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은 성철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출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녀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청담은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다시 지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하룻밤 파계를 한 후 얼마나 많은 참회 수행을 했던가.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저리는데 그 인연이 자신을 따라왔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
▲ 한국 현대불교 비구니사에 큰 획을 그은 묘엄 스님. 스님은 성철 스님의 유일한 비구니 제자였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1945년 늦봄, 14세 소녀가 대승사 산문을 넘어왔다. 청담의 둘째 딸 인순이었다. 인순은 ‘인간 사냥’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일제는 조선 부녀자들을 색출해서 일본군위안부로 끌고 갔다. 조선이라는 이름만 남았지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의병조차 사라졌다. 둘러봐도 불러봐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슬픈 산하에서는 소름만이 돋아났다.
집에서, 들에서, 골목에서 조선 부녀자들이 끌려갔다. 일제는 초등학생까지 꾀거나 위협하여 일본 또는 남태평양 지역으로 보냈다. 짓밟힌 딸들은 먼 나라에서 울부짖었다. 전쟁의 광기가 스며들어 이 땅은 지옥이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인순이 그 지옥의 땅을 막 벗어나 산에 오른 것이다.
44세 청담은 출가한 지 벌써 19년이 넘었는데 14세 딸이 찾아 왔다. 그렇다면 중이 아기를 낳았음이었다. 청담은 파계를 했다. 그 사연은 이렇다.
강원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청담은 고향 진주의 재가불자들이 보낸 초청장을 받았다. 연화사에서 법회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청담은 망설이다 초청에 응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 고향에 내려가 연화사 낙성법회에서 법문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속가의 어머니를 만났다. 늙은 어머니는 장삼자락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종손이 아들을 낳지 않고 출가했기 때문이었다. 청담은 그 순간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특히 나로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법회가 끝난 뒤에 나를 찾아와 내 장삼자락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님의 모습이었다.(…)
비록 인연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그 옛집에 하루쯤 쉬어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하는 어머니의 말에 나는 설복 당했고, 그리하여 어머님의 뒤를 따라 그 옛 집을 찾아갔고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님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야 했다.
“네가 중이 된 것도 좋지만 집안의 혈통만은 이어야 되지 않느냐.”
이혼한 뒤에도 집에 남아 어머니를 봉양하는 아내와 그들이 처해있는 험한 생활이 나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강압이 되었다. 나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청담대종사전서1 : 마음’)
그렇게 하룻밤 파계로 둘째 딸이 태어났고, 그 딸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인순이는 청담에게 어머니가 쓴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에는 딸을 산사로 보낼 수밖에 없는 전후 사정이 담겨있었고, 기왕에 절을 찾아갔으니 인순이를 설득하여 출가시켜 달라고 쓰여 있었다.
청담은 성철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출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녀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그날 밤 성철과 청담은 인순이가 머무는 원주 방을 찾았다. 깜박이는 호롱불 아래서 성철이 얘기를 꺼냈다. 청담은 눈을 지그시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청담은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다시 지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하룻밤 파계를 한 후 얼마나 많은 참회 수행을 했던가.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저리는데 그 인연이 자신을 따라왔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성철은 처음 부처님 일대기를 얘기해줬다. 탄생, 출가, 고행, 깨달음, 열반까지 차례로 이어갔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성인의 삶이 관심 밖에 있을 뿐이었다. 다른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줘야 했다. 성철과 청담은 날마다 저녁 공양을 마치면 인순을 찾아갔다. 성철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위인, 장군, 왕들의 삶을 풀어놓았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인순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다. 인순은 성철의 넓고도 넓은 지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님들은 목탁 치며 염불이나 외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책을 보지 않고 얘기하는데도 선생님들보다 훨씬 아는 게 많았다. 성철은 매번 이야기 말미를 불교 교리로 돌렸다. 처음엔 은근히, 나중엔 노골적으로 출가를 권유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가고 인순이 문득 물었다.
“스님, 스님이 알고 있는 것 모두 제게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 네가 중이 되면 다 가르쳐주지.” “그럼 중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인순이는 성철의 ‘지식’에 끌려 승려가 되기로 했다. 인순은 대승사 근처 비구니 절인 윤필암에서 월혜 스님을 은사로 삭발했다. 행자생활도 하지 않고 승복을 입었으니 청담을 아버지로 둔 덕분이며 엄연한 ‘산중 특혜’였다. 하기야 망가진 승단에 수계식에 대한 체계적인 규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원로 비구들이 계를 주면 그만이었다. 청담은 도반 성철이 인순에게 사미니계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철은 상좌도 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꺼이 나섰다.
“나는 법상에 오르지 않는 사람인데 순호(청담) 스님 딸이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미니계를 설해주지.”
성철은 자신의 말대로 그 후 한 번도 사미니계를 설한 적이 없다. 단오절인 음력 5월5일, 윤필암이 제법 부산했다. 인순이 사미니계를 받는 날이었다. 산 너머 큰 절에서 비구들이 넘어왔다. 속가의 어머니도 전날 도착해 있었다. 윤필암 큰 방에 법상을 차렸다. 다른 수계자는 없었다. 오로지 인순이 만을 위한 법상이었다. 계사(戒師) 성철이 법상에 올랐다. 그리고 물었다.
“첫째는, 이 명(命)과 목숨이 다하도록 일생 동안 산목숨을 죽이지 말 것이니 이를 능히 지키겠느냐?” “능지(能持).” 인순이 대답했다. 사실 능지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윤필암 비구니가 시킨 대로 대답할 뿐이었다. “두 번째, 이 명과 목숨이 다하도록 일생동안 도둑질을 말 것이니, 이를 능히 지키겠느냐?” “능지.”
