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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칠보산 아파트 공동체
마지막 희망의 뿌리, 공동체 (4)
박승옥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을 만들다
박정근저희가 사는 곳은 수원 금곡동에 있는 엘지빌리지 아파트입니다. 올해로 11년 된 아파트단지이고 3,200세대가 삽니다. 80평형도 있으니까 지어질 당시만 해도 수원지역에서 여유있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서가 좀 보수적입니다. 건물 동간 거리도 널찍하고 야외공간도 많고 주변에 논밭도 있어 노인들이 살기 좋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어른들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아주 좋지요. 뛰어놀기에 수원에서 여기만한 데가 없을 거예요.
임종길아파트는 투기를 목적으로 사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아파트 특징은 실제로 살고 싶어서 입주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사를 가도 단지 안에서 옮기는 경우가 많아요.
조영미또다른 특징은 아이들이 많다는 거예요. 아이가 셋인 집이 흔합니다. 넷인 집도 여럿이고요.
박아이들 때문에 우리 모임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어요. 아파트 입주하면서부터 부닥친 절박한 현안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 하는 거였어요. 안심하고 맡길 데가 없었거든요. 그때 마침 공동육아 사례가 많이 소개되고 있었어요. 우리도 한번 해보자며 몇사람이 모였던 겁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1년도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처음에는 공동육아를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이 제일 중요했어요. 아파트 게시판에 안내문을 붙이기도 하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홍보하기도 했어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엘지빌리지뿐만 아니라 칠보쪽 아파트들 전부, 성대전철역 근처 삼성아파트에까지 다녔습니다.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지요. 나중에 듣자니 외판원인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처음 서너명이 열대여섯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바람직스럽지 못한데, 몇시간씩 밤을 새가며 매주 회의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 반년 준비해서 열댓가구 아이들로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단독주택을 얻어 ‘사이좋은어린이집’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개원하고 1년이 지나자 일곱 살이었던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빨리 방과후 학교를 해야 되겠다 생각했고, 또 딱 1년 만에 ‘사이좋은방과후학교’를 시작했지요. 방과후 학교는 아주 좋지 않은 조건에서 시작했어요. 번갈아 각 가정에서도 열어보고, 장소를 빌려도 보았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결국 출자금을 모아 별도의 독립공간을 마련했습니다.
공동육아를 하면서 특히 여성분들이 시간 여유를 갖고,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경우가 많았어요. 또 자꾸 모이고, 격론도 벌이고, 일도 나누어서 하고, 돈도 모으고 하다보니 굉장히 가까워졌죠. 참여하는 사람들의 직업도 다양했는데요, 교사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자영업, 전문 직종, 정치인도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하던 이기우 씨도 공동육아를 했던 이웃입니다.
방과후가 생겨난 것처럼 전일제 대안학교도 자연스럽게 고민한 결과입니다. 저도 그 당시 학교에서 15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이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교장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말씀하시는데,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그럼 우리가 대안학교를 만들어보자, 일을 시작해보자 그랬던 것입니다.
내 아이만 잘 키울 수는 없다
조2005년 3월에 첫 입학식을 했으니까 자유학교는 올해 만으로 5.5년입니다. 준비는 2004년 4월부터 했습니다. 두 번째 준비모임에 갔을 때가 생각나는데 커다란 방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지요.
박보통 25명에서 30명 넘게 모여서 8~9개월,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강사도 모시고, 책도 읽고 토론도 했어요. 대단했지요. 내 아이 문제이지만 다른 집 아이들과 함께 풀어야 한다는 데 모두 한생각이었어요. 주변환경을 개선하지 않고서 우리 아이만 잘 키울 수는 없다는 신념을 모두가 공유했습니다. 각 개인과 가정의 교육에 대한 욕구가 강했고, 그것이 일차적 출발점이었지만, 동시에 아이들을 같이 키우겠다는 전제가 있었어요. 운동 차원에서 모인 게 아니라 그저 내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키우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과, 제도교육의 폐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그런 강행군을 가능하게 한 것 같아요. 푸른숲학교, 무지개학교, 자자학교 같은, 전국의 대안학교에 견학도 가고, 그 선생님들을 모셔서 경험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실현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지요.
