹으니 시릿한 감촉이 아릿아릿 전해 오고 꽃 내음이 더욱 짙다. ³비닐종이로 돌돌 싸고 실로 칭칭 감는데 아이가 켠 라디오에서 가야금 산조가 흘러나온다. ⁴문득 원나라에 붙들려 가 가야금을 타던 궁녀 생각이 떠오르며 어린 날의 향수가 가슴 가득 밀려온다.
바람이 인다.
마당가의 봉숭아 꽃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들이 순간 수천의 작은 연실의 모습이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연실인 봉숭아꽃 요정이었을까?
내 손톱에 든 봉숭아물은 연실의 고운 마음의 색깔이 아닐까?
봉숭아물을 들이고 나니 이상스럽게도 내 발뒤꿈치가 아프다. (1987)
-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에서
위 ²³⁴는
현실과 과거, 과거와 현실이 교류되면서 독자에게 시공을 초월한 새로운 이미지를 주고자 한 시도이다.
독자를 끌어들일 수 없는 글은 아무리 잘 된 글이라고 자신이 평가해도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결코 좋은 글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하지만 쓰는 것이 '붓 가는 대로'인 것처럼 읽히는 것은 물 흐르듯이 되어야 하는 것이 수필이기에 문장의 완숙이 선행되어야 하고, 자신의 삶과 인생이면서도 일상성이 아닌 전문성으로 사건마다 독자적 구성력을 확보함으로써 표현상 전환을 가능케 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필은 쉬운 글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쉽다는 것이 아무나 아무렇게나 쓰는 글도 수필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필의 매력 중 가장 큰 매력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글이라는 점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접근하여 시나 소설이나 희곡의 장르를 벗어나면 수필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수필이라면 어떻게들 받아들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사실 그대로 문장화해 놓아야 한다는 진솔성을 사람들은 너무 무시하고 사는 것 같다.
또 하나 읽는 이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생각한 대로 이해하면 되는 글이라는 점에서 수필의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춰가야 할 이유가 없이 내 식으로 읽고 내 식으로 이해하면서 내 수준에서 감동하고 만족해 할 수도 있는 글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필이 독자에게 주는 목적성, 이를테면 수필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수필은 인간의 심성 깊이 스며드는 글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어떤 글을 써야 할까라는 데도 의견이 모아질 수 있으리라.
나의 이야기이지만 내 이야기만이 아닌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요, 나 외에는 아무도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체험의 글감을 재미와 호기심과 감동이 어우러진 내용으로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도 수필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료 3] 수필/어머니의 눈/최원현 작
나이가 들어가면서 커지는 그리움이 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도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조차 없어서인가, 해마다 가을빛이 짙어 가면 그리움은 더욱 심해지곤 한다.
얼마 전에 이장(移葬)을 했다.
외가의 선산에 계신 어머니를 아버지와 함께 충청도 아산으로 모셔온 것이다.
생명이 떠난 흙의 잔해일 뿐인 유골에 무슨 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련만 내 육신의 뿌리요, 내 아이들의 뿌리이기도 한 어머니는 늘 근원의 어떤 힘으로 내 삶의 지주가 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 어머니의 산소가 천 리 멀리 있다 보니 자연 성묘조차 가기 힘들었고, 그나마 이젠 꼭 찾아가 뵈어야 할 어른들도 별로 안 계셔서 자연히 걸음이 뜸해지다보니 내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생각조차도 많이 사그라져 가던 참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한 번도 제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산소엘 가보지 못한 처지였다.
얼굴조차 기억 못하게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인데도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이만큼 어른이 된 지금까지 어머니는 늘 새로운 모습으로 내 곁에 있어 주시고, 또 그런가 하면 늘 한 가닥 외줄기 그리움이 되어 내 마음을 잡아당기곤 한다.
내 어머니를 모셔 오는 게 아니라 어쩌면 아이들의 할머니를 모셔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이야 할머니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니 저들의 마음을 내 어찌 읽을 수 있으랴.
헌데 막상 이장을 하고 나니 나보다도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온 산을 누비며 두 아이는 예쁜 꽃들만 골라 꺾어다 제 할머니의 묘를 치장하더니 작은놈은 꽃씨를 받아다 아주 꽃동산을 만들자고 한다.
그래,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목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했던 할머니라지만 아버지의 어머니, 그리고 저희들의 할머니라고 하니 저처럼 각별한 마음이 되는 것은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던 말이 헛말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인가.
어쩌면 녀석들은 늘 의아해 했을 지도 모른다.