인순은 음행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또 꽃다발로 몸을 장식하거나 향을 바르지 않으며, 노래하고 춤추지 않겠다고 했다. 높고 큰 자리에 앉지 않고, 때 아닌 때에 밥 먹지 않고, 금은보화를 지니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10계를 설한 후 성철은 묘엄(妙嚴)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현대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거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험한 시국이 여승 하나를 탄생시킨 셈이었다. 이후 묘엄은 아버지와 스승의 바람대로 비구니들의 스승이 되었다. 묘엄은 대강백 경봉·운허에게 교학을 배우는 등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두루 받으며 고된 수행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최초의 비구니 강사로 동학사·운문사 등에서 비구니강원을 이끌었고, 봉녕사 주지와 승가대학장을 지냈다. 파계로 낳은 딸이 큰스님이 되었으니 이를 두고 누군가는 ‘청담이 남긴 사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청담의 하룻밤 파계는 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었을까. 또 불제자를 낳았으니 파계의 업은 어찌 되는 것인가.
수계식을 마치자 어머니가 묘엄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것은 속세의 모녀 관계를 끊음이었다. 딸이 속가를 벗어나 비구니 승가에 들어감이었다. 한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 이제 월혜 스님의 제자였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승려가 되었지만 세속의 인연을 어찌 두부 자르듯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묘엄도, 어머니도, 다른 비구니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청담과 스승 성철은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보고 있었다. 청산은 그저 무심했다.
어머니는 다시 진주 속가로 돌아가야 했다. 절을 나서는 어머니를 성철이 불러 세웠다.
“다시는 묘엄을 찾지 마시오. 묘엄이 보살을 보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어머니는 산길을 내려갔다. 묘엄을 산 속에 남겨두고 숲길로 사라지는 어머니의 모습이 실로 작아보였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성철은 문득 산청 묵곡리에 두고 온 아내와 두 딸이 생각났다. 어림 헤아려보니 큰 딸 도경은 묘엄보다 한 살 어린 13세였다. 사실 도경은 그 나이에 중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뜻을 담아 아버지 성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언니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경허 스님의 ‘참선곡’을 보고는 문경 대승사에 계시던 아버지 큰스님께 ‘출가하러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때 언니가 불교나 출가, 아버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에 가서 입을 것이라며 바지를 만들던 기억은 난다.’ (불필 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편지는 성철보다 원주를 맡고 있던 청하 노스님 손에 먼저 들어갔다. 성철은 안거 중이었고, 선승의 성정을 잘 아는 청하는 속가의 편지를 전하지 않고 대신 자신이 답을 보냈다.
‘큰 중이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하니 학업을 마치고 오너라.’
청하는 나중에 그 사실을 성철에 알렸다. 어찌됐든 도반의 딸에게는 계까지 설했으면서 정작 자신의 딸은 출가를 막은 셈이었다. 성철은 그것이 자꾸 짚였다. 그리고…. 이듬해 큰 딸 도경이 죽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01호 / 2015년 7월 8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7. 말없이 말하는 제3의 도반, 책을 얻다
『"김병룡에게서 얻은 책은 트럭 한 대 분량이었다. 성철은 이 불서들을 아꼈다. 거처를 옮길 때마다 책부터 챙겼다. 해인사 백련암에 있을 때는 아예 장경각을 지어 보관했다. 그리고 혼자만 열쇠를 지녀 누구도 드나들 수 없게 했다. 성철은 수좌들에게 책을 멀리 하라면서도 자신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었고 또 책을 아꼈다. 성철은 그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글을 남겼다. "』
▲ 백련암 장경각에서 성철 스님이 생전 보던 책을 살펴보고 있는 원택 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 스님은 대한민국의 대표선사며 우리 시대의 부처로 추앙받는 국민선사다. 피나는 좌선과 아울러 우리 역사상 가장 다양한 책을 많이 읽은 선지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마대사나 조주 스님도 팔만장경이나 조사어록은 읽었다. 그러나 세계문학전집을 읽지는 않았다. 국민선사 성철 스님은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다. 임제 스님도 팔만장경과 조사어록은 읽었다. 그러나 영목대졸의 선어록이나 우정백수의 불교전서나 나카무라의 불교론은 읽지 못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그것을 다 읽은 선사다. 그뿐만 아니라 성철 스님은 노장학과 공맹학은 물론이며 캐논보고서도 읽었고 심령과학서나 연령소급 최면술에 관한 학술지도 읽었다. 온갖 물리학 서적들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칼 구스타브 융이나 프로이트의 심리학도 다 읽었다. 또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과 칸트, 니체까지 다 읽었다. 그래서 진정한 국민선사가 되었다.’ (무비 스님 ‘당신은 부처님’)
대승사에서 성철은 제3의 도반을 얻었다. 바로 불서였다. 당시 대승사 주지 김낙순은 인척인 김병룡 거사로부터 한 가지 제의를 받았다. 불서를 어딘가에 기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김병룡은 충주의 부호였고, 선대 어른들이 불서를 좋아해서 많은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김낙순은 최범술에게, 최범술은 청담에게 연락을 했다. 청담은 곧바로 도반인 성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독서광 성철이 마다할 리 없었다.
“앞으로 총림을 만들려면 장경이 꼭 필요하네.”
그런데 김병룡은 정작 스님들에게는 불서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 왜색에 물든 당시 승가를 믿을 수 없는 집단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이 오히려 성철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청담과 서울로 올라가 김병룡을 만났다. 예상대로 그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교리에 밝았고 특히 유식론에 해박했다. 그날 선승과 거사가 치열하게 묻고 답했다.