어린이집도 그렇고 방과후도 그렇고, 처음부터 조합식으로 운영했습니다. 보증금을 가구별로 출자해 분담했습니다. 아이가 졸업하면 돌려받고요. 지금 자유학교 같은 경우는 얼마가 되든 되찾아가지 않고 기부할 수 있게 정책을 바꾸었습니다. 어린이집, 방과후, 자유학교 각각 부담 금액이 조금씩 달랐어요. 자유학교는 우선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규모가 큰 편이라 초기부터 분담 금액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유학교는 처음에 아파트단지 옆 주택가에 있는 건물의 2층을 빌려서 시작했습니다. 환경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뛰어놀 수도 없었지요. 두달쯤 뒤에 좀 무리를 해서 옮겼습니다. 보증금 1억에 월 300인가 했어요. 위는 어린이집, 아래는 자유학교, 이렇게 함께 쓰기로 했지요. 자유학교 9가구와 어린이집 20가구가 보증금을 나누어서 부담했으니, 자유학교는 굉장히 부담이 컸죠.
조2005년 3월, 9가구 아이들 12명으로 자유학교는 출발했습니다. 교사는 개교 1년차에 3명이었어요. 아이들 수에 비하면 파격이었지요. 다음해에는 학생이 거의 곱절인 28명인가로 늘었어요. 한두해쯤은 매년 거의 배로 숫자가 늘었습니다.
엘지빌리지 단지 안에서는 대안학교인 자유학교가 많이 알려져있었거든요. 아파트 게시판에 안내문도 붙여놓고, ‘선데이마켓’ - 이건 ‘도토리교실’에서 시작한 일요 벼룩시장인데요 - 이 열릴 때 선생님과 아이들, 학부모가 함께 음식도 팔고 물건도 팔고, 홍보물도 나누어 주고, 현수막도 걸어놓고 해서 홍보가 되었습니다.
임저는 미술교사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환경캠프 활동도 했지만 늘 뭔가 허전한 기분이었어요. 그러다 외국에 연수를 다녀온 경험에서 착상을 얻어 ‘도토리교실’을 열었습니다. 논 한가운데 있는 농업용 창고를 작업실로 개조해 쓰고 있었는데요, 그곳을 아이와 어른이 다 함께 노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 칠보산 자락은 옛날에 상수리나무가 많아 상촌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그래서 이름을 도토리교실이라고 지었어요.
도토리교실의 목적은 두가지였어요. 하나는 아이들 공방이었습니다. 월회비 1만원을 받고 아이들이 마음껏 뚝딱거리며 무엇이든 만들고 놀 공간으로 쓰게 하려는 것이었어요. 야, 신청자가 너무 많으면 제한하다가 항의도 받겠구나 이런 망상을 혼자 했답니다!(웃음) 또하나는 어른들이 모여서 놀 수 있는 구심점, 사랑방 역할이었습니다.
도토리교실 카페를 개설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뜻밖에 많았던 것입니다. 방과후학교나 대안학교에 실제로 자녀를 보내지 않아도, 아이들한테 뭔가 체험을 시켜주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아이들과 함께 도토리교실에 와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을 때도 있었어요. 상근자도 없고, 열쇠는 약속한 데다 두는 식으로 자치적으로 운영했지만 활발하게 잘 돌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숲에 데려가면 좋아할 것 같았습니다. 영어학원 대신이지요. 동의하는 분들과 함께 숲 속 ‘과외’, 숲속학교도 만들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오는 아이, 이틀 나오는 아이, 삼일 나오는 아이 등 다양했습니다. 아이들 숫자가 늘어나 지금은 회계업무 등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개별모임에서 공동체로
임전환점을 맞이한 건 작년입니다. 공감대도 있고 눈인사도 하는 사이들이었지만, 작년에 ‘둠벙’이 생기면서 우리 아파트 마을공동체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지요. 둠벙은 청소년교육나눔 공동체입니다. 아주 열정적인 초등학교 선생님 한분이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 없다며 시의원의 도움을 받아 아파트 지하 빈 공간을 확보해서 만든 모임입니다. 우리 여러 모임의 이른바 대표들이 모두 모여서 취지를 같이 얘기하고, 운영계획도 세우고, 이름도 정했습니다. 둠벙이란 겨울철에는 생명의 도피처도 되고 아우르는 장소이기도 하고, 어감도 좋지 않습니까. 이렇게 각각 흩어져있던 기존 모임들이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된 것입니다. 산발적으로 있던 모임들의 구심점 같은 역할입니다. 이제는 회의도 둠벙에서 엽니다.
