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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구덩 원문보기 글쓴이: punuri
별신굿의 미학성
다니엘 키스터*
1)
〔요약〕
전통적인 서양 희극은 웃음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추구하게 되었고 비극은 숭고의 정신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찾게 되었다. 동해안 별신굿은 그 둘을 솜씨 있게 융합하여 공동체에 정화를 가져오는 轉化를 성취한다. 그러한 전화
과정은 동해안 별신굿의 총체적인 미학적 역동성을 구현하는 인간의 희극적 부조리와 빛나는 신성한 조화 상태의 융
합 속에서 볼 수 있다. 서낭신 맞이 의식을 신대로 극화하는 별신굿의 핵심적인 거리는, 다른 여러 거리의 笑劇的 정
화를 완성하며 굿 미학이 지닌 淨化의 힘은 조화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는 덩실덩실 추는 우아한 원무가
다른 익살스러운 거리들에서 펼쳐져 나타나는 일상적 부조리의 무게로부터 참가자들을 더욱 정화하고 해방시키며,
이들을 땅과 하늘, 바다와 육지,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신이 조화롭게 일치되는 순간 속으로 이끌어 들인
다. 그럼에도 이 굿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순을 불러일으키고 그러한 삶의 경험을 신대로 서낭신을 맞이
하는 상징을 통하여 더욱 더 통합하고 정화하며 聖化하는 것이다.
한국의 건국 신화들은 고대 한국인의 미의식을 大明天地를 밝히는 天神의 光彩로 함축하였
다고 전하여진다. 한국인의 색채 의식에 대한 고찰에서 閔周植은 육당의 말을 빌려 유별나
게 많이 사용되는 白자와 白色이 “.의 문화”를 이루며 여기서 “.”은 태양의 광명을 뜻할
뿐만 아니라 “신이나 하늘을 내포”하고 “밝음을 숭상하는 제천의식의 근본 정신을 상징한
다”고 하였다.1) 한국 무당이 여러 굿에서 과시하는 예술적 수완은 그가 神性과 신성의 계
시를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2) 신령의 영역이 생명을 고취하
는 조화를 발산한다는 고대 신화의 믿음이 한국 무속 전통 전반에 내재한다고 전하여진
다.3) 그것은 여러 굿의 예술적 노력에 구체적 형태로 내재하여 있다. 굿의 예술적 기교는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한국 미학에 조응하여 자연, 가정, 출생, 개인의 죽음과 같은 일
상의 세속적 요소들을 신의 현존으로 빛나는 세상으로 轉化시킨다. 동해안 별신굿에서 서낭
신을 맞이하는 활기찬 圓舞는 그러한 의식에 참례하고 있는 사람들이 神性을 숭고미의 대상
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마을 사람들은 별신굿의 핵심적인 거리에 이르면 바닷가나 야산에 있는 서낭당에 모여 신령
을 청한다. 그들은 신령이 대나무 “신대”의 흔들림을 통하여 자신의 현존을 상징적으로 드
러내기를 조바심내며 고대한다. 이 의식은 단지 의식 주변에 감도는 기적적 분위기에서뿐만
* 서강대학교 교수.
1) 閔周植, “韓國古典美學思想의 展開”, .韓國美學試論., 權寧弼 외 (서울: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4), 2
0~22쪽.
2) 다음의 글을 참조:다니엘 A. 키스터(D. A. Kister), .삶의 드라마:굿의 종교적 상상력 연구.(서울:서강대
학교 출판부, 1997), 137~170쪽.
3) 김인회, .韓國 巫俗 思想 硏究.(서울:집문당, 1987), 57쪽 이하.
2 한국무속학
아니라 원형적 상징을 예술적으로 효과 있게 극화한 데서 그 힘을 얻는다. 롬멜(A.
Lommel)은 .샤머니즘--예술의 기원. (Shamanism:The Beginnings of Art)에서 샤먼은
“예술적으로 생산적인 사람, 곧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강조하였다.4) 능숙한 무당은 몸짓과
음악, 춤, 시각적 상징들을 사용해서 신령과의 만남을 나타내는 징표를 창조한다. 별신굿에
서 마을 사람들은 맑게 개인 봄 날 무당 일행과 함께 강렬한 태평소 소리와 울려 퍼지는 꽹
과리 소리에 맞추어, 하늘에 펄럭이는 흰 깃발을 단 신대 주변에서 신명나게 圓舞를 춘다.
이 때 의식은 개개인들을 공동체로, 하늘의 신령들과 교감하는 공동체로 질적으로 변화시키
려는 목적을 이루게 되며 그것은 숭고하며 아름다운 상징으로 극화된다. 이 의식은 평범한
도구들, 즉 종이꽃과 간단한 악기에서 울려 퍼지는 리드미컬한 장단, 주변 자연 경관 등을
顯示的인 동시에 아름답기도 한 조화의 상징으로 전화시키고, 마을 공동체가 일상 삶 속에
서 신 중심적 조화를 유지하도록 유도한다.