“두 시간 정도 법담을 나눴다고 한다. (김 거사는) ‘유식’에 정통했다. 그런데 한 가지, 선종의 입장으로는 유식을 바라보지 않았다고 한다. 교종은 삼아승지겁, 즉 무한한 시간이 걸려 불지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선종은 일초직입여래지라 하여 돈오돈수를 얘기한다. 이는 시간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시간을 절대적으로 보면 일초직입이 이뤄질 수 없다. ‘기신론’도 설명할 수 없다. 큰스님께서 선종의 입장에서 유식학을 풀었더니 (김 거사가) 박수를 치며 항복했다고 했다.” (천제 스님)
“군대를 막 제대하고 1970년 아니면 71년에 해인사 백련암에 들렀다. 당시 장경각에는 희귀 불서들이 많았다. 성철 스님은 중국에도 없는 것들이라며 유식론 논쟁에서 이겨 얻은 것이라고 했다.” (철학자 윤구병 교수)
성철이 김병룡을 어떤 문답으로 설복시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제자 천제와 대불련(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이었던 윤구병에게 들려준 일화를 살펴보면 유식론 논쟁이 자못 심각했던 것 같다. 성철은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구경각에 이르는 단계를 유식론으로 설명했음직하다. 의식이 지혜로 바뀌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과정과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념까지 사라진 구경각의 경지를 선종의 돈오돈수로 풀었음직하다. 김병룡은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스님, 유식론에서는 중생의 마음을 전5식, 제6 의식, 제7 말나식, 제8 아뢰야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제6식은 우리 의식을 말하고, 제7 말나식은 아직 자아에 집착하는 단계이며 이후 다시 마음을 닦아 제8 아뢰야식에 이른다고 합니다. 유식론에서 볼 때 깨침은 어떤 경지에 들어야 합니까?”
성철은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화두가 꿈속에서도 성성한 경지에 이릅니다. 이를 몽중일여라 합니다. 그때는 제6 의식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지혜인 묘관찰지(妙觀察智)로 바뀝니다. 다시 깊은 잠속에서도 화두가 여여하면 제7식이 완전히 없어진 멸진정(滅盡定) 단계에 이릅니다. 이때는 제8 아뢰야의 미세망념만 남게 됩니다. 그래도 아직 견성을 이룬 것이 아니지요. 오매일여의 상태라 자아[我]라는 분별은 사라졌지만 미세망념이 남아있다 이겁니다. 이 미세망념까지 없애야 비로소 구경각에 이르러 시공을 초월한 대원경지에 이릅니다.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은 점차 수행해서 벗어날 수 있지만 제8 아뢰야식은 깨치는 그 순간 단박에 대원경지로 바뀐다 이 말입니다. 육조가 말한 돈오돈수를 이렇게 유식론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김병룡은 그날 감복했다. 깨치지 않고는 이렇듯 명쾌하게 수행의 단계를 설명할 수 없었다. 산중에 떠도는 선승 성철의 명성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입으로만 살아있는 승려들을 접하고 속으로 경멸했던 김병룡은 성철의 형형한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님, 제가 지닌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김병룡은 성철을 서울 세검정으로 ‘모시고’ 갔다. 그는 자신의 밭에 창고를 지어 불서를 보관하고 있었다. 불서를 본 성철의 얼굴이 환해졌다. 남경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에서 찍은 경서를 비롯하여 선종 사서 등 당시에는 구하기 힘든 책들이었다. 김병룡은 목록을 건네며 한마디를 보탰다.
“서책은 물론이요 이 밭도 드리겠습니다. 부디 유용하게 써 주십시오.” “아닙니다. 책으로 족합니다.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 마음만 뺏길 뿐입니다.”
김병룡에게서 얻은 책은 트럭 한 대 분량이었다. 성철은 이 불서들을 아꼈다. 거처를 옮길 때마다 책부터 챙겼다. 해인사 백련암에 있을 때는 아예 장경각을 지어 보관했다. 그리고 혼자만 열쇠를 지녀 누구도 드나들 수 없게 했다.
성철은 수좌들에게 책을 멀리 하라면서도 자신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었고 또 책을 아꼈다. 성철은 그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글을 남겼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은 항상 ‘글자를 의지해서 해석하면 삼세 부처님들의 원수이다(依文解 三世佛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피상적인 글자에 구애받지 말고 법문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글자는 볼 것도 없이 뜻만 알아야 하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선가에서는 ‘경을 떠나서 해석하면 곧 마설과 같다(離經說卽同魔說)’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만 부처님의 뜻을 바로 알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참 곤란한 일입니다. 문자에 집착하면 삼세부처님의 원수가 되고 문자를 떠날 것 같으면 마설이라고 했으니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마설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삼세부처님의 원수가 되어도 안 될 것이니 여기서는 이것이 모두 양변입니다. 마설도 버리고 부처님 원수도 버릴 것 같으면 중도정견이 나옵니다. 분명히 문자에 의지해서 설명하는데 문자를 떠나고 문자를 떠나서 설명하는데 분명히 문자에 의지해 있어서, 아무리 문자에 의지해서 설명하지만 조금도 문자에 구애되지 않고 아무리 문자를 떠나서 설명한다고 해도 문자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성철은 ‘백일법문’에서 언어문자로 이뤄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을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에 비유했다. 언어문자로 된 안내문이 없으면 부처님의 훌륭한 법을 알 수가 없으니 그 자체로 귀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노정기 자체가 깨달음일 수는 없다. 부처님은 언어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했다.
그래서 문자에만 의지하면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쳐다보고 마는 격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그 손가락 끝을 따라 허공에 있는 달을 봐야 마땅한데도 달은 쳐다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쳐다보며 달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꼴이다. 또 언어문자는 처방전에 불과했다. 처방전에 의거해서 약을 지어먹어야 병이 낫지 처방전만 열심히 쳐다봐서는 병이 낫지 않는 것이다.