조임 선생님 말씀대로지만 그렇게 가시화되기 전에 분위기가 함께하는 것으로 바뀐 계기는 ‘두꺼비논’인 것 같아요.
임그렇습니다. ‘두꺼비논’은 두꺼비를 살리려고 시작한 것이었어요. 아파트 인근에 겨울철 썰매장으로 쓰이던 논이 있었습니다. 두꺼비는 알을 일찍 낳는데, 그 논에는 이른 봄에도 물이 있으니까 두꺼비들이 거기에 알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2003년에 두꺼비들이 모조리 죽어버렸어요. 제초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산 밑 논 주인을 찾아가서 농사짓던 대로 짓고 비료도 쳐도 좋지만, 단 제초제와 농약만큼은 일절 치지 말라, 대신 논 빌리는 값을 쳐서 드리겠다고 부탁해 일종의 재배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도토리교실에서 ‘펀드’를 모집했어요. 수확이 전혀 업을 수도 있지만 나오는 쌀은 분배하겠다. 두꺼비를 살리기 위해서다, 이렇게 1구좌 5만원에 모집했는데, 금방 다 나갔습니다. 지금도 ‘두꺼비논 펀드’는 해마다 계속하고 있습니다. 단체로도 가입을 하고, 심지어 외지 분들도 한답니다. 썰매장은 3년 전부터 닫았어요. 요즈음은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를 않으니까 수지타산이 안 맞는 거예요. 지금은 할 수 없이 그 옆의 논 주인에게 해마다 20만원을 드리고 부탁해 물을 받아놓습니다. 물이 없으면 알을 못 낳으니까요.
두꺼비논이 우리 공동체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부 다 모여 김매기도 하고 벼베기도 하고 떡잔치도 하면서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런 잔치가 없습니다! 이제는 행사 공지를 하면 의논도 없이 여기서는 안주 뭐 준비하겠다, 저기서는 우리가 막걸리 하겠다, 척척 알아서 손발 맞추어 잘 진행됩니다. 작년부터는 참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마이크를 준비해야겠구나하고 있답니다.
조매년 그런 행사 때에는 예술적 흥취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답니다. 오색 천들이 줄지어 나부끼고, 파이프를 커다란 공처럼 만들어 놓은 구조물을 설치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공연도 하고, 시를 낭송하기도 했지요.
공동체생활 속에서 정치가 바뀐다
임우리 아파트마을에 모임이 몇 개 있나 세어보았어요. 사이좋은어린이집, 방과후, 명예방과후, 자유학교, 둠벙, 칠보농악전수회, 전통주 만드는 모임, 새날의료생협, 한살림 햇살모임, 배움터마당, 도토리교실 등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명예방과후는 졸업하고도 떠나지를 못해서 만든 일종의 방과후 동창회입니다. 배움터마당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힘을 모아 만든 모임이에요. 그런 아이들이 중등과정을 마친 뒤 지역에서 직업을 갖고 살 수 있게 하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두꺼비논은 모임이라기보다 지역사람들이 함께하는 광장의 역할, 공동체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요.
임실제로 모임에 참여하는 세대는 어림잡아 200가구 정도 될 거예요. 아이들이 크고, 이제는 모임을 떠나야 해도 그대로 있는 분들도 많아요. 어쨌든 여기서 살고 계신 분들이니까요. 우리는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필요에 의해서 모임을 만들었고, 마을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는 아주 보수적인 동네랍니다. 선거를 했다 하면 한나라당이 당선되는 지역입니다. 민노당이라고 하면 이곳 분들은 ‘친북 빨갱이’ 비슷하게 봐요. 그런데 이번에는 시의원 선거에서 민노당 소속 후보가 우리 아파트에서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한나라당 지지 할아버지들까지도 그분을 응원하셨어요. 지역에서 풀뿌리 정치의 모범을 실제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생활을 실제로 경험하면서 정치에 대한 생각까지 바뀔 수 있는 것 같아요.