남들은 명절 때가 되면 성묘 간다고 묘지로 향하는 길이란 길을 꽉꽉 메우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왜 우리 집에선 성묘도 가지 않는 것일까 하고 묻고 싶을 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저희들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고, 이렇게 가까운 곳으로 산소를 옮겨 성묘를 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저들 마음의 한 구석에 따스한 채움을 준 것이라고나 할까.
음력 시월 초하루는 어머니의 영혼이 오셨던 곳으로 돌아가신 날이다.
영혼이 떠난 채 흔적만으로 멀리 남아 계시던 부모님이시지만 가까이 모셔 오고 보니 어머니 추도 예배를 드리는 내 마음까지 가을빛보다도 더 맑아지는 것 같다.
그러나 내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도 단조롭다.
하늘이 유난히도 파아랗던 어느 날, 이모의 등에 업혀 마루에서 마당을 바라보았을 때 하얀 꽃가마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해으름에 부시도록 하얀 꽃에 휩싸여 들어오던 상여, 그 상여의 꽃을 따달라고 했었던 것 같은 것이 내 기억의 전부다.
그 후 꽃상여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이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타고 가셨던 것이 맞는지 확인도 못해 봤지만, 나는 이내 이모의 등에 업혀 어디론가 가 버렸고, 많은 날이 지난 후 나의 기억 속에선 그것이 어머니의 상여였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어머니에 대한 오직 하나의 기억으로 여겨 버리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몸져누우신 어머니께선 행여 자식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당신 가까이 오는 것조차 막아버렸던 관계로 사실 나는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 봤던 기억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늘 나의 마음 속 깊이에서 도란도란 흘러가는 물소리를 내었고, 대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내었고, 밤 마실 다녀오는 발걸음엔 달빛 그림자로 따라오기도 하며 나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늘상 확실한 모습이나 소리가 아닌 막연하고 희미한 그러면서도 맞다고 생각이 들어버리는 이상한 작용을 해서 어린 내 마음속에 늘 슬픔 같은 작은 빛 구멍을 만들어 그 구멍으로 내 허전하고, 아쉽고, 안타까움의 바람이 지나는 통로가 되게 했었다.
오늘은 참으로 오랜만에 사진첩을 펼쳐 보게 되었다.
좀처럼 정리할 시간도, 또 꺼내어 펼쳐 볼 기회도 갖지 못하던 나의 날들 속에서 누우렇게 빛 바랜 사진 두 장이 오늘따라 유난스레 마음을 싸아하게 한다.
하나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작은아버지께서 고등학교에 다니실 때 온 가족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요, 또 하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서 찍었던 사진인데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는 아버지의 모습과 늘 흐린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내 곁을 떠나지 않던 어머니의 모습이 정말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몇 번이나 사진을 확대하거나 초상화로라도 그려 놓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워낙이 흐린 상으로 남아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인데 선명하게 재구성된 어머니의 모습 때문에 그나마 겨우 겨우 보존해 오던 기억까지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 그것조차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장을 하고 나니 아픔도 슬픔도 그리움까지도 항상 흐린 상으로만 남아 내게 무언가 알지 못할 숙제 같은 것을 남겨 놓은 것 같은 기분으로 내 삶 속에 남아 있던 것 들 중 하나가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고, 늘 멀리서만 아리아리 보이기만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한껏 가까워진 느낌을 받게 되었다.
문득, 주름살 하나 없는 서른도 안된 어머니의 사진에서 유난히 눈매가 낯익고 정겹다는 생각을 하며 그 때마다 희미한 형체로만 내 기억의 주위를 맴돌면서 어머니다라고 생각케 하던 것이 바로 사진 속의 이 눈매였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러고 보니 세월이 아무리 지나가도 혈연의 고리는 어떤 형태로든 이어져 있기 마련이고, 오히려 빛 바래고 기억이 희미해져가면서 더욱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 것 같다.
어머니의 눈은 수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십 년의 세월을 지켜보시면서 줄곧 말씀하고 계셨는지 모른다.
그 말씀을 섣불리 짐작한다는 것이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불경스러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조차 이는, 그러면서도 살아온 내 삶을 향해 끊임없이 격려하고, 위로하고, 치하하며 조심스레 지켜보고 계셨을 것 같은 어머니의 눈, 나를 이 나이까지 보이지 않는 그리움에 애태우게 하던 기억의 샘인 어머니의 눈이 사진 속에서 따스한 웃음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래, 나이 들어가면 사람은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 간다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같다는 말을 곧잘 듣곤 하던 나였으니 차라리 나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어머니 앞의 아이처럼 살아가라는 하늘의 특별한 배려로 받아들여 버리고도 싶어진다.