즉 언어문자는 노정기며 손가락이고 처방전이었다. 모두 깨우침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하는 ‘방편가설’이었다. 깨달으면 팔만대장경도 고름 묻은 휴지에 불과 했다. 마음을 일으킨 이는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며, 이치를 깨닫고는 교리를 버린다. 흡사 고기를 얻고 통발을, 토끼를 잡고는 그물을 버리는 것과 같다. 하지만 역으로 통발과 그물이 없으면 고기와 토끼는 어떻게 잡을 것인가. 성철이 후학들에게 통발과 그물을 남겼음이니 이는 얼마나 귀한 것인가.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02호 / 2015년 7월 15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8. 대승사에 광복 소식이 올라왔다
『"해방이 됐다고 부처님 법이, 또 수좌들 수행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정 승가의 복원을 발원했던 선승들은 서로를 찾았다. 멀리 있어도 법향은 전해졌다. "』
▲ 대승사의 동안거. 스님들이 선원 앞을 지나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책을 스승 대하듯, 또는 아기 돌보듯 했다. 절 살림에는 도통 무심했지만 책만은 철저히 관리했다. 어디에서 살든 봄 가을에는 바람을 쐬어주었다. 그때는 꼼짝 않고 곁에서 책을 지켰다. 대지를 녹이는 봄기운이, 삽상한 가을바람이 책 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기다렸다.
“참 무섭대요. 책을 얼마나 귀하게 다루시는지는 책 한 권 드는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손이 달달달 떨려요. 참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책을 보실 때도 아주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지 되는대로 넘기는 것은 꿈에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책은 안 빌려줘요. 혜적이라는 내 사제가 있었는데, 머리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어요. 한번은 내가 ‘증도가’ 한 권을 빌려줬더니 그 이튿날 가져오더군요. 그래서 ‘더 보지 왜 가져왔냐’고 하니 ‘다 외웠습니다.’ 하더군요. 그래 외워보라 하니까 줄줄 외워요. ‘법화경’ 한 권도 다 외워요. 머리만 좋을 뿐 아니라 인물도 잘나서 천동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인간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사람이라 말을 들었어요. 내가 안정사 토굴에 살 때, 일본 말로 된 한산시를 빌리러 왔더군요. 큰스님께서 어떻게 그 사람을 귀엽게 보고 빌려주시더군요. 그런데 혜적이가 책을 구부려서 손에 들고 다니니까, 큰스님께서 마치 잠자리 잡듯 뒤로 가서 탁 뺏더니 ‘너 이 자식, 책 볼 자격 없다’고 어찌나 혼을 내셨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책을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라서 바다와 같이 많은 것을 아는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혜암 스님 인터뷰 ‘고경(古鏡)’)
성철은 책이 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책 읽고 싶은 사람은 산 속으로 들어오라 했다. 책 볼 동안은 재워주고 먹여 주겠지만 ‘산외(山外) 대출’은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철학자 윤구병과의 일화도 그래서 생겨났으니 자못 유쾌하다. 성철이 대불련 회원 중에서 ‘중이 됐으면’ 하는 인물로 윤구병을 찍었던 모양이다. 윤구병 만을 서고인 장경각으로 데려가 서책들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 같은 난리를 겪으면서도 땅에 묻고 산 속에 숨기며 지켜왔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선승의 책 자랑이었다. 홀로 쇳대를 지니고 장경각을 드나드는 성철을 향해 윤구병은 쓴 소리를 올렸다.
“스님, 좁은 소견입니다만 그렇게 소중한 책일수록 공개해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수행과 연구에 도움이 되게 해야지요.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면 길은 둘 중 하나밖에 없겠습니다.”
성철이 의아스럽게 바라보자 대차게, 또 태연하게 얘기했다.
“스님께서 마음보를 고쳐서 책을 내놓으시거나 아님 스님께서 일찍 돌아가시거나 해야 할 것 같네요.”
그 말에 성철이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은 따뜻했다. 윤구병은 성철이 책을 보여주며 ‘함께 읽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묻고 있는 듯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성철이 ‘깨치면 고름 닦은 휴지에 불과한 불서’를 이렇듯 아낀 것은 뒤에 올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불서들은 임자가 따로 없었다. 보는 사람이 주인이었다. 성철은 책마다 ‘法界之寶(법계지보)’라는 도장을 찍었다.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법계의 보배라 표시한 것이다. 후학들에게 만고의 진리가 담겼으니 이를 보고 진리를 찾으라 했음이었다.
지금도 해인사 백련암의 보물들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철이 남긴 전설만을 찾으려 하지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성철이 정성스레 넘기던 책장이 후학들에 의해 닿아 없애져야 하지 않은가.
1945년 8월15일, 마침내 해방을 맞았다. 갑자기 찾아온 광복에 일본인 못지않게 조선인들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회 각 부문에서 어정쩡한 동거를 했다. 불교계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이틀 후 조선불교조계종 이종욱 종무총장과 모든 간부들이 사퇴했다.