I. 희극적 정화
동해안 별신굿의 미학은 숭고미의 문제만은 아니다. 훼손되고 좌절되고 부조리한 인간 세계
와 직면하여 터지는 굿의 웃음이 지닌 정화(catharsis)의 미학은 굿이 표현하는 신적 숭고
미와 대등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해학을 결여한 한국 미학은 상상할 수도 없으며5) 정화
하고 평등화하고 객관화하는 웃음의 활력을 결여한 굿의 미학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별신굿의 희극적 장면들은 전체적으로 신령에게로 나아가려는 숭배자들의 노력을 압박할 수
있는 恨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굿의 익살스러운 희극적 장면들
은 신령들이 쉽사리 靈巧를 야기할 수 있는 일상적인 수준에서 숭배자들에게로 나아가는 모
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굿의 희극적 장면들이 연출하는 미학은 바로 익살스러운 일상
의 혼란 속에서 신의 광채가 빛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별신굿의 마지막 날 아침에 천막과 장식들과 제상을 치우고 바다만을 배경으로 해서 북과
때로 요란한 징소리가 이어지자, 남자 무당은 淨化를 공공연한 의례 목적으로 삼는 일련의
굿거리로 굿판을 끝마친다. 여기서 별신굿에 불러들였다가 이제 마을에 해를 끼치지 않게
하려면 융숭하게 대해서 떠나 보내야 하는 수비(인간이 죽어서 된 귀신)들에게 음식을 대접
하고 이들을 즐겁게 하는 일을 뜻한다.6) 무당은 남아 있는 몇 안되는 마을 사람들도 역시
즐겁게 하며 점잖은 훈장과 소경, 어부, 해녀, 해산하는 여자, 그리고 마을의 일상 삶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인물들의 인생 起伏을 희극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평범한 것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한국 미학과 상통한다.
이 소극들은 의례의 내재적 목적을 이루고 별신굿의 전체 미학 형식을 완성하는 데에 필수
적이다. 이 소극들은 별신굿 주요 거리에서 소개되는 희극적 농담과 감동적인 이야기와 함
께 한 맺힌 잡귀들의 존재가 유발하는 불안을 훌훌 털어 버린다. 이 소극들은 정화 의식의
초점을 달갑지 않은 귀신들을 쫓아내는 푸닥거리로부터 참가자들이 느끼는 악감정을 씻어
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포괄하며, 일상 삶 속에서 뒤범벅이 된 희망과 기쁨과 좌절을 생의
4) Andreas Lommel, Shamanism: The Beginnings of Art, tr. Michael Bullock(New York:McGraw-Hill,
1967), p. 8.
5) 權寧弼, “韓國傳統美術의 美學的 課題”, .韓國美學試論., 權寧弼 외(서울: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4),
91쪽 이하.
6) 崔正如.徐大錫 편, .東海岸巫歌.(서울:형설출판사, 1982), 283쪽.
별신굿의 미학성 3
축제로 轉化시키는 것이다. 이 소극들은 삶의 부조리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별신굿 전체에
가미하여 별신굿 절정부에서 이루어지는 서낭신과의 通交를 좀더 정직하고 성숙한 차원으로
이끈다.
거리굿의 소극 메들리는 기회만 있으면 훈장을 골려 대는 마을의 학동들을 가르치려는 훈장
에 관한 거리로 시작된다. 이어서 이 메들리는 전통적인 과거 시험을 풍자하는 科擧 거리로
넘어간다. 무당은 훈장이 가르칠 책무를 포기하고 유교적 가치관을 좇아 벼슬이나 한 자리
해 볼 생각으로 어려운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서울로 향하고 있다고 우리가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데 훈장은 이전에 자신의 학동들이 했던 장난꾸러기 역할을 맡아서 기존 유교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그는 말도 안되는 시 한 수로 과거 시험에 합격한다. 그
러나 그는 “參奉”이라는 벼슬이 봉사--경상도 사투리로 봉사를 “참봉”이라고 함--의 일이
라면서 참봉 벼슬을 마다하고, “座首”라는 벼슬은 그저 졸면서 요강 위에 앉아 있는 일--
“요강 坐睡”--과 같기 때문에 좌수 벼슬 역시 사양한다.7) 시험관들은 “니 꼬라지 보니 벼
슬은 커녕 개똥도 못하겠다”라는 훈계와 함께 그를 내던져 버린다.
그러자 우리의 불운한 주인공은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독약을 먹기는 하지만 우연히도
그것은 진짜 목숨을 잃을 정도의 양은 아니다. 대신 독약으로 유발된 무아경 속에서 그는
저승의 명부 십대왕을 만나게 되고 십대왕은 그에게 자신의 왕국에서 과거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며 그 결과 자신에게 제수된 벼슬을 받아들인
다. 그 벼슬은 거리굿으로 떠도는 잡귀들을 배불리 먹여 쫓아 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통제하려는 잡귀들이 앞의 훈장 거리에서의 학동들만큼이나 장난스럽고 다루기 힘들
다. 익살 일변도의 난장판이 되어 잡귀들은 그의 귀를 잡아당기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그
를 좌지우지하려 든다.8) 이처럼 이 笑劇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대한
패러디와 잡귀들을 다루려는 무당의 儀式的인 시도에 대한 戱畵化로 끝을 맺는다. 무당의
儀式的 역할을 희화화하는 익살은 결코 신대로 서낭신을 맞이하는 장면과 같은 별신굿의 진
지하거나 숭고한 순간들 속에서 일어나는 경외심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익
살은 경외심을 건전한 사실주의와 섞어 굿의 비전이 소박한 신화적 경이감과 사실주의적 懷
疑 모두를 감싸안을 만큼 성숙하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여러 거리들이 이어지면서 희극의 초점은 유교 양반 계급의 부조리에서 민중의 불행으로 옮
겨진다. 떠들썩한 웃음은 희극적 걸작인 여섯 번째 거리, 곧 奉事 거리에서 그 절정에 이를
수 있다. 이 소극의 용감한 주인공은 불운한 훈장보다는 훨씬 더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줄
안다. “일출을 구경하러”9) 가던 길에 그는 자신의 눈먼 것을 농담거리로 삼기도 하고 자신
을 조롱하는 방아찧는 아낙네들의 입을 막기도 한다. 그는 그 아낙네들이 지나가는 모든 남
정네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고 상스럽게 줄줄이 읊어 댄다.