해가 갈수록 쌓아가기 보다는 자꾸만 잃어 가는 것만 같은 불안 속에 자신이 없어지는 나를 보며 갑자기 지난 번 이장 때 눈물 글썽이던 이모님이 뵙고 싶어진다.
그리움이란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커져 가는 것이요, 오히려 작고 하찮은 것에 더욱 연연해지는 것 같은데 그것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자의적으로보다는 타의적으로 결정되고 이뤄지는 게 더 많은 현실, 맑고 아름답고 소중한 꿈이 있어도 그 꿈을 그렇게 간직하거나 가꿔 갈 수가 없는 현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 그런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삶이기에 가슴들은 늘 답답하게 막혀있기 마련이고, 그런 아픔이 잊혀져 간 옛것에의 그리움으로 커가는 지도 모른다.
삶이란 막히면 돌아가야 하고 아니면 넘어야 하는 것, 그리우면 그 그리운 곳으로 찾아가면 된다지만 갈 수도 없고, 가 봐야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은 어디 가서 채운단 말인가.
밖으로 나와 파랗고 맑은 하늘을 향해 어머니! 하고 가만히 불러 본다.
어머니가 하늘빛 웃음을 띠고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시는 것만 같다.
제법 선명한 얼굴 모습 속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에 유난히 정이 가득한 것 같다.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어쩌면 어머니도 이런 맑은 하늘빛을 참 좋아하셨을 것만 같다. 어머니는 이젠 맑은 하늘빛으로 내 곁에 있으시려나 보다.(1992)
-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에서
(1) 삶이란 막히면 돌아가야 하고 아니면 넘어야 하는 것, 그리우면 그 그리운 곳으로 찾아가면 된다지만 갈 수도 없고, 가 봐야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은 어디 가서 채운단 말인가.
(2) 밖으로 나와 파랗고 맑은 하늘을 향해 어머니! 하고 가만히 불러본다.
(3) 어머니가 하늘빛 웃음을 띄고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시는 것만 같다.
(4) 제법 선명한 얼굴 모습 속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에 유난히 정이 가득한 것 같다.
(5)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어쩜 어머니도 이런 맑은 하늘빛을 참 좋아 하셨을 것만 같다.
(6) 어머니는 이젠 맑은 하늘빛으로 내 곁에 있으시려나 보다.
- 수필 <어머니의 눈> 중에서-
마치 물이 어름이 되고, 어름이 녹아 수증기가 되고, 그것이 식어 다시 물이 되는 것처럼 수필가는 'H2O'라는 사실적 근거 곧 체험을 상황과 필요에 따라 어름으로, 수증기로, 물로 형상화시키는 사람이다.
지금의 삶과 어머니, 어머니와 하늘, 그리고 그리움, 그것들은 담을 수 없는 무형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수필가는 그것을 담는 방법을 안다.
바로 작가의 가슴에 담아 자기의 이야기 내지는 자기로 연결되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를 사랑하거나 미워해야 가능한 것이요, 좋은 수필을 쓰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나야 할 것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일 때 좋은 작품은 태어나는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는 좋은 수필도 씌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이 곧 작가'인 것 아니겠는가. 작가가 자기의 이야기인데도 감동적으로 독자의 가슴에 담아 줌으로써 동질의 체험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필은 어쩔 수 없는 제1인칭 문학이다. 수필의 재미와 감동도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4. 어떻게, 무엇을 써야 할까?
프랑스의 철학자요 에세이스트인 알랭(Alain)은 "만약에 당신이 무엇이든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글로 써보라"고 했습니다. 쓰고 싶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글로 써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데에 대해선 두려움이 먼저 앞섭니다. 말로는 잘 하는데도 막상 글로 써보라면 잘 안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에 대해 수필가 정봉구는 그의 《새로운 에세이 작법》(1996.신아출판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필작법의 요령을 노변담화의 자세로 비유합니다. 겨울 밤 화로가에 둘러 앉아서 아무 부담 없이 나누는 세상얘기, 그런 기분을 수필의 분위기로 지적합니다. 우리가 어려서 시골집 온돌방에 앉아서 화로에 손을 쬐며 할머니의 옛 얘기를 듣던 추억,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환상일까요. 그러나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난로가에 앉아서 돌림뱅이로 얘기를 하다가 그 차례가 당신께 돌아왔다면 당신은 무슨 얘기를 하시겠습니까. 날씨 얘기도 할 테고, 정치 얘기도 할 테고, 어쩌면 집안에서 말썽이 되고 있는 걱정거리나 그 반대의 자랑거리 같은 떠들썩한 얘기도 나올 테지요.