8월20일 김법린, 최범술, 유엽 등이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조계사)에서 종무총장 이종욱으로부터 종단운영권을 인수했다. 이어서 9월22일에 전국승려대회가 열렸다. 사찰령, 조선불교총본산태고사법, 31본말사법을 폐지하고 교헌을 새로 제정했다. 서울에는 중앙총무원을 두고, 지방은 13개 교구로 나누고, 각 교구마다 교무원을 두어 지역 사찰을 관장토록 했다. 승려들은 모범총림 창설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새 교헌에 따라 교정(지금의 종정)은 박한영, 중앙총무원장에 김법린, 총무부장에 최범술 등을 선출했다. 김법린과 최범술은 성철과 인연이 깊었다. 중앙교무회 고문으로는 송만공, 송만암, 설석우, 백경하, 김구하, 장석상, 김상월, 강도봉 등을 위촉했다. 만공 스님은 덕숭산 전월사에서 해방 소식을 듣고 무궁화 꽃송이에 먹을 묻혀 ‘世界一花(세계일화)’를 썼다고 한다.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장래 조선이 세계일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친일승들은 해방공간에서도 건재했다. 이종욱은 3년간 승권 정지 처분만을 받았다. 친일의 큰 머리였지만 그에게 내린 징계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저 시늉만 냈을 뿐이었다. 권상로 또한 새로 설치된 해동역경원의 역경부장을 맡았다. 큰 종권은 놓았지만 친일승들은 그동안 구축했던 인적 보호망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그러다보니 일본 조동종 승려들과 조선 친일승들은 곳곳에서 눈물로 헤어졌다. 경성포교당에서 벌어진 ‘작별 의식’은 해방공간 불교계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일제강점기 조동종이 조선에 설립한 사찰이나 포교소는 171개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 경성포교당인 조계사였다.
물론 지금의 조계사와는 전혀 다른 절이다. 경성포교당은 현재의 동국대학교 만해광장 자리에 있었다. 전쟁에 패하자 조동종 승려들은 절을 넘기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절과 부처를 옮겨갈 수는 없었다. 경성포교당도 인수인계 파트너를 물색하다가 친일승 홍태욱을 점찍었다. 그리고 인수인계 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의 대표로 참여했던 사토 다이순(경성제국대학 교수)은 ‘조동종 경성 별원(경성포교당) 이양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홍태욱 일파는 11월 20일경 차례로 입산하여 일선(日鮮:일본과 조선) 승려가 한솥밥을 먹으며 조석 예불을 같이하고 25일에는 인계 법요를 엄수하여(…) 일동이 회식을 하고 난 후에 조선인 신자의 요청으로 권상로 선생이 두 시간 동안 법문을 하는 등 실로 의미 있고 인정이 있는 인계 법요를 한 것은 아마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선 불교의 위임 인계 이행에서 유일무이한 훌륭한 일이 아닐까 상상이 된다. 게다가 별도로 기재한 현물 인도 목록으로도 위의 인계 내용을 알 수 있듯이 물건 하나도 숨기지 않고 티끌 하나도 가져가지 않고 동전 한 닢도 받지 않고 참으로 평상시의 조계사 그대로 조선 불교에 위임했다. 이로써 불상과 불구는 변함없이 단상 위에서 조선 불교의 예배를 받아 법륜이 항시 굴러가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는 실로 환희의 절정이다. 일동은 25일과 28일 저녁 두 차례의 송별회를 하고 출발 당일에는 준비해 준 고가의 약밥 도시락을 받아 별원에서 용산역까지 1리 반의 도보 환송을 받았으며 쌍방이 모두 감격의 눈물로 이별하였다.’ (이치노헤 쇼코 ‘조선 침략 참회기-일본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나’)
해방이 되고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일본 조동종 포교소에서는 조선과 일본승려들이 함께 예불을 드리고 있다. 또 친일승 권상로도 여전히 법문을 설하고 있다. 그가 해방된 이 땅에서 어떤 법문을 했는지 궁금하다. 아마 조선과 일본이 같은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니 떨어져 있어도 떨어짐이 아니요,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사토 다이순은 일본포교당의 일본 부처가 전쟁이 끝나고 조선에 인계되어 다시 조선인의 절을 받을 것이니 이를 환희의 절정이라 표현했다. 부처님 말씀을 비틀고 승풍을 훼손하고도 참회는 없었다. 조동종 승려들과 친일승들은 이렇듯 보란 듯이 ‘떳떳하게’ 헤어졌다. 저들은 다시 만날 것을 진정 믿었을 것이다.
성철이 머물던 대승사에도 광복 소식이 올라왔다. 해방이 됐다고 부처님 법이, 또 수좌들 수행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정 승가의 복원을 발원했던 선승들은 서로를 찾았다. 멀리 있어도 법향은 전해졌다.
성철은 그해 겨울 대승사 산내 암자인 묘적암에 들어 동안거를 지냈다. 묘적암의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라 말 부설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나옹선사(1320~1376)가 이곳에 출가한 이후 불교 성지로, 또 수행처로 이름이 높았다.
묘적암은 비록 작았지만 고요함이 깊었다. 그 속에서 성철은 조선불교의 미래를 그렸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작은 방에서 임제의 ‘호통’과 덕산의 ‘방망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03호 / 2015년 7월 22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9. “혼자 가는 길이 중의 길이다”
『"성철은 그렇게 떠나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외로운 길이었다. 일타의 눈에 비친 뒷모습은 당당했다. 송광사 화엄전 뒷길로 성철은 사라져갔다. 일타는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젊은 시절의 성철 스님. 송광사에서 성철 스님을 처음 만난 일타 스님은 “찬란하게 빛나는 눈빛에서 지혜가 샘솟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깨달음을 얻은 후 큰스님을 찾아다녔다. 나름 인가를 받으려 했을 것이다. 성철은 산을 허무는 천둥 같은 법거량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계산의 효봉도, 덕숭산의 만공도 성철과 법거량을 하지 않았다. 단지 성철이 큰 법기(法器)라는 것만은 알아주었다.