마음의 벽 무너뜨리기
임주변에서 공동육아에 대해 물어오면, 저는 이렇게 조언해요. 애들한테 신경 쓰지 말고 부모들 친목부터 다지라고요. 어른에 중점을 두어야 해요. 어른들이 서로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진짜 교육이다, 즐겁게 지내는 멋진 모습을 보여줄 때, 아이들 스스로, 저절로 그런 어른들을 따라합니다. 아이들 공동육아는 시발점이었던 거지요. 어른들이 마음을 터놓고 교류하는 관계를 맺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마을 만들기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를 맺어가면서 공동체의식을 배워나가는 겁니다. 아마 서로들 굉장히 많이 배웠을 겁니다. 개인이나 가정에서 생기는 개별적인 문제도 이런 공동체적 모임을 통해서 소통도 되고 자극도 되고 해소도 되곤 합니다. 우리 아파트에서는 서로 왔다갔다 시도 때도 없이 마실들을 간답니다. 지금도 어디서들 모여서 축구를 보고 있을 거예요.
조아이들은 더 자주 왕래를 합니다. 이웃집에 놀러가는 게 일상회되어 있어요. 다른 곳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언제부터인가 도시건 시골이건 다른 사람 집에 가는 일을 폐를 끼치고 무례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지요. 아무리 친해도 미리 연락을 하고 찾아가고 서둘러 나오고, 그런 것이 현대인의 삶입니다.
끼니때에 집에 밥이 없으면 이웃집으로 애들을 보냅니다. 제가 애가 넷인데요, 지금도 넷째를 동네 언니한테 기저귀까지 맡기고 왔어요. 여성, 엄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편할 수 없고, 든든합니다. 다급한 일이 생겨도 막막하거나 불안하지가 않아요. 서로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도움을 받지만 다음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서로 편안한 마음이 될 수 있어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물론 아닙니다. 마음의 벽을 깨는 데는 노력도 필요했고, 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부탁을 하는 쪽에서도, 청을 들어주는 쪽에서도 주춤주춤하고 그랬습니다. 내가 만만하게 보이나, 하는 생각, 이런 것까지 얘기해도 될까, 그런 생각들을 누구나 하지요. 평생을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왔으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은 서로를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높게 쌓인 불신의 담이 서로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함께’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실제로 느꼈고, 또 깨닫게 되면서 마음의 담이 허물어지고, 진심으로 나와 상대방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의 자식, 내 자식 칼같이 구분하는 게 무의미해지더라고요. 모두 내가 품어야 할 자식들이구나, 하는 순간이 오더라니까요.
임지금 모임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알고 믿고 재미있게 어울립니다. 그렇지만 통합 모임을 통해서 교류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지평을 넓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만 똘똘 뭉쳐 즐겁게 지낼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속으로 따뜻하게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아, 저 사람들은 뭔가 행복해 보이네, 우리도 저렇게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게요.
조자유학교 때문에, 공동육아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를 온 사람들도 꽤 됩니다. 학부모도 선생님도 순하고 편하게 서로를 대해요. 강한 자립성, 내가 필요하니까 내가 하는 거다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합니다. 모이다 보니까 재밌고, 내가 변하고, 그래서 더 좋고 그런 식입니다. 아이들이 잘 지내서 좋기도 하지만, 어른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스스로 발전하고, 이런 게 좋아서 모임을 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튼튼하게 나아가는 것 가타요. 마음 터놓는 친구를 사귀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박어려움도 많았어요. 처음에는 어떻게든 학교가 망하면 안되니까 무슨 일만 생기면 학교에 가서 일을 해야 했고 -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니었지요. 이제는 자리를 잡았고 해마다 걱정해야 할 정도는 벗어나니까, 점차 시야가 학교 안에서 밖으로 가게 되네요.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사람 사이의 관계문제였습니다. 어디나 이견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결국 그만둔 선생님도 계시고, 부모들 사이에,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또 교사들 사이에 갈등도 있었습니다.
제가 공동육아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년이 되는데요, 초기의 건강한 문제의식이 살아있는지, 질적으로 성장한 게 있는지 분명한 자기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 현재의 자기를 돌아보고 챙기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을도 지금 그런 자기성찰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학교에서 지역으로
조학교를 준비하던 동안은 다들 펄펄 힘이 넘쳤습니다. 발 벗고 나서서 공부하고 일했습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회의하고, 이 자유학교 건물도 우리가 손을 안 댄 곳이 없을 정도로 쓸고 닦았어요. 그렇게 개교 1년까지 진을 빼고 나니까 3년째부터는 지치고, 모임도 잘 안되고, 이제 조정을 하자는 얘기가 저절로 나왔어요. 어떤 조직이든 자리잡기 전에 시작하고서 2, 3년 정도는 격변의 시기를 거치는 것 같아요. 이제 좀 안정됐다고 느낍니다. 아이들 숫자가 늘어나는 속도도 줄어들고, 그러면서 엄마들 공부모임도 다시 시작됐어요. 예전처럼 힘들게 하지는 않고 한학기에 두세번, 열린 강좌식으로 여유있게 합니다.