우리가 어려서 화로가에 옹기종기 앉아서 턱을 치대고 듣던 할머니의 옛날 얘기에는 분명히 우리의 넋을 사로잡던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넋을 사로잡는 '무엇'입니다. 내가 하고싶은 얘기, 내가 하려는 얘기에는 적으나마 하나의 정신이 깃들어야 할 것입니다."
둘러앉아 돌림뱅이로 하는 얘기를 듣다가 내 차례가 되면 아주 당황이 되지요. 그러나 막상 얘기를 시작하면 또 얘기가 얘기를 낳게 되고, 금방 분위기에도 적응이 되어 생각보다 잘 해 내기도 합니다.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글을 쓰고싶어 하는 만큼 두려움도 더 크게 느낍니다. 그런데 말을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글로 쓰라면 또 더 어려워집니다.
노변담화(爐邊談話)의 분위기는 수필 쓰기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옛이야기를 듣던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수필의 호흡을 갖추는 것입니다.
여기에 할머니의 얘기 속에 들어있던, 나를 사로잡던 그 무엇, 그 이야기의 핵심처럼 나의 이야기, 나의 글에서도 그 핵심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문학성이라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곧 글쓰는 이의 정신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모든 문학은 인간의 삶의 이야기요, 인간 삶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풍속이나 습관은 말 할 것도 없고, 모두 인간 생활과 관련됨으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겪어온 삶의 경험과 그런 삶 속에서 시도한 생각과 판단들,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가 글로써 쓸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잘 써보려는 생각, 좋은 글을 쓰겠다는 욕심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각나서 흘러나오는 표현은 왠지 값없어 보여서 조금 멋진 말을 찾게 되고, 고상한 말을 생각케 됩니다.
그 결과는 바로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수필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피천득의 <수필>이나, 이양하의 <나무> 같은 수필을 마치 수필의 모범이요 교본처럼 생각하고 그것에서 수필 쓰기의 비밀을 찾아내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한 작품이 수필의 모범이 될 수는 없습니다. 수필은 자기의 생각을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쓰는데 남의 틀에 집어넣어 그렇게 써보려 한다면 그 수필은 이미 자연스러움을 잃게 된 것이요, 진실하고 솔직한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수필에서 그 맛을 잃게 될 수박에 없습니다.
따라서 수필은 너무 이론에 집착하다보면 좋은 글을 쓰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수필에 형식이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집착의 한계를 초월하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화로가에서 듣는 할머니의 옛날 얘기나 돌림뱅이로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같으나 그 이야기가 넋을 빼앗을 만큼 집중시키고 재미를 주던 그 '무엇'을 글 속에 넣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예로 드는 두 편의 글은 제가 운영하는 사이트 <에세이코리아>에서 수필을 공부하던 이들에게 '나'란 주제로 글을 쓰게 한 것 중 두 편입니다.
[예문] 나를 말한다/고현숙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수필로 엮어 보라는 제의를 받고 한참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를 글로 표현하라니. 도대체 어떻게 그려보라는 말인지. 글을 통해서 만나는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하면 쓰기도 전에 긴장이 되어 가능하면 좋은 첫인상으로 상쾌한 인사를 하듯 그려내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랴.
또한 그렇게 그려낸다 한들 내 모습이 그렇지 못하다면 현명한 독자들은 몇 초도 안 가 눈치채고 말 일이니 그저 솔직한 모습 그대로를 적어 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만 내 독자(?)들은 내가 그려 놓은 내 모습에 신뢰를 할 수 있고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 수 있으리라는 바램을 갖고.
지나온 시간들이야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 여겨져 생략하고 현재의 나를 말해 보고자 한다. 중요한 건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고 지나온 시간들 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니 현재의 모습을 보는 건 지난 시간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나의 모습은 삼십대에 머물러 있는 한 남자의 아내이며 주부이자 직장인이며 작은 기획실을 운영하는 사무실의 대표이기도 하고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태어나면서부터 도시에서만 살아왔지만 언젠가는 도시를 탈출(?)하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살아가는 도시생활 부적응자(?)이기도 하다. 도시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는 이상한 믿음 탓에 어쩌면 바보가 되어 가고 있을지도 모를.
언젠가 절친한 선배가 나를 지칭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극과 극을 오간다는.
그 말처럼 나를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했고, 지금까지도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이 딱 맞다 싶을 만큼 표면적인 모습이나 내면의 모습이나 양극을 포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거래처 사람을 만나거나 중요한 약속을 몰아서 하는 월요일엔 정장차림을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엔 찢어진 청바지나 진바지에 셔츠 하나로 나고, 별 말이 없고 조용한 성품이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대중들 앞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의 향을 좋아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혼자 있는 시간도 즐겨하여 딱히 나갈 일이 없으면 일주일 내내 꼼짝 않고 집밖을 나서지 않는 수도 있다.