각득아지매 입으는 술잔이나 다를까
이놈도 쭉쭉 저놈도 맞춘다.
각득아지매 젖으는 주전자 꼭지나 다를까
이 사람도 만치고 저 사람도 빤다.
7) 위의 책, 295~296쪽.
8) 위의 책, 303~305쪽.
9) 위의 책, 331~332쪽.
4 한국무속학
각득 아지매 손목은 낫자리(낫자루)나 다를까
이 놈도 쥐고 저 놈도 쥔다.
그리고 그는,
각득아지매 또 그거는 히히히
방아 확이나 다룰까
이 봉사 이거는
방아공이나 다를까10)
하고 뽐내는 것이다. 길을 계속 가던 중에 소경은 이 별신굿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우연히
지나게 된다. 그는 신령에 대한 믿음에서 약수로 그의 눈을 씻어 내고 기적적으로 시력을
되찾는다.11) 징 소리에 맞추어 봉사는 신들께 찬사를 드리고 나서, 이 거리는 비애를 경이
감으로 전화시키는 신령들에 대한 경탄으로 끝을 맺는다.
거리굿 후반부의 여섯 거리들은 바다와 싸우는 어촌 사람들의 삶을 조명해 준다. 뱃놀이에
서 한 어부는 바다에서 고기가 잡히지 않자 심심풀이로 노래를 부르게 된다. 대나무 장대로
노를 젖는 시늉을 하며 남들은 동력배로 고기를 잡는데 자기는 왜 노를 저어야 하나 하고
한탄한다. 그는 그물을 던지는 시늉을 하고는, “어이쿠 이것봐라! 고기떼로구나”하고 외친
다. 그가 상상 속에서 뭍으로 향할 때 풍랑이 인다. 한 판본에서는 어부와 그의 동료들이
폭풍우를 만나도 구조되고 모든 것이 좋은 결말에 이르게 된다. 보다 더 어두운 판본에서는
해안가 어부에게라면 아직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 투영되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모두가
물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마지막 解産 거리에서는 막 아이를 낳으려던 순간에 여인이 고통 속에서 삼신할머니를 찾는
다. 남자 무당이 이 여인 역을 연기하는데, 이 여인은 자기 뱃속의 아이가 마을의 알 만한
사람 중 한 사람의 아이일거라고 넌지시 말하여 폭소를 유발한다. 오렌지색 플라스틱 물바
가지를 代用하여 등장한 아기는 예쁜 사내아이로 밝혀진다. 이 거리는 모성애와 생명 탄생
의 경이를 찬미하는 시적인 자장가로 희극의 절정에 이른다.
둥둥둥 내 사랑
어디 갔다가 이제 왔나 어디 갔다가 이제와
하날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불끈 솟았나
하운(夏雲)이 다기봉(多崎峰) 하니 구름 속에 싸여 왔나.12)
한 판본에서는 이 거리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러나 좀더 어두운 판본에서는 현대 의학이
발전되기 전에는 흔한 일이었듯이 신령의 도움은 거의 효험이 없다. 아기는 갑작스레 병이
들어 죽게 된다.13)
거리굿 전반에 걸쳐서 무당은 예술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화술, 이미지, 연극적 동작, 익살
10) 위의 책, 334~335쪽.
11) 위의 책, 336쪽.
12) 위의 책, 350쪽.
13) 위의 책, 352쪽.
별신굿의 미학성 5
등을 사용하면서 상반된 것들간의 불안정한 긴장으로 결합되는 세계를 구축한다. 무당은 양
반 계급의 유교적 가치들을 동경하거나 거부하는 모호한 반응들을 불러일으키는 제반 장면
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매우 중시되는 사회적, 儀式的 구조들을
그들 자신들이 희롱하게 되는 희극적 상황을 연출해 낸다.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때로는 극
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때로는 무력한 느낌으로 삶의 난제들을 대하도록 관객들의 감정의 흐
름을 섬세하게 이끌어 간다. 그는 運數란 예기치 않은 기쁨과 또 갑작스런 죽음으로 우리들
을 놀라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는 거리굿 메들리의 거의 전반에 걸쳐 삶의 비애를
기쁨으로 바꾸는 웃음의 역설적 힘을 능수 능란하게 이용한다. 이제 끝나는 마당에서 무당
은 자신이 구축해 온 세계의 긴장과 양면성을 해소하기는커녕, 처음의 희극적 전개를 희망
으로 약동하는 미래를 지향하도록 만들다가 죽음을 향한 전개로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를 더
욱더 불안에 떨게 한다.