성철은 도반에 대한 칭찬은 많이 했지만 상대적으로 불교계 스승이라 일컫는 큰스님들에 대한 상찬은 드문 편이다. 그렇다고 큰스님들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성철은 말을 아꼈다. 아마도 그 속에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을 하지 못한 서운함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성철에게 삭발을 해주고 계를 준 스승[得度師]은 분명 있지만, 마음을 깨우쳐주고 법을 준 스승은 따로 없었다. 성철은 진정 사법사(嗣法師)를 모시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법을 잇고 그 등불을 다시 전해주고[嗣法傳燈]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철은 그런 스승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배경에는 당대 큰스님들의 경계가 성철의 기대에 못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성철이 밝힌 대로 ‘불법 전승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이심전심이 생명’이며, 따라서 사자상승은 법을 전해주고 전해 받는 당사자 사이에서만 결정되는 일이니 제3자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성철의 깨침은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는가. 성철의 득도와 인가 여부를 연구해온 서명원은 나름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석가세존의 성도(成道)와 마찬가지로 성철 스님이 확철대오한 경지에 대한 평가는 그분이 인가를 받았는지 혹은 받지 않았는지를 떠나서 후대에 맡겨져 있다.’ (서명원 지음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 성철은 깨친 이후 괴각의 행보를 보였다. 그 당당함이 절대 순종의 절집 풍토로 보아 사뭇 방자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철은 깨쳤다고 해서 버릇없는 법기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성철은 이런 법어를 남겼다.
“견성한 사람은 구경의 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자이다. 설사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런 사람에겐 아무 일이 없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볼 때는 마치 멍텅구리 같고 둔한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에 닥쳐 법문을 한다든지 법거량을 할라치면 그 임기응변의 기봉이 번갯불처럼 빠르고 회오리바람처럼 매섭다. 암두 스님은 덕산 스님의 상수제자인데 자기 스승인 덕산을 두고 종종 구업이나 일삼는 자라고 폄하하곤 했다. 그렇다고 암두 스님이 덕산 스님보다 나아서 그런 소리 한 것이 아니다. 늘 자성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이 법거량이다. 제자가 스승과 엇비슷하면 이는 스승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라 했다. 그 덕과 지혜가 스승을 능가해야 비로소 은혜를 갚는 것이라 했으니 덕산 스님도 그와 같다 하겠다. 또한 임제 스님도 대오한 후에 감히 황벽 스님의 뺨을 때리고 어린아이 다루듯 하였으니 이 또한 같은 예라 하겠다. 스승의 무릎 아래에서 병든 양처럼 예, 예, 거리며 그저 눈치나 살피는 이는 올바른 자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스승에게 함부로 덤비라는 말이 아니다. 바른 안목과 법에 있어선 스승에게조차 양보하지 말라는 소리다.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에게 주먹질하고 황벽 스님에게 달려들어 뺨을 친 것도 그 분들이 선 자리를 바로 알고 번개와 회오리 같은 임기응변의 기봉을 쓴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겉모양만 흉내 낸다면 그건 어른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어린아이의 치기와 불손에 지나지 않는다.” (성철 지음 ‘옛거울을 부수고 오너라 禪門正路’)
성철은 간월도 간월암에서 정진한 후 뭍에 나와서는 더 이상 큰스님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도반들과 수행에 전념했다. 성철의 말을 듣거나 함께 수행한 운수납자들은 그야말로 구름과 물이 되어 선승 성철의 면모를 세상에 퍼뜨렸다. 성철은 차츰 수좌들의 표상이 되어갔다.
“우리 같은 걸망쟁이에게는 혹하고 반할 수 있는 그런 어른입니다.” (일각 스님)
성철은 대승사 묘적암을 나와 송광사로 향했다. 1946년 여름, 삼일암에서 하안거를 나기 위해서였다. 그때 송광사에는 18세의 일타(1929~1999)가 와 있었다. 일타는 14세에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다. 일타에겐 일가친척 41명이 출가한 불연(佛緣)이 있었다. 그도 일찍이 집을 나와 정진한 끝에 26세에 손가락 네 개를 태우는 연지 공양을 했다. 또 태백산 도솔암에서 6년 동안 장좌불와,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일타는 대선지식 아래서 공부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열흘 동안 걸어서 송광사에 들었다. 송광사에는 전국에서 여름 결제를 지내려 많은 수좌들이 몰려왔다. 다른 듯 닮은 걸망이 선방에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일타도 자신의 걸망을 그 속에 내려놓았다. 나이가 제일 어렸던 일타에게는 첫 안거였다. 당시 송광사 조실은 효봉 스님이었다.
결제를 기다리던 어느 날 공양을 마친 스님들이 쑥덕거렸다. 일타가 귀를 세우니 ‘철수좌가 온다’는 것이었다. 일타가 물었다.
“철수좌가 누구십니까?”
그러자 답 삼아 스님들끼리 성철에 대해 얘기했다.
“만물박사여서 세상천지 모르는 것이 없다지? 글이 우리나라 제일이래.” “말도 말어.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우는 스님이야.”
성철의 이름은 이미 물을 넘고 재를 넘어 전국 사찰에 퍼져있었다. 성철은 당시에도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타는 철수좌가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 마침내 성철이 나타났다.
일타는 성철이 효봉을 만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성철이 큰방 앞에서 객이 왔음을 알리자 지객스님이 객실로 안내했다. 방안에는 효봉과 입승을 보는 노장 영월이 앉아 있고 대중들은 서 있었다. 견성했다는 젊은 수좌의 모습이 늠름했다. 성철이 성큼성큼 들어와 절을 하고는 이내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았다. 당연히 무릎을 꿇을 것으로 여겼던 대중들은 내심 놀랐다. 이어서 성철이 하안거를 나고 싶다며 방부를 알렸다. 그러자 영월이 입을 뗐다. 낮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듣자하니 생식을 한다던데 그런 분은 여기서 대중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말을 돌려 퇴짜를 놓은 것이었다. 성철이 무심하게 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며칠만 쉬어가겠습니다.”