또 예전에는 학교 안에만 몰두했지만 지역활동 차원으로 관심이 넓어졌습니다. 그래서 상설 벼룩시장이라든지, 소농, 가족농과의 직거래와 같이 지역주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작은 것부터 실천하려고 해요. 공연이나 카페 같은 함께 쉬고 놀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의논도 되고 있습니다. 자유학교에서부터 그런 모임들이 만들어졌죠. 마을신문도 거기서 계획한 거랍니다.
임아파트의 나머지 주민들은 자유학교에 대해서 크게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호의적이지도 않습니다. 기탁금, 기부금, 등록금 해서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니까, 왜 그런 가외의 돈을 부담해가면서 별나게 구느냐는 거지요. 이제는 ‘귀족’학교라는 낙인은 벗은 것 같지만, 그래도 매달 38만 5,000원(급식비 포함 43만 5,000원)은 물론 부담이 됩니다. 자유학교의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너무 큰 금액이지요.
걱정스러운 부분은 학부모 주도로 만든 학교이기 때문에 교사들과의 갈등 등은 문제가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운영위원회나 지역위원회 같은 제도로 보완하여, 박 선생님 같은 믿을 만한 분들이 갈등을 중재하거나 완충하는 역할을 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마을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되어가고 있는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박처음에는 교육과정에 대한 학부모의 개입이 때로는 지나치기도 했어요. 교사가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부족했지요. 그렇지만 학교 운영에 선생님들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갈수록 늘어 이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혼란스런 과정을 거쳐서 좀더 세련되게 정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조맞아요. 초기에는 학부모들의 ‘주인의식’이 너무 강했지요. 교사의 고유영역에까지 침범하기도 했어요. 준비과정에서 너무나 열심히 공부한 탓일지 모릅니다! 그 당시에는 참으로 스스로 절실해서, 부모들이 직접 공부도 했고, 일도 했고, 운영도 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온 다소 지나친 자신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가면서 균형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임공교육에서는 지금 모두가 정신없이 바쁩니다. 도무지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바쁩니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쁘기만 합니다. 칠보산공동체는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스스로를 다져나가면서 해야 할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수원 금곡동의 엘지빌리지는 1998년 12월에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단지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아파트 신도시가 그러하듯 논두렁에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을 세운 것이었다. 도시 노동자들은 이런 아파트 철문 안에서 한 개인 또는 가족 단위의 파편화된 존재로 수용된다. 그 사각의 감옥 안에서 극단의 개인주의 의식을 가지고 철저히 이웃과 단절된 생활을 한다. 그게 도시 아파트주민의 표준적인 생활방식이다. 그런데 칠보산 자락에 있는 엘지빌리지 아파트주민 가운데 일부 ‘이상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런 ‘세련된’ 도시생활의 공식을 깨고 서로 교류를 시도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실천한,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앞선 대화는 ‘나’에서 ‘우리’로 나아가는, 힘들지만 자연스러운 경험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시에서는 공동체를 세우기 어렵고, 더더구나 아파트공동체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책상물림 먹물의 패배주의에서 나온 설익은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동체는 결코 비범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상식을 갖춘 보통사람들이 절실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칠보산공동체 구성원의 80~90퍼센트는 자기 소유의 아파트를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주소지 이동이 심하지 않고 정착하는 경향이 크며, 아마도 그래서 마을만들기가 쉽게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실패에는 핑계가 많고, 또 모든 성곡에는 극복이 많은 법이다. 칠보산공동체는 아파트라는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꾼 훌륭한 극복의 사례이다.
첫댓글 박(정근) 조(영미,채송화) 임(종길,녹색손) 선생님들이 대담으로 참여한 녹색평론113호 군요.
수원에서 정자천천지구 마을만들기 주민토론회에 며칠전에 다녀온적 있는데, 시민활동을 열심히 해오시는 어떤 활동가분 말씀으로는 아파트라는 곳이 오히려 공동체를 꾸리기에 좋은 사례가 많이 나오더라고 하시더군요.
,,, 처한 조건보다는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문화를 만들어가는거겠지요.
기사로 활용하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