음악을 좋아하고 등산을 좋아하여 스트레스가 쌓인다 싶으면 빈집에 들어와 음악을 듣거나 아무런 말도 없이 산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한다. 물론 그 날 집으로 돌아올 테지만.
걷는 것을 즐겨하여 이른 새벽이나 초저녁 혼자서, 혹은 아이를 앞세우고 남편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차를 타고 다니기 보다 자전거를 타기 좋아하고 틀에 맞춰진 모습보다 자유로운 흐트러짐을 사랑한다. 지난 4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여서 그저 생각이 풀려나는 대로 쓰거나 그때그때 감정의 흐름을 옮겨 놓거나 하여 아직까지 정리되지 못한 모습 그대로이다.
혼자서의 글쓰기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허용이 될지 모르나 독자들에게 내 보이기 위한 글일 때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라는 걸 안다. 그러니 고칠밖에.
감정에 충실함이 좋고 조금 빈 듯한 모자람이 좋다
여러 사람을 곁에 두지 않지만 한 번 마음을 맺은 사람과는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마음을 주어 오래도록 곁에 머물게 하는 사람이 몇 있다. 유난스레 정을 표현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있어도 서로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 좋다.
외형적인 조건에 구애됨 없이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고 그렇게 만나진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그래서 내겐 나이 많으신 어른도, 동네 꼬마들도, 사무실 앞 구두방 아저씨도, 아파트 우유배달 아주머니도, 같은 초등학교 출신의 머슴아들도, 한 달에 한번씩 들르는 '객석'레코드 가게 아저씨도 다 친구가 될 수 있다.
슈바이처를 존경하고 그의 나눔을 사랑한다. 내 것만을 챙기는 것보다 나눌 줄 아는 마음을 사랑하고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사랑한다.
무수한 사랑의 대상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건 사람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나는 가식을 싫어한다. '척'하는 것을 싫어한다. 구속을 싫어하고 거짓을 싫어한다.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파헤쳐지는 자연을 아파한다. 나눌 수 있으면서 나누지 않음을 미워한다. 함께 살아가면서 함께이지 않음을 싫어한다. 입으로만 떠드는 사랑을 싫어한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나눔을 싫어한다.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지 못하다 말하지 못하는 용기 없음을 아파하고 바른 것을 바르다 말하지 못함을 슬퍼한다. 나태함을 싫어하고 핑계 댐을 싫어한다.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도 많고 싫어하는 것도 많다.
그러나 내가 좋아한다 해서, 사랑한다 해서 그러한 것들을 다 내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는 것이라 해서 내 안에 그러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열하지 못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랑하고 싶은 것들도 있고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럽기만 한 싫은 부분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사랑하고 싶은 부분도 버리고 싶은 부분도 모두 나의 일부인 것을.
요즘처럼 가을 하늘이 깊고 구름이 깨끗한 날엔 머리 끈 하나로 질끈 묶고 맑은 얼굴로 길가에 퍼질러 앉아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요즘처럼 새벽하늘이 명징한 날엔 밤새 창을 열어두고 함께 날을 밝히고 싶다.
위의 예문 <나를 말한다/고현숙>에는 주제를 받고 고민하는 상황부터 전개가 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수필로 엮어 보라는 제의를 받고 한참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를 글로 표현하라니. 도대체 어떻게 그려보라는 말인지. 글을 통해서 만나는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하면 쓰기도 전에 긴장이 되어 가능하면 좋은 첫인상으로 상쾌한 인사를 하듯
그려내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랴.
또한 그렇게 그려낸다 한들 내 모습이 그렇지 못하다면 현명한 독자들은 몇 초도 안 가 눈치채고
말 일이니 그저 솔직한 모습 그대로를 적어 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만 내 독자(?)들은 내가 그려 놓은 내 모습에 신뢰를 할 수 있고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 수
있으리라는 바램을 갖고.'
먼저 '나'를 표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나를 글로 표현하라니.
도대체 어떻게 그려보라는 말인지.' 그 고민은 또 불안까지 불러옵니다. '가능하면 좋은 첫인상으로
상쾌한 인사를 하듯 그려내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랴.