일타는 그 광경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눈빛에서는 지혜가 샘솟는 것 같고 헌칠한 이마에 흠씬 커 보이는 키가 대중을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송광사에서 방부를 거절한 이유가 생식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35세 선승이 뿜는 빛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타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지금 생각하면 꼭 생식이라기보다는 이 분이 워낙 아는 것이 많고 바른 소리를 잘하는 쉽게 말하면 ‘괴각’이다보니, 대중 속에서 평범하게 얌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틀리다 싶으며 바른 소리를 해버리니 좀 곤란하다 싶어 거절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 이미 성철은 ‘할 말은 하는’ 선승이었다. 성철은 선방에 들지 못하고 노전에 머물렀다. 훗날 성철은 지눌을 비판했고, 그로 인해 촉발된 돈점논쟁에서 지눌의 사찰인 송광사의 대대적인 공격을 당했으니 이때의 ‘성철 냉대’는 무슨 암시였는지도 모른다.
일타는 생식하는 성철에게 끼니마다 상추를 씻어 가져갔다. 왠지 말뚝신심이 일었다. 하루는 경치 좋은 수석대로 산보를 나서는 성철을 따라나섰다. 성철이 일타를 보고 말했다.
“왜 따라오는가?” “따라갑니까? 그냥 가지요.”
성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18세 어린 중을 한참 바라봤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란히 걷다가 문득 성철이 말했다.
“중노릇은 사람노릇이 아니다. 중노릇하고 사람노릇하고는 다르지. 사람노릇하면 옳은 중노릇은 못한다.”
그 말은 막 불가에 들어온 일타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일타는 ‘중노릇’을 훗날 이렇게 적고 있다.
‘중은 중노릇만 해야지 세속에서 말하는 ‘사람노릇’을 하려고 하면 올바른 불교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도를 닦는 이가 공부가 안 된다는 것은 스스로 사람노릇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이 중노릇만 하면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이 자꾸 사람 노릇을 하려 하는 것이 탈인 것입니다. 사람대접 받으려 하고, 사람들과 왕래하며 다니고, 절 살림 살고 하는 모든 것이 사람노릇이지 중노릇은 아닙니다.’ (일타 지음 ‘발심수행장’)
성철은 일타의 일생을 흔들어버렸다. 일타는 성철을 따라 어디든 가고 싶었다. 떠나가는 성철에게 물었다.
“혼자 가십니까?” “혼자 가는 길이 중의 길이지.”
성철은 그렇게 떠나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외로운 길이었다. 일타의 눈에 비친 뒷모습은 당당했다. 송광사 화엄전 뒷길로 성철은 사라져갔다. 일타는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04호 / 2015년 7월 29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0. 일어나 봉암사를 바라보았다
『“도우와 함께 해인사를 빠져나온 성철은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 들었다. 청정승가 복원을 서원했던 성철은 그곳에서 도반들을 찾았다. 성철은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설파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 싶었다.”』
▲ 가야총림을 세운다는 소식을 접한 성철 스님은 해인사로 향했다. 그러나 적폐들이 드러나자 이내 해인사를 빠져나온다. 사진은 해인사 대적광전. 법보신문 자료사진
세간에 성철은 딸 하나만을 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두 딸이 있었다. 성철의 큰 딸 도경은 예쁘고 똑똑했다. 집안 어른들은 도경을 끔찍이 아꼈고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녔다. 식구들은 아버지 성철이 없었기에 더 애틋한 정을 쏟았을 것이다. 동생 수경(불필 스님)은 언니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언니는 할아버지의 훤한 인물을 닮아 이마도 반듯하고, 콧날도 오똑하고, 눈도 크고 아름다웠다. 키도 늘씬하게 커서 모두들 미인이라고 했고, 성격도 좋아 집안 식구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총애를 받았다.” 도경은 동생이 밖에서 놀다가 돌아오면 옷차림부터 살폈다. 동생은 활달해서 사내아이들과 놀다가 곧잘 옷고름을 떨어뜨렸고 도경은 말없이 그걸 달아주었다. 또 어른들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맏이였다. 그러던 도경이 경허 스님의 ‘참선곡’을 읽었다. 추측컨대 아버지를 그리다 아버지가 빠져든 불교에 관심을 가졌음직하다. 당시 열심히 절에 다니던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아버지의 출가를 이해하고 종국에는 동경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참선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夢中)이로다 / 천만고(千萬苦) 영웅호걸 북망산(北邙山) 무덤이요 / 부귀문장(富貴文章) 쓸데없다 / 황천객을 면할소냐 / 오호라 이내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에 등불이라’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도경이 ‘참선곡’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 성철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린 나이지만 아버지처럼 ‘영원한 삶’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성철이 훗날 딸(불필 스님)에게 준 법문 노트의 머리말을 보면 마치 ‘참선곡’의 변형처럼 느껴진다.
‘초로인생(草露人生), 풀잎의 이슬 같은 인생! 들판의 저 화초는 겨울에 죽었다가 봄이 오면 다시 꽃이 피건마는, 오직 이 인간은 한 번 죽으면 아주 가서 몇 천 년의 세월이 바뀌어도 다시 돌아오는 이 없으니, 우주는 인생의 분묘라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라. 참으로 영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도경은 절에 가서 입을 것이라며 손수 바지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정진 중인 대승사에 편지를 보냈지만 위에서 이미 살핀 것처럼 성철의 손에는 닿지 못했다. 도경은 ‘큰 중이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하니 학업을 마치고 오라’는 노스님의 답장을 받고 실망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출가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도경은 집안 어른들의 바람대로 반듯하게 자랐다. 그리고 진주여중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집안뿐만 아니라 묵곡리 일대에서도 처음 있는 경사였다.
1946년 추석이었다. 열네 살 도경이 밖으로 놀러나갔다가 돌아와 갑자기 아프다며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동생 불필의 얘기를 옮겨 본다.
