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동촌과 김약연
▲ 김약연 목사
‘동쪽, 즉 조선을 밝힌다’(明東)는 그 이름대로 조국의 내일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던 땅, 그곳이 바로 명동촌이었다.
나라가 망해가던 때에 국내에선 남강 이승훈이 평북 정주에 용동촌과 오산학교라는 이상촌을 세워 미래를 준비했다면, 간도에선 규암 김약연(1868~1942)이 한민족기독교공동체인 명동촌을 세워 민족의 앞날을 밝혔다. 김약연은 함북 회령의 유가적 가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유학 경전에 통달했다.
김약연이 고향 사람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은 것은 1899년 2월이었다. 구한말 나라가 망해가는 데도 관리들의 부패와 타락과 민중 수탈이 심해지자 김약연은 문치정, 문병규, 김하규의 가솔 등 142명과 함께 북간도 화룡현 부굴라재로 이주를 감행한다. 본래 우리 조상인 고구려인들의 땅이므로 개간해 우리 땅을 만들어보자는 웅지를 품은 김약연은 땅 수백정보를 사들여 개간해 한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했다. 명동촌은 1905년까지 마을이 거의 완성되었다. 명동촌은 문익환, 윤동주와 나운규, 송몽규 뿐만 아니라, 이준 열사, ‘서전서숙’을 개설한 이상설 등이 이곳 출신이고 안중근 의사와 같은 독립 의사들의 은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규암 김약연은 1907년 간도 화룡현 지신사 명동촌에서 연변교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09년에는 간도 간민회를 이동춘과 함께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이동휘가 명동으로 망명해오자 북간도국민회를 창설,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3·1 봉기 당시에는 육탄 혈전을 선언하고 자금을 걷어 무기를 사들여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부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규암은 간도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둘도 없는 지도자였다. 1942년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75세로 별세하였다.
▣ 명동 학교
▲ 명동학교 터
명동학교는 1908년 명동촌에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이다. 1906년에 설립되었다가 1년만에 폐교된 서전서숙의 민족교육정신을 계승하여 애국지사들이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하였다. 교육이념을 ‘독립 정신’에 두고 신교육 체제를 세워 숙장에 박무림, 숙감에 김약연, 재정에 문치정 등이 취임하였다.
1910년 3월에 명동학교에 명동중학교를 병설하고 교장에 김약연 목사가 취임하였으며, 1911년에는 이동휘가 명동에 와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명동학교에 여학교도 병설하였다. 간도에서는 최초의 여학교로 이동휘의 딸 이의순이 가르쳤다. 명동학교의 교육목표는 항일독립정신으로, 입학시험이나 작문시험에는 반드시 애국과 독립의 내용을 포함시키도록 하였으며, 매주 토요일에는 토론회를 열어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기미년 3․13 만세시위 때 그 학교의 중학생들이 충렬대를 조직하여 시위의 맨 앞장에 섰던 학교로, 그로 인해 간도참변 때에 일본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불타버린 비운의 학교이기도 하다.
명동학교는 1925년 폐교 때까지 1천여명의 애국청년들을 졸업시켰고, 교장인 김약연 목사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리던 항일운동가였다. 현재는 학교 터만이 남아 있으며, 뒷산에는 김약연 목사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있던 비석은 현재 명동교회 앞으로 옮겨져 있다.
▣ 윤동주와 송몽규
▲ 명동촌에 복원되어 있는 윤동주 생가
복원된 생가는 윤동주가 태어나 15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별 헤는 밤’ 등의 시를 통해 그리워한 북간도의 집이다. 대지 990㎡(약300여평)에 외양간 등이 실내에 있는 함경도 전통 가옥의 본채와 별채가 그대로 복원되었다. 사각 모양의 나무로 된 우물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윤동주(1917~1945)는 14세에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24세(1941)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귀향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하였고 유해는 용정 동산교회 묘지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일제 구주제국대학의 생체실험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대성중학교에 윤동주의 시비가 서 있으며, 한국에는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의 후신인 연세대학교 교내에 윤동주 시비가 서있다.
송몽규(1917~1945)는 1917년 길림성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이다. 아명은 한범으로 아명으로 쓴「술가락」이 1935년
▲ 윤동주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콩트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그 뒤 1935년 3월 말에 은진중학교 3학년을 수료한 뒤 중국 낙양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는데, 동기생들과 함께「신민(新民)」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 송몽규
1935년 남경을 떠나 산동의 제남에서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였다. 1936년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본적지인 함경북도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거주 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937년 용정의 대성중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하였고,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였으며, 1942년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 전공에 입학하였다.
1943년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 혐의로 검거되어 윤동주와 함께 1944년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45년 3월 7일에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눈을 뜬 채 세상을 떠났다.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