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25전쟁(戰爭) 발발 6일전, 6월 19일 일요일,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을 맞아 강원도 최전방 백마고지(白馬高地) 전적지(戰跡地)와 노동당사(勞動黨社)를 탐방(探訪)하고 소요산역 까지 라이딩하기로 하였다. 동두천역(東頭川驛)에서 9시10분에 만나 자전거는 트럭에 실려 보내고, 경원선(京原線)으로 갈아타고 백마고지역(白馬高地驛)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25분경 이었다. 겹겹이 병풍(倂風)처럼 펼쳐진 산들은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백마고지(白馬高地) 전적지(戰跡地)를 먼저 답사(踏査)하기로 하고 맑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출발(出發)하였다.
백마고지역에서 불과 2km이내에 위치하고 있었다.단체 관광객들로 계속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엄숙(嚴淑)하고 경건(敬建)한 마음으로 전적지를 두루두루 살펴본 다음 백마고지 전적지 전망대(展望臺)에 오르자 시야(視野)가 확 트이면서 백마고지 능선(陵線)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산림(山林)도 울창(鬱蒼)하게 우거져 있었다. 백마고지는 395m로서 군사지정학 (軍史地政學)상 요충지(要衝地)였다. 따라서 이 고지를 선점(先占) 하기위해 아군 9사단과 중공군이 열흘간 12차레 밤낮으로 치열(熾熱)하게 전투(戰鬪)를 했던 것이다. 세계(世界) 전사상(戰史上)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가장 치열(熾熱)한 전투로 기록(記錄)되고 있다. 결국은 아군 9사단이 승리(勝利) 함으로써 지리한 전투가 종결(終結)된 것이다.
심한 포격(포탄 약30만발)으로 백마고지(白馬高地)는 황폐화(黃廢化)되었고, 그로인해 고지의 모습이 백마(白馬)와 같다하여 백마고지(白馬高地)라 불리게 되었다. 9사단이 백마부대(白馬部隊)로 불리게된 배경(背景)이다.다시는 이땅에서 전쟁(戰爭)을 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느꼈다. 63년전 전쟁(戰爭)은 끝났지만 여전히 휴전상태(休戰狀態)로 진행형이다. 155마일 전선(戰線)을 휴전선(休戰線)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전운(戰雲)이 감돌고있는 한반도가 언제 전쟁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통일이 오는 그날 까지라도 철통같은 방어준비태세와 국민이 혼연일체가된 굳건한 안보태세(安保態勢)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만이 사랑하는 조국(趙國)을 지키는 일이다.
백마고지 전적 위령탑(慰靈塔)에서 잠시 묵념(默念)을 올린후 노동당사(勞動黨社)로 향하였다. 노동당사는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4km 이내 떨어진 곳에 있었다. 벌거벗겨진 상태로 온통 깊은 상처(傷處)와 멍이든 채로 철원평야의 한복판에 외롭게 서있었다. 총알 흔적(痕跡)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사방팔방(四方八方)에 선명(鮮明)하게 드러나 보였다.오늘날 역사(歷史)의 산 증인(證人)으로 남아 안보교육 (安保敎育) 역활(役活)을 톡톡히 하고있는 상징적(象徵的)인 건물이다. 건물이 워낙 낡고 붕괴(崩壞) 위험(危險)이 상존(常存)하고 있어 건물 내부 출입(出入)이 금지 되었다.그리고 쇠파이프로 긴급 수혈(受血)하여 건물의 생명(生命)을 유지하고 있었다.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상흔(傷痕)이 전쟁(戰爭)의 폐허(廢虛)와 평화(平和)의 중요성(重要性)을 말해주고 있다.노동당사를 빠져나오자 바람이 세어지고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스트라 전(전인구)의 GOP출입 협상 (協商)덕분에 계획에 없던 월정리역(月井里驛)을 깜짝 방문(訪門)할 수 있었다. 월정리역은 노동당사로 부터 10km에 위치한 GOP 부근에 있었다.민간인 신분으로 출입(出入)할 수 없는 곳이다. "철마(鐵馬)는 달리고 싶다"는 역이 바로 월정리역이다. 