‘(언니는) 자기 손바닥을 한 번 쳐다본 후 엄마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나를 믿는 모양이지? 나를 믿지 마.” 언니는 사흘 후 거짓말처럼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예쁜 중학교 교복을 맞춰 놓고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채 언니가 그렇게 가버리자, 할아버지 할머니의 슬픔은 물론이고 어머니의 비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집안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집 앞 강가에서 화장을 했다. 어른들은 수경에게 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다. 도경은 숲 속 큰 소나무 밑에 한 줌의 재로 묻혔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할아버지 이상언은 비탄에 빠졌다. 딸이 죽었건만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 성철은 정녕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다. 도경은 죽은 지 7일째 되던 날 어머니 꿈에 나타나 교복이 입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교복을 도경이 묻힌 소나무 아래서 태웠다.
사십구재를 지낸 날 밤에는 고모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스님으로 만들어주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나는 이제 천상으로 갑니다.”
그리고 불이 난 것처럼 환한 숲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 무렵 성철은 하안거를 마치고 파계사 성전암에 머물고 있었다. 대승사가 선방 문을 닫았고, 그곳에 있던 선객들은 다시 구도처를 찾아 흩어졌다. 성철은 석암 스님과 함께 파계사 산문을 넘었다. 홍경, 자운, 종수, 청담, 도우는 희양산 봉암사로 거처를 옮겼다, 봉암사 주지 최성업이 선방을 열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1947년, 동안거를 마친 선승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종단을 접수한 소위 개혁승들은 삼보사찰(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을 총림으로 만들자고 주창했고, 그중 해인사를 가장 먼저 총림 시범사찰로 지정했다. 총림이란 선원, 강원, 율원을 갖춰야 했다. 중국의 총림을 본떴으니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듯 각기 다른 소임의 승려들이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곳이었다. 가야총림은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추대했다. 정든 송광사를 떠나오는 노장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고 한다. 효봉은 그 아쉬움을 시에 담았다.
‘내가 송광사에 온 지 어느덧 10년 / 옛 어른들 품 안에서 편히 먹고 자랐네 / 한데 오늘 조계산을 떠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 인간과 천상의 큰 복밭을 갈기 위해서라네’
효봉은 해인사를 복밭으로 갈겠다는 원을 세웠다. 그것은 결국 인재양성이었다. 사찰에서 술 냄새와 비린내를 없애려면 술 마시고 고기 먹는 승려들을 추방해야 했다. 해인사로 가는 길은 멀었다. 나흘 동안 걷고 또 걸으면서 효봉은 조선불교를 새롭게 일으킬 수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정진하는 광경을 그렸다. 생각만 해도 장엄했다.
선방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던 선승들이 가야산으로 향했다. 청담, 홍경, 종수가 봉암사를 나왔다. 봉암사에 있던 수좌들은 막 사다놓은 커다란 목간통을 걸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짊어지고 내려와야 했다. 성철도 소식을 듣고 성전암을 나섰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좌들이 100명도 넘었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눈칫밥을 먹던 선승들은 제대로 실컷 공부 한번 해보자며 해인사에 모였다. 하지만 총림을 세우겠다는 뜻만 높았을 뿐 현실은 무엇 하나 준비된 것이 없었다. 총림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견만 분분했다. 종단 측에서는 최범술, 해인사 측에서는 주지 환경, 그리고 수좌들을 대표해서는 청담과 성철이 수시로 협의를 했다.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총림의 재정 문제였다.
종단에서는 총림 예산을 따로 마련해 주지 못했다. 대신 해인사의 논밭을 대처승들과 총림이 반반씩 나눠 갖도록 했다. 그런데 정작 소출이 많은 멀쩡한 논밭은 대처승들이 차지하고, 재 밑의 천봉답이나 산간벽지의 척박한 밭은 총림에 주었다. 해방공간에서도 대처승의 입김은 여전했다. 입은 많은데 양식이 부족했다. 한창 수행 정진해야 할 수좌들이 바랑을 짊어지고 동냥질을 해야 했다. 마음껏 공부만 해보겠다는 수좌들의 원이 자고나면 조금씩 부서졌다.
성철과 청담이 구상한 총림 속의 계(戒)살림도 그리 여의치 않았다. 여러 색깔의 대중이 어떤 규약이나 약조 없이 모여 살다 보니 중구난방이었다. 가야 총림은 성철과 청담의 ‘대승사 구상’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종단과 총림이, 해인사와 선승들이, 비구와 대처승이, 또 비구와 비구가 다퉜다. 적폐(積弊)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비록 명분으로 가렸지만 그 속의 욕심이 훤히 보였다. 성철은 낙담했다. 어정쩡하게 서산으로 넘어가는 하루 해가 아깝기만 했다. 도우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곳은 싹수가 노라네. 우린 공부나 하러 가세.”
성철은 청담에게도 함께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청담은 그래도 종단에서 하는 총림이니 한 철은 있어야겠다며 해인사에 남았다. 불교개혁의 서원은 간절했지만 아직 시절인연이 닿지 않았음이었다. 그 후 가야산에는 총을 든 사람들이 자주 나타났다. 일제가 떠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험했다. 가야총림은 제대로 서보지도 못하고 스러졌다. ‘최초의 총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도우와 함께 해인사를 빠져나온 성철은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 들었다. 청정승가 복원을 서원했던 성철은 그곳에서 도반들을 찾았다. 성철은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설파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 싶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은 반유반승(半儒半僧), 반승반속(半僧半俗)의 풍조를 당연시했다. 일제시대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유입되어 정체성마저 잃어버렸다. 이제 선종의 맥을 잇고 선풍을 다시 일으켜야 했다. 성철은 봉암사를 바라봤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05호 / 2015년 8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