거리굿은 모든 희극과 마찬가지로 풍요와 다산을 비는 祭儀에 그 희극의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아기의 죽음은 거리굿의 마지막 거리인 이 짤막한 寸劇을 생명을 기리는 전통 희극
과 神에 대한 믿음을 표출하는 종교 제의와는 멀어지게 한다. 이 촌극은 순전히 연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부조리극에 더 가깝다. 극작가 핀터(H. Pinter)의 부조리극 .생일 파
티.(The Birthday Party, 1958)에서 탄생의 축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죽음이 지배하는 붕
괴의 儀式으로 바뀌어 버린다. 핀터가 그의 .생일 파티.에서 좀더 내향적으로 표현하는 것
을 이 소극은 단순하고도 잔혹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니체(F. Nietzsche)는 희랍 극예술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서 희랍인들은 삶의 잔혹성에 대해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적 의지 부정을 갈망하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고 말
한다.14) 그러나 그는 희랍의 비극들은 삶을 회피하기보다는 삶의 공포를 표현하는 동시에
“모든 현상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삶이 본질적으로 불멸의 기쁨과 힘으로 가득한 것이라
는...... 형이상학적 위안” 속에서 삶과 하나가 되는 디오니소스적 일치감을 관객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해준다고 말한다.15) 한국인의 심성은 삶이 노정하는 최악의 경우에 대해서도 날카
롭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희랍인들의 성격과 비교할 만하다. 그리고 동해안 별신
굿의 미학은 이러한 인식을 淨化와 轉化의 경험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에 있어서도 비록 소박
할지라도 희랍 극예술과 비교될 만하다. 별신굿의 마무리 부분에 속하는 笑劇들은 한국 전
통 어촌에 존재하는 삶의 불안정성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내포한다. 그러나 심지어 비관적
인 판본에서조차 이러한 소극들은 정화를 가져오는 위안을 제공해 준다. 이 소극들은 참가
자들을 삶이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신과의 영속적인 일치 속
에서 삶을 찬양하는 공동체로 전화시킨다.
굿의 희극은 불란서 연극 비평가 아르또(A. Artaud)가 모든 연극 창작의 典範으로 삼았던
“잔혹극”으로서도 사실적이고 성숙한 종교 의례의 힘을 성취한다. 굿은 잔혹극처럼 “물리적
이고 무정부적인 혼돈을 주는 웃음이 가지는 힘”에 대한 인식과 “모든 시의 근원을 이루는
심오한 무정부적 혼돈의 정신”에 대한 이해에 토대를 두고 있는 연극이다.16) 굿의 극적인
14) Friedrich Nietzsche, The Birth of Tragedy and the Genealogy of Morals, tr. Francis Golffing
(Garden City, N. Y.:Doubleday, 1956), p. 51.
15) Ibid., p. 50.
16) Antonin Artaud, The Theater and Its Double, tr. Mary Caroline Richards(New York:Grove, 1958),
p. 42.
6 한국무속학
세계는 페컴(M. Peckham)이 주장하듯이 모든 살아 있는 예술 행위의 영역, 곧 질서에 대
한 인간의 보편적 욕망으로부터 비롯하기보다는 그의 저서 제목이 상기하듯이 .혼돈에 대한
인간의 열망』(Man's Rage for Chaos)으로부터 비롯하는 세상이다.
페컴은 모든 예술의 기능은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무질서를 유지하
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이 질서에 대한 열망과 혼돈에 대한 열망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활기를 부여하는 무질서와 질서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
해서 예술의 영역을 지향한다고 주장한다.17) 만일 한국 사회가 유교 규범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한국인들이 질서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의 굿 공동체가 굿
의 웃음과 희극적 놀이에서 매력을 느낀다면 그것은 한국인들이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 불
안정한 혼돈의 영역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페컴은 “인간은 무엇보다도 예측할 수 있고 정돈된 세계, 곧 자신이 적응한 세계를 원한
다”18)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세계를 너무나도 강렬하게 바라기 때문에 그가 그러한 세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암시하는 것은 무
엇이든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혼란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곧 그로 하여금 知覺的 긴장
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부정적 가치를 부여한다.19)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교 사회가 수세기 동안 무당을 불신해 왔고 굿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아 왔을 것이다. 무아경적 의식 행위뿐만 아니라 굿의 희극적 유희와 거리굿의 해산 거리
에서와 같은 잔혹극적 유머는 그러한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와 건
전하게 상호 작용하기 위해서는 정화 효과를 낳는 무정부적 영역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페컴의 주장은 합당하다. 페컴이 지적하고 있듯이 예술은 “인간을 항상 생동감 있고 깨어
있게 하며 자신이 적합하지도 부적합하지도 않은 양자의 위험스런 혼합 상태에 있고 혁신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20) 굿의 희극 미학은 이러한 일을 아
주 훌륭하게 해낸다.
거리굿의 소극들은 굿이 제의적 맥락과 분리된 채 순수 연극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
을 보여주고 있다. 거리굿의 비관주의적 판본이 암시하듯이 신령의 힘에 대한 신화적으로
불경스런 문제 제기는 굿이 이 지점에서 종교적 기원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실
제로는 그 기원을 전복시키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이
뱃놀이와 해산 거리 그리고 무당의 儀式的 역할을 패러디하는 앞서의 과거 거리에서 거리굿
의 회극은 그 신화적 사유 방식의 한계를 드러내고 좀더 성숙하고 현실적인 종교 신앙의 단
계로 들어서는 듯하다. 소박한 신화적 경험 자체가 정화되고 성숙한 종교적 경험으로 전화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신화적 사유 방식과 종교적 사유 방식을 동일 현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
자 카시러(E. Cassirer)는 그 둘 사이를 구분한다. 신화적 사유 방식은 그 자체의 감각적
17) Morse Peckham, Man's Rage for Chaos:Biology, Behavior, and the Arts(1965, rpt. New York:
Schocken, 1967), p. 313.