6.25 전쟁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汽笛)을 올렸던 객차의 잔해(殘害)와 유엔군 포격(砲擊)으로 부서진 인민군 화물열차(貨物列車)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채 누워 있어 분단(分斷)의 아픔을 실감케 하였다.그리고 역사(驛舍)는 낡고 허름한채로 방치(放置)되어 있었다. 통일(統一)이 오면 월정리역은 한(恨)을 털어내고 생생(生生)하게 살아 숨쉬는 역(驛)으로 탈바꿈 하게 될것이다.통일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오후부터 구름이 걷히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대마사거리에서 국도 3번 도로를 따라 신탄리 방향으로 직행한 다음 차탄천변길로 접어들었다. 점심 때인 지라 우선 식사부터 해결하기로 하고 신탄리 평양막국수 식당을 찾았다. 주메뉴는 얼큰한 평양 막국수와 닭 날개였다. 오래간만에 먹어 본지라 맛이 있었다. 정답게 이야기를 하면서 시원한 막걸리도 곁들여 마셨다. 오후 2시경 식당에서 나와 다시 차탄천변길로 턴하여 이동하였다. 차탄천변길 양가에 금계국꽃이 온통 노란색으로 끝도없이 펼쳐져있어 장관(壯觀)을 이루웠다. 코속으로 물씬 향기(香氣)가 풍겨왔다.
대광리에 진입할 즈음 왼쪽에 우뚝하게 솟은 고대산(852m)의 웅장(雄壯)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1971년 소대장시절 소대원들과 함께 시멘트와 모래를 걸머지고 고대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진지공사(陳地共事)를 했던 기억(記憶)이 떠올랐다. 내 발자국과 손길,숨소리가 묻혀있는 추억(追憶)이 깃든 산이다. 그리고 대광리는 하숙(下宿)하면서 생활했던 곳이다.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신 어머니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보잘것 없는 시골 동네 였지만 지금은 깨끗하게 단장(端裝)되어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신망리를 지나 연천에서 차탄천과 아쉬운 작별하고 연천 진입로 사거리에서 가로질러 마을길과 농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20-30분 지날 무렵 한탄강(漢灘江)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암절벽(奇巖絶碧)에 우뚝솟은 수목들, 그리고 한탄강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관(壯觀)을 연출했다.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水彩花)였다. 사진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탄강(漢灘江)은 한국의 중서부 화산지대(火山地帶)를 관류(貫流)하는 강으로 현무암(玄武巖) 수직절벽(垂直絶碧)이 잘 발달되어 있어 절경(絶景)이 매우 아름답다. 강원도 평창군에서 발원하여 철원군을 거쳐 연천군 전곡읍과 미산면 사이에서 임진강(臨津江)과 합류(合流)한다. 총 길이는 136km에 이른다. 한탄강을 따라 전곡까지 계속 이동한 다음 전곡읍 수퍼에 들러 시원한 음료와 아이스크림으로 식은땀과 갈증(渴症)을 해결했다.
3번 국도를 따라 구한탄강대교를 지나 초성리를 경유하여 소요산역에 도착하였다. 오후 5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길고 긴 여정이 종료된 시점이었다. 오늘 총 이동거리는 71km로서 새로운 기록으로 갈아치웠다. 종전기록은 61km 였다. 땀도 많이나고 몸이 몹시 피곤해 보였다. 대열 쟌차 동우회 라이딩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동기생들과 함께 멋진 하루를 보내게 되어 매우 기쁘다. 쇄도우수(김명수)의 명쾌한 안내로 비교적 평탄한 길에 편안하고 즐거운 라이딩을해 고맙다는 말로 전하고 싶다. 그리고 특히 내가 소대장시절 근무했던 지역을 라이딩 하게되어 무엇보다도 기쁘게 생각한다. 감회가 남달랐다. 맥아더 장군의 명언인 "노병(老兵)은 죽지않고 살아질 뿐이다." 라는 말로 끝맺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