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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노모가 말기 암인데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데다 고령이라서 병원에서도 더는 치료를 권유하지 않는다고 했다. 운명 직전의 어머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 난감하다는 게 통화의 요지였다. 나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던지 요양병원에 모시라고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여러 차례 가족회의 등을 통해 이미 결정된 사항이지만 단지 나의 의중을 확인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료를 포기한 자신의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겠다는 의도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진즉 결정을 하고서도 그것이 잘못된 결론은 아닌지 자꾸 되묻는걸 보면. 나는 치료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있겠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중요하다고 감히 조언을 했다. 이제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내가 주치의 때만 해도 병원에서 운명하는 것조차 객사라 규정해 용납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서 임종이 가까워지면 미리 알려달라는 보호자가 많았다. 운명이 임박했다고 하면 모든 가족이 임종의 순간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상황이 되고, 어쩌다 그 시각을 잘못 예측해 갑작스런 임종을 맞이한 경우에는 사망선고를 유예한 채 집까지 동행해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야말로 진짜 운명인데 그 운명의 시각을 어떻게 정확하게 예측한단 말인가. 그는 여전히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자식 된 도리로 부모의 죽음을 마냥 바라보고 있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가족 중 일부는 안락사를 주장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존엄사와의 개념에 대한 혼용으로 야기된 오해였을 것이다. 안락사는 죽음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약물주입이나 강제적 식이중단 등 적극적으로 죽음에 개입하는 것이고, 존엄사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존엄사를 소극적 안락사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차이점을 비교적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오해가 풀린 그는 자기도 존엄사를 택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들어 <사전의료 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평온한 죽음에 이르기 위해 꼭 받아야 할 치료와 받지 말아야 할 치료를 스스로 밝히는 서류인데 오로지 환자 본인의 의사만 존중된다. 나도 의식이 명료할 때 <사전의료 의향서>를 미리 작성해 두기로 했다. 나는 죽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목숨을 담보로/삶의 고통을 덜어내고자 함도 아니다/그저 마지막 길을 당당하게 걷고자 함이다/이제 모니터로는 남은 생을 기록할 수 없으니/내 몸에 부착된 고통의 계기판을 제거하고/가장 편안한 단추의 상복을 부탁한다/중략… 일체의 심폐소생술 또한 거부한다/사유의 파동이 사라진 육신의 신호음은/한낱 기계적 박동일 뿐이니/에피네피린과 도파민의 사용을 원치 않는다/기계의 호흡과 심박동은 이미 어긋났으니/심장마사지는 사양한다/썩은 육신을 인수해 갈 가족과/상한 영혼을 거두어 갈 神과 조우의 시간,/내 죄 값을 흥정하는 비굴한 모습을 원치 않으니/침대 주변을 말끔히 정리해 주기 부탁한다/이제 종언을 告하노니,/여태껏 밀린 치료비와 남은 죗값은/저당 잡힌 내 생의 이력서에 함께 청구해주기 바란다 -'연명치료 중단을 告함' 부분, 나는 연명치료에 반대한다. 단순한 생명연장이란 아무 의미가 없을 뿐더러 주어진 운명에도 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내 자신의 운명에 관한 일이지 의사로서의 입장은 아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는 이유로 의사가 환자를 거부하거나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것은 의사로서의 사명을 저버리는 일일뿐더러 현행법상으로도 불법이다. 누군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보내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운명을 결정하는 시간뿐 아니라 운명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쩌면 神의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인간답게 살 권리도 중요하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야말로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몫이 아닐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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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죽은 사람은 많아도
죽어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 산문은 몇번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이제 모니터로는 남은 생을 기록 할 수 없으니...
존엄사라는 어휘가 언제 부터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대의 상황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저 역시 집안 어른들을 보내면서 겪은 일이 있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제 경우가 다가오면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존엄사를 위하여 <사전의료 의향서>에 의지 해야 한다는 일이 슬프긴 하군요.
부모의 죽음을 바라보는 지인의 시선과 행위가 이해됩니다.그리고 전문의로서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한 말씀도 공감입니다. 삶의 옆에 있는 죽음을 가까이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이 글을 읽자니 또 눈물이 나네요. 담도암 판정을 받으시고 2달 반 동안 요양병원에서 곡기를 끊으시고 투병하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임종 직전에는 집에 그렇게 가고 싶어하셨는데 그 소원을 이뤄드리지 못했지요. 태어날 때도 나의 의지가 아니었듯이 죽을 때도 나의 의지가 아닌 그분의 영역이겠지요.
이 글 올리며 분홍시인 다시 아프겠구나 했지요~ 그래도 마음 다독다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