18) Ibid.
19) Ibid.
20) Ibid., p. 314.
별신굿의 미학성 7
이미지와 신성한 상징의 영역에 한정된다. 순수한 종교적 사유 방식은 비록 이미지와 상징
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단순히 상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이 상징
들은 신성한 현실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이러한 현실의 신비를 결코 완전하게 그리고 적합하
게 표현하지 못한다. 카시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록 신화와 종교의 내용이 풀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을지라도 그 형식은 같지 않다...... 종교는 감각적 이미지
와 상징을 사용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단지 표현 수단으로만 이해한다. 곧 그것들은 확정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하더라도 부득이 그 의미에는 부적합한 상태에 있고, 그 의미를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을 속속들이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다.21)
이러한 인식이 일부 거리굿의 비관주의적 판본과 몇몇 다른 경우에서 굿의 웃음이 내비치는
유머의 역동적 淨化 행위에 내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뱃놀이와 해산 거리에서 도달하
는 거리굿의 무정부적인 삶의 리듬의 희극적 정점에서 생명에 대한 신의 보살핌은 우스개로
나타낸다. 이 경우에서 신령과 신성한 현실을 희극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소박한 신앙이 현
실, 때로 잔혹한 현실과 결합되어 파괴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정화를 낳고 굿 공동체에 객
관적 안목을 가져다주며 성숙케 하는 역할을 한다. 별신굿에서 기리는 신의 권능과 보살핌
의 이미지들은, 탄생의 경이와 신령이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 생명에 대한 기원 그리고 신의
보살핌과 신의 심판이 우스개로 환원되어 버리는 것처럼 그 신화적인 빛을 잃어버린다. 그
리고 이미지와 儀式 행위와 이야기 등 굿의 모든 레퍼터리로도 어느 종교의 상징이든 다 그
렇겠지만, 신령이 인간에게로 나아가는 그러한 신비를 완전하게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못
하다.
굿의 희극적 에피소드들은 이처럼 단순히 정화를 낳는 데 그치지 않고 해체적이기도 하다.
이들은 삶을 속박하는 비애로부터 공동체를 해방시키는 동시에 공동체 자체가 갖고 있는 신
화적 사유 방식의 한계로부터 공동체를 풀어 주고, 공동체가 좀더 성숙하고 현실적인 종교
신앙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신령이 현존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별신굿
의 놀이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놀이가 아니다. 별신굿에서 형상화되는 공동체의 신령 신앙도
.심청전』과 봉사 거리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기적에 대한 단순한 믿음만은 아니다. 굿의 세
계는 인간 삶의 어둡고 위험하며 부조리하고 회의적이고 또 거의 무의미한 측면들을 흡수하
면서도 여전히 신령과의 교통을 통하여 신뢰와 안정과 다층적 조화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다.
Ⅱ. 조화로운 통합
전통적인 서양 희극은 웃음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추구하게 되었고 비극은 숭고의 정신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찾게 되었다. 동해안 별신굿은 비록 완벽한 형식과 엄밀한 삶의 모방
에서 희랍 극예술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둘을 솜씨 있게 융합하여 공동체에 정화를 가져오
는 轉化를 성취한다. 그러한 전화 과정은 동해안 별신굿의 총체적인 미학적 역동성을 구현
21) Ernst Cassirer, The Philosophy of Symbolic Forms. II: Mythical Thought, tr. Ralph Manheim(New
Haven:Yale UP, 1955), p.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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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인간의 희극적 무정부 상태와 빛나는 신성한 조화 상태의 융합 속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서낭신 맞이 의식을 신대로 극화하는 별신굿의 핵심적인 거리는 이처럼 거리굿의 笑劇的 정
화를 숭고한 공간 시적 양식으로 완성하며 굿 미학이 지닌 淨化의 힘은 조화의 형식으로 나
타난다. 이 장면에서는 덩실덩실 추는 우아한 원무가 거리굿에서 펼쳐져 나타나는 일상적
비애와 혼돈의 무게로부터 참가자들을 더욱 정화하고 해방시키며, 이들을 땅과 하늘, 바다
와 육지,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신이 조화롭게 일치되는 순간 속으로 이끌어 들
인다.
동해안 별신굿은 여느 훌륭한 예술 작품처럼 “통상 이질적이고 산재되어 있는 경험 요소들
을 활기찬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우리의 경험에 새로운 통일성을 부여하”여 참가자들의
“意識의 질”22)을 고양한다. 그럼에도 이 굿은 마을 사람들의 전반적인 삶의 경험을 객관화
하고 명확히 하며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그러한 삶의 경험을 신대로 서낭신
을 맞이하는 상징을 통하여 더욱 더 통합하고 정화하며 聖化하는 것이다.