또한 그렇게 그려낸다 한들 내 모습이 그렇지 못하다면 현명한 독자들은 몇 초도 안 가 눈치채고
말 일이니'
글이란 누군가 읽게 될 것인데 일단 썼다고 해도 그 다음도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곧 솔직하게 그려내야 독자도 내 모습을 신뢰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자신에
대한 얘기를 독자 앞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필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특별한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도 이런 나만의 글쓰기 방식을 택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표면적인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성격과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말함으로서
자기를 표현합니다.
작품의 완성도는 좀 떨어지는 감이 있으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어느 정도 멋(?)을
내 가면서까지 자신을 잘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예문] 나/장미
저녁 뉴스를 보면서 나는 달려간다.
시간이 없어 뉴스 보는 시간을 운동 시간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단지 가만히 앉아서 뉴스를 본다는
게 왠지 시간 낭비처럼 느껴져 한 30여 분을 이렇게 달리기를 하곤 한다. 그러고 나면 별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하루 마무리를 제법 잘 한 듯한 느낌에 스스로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지금 달려가고 있는 이 곳은 어디쯤일까.
언젠가 와 본 듯도 하고 어쩌면 내 미래에 가 보게 될 듯도 한 많이 낯익은 장소. 나는 한 남자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다가 노래도 부르고 그와 식사를 하고... 아 나는 그와 결혼을 한다.
내 주변엔 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세 동생들이 둘러 서 있으며 많은 친구들과 친지들이 웃음 띤
얼굴로 내 결혼을 축하해 주고 있다.
내 사랑하는 사람 뒤쪽으로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과 친구, 친지들이 역시 빙
둘러서서 그의 결혼을 축하해 주고 있다. 내 둘째 손위 동서가 될 여자가 다가와 신랑보다 키가 더 커
보인다며 드레스에 맞춰 신은 굽 높은 신을 자기가 신고 있는 고무신과 바꿔 신자고 한다.
나는 기꺼이 그러마고 답하고 내가 신고 있던 굽 높은 신을 동서 될 여자가 신고 있던 고무신과 바꿔
신는다. 내 키가 작아졌다고 내 친구들은 아쉬운 소리를 하지만 나는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나보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좀 더 커 보일 수 있다면 내가 조금 작아 보인다고 대수겠는가.
혹 이야말로 참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싶은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 안달이라도 날 듯하다.
나는 계속 달려간다.
숲길을 지나고 신작로를 지나서 나는 워커힐 자락에 있는 서울 광장 초등 학교 입학식장으로 들어선다.
왼쪽 가슴에는 길게 접은 하얀 손수건이 머리 큰 옷핀으로 고정되어 매달려 있고 커다란 두 눈은
구령대 위에 서서 입학 식사를 하는 선생님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나도 이젠 학교에 다니게 됐다며 신나 하는 나를 엄마는 가끔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기도 한다.
내가 사는 곳은 한강변 아마도 지금의 성수역 근처인 듯하다.
학교는 산길을 통해서 가야 하는데 그 산에는 간혹 나쁜 사람들이 나타나 어린아이들을 해친다는
말이 들린다. 내가 사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얼마 전에는 내 또래의 아이가 유괴를 당한 적도 있었다.
그 아이는 그 후로도 결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엄마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나를 학교에 데리고
가고 데리고 오곤 한다.
학교가 파하면 나는 점심도 안 먹고 숙제를 한다. 숙제 후에는 강가에 나가 모래로 두꺼비집을 짓고
놀거나 여린 분홍 메꽃을 따서 머리에 꽂고 논다. 마당 겸 텃밭에 조로록한 쇠비름을 뽑아 쇠비름
뿌리를 훑으면서 금옥이랑 화자랑 둘러앉아 '신랑방에 불 켜라 각시방에 불 켜라' 노래를 부르면
쇠비름 뿌리가 정말 불처럼 붉은 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나는 서울 자양 초등 학교로 전학을 하지만 아버지 일이 여의치 않아 전라도 무안으로
이사를 한다. 그 곳 아이들은 너무도 나를 힘들게 한다. 어른들 얘기로는 그것이 바로 텃세라고 한다.
내가 나중에 자라서 알게 된 일들 중에 가장 버려야 할 것이 바로 텃세라는 것을 나는 5학년을 다니던
그 1년 동안 시골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깨닫고 있었다.
내가 만약 공부를 못한다면 저 친구들은 나를 친구 자리에 끼워주지도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공부만큼은 자신 있었다. 물론 고무줄놀이와 공치기, 줄넘기 등도 열심이어서 우리 반에
서 가장 못하는 아이가 언제나 내 편이 되곤 하였다. 당시엔 대부분의 가정 생활이 그랬었지만 시골에
내려와서도 우리는 넉넉지 못했다.