별신굿에는 한국 미학에 내재하는 것으로 지적되는 陰陽의 균형이 존재하며23) 신대로 서낭
신을 맞이하는 이 상징적인 행위로써 훌륭한 예술 작품을 가르는 시금석이 되는 “통일성과
복합성 그리고 강렬함”을 성취하다.24) 이 굿의 유연하고 무계획적인 듯한 거리들은 경이감,
놀이, 파토스, 희극, 그리고 아르또가 활력이 있는 연극에서 찾는 “공간의 詩”가25) 강렬하
게 느껴지는 순간들로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한다. 이 굿은 장군신이나 영웅의 역을 맡은 무
당이 이빨로 큼지막한 떡시루를 들어올리는 놀라운 묘기를 포함하고 있다. 별신굿은 무당과
어부가 풍어를 빌며 장구 장단에 맞추어 흰색 천에 붙여 놓은 색색으로 채색된 종이배를 앞
뒤로 끌었다 당겼다 하는 뱃놀이의 경쾌한 장면을 담고 있다. 또 가슴 적시는.심청전』의 파
토스와 거리굿 소극들의 활기 넘치는 해학을 갖고 있으며 서낭신을 맞이하는 의식에서는 상
징적인 공간의 시를 연출한다.
신화란 “논증적 사고에서 비롯하는 모든 설명들에 선행하고 그것들에 내재하는 직관의 화
합”을 의미한다는 카시러의 주장26)을 살펴보았다. 신화의 형성 자체는 결코 단순히 수동적
과정을 뜻하지는 않는다. 카시러는 이어서 “우리는 신화의 어느 부분에서도 사물에 대한 수
동적 관조를 발견할 수 없다. 여기서 모든 관조는 하나의 태도, 감정적, 의지적 작용으로부
터 출발한다”라고 말한다. 별신굿 가운데 신대로 서낭신을 맞이하는 의식에 내재하는 창조
적인 미학에 관해서도 동일한 주장을 할 수 있다. 아마 수세기 전에 시작되었을 이와 같은
의식의 상징들을 연출하는 세습무 일행은 연극적인 몸짓과 공간에 대한 날카롭고 미학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감각을 가지고 신령과의 교통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태
도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몇 가지 점에서 예술적 천재성을 과시하는 顯示的 장관
을 연출하면서 그러한 공동체의 태도를 표출한다. 이들은 단순한 연극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깊이 있는 감정과 의미와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경험을 이끌어 낸다. 이들은 특수한 민속
22) Ronald W. Hepburn, Theories of art, A Companion to Aesthetics, ed. David E. Cooper(London:
Blackwell, 1992), p. 423b.
23) 박용숙, .한국의 미학 사상:바시미의 구조.(서울:일월서각, 1990).
24) Monroe C. Beardsley, Aesthetics(New York:Harcourt, Brace and World, 1958), p. 469.
25) Artaud, op.cit., p. 38.
26) Cassirer, op.cit., II, p. 69.
별신굿의 미학성 9
음악과 춤, 장소적 배경, 그리고 지역의 신을 신봉하는 신앙 등을 능숙하게 이용하여 원형
적 경험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신을 맞이하는 의식은 공동체의 일상 삶에 내재한 이질적인
경험들을 조화로운 현시적 만남 속으로 이끌어 들이고 공동체의 삶을 신성 영역으로 전화시
킨다. 동시에 그 밖의 굿거리들에서 현실적인 해학은 신령과의 화합의 지향이 단순히 소박
한 신화적 갈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성숙한 태도로 삶의 신성한 드라마에
종교적인 심성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1996년 여름 일단의 부르야트족 샤먼들과 지역 대표들은 바이칼 호수 변에서 하루 종일 정
화 의식을 벌였다. 이 의례은 별신굿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별신
굿은 그 미학적 형상과 복합성과 연극적 활기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부르야트족의 의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부르야트족의 의식은 호수 기슭의 땅에 꽂혀 있는 세 쌍의 자작나무
가지 앞에서 세 마리의 양을 제물로 바이칼 호수 신과 다른 두 신에게 바치는 희생 제의에
초점을 두었다. 오전 의례가 시작되면서 첫 번째 양이 자작나무 가지 쪽으로 옮겨졌다. 간
편한 복장으로 차려 입은 큰 샤먼은 불에 타는 막대기로 다른 샤먼들을 정화시켰다. 샤먼
한 사람이 다소 단조롭게 唱을 읊고 북을 쳤다. 氏族 대표들은 바다 쪽으로 접시들을 던져
그 접시들이 선 채로 땅에 닿으면 이를 길조로 여기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다른 의식적 동
작들이 끝난 다음 북 소리가 그쳤고 모두가 창을 읊었다. 이윽고 남자 두 사람이 양을 죽여
제물과 요리를 준비하였다. 두 시간 가량 양을 가지고 제물과 요리를 준비하는 동안 전체적
으로 통제되지 않은 여러 가지 의식 행위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소집단별로 이루어졌다. 개
인의 치유를 위하여 의식을 올린다거나 占卜을 한다거나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오후에는 동일한 의식이 나머지 두 마리의 양을 희생하기 위하여 열렸다. 그리고 다섯 시경
이 되자 큰 샤먼은 호수 쪽을 향해서 제물을 바쳤고 唱과 방울 소리가 났다. 남자 대표자들
은 양고기를 조금 먹고 고기 조각을 호수 쪽이나 나무 쪽으로 멀찌감치 던졌다. 큰 샤먼은
중요 남자 참가자들에게 각기 개별적으로 복을 빌어 주었다. 가죽에 덮인 양의 뼈가 불에
태워지고 개인적 기도와 치유를 바라는 치성과 개별적인 점복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행사가 끝을 맺었다.
이 의례는 자작나무와 소나무로 이루어진 원시림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바다처럼 광활
한 바이칼 호에 의식의 초점을 둠으로써 숭고 意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의례는 예술
적, 연극적 기교는 거의 뒤로 한 채 광대한 자연 배경 그 자체만으로 그러한 意識을 불러일
으키기에 충분하였다. 한국 별신굿의 경우에는 무당의 예술적, 그리고 연극적 기술로 어촌
공동체가 갖고 있는 정화와 기원을 생생한 극적인 파노라마로 바꾸고, 삶의 모든 부조리와
두려움과 기쁨 속에서 공동체가 깊이 인식하고 충분히 향유하며 함께 기리는 신성 드라마로
그러한 기원을 轉化하는 것이다. 부르야트족 의례는 다른 경우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번
경우에서는 극적 형식과 활기의 폭이 넓지 않았다. 이 의례는 단순한 희생 의식들로 구성되
고 약간의 북 장단과 주로 호수에 초점을 둔 몇몇 상징적 몸짓으로 인하여 고조된다.
의식이 예술적 호소력을 갖는다고 해서 종교적으로도 흡족하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필자
는 부산에 사는 한 무당이 자신의 집에서 간단한 의례를 드리고 나서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서울 무당들이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많은 서울 재수굿들
은 이런 비난을 받을 만도 하다. 이 굿들은 현란한 연극적 몸짓으로 참가자들을 압도하기도
하지만 때로 종교적 성실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 같다. 바이칼 호 기슭에서 거행된 미학적으
로나 연극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양 희생 의식이나 한국인 신봉자가 밤에 혼자서 산의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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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촛불을 켜 놓고 간소하게 치성을 드리는 것은 굿의 어떠한 연극적 묘미보다도 더욱 진지
한 獻身을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간소한 의식들은 요즈음 때때로 공개적으로 서울에서 무
대에 올려지는 굿 공연보다는 신과 交感하고자 하는 한 민족의 충동을 더욱 진실하게 형상
화할 것임에 틀림없다.
Ⅲ. 극적 강렬성
우리는 특히 동해안 별신굿에 논의의 초점을 두고, 굿이 소유한 삼중의 힘, 곧 신의 광채에
대한 인식과 정화를 불러일으키는 무정부적인 익살스런 상태와 다면적 통합을 성취하는 조
화를 자아내는 굿의 힘이란 측면에서 굿의 연극 미학이 내포한 역동성을 연구하였다. 이러
한 굿의 극적 예술성의 첫 번째 측면은 신령과의 현시적 결합을 유지하고자 하는 굿의 일차
적 충동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측면은 각기 고유의 방식으로 비애
로부터 해방되고 현실을 사실적으로 긍정하고자 하는 굿의 충동을 촉진한다. 굿의 궁극적인
총체적 충동은 숭배자들을 강렬하게 삶의 신성한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이러
한 충동을 만족시키는 굿의 극적 轉化力을 잘 설명하는 극이론은 유명한 이십세기 불란서
비평가 아르또의 이론이다.
아르또는 일찍이 1930년대에, 현대 서구 연극이 연극의 뿌리인 “원형적 원시 연극”에서 멀
어졌다고 주장하였다.27) 그는 현대 연극은 삶의 드라마, “우주의 보이지 않는 힘들”이 분출
하는 잔혹극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근본 힘을 상실하였다고 하였다.28) 굿이 형상화하
는 우주의 보이지 않는 힘들은 자연, 운명, 조상, 신령 등으로 구체화될 수 있으며, 이러한
힘들은 아르또의 세계에 존재하는 힘들만큼 그렇게 철저히 잔혹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굿의 연극적 힘이 숭배자들을 삶의 영속적인 드라마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방식들을
조명해 준다. 우리는 아르또의 이론을 사용하여 별신굿과 사자를 위한 굿이 사용하는 그러
한 방식들을 다시 검토해 보며 굿의 미학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짓고자 한다.
아르또는 현대 서구 도시 문화의 언어적, 합리적 성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서구의 극작가
들이 연극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발리섬의 무용극과 고대 아즈텍 문명의 희생 제의가 지녔
던 신성한 연극 언어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굿은 또한 아르또가 추구
하는 원시적 연극 언어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 굿은 때때로 아르또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페스트와 같이 전염성의 광적인 상태”를 유발한다. 여기서 “인간은 그가 보는
바를 믿게 된다.”29) 대부분의 경우, 신령의 신탁이 굿의 핵심부를 이루지만 극적인 몸짓이
이러한 말씀에 위세를 더해 준다. 굿의 문화는 이처럼 “말의 문화”가 아니고 분명히 신성한
문서 텍스트도 아니며 “몸짓의 문화”인 것이다.30) 작둣날 위에서 서울 무당이 춤을 추는 경
우처럼, 굿의 몸짓은 때로 아연실색케 하는 놀라움을 유발하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사자를
위한 굿에서처럼 굿은 감동적인 “공간의 詩”31)의 미학을 끌어들이고, 자연, 조상, 개인적
운명, 그리고 신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려는 굿 공동체에게 항상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27) Artaud, op.cit., p. 50.