더구나 내 상급 학교 진학 문제로 많은 걱정을 하신 아버지는 이미 서울에 올라가 계셨는데 한 달에
한 번 아버지는 시골에 있는 가족을 위해 돈을 부치셨고, 나는 글을 모르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돈을
잘 받았다는 편지를 아버지께 썼다. '아버님전 상서'라는 연극 광고가 거리에 나부끼던 지난 해 나는
예전 아버지께 편지를 쓰던 어린 나를 떠올리며 회상에 젖었었다.
아버지는 그 후 일 년쯤 되는 날 우리를 다시 서울로 부른다. 우리는 서울 도봉동에 둥지를 튼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나는 서울 도봉 초등 학교 6학년 3반에 앉아 있다. 교감 선생님께서 낸 분수 문제를 다 풀고 나서
배정해 준 반이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을 위해 입시를 치러야 했던 시절, 나는 첫날은 저 꼴찌 자리에
앉았다. 배치고사를 치르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린 나는 자존심이 많이 상한다.
매일 매일이 시험 치르는 것이 일인 학교 생활, 나는 진학 바로 다음날 선생님 책상을 마주 대하고
앉는다. 비로소 내 자리를 찾은 듯하여 빙긋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빼빼 마르고 키만 훌쭉 큰, 얼굴엔 버즘자리가 희끗희끗한 말없는 아이다.
황성연 담임 선생님은 달리기만 하면 늘 꼴찌인 내게 체육 때문에 중학 입학 시험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며 혹독한 연습을 시킨다. 나는 아직 패배란 걸 모르는 나이였지만 어쨌든 그건 진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나는 연습하고 또 연습하여 체육도 거의 만점 수준에 닿게 되었다.
놀 때는 잘 달리면서 왜 달리기라는 말이 붙으면 걸어가는 것 같으냐는 친구들의 우스개를 생각하면
선생님은 내게 있어 두고 두고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 은혜로운 분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숨이 조금 차기 시작한다.
나는 하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 틈에 얌전히 앉아 있다. 가슴엔 이름표와 교표가 달려 있다.
J여중. 빙긋이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J여고. 그러나 아버지의 일은 다시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
게다가 내게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가 있어 앞으로 한동안 목돈 들 일만 남아 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가지 않고 취직하여 동생들 뒷바라지하기를 바라시지만 나는 공부를 향한
나를 꺾을 수 없다.
하지만 대학을 나중으로 미루면 어떻겠느냐는 아버지의 말씀은 나를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내 성적은 깊이를 모르고 추락하여 첫 해 대학 시험에서 전후기 모두 낙방하고 만다.
이듬해 나는 모 대학에 합격을 하지만 등록금이 없어 입학를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나는 친구가 권하는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
다음해 공무원으로서 발령을 받고 H대학 영어 영문학과 야간부에 입학한다.
그러나 공부만을 하고 싶은 일념에 2년 반 가량의 공무원 생활을 접는다.
뾰족한 대안도 없이 말이다.
이제 숨을 조금 조절해야 할 시간이 되어간다.
나는 호국단 문예부 차장을 거쳐 문예부장을 지내면서 고등 학교 때 우리 학교 선배 시인으로부터
지도 받던 문예부 시간을 떠올린다.
조금 더 지도를 받아두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그리 만족한 건 아니었지만 사각모를 쓰고 사진을
찍고 나니 나는 작은 출판사 편집부 말석에 앉아 있게 된다.
그리고 세계 문학 전집과 우리 문학 등을 월급을 받으면서 읽을 수 있는 출판사 일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래도 내로라 하는 출판사 등을 거치면서 문교부에 검인정 교과서 중 국어 교과서가 통과되는데
그건 내가 출판사 일을 한 중에 가장 보람된 일 중의 하나이다.
나는 틈틈이 잡문을 쓰기도 하고 몸이 아파 쉬는 동안 동인회에 가입도 하면서 글을 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어느 신문 독자란에 올린 내 시조를 본 한 남자의 편지를 받은 후 바로 사랑에
빠진다.
나는 그에게 내가 글이란 걸 쓴답시고 다른 데 기웃거리지 않게 잘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그러마고 약속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 없이는 안 될 일이었기에 나는 글보다는 고통 없는 삶을 택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온몸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난다.
굳이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서른의 나이에 만난 남자가 날마다 쫓아다니며 구애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아직 혼자일 것이다. 그러나 결혼으로 얻은 두 딸과 아니 그 이전에 두 딸의 아빠가 되어 준
사람이 있음으로 결혼과 함께 내가 정말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얻은 것은 잃은 것보다
수 백 배는 되리라는 만족감을 갖는다. 더구나 여러 잔병치레와 수 차례의 수술 그리고 때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들로 인해 사경을 헤맬 때 내 곁에 있어 준 가족 특히 남편에게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걸음을 조금 더 늦추자 차츰 땀이 식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이제 많이 커서 내 손길을 일일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편은 이제부터야말로 당신의 일을 찾아야 할 때라는 말로 그 동안 집안일과 남편 그리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나를 버리고 산 시간을 보상해 주려는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작년에도 심한 아픔에 시달렸으며 아직 그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태다.
이제는 이따금 아르바이트로 들어오는 편집 교정 일을 거절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었으니 글 좋아라 하며 쫓아다니던 시절까지 한 스무 해는
되돌아 가 죽은 듯이 남의 글을 읽고 습작을 하며 노력하는 수밖에 없음을 안다.
오늘도 내일도 열매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어떤 인자를 불러 일으켜 꽃 피우고 수정시키는 데 있을
뿐이다.
오늘 뉴스도 온통 뉴욕에서 자행된 자살 테러 사건에 관한 것이다.
내 아는 이들이 연관되어 있지 않아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텔레비전 화면 속에는 너 그리고 나의
숨결이 흥분된 채 아직 일렁이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이제 자리에 앉기 전에 어서 가 씻어야겠다.
내일 다시 같은 땀을 흘릴지라도 이 땀방울 역시 오늘 버려야 내일 새 땀방울로 교체될 것이기에.
삶은 런닝 머신 위의 끝없는 달리기란 생각이다. 나의 글공부 또한 그러하리란 생각이다.
나는 내가 학업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내가 졸업한 대학을 이력서를 쓸 때를 제외하고는 밝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또한 내 본모습임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함께 수필을 공부하기로 한
모듬 식구들에게 알리고 나니 내가 꽤나 용기 있는 사람이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리하여 이제 영어 이니셜로 바꾸어도 좋겠단 생각을 한다. 내가 원하던 대학, 내가 바라는 환경과
가지고 싶었던 것 그리고 건강을 하나도 빠짐없이 누리고 있다면 아마 나는 글쓰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접으며 나는 슬며시 리모콘의 파워 기능을 누른다.
고통을 통해 얻어지는 보석과도 같은 글을 얻느니 고통 없는 평범한 삶을 살다 가려던 내 생각에
수정을 해야 할 시각이다.
왜냐하면 나는 고통을 멀리 하려던 그 순간 이미 고통과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바로 지금 내 머리를 스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달리기를 접고 나만의 시간을 나만의 색으로 칠할 준비에 들어간다.
두 번째 예문 <나/장미>는상당히 긴 글입니다만 조금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전개는 영화 '박하사탕'을 연상시킵니다.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가며 지난 일을 말합니다.
그는 런닝머신이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앞으로 뛰어가면서 이야기는 과거로 역행하는 기술법을
씁니다. 그냥 놔두면 타임머신이라도 타서 돌아오지 못할 과거로 아주 돌아가 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했을까요?
여하튼 전개형식도 좀 색다르지만 구성의 방법도 평범하진 않습니다.
그는 마무리에서 '삶은 런닝머신 위의 끝없는 달리기'요,
고통이 따르는 글쓰기 보다 편한 평범한 삶을 택한다고 했지만
고통을 멀리 하려던 그 순간에 이미 고통과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두 예문 모두 작가적 욕망이 큰 사람들이고, 또 그만큼 상당한 습작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수필이 '나'라는 인생이기에 주제를 '나'로 주었었고, 거기에 대한 답으로 씨어진 동일 주제의
글인만큼 두 예문을 비교해 볼 수 있겠는데 둘 다 자신의 세계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매우 당황합니다.
위의 두 편 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까?
수필이 되는 대상은 자기 마음속에 담겨있는 모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을 관조(觀照)해 보며,
내가 가장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실체를 찾아내면 바로 그것이 내가 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쓸 것에 대해 어떻게 쓸 것인가는 나름대로, 곧 자기 방식대로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필을 쓰는 사람이 자기의 내심을 조용한 마음으로 방관하고 관조한 나머지 조용히 붓을 들 때 그
수필에는 작자의 독특한 인생의 향취와 내용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이 있고, 마음의 경지인 심경의
철학이 있을 것이다.'[<교양문학원론>(1991.창문각) 203쪽 수필의 특질 중]고 한 것 처럼
수필은 결국 진주조개가 진주를 아몰리는 것처럼 자기와의 부단한 싸움이요 승화여야 하는 것입니다.
2003년 0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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