28) Ibid., pp. 59~60.
29) Ibid., p. 27.
30) Ibid., p. 108.
31) Ibid., p. 38.
별신굿의 미학성 11
창조적인 “몸짓의 형이상학”32)을 구현한다.
별신굿의 잔치판이 무르익어 감에 따라 연이어지는 장구 소리, 피리 소리, 그리고 흥청거리
는 노랫가락이 전형적인 한국인의 디오니소스적 환락을 창출한다. 이와 같은 시적 음향은
서낭신 맞이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인 “공간의 시”를 강화해 준다. 울려 퍼지는 음악
에 흥이 고조된 무당은 참가자들 모두가 신대 앞에서 신명나게 춤을 추도록 유도한다. 이
때 그는 신령과의 교감과 조화를 지향하는 의지의 “정신 상태를 몸짓으로 표현하는 정신적
연금술”을 구사하는 것이다.33)
이러한 공간적 몸짓은 아르또의 미학적 이상인 원형극을 성취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거
리굿의 익살과 그 밖의 별신굿의 笑劇들이 덧붙여져 인간 삶에 “내재하는 혼돈의 위협”34)
과 비애와 잔혹성을 극적 행위로 형상화할 때 가능하다. 연극은 “사물들이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는 끔찍하고도 필연적인 잔혹성”을 “일깨우기 위하여 창조되어 왔다”고 아르또는 말한
다.35) 굿은 삶의 잔혹성을 “일깨워” 주기보다는 참가자들이 너무나도 잘 인식하고 있는 그
러한 잔혹성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아르또의 이론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험을 한다. 그것은 삶의 잔혹성에서 풀려날 수 있고 삶의 드라마가
행복하거나 아름답게 잔잔히 끝맺음할 수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부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고 갓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의 치성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어 죽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어두운 분위기의 거리굿 판본은 참가자들의 “意識의 질”을 소박한 신화적
열망으로부터 모든 것이 행복하게만 끝나지는 않는 “끔찍하고도 필연적인 잔혹성” 속에 그
실질적인 뿌리를 두고 있는 성숙한 종교 신앙으로 고양한다.
바이칼 호수변에서 벌어진 부르야트족의 의례는 참가자들을 자연과 그들의 공통적 인간 상
황 그리고 신령과의 통교 속에서 삶의 신성한 드라마 안으로 잘 이끌어 들인다. 그러나 그
의례들은 위와 같은 직관적 창조 행위에 이르려 하지는 않는다. 한편 한국의 모든 굿들이
별신굿을 위한 굿과 같이 극적 몸짓 언어와 해학과 詩的 공간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
럼에도 모든 굿은 연극의 공간 언어로 말하고 있다. 모든 굿은 “몸짓의 형이상학”과 “공간
의 시”를 지향한다. 한국의 굿에는 아르또가 말하는 “모든 詩의 근원에 자리한 심오한 혼돈
의 정신”36)이 있다. 굿은 민속학이나 인류학, 사회학, 철학, 종교사학과 같은 이론적인 언어
의 측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샤먼 의식에 대한 어떠한 연구이건 의식 자체의 연극적
인 상징적 몸짓 언어와 笑劇, 공간 이미지, 그리고 미학적 형식에 근거할 때 가장 좋은 성
과를 얻을 수 있다. 한국 무속 의례의 연극 언어는 어느 특정 무당이나 참가자 또는 학자의
의도나 해석과 관계없이, 고유의 상징적 의의를 갖는 공간 이미지와 몸짓의 이미지를 통하
여 신앙 공동체에 전화의 힘을 행사한다. 굿이 사용하는 언어의 원형적 원천은 의도라든지
한정된 해석에 선행한다. 굿은 잘 된 경우 다층적이고 모호하며 심지어 자기 모순적인 언어
로 말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굿 공동체의 복잡한 영적 세계를 정화하고 객관화하며 자각케
하는 힘을 드러낸다.
32) Ibid., p. 56.
33) Ibid., p. 66.
34) Ibid., p. 51.
35) Ibid., p. 79.
36) Ibid., p. 42.
12 한국무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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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신굿의 미학성 13
Aesthetics of Pyolshin-kut
Daniel A. Kister
Nietzsche has classified the purifying power of ancient Greek drama into "the comic
spirit, which releases us, through art, from the tedium of absurdity" and "the spirit
of the sublime, which subjugates terror by means of art." At its best, Korean
shamanist drama, or kut, though less perfect in form and less developed in its
imitative scope, achieves purifying transformation through a deft fusion of the two.
We can see this in the fusion of comic anarchy and sacred harmony that constitutes
the aesthetic dynamics of an East Coast Village Pyolshin-kut. The comic aspect of
the Pyolshin-kut comes to the fore at the end of the rite, in farcical skits that
evoke the ups-and-downs of daily village life. The sublime aspect appears in the
music, dance, and natural setting of the key symbolic rite, in which worshipers
greet the Village Ancestral God as symbolized by a tall bamboo pole, its white
streamers floating high in the spring or autumn sky. The comic skits evoke the
"underlying menace of chaos" that the French drama critic Antonin Artaud sees all
good drama as bringing to our consciousness. The rite around the bamboo pole
constitutes the "poetry in space" that Artaud proposes as the ideal that all
dramatists should strive to create. The fusion of the two aesthetic forces creates
a cathartic, mature religious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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