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새벽에 아차산을 다녀왔습니다. 오늘 아침 다섯시 사십사분에 현관문을 나섭니다. 아차산을 가려고 방향을 외손주들이 5년 동안 살았던 광장동 11차 현대홈타운 안으로 들어섭니다. 2층이 바로 딸네 집이었습니다. 쳐다보면서 뒷편에 있는 양진 초등학교로 향합니다. 외손녀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자전거 타는 것을 가르쳐 주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양진초등학교 앞을 지납니다. 울타리에는 샛 빨간 넝클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여있네요. 산행 후에 다시 손자 녀석 유치원 버스를 태워주던 장소를 지납니다. 오물 조물 재잘거리는 유치원생들이 모두 손주같습니다. 수시로 피자를 사다가 주던 상점 앞도 통과합니다. 뜨끈 뜨끈한 피자 몇 조각을 단숨에 먹어치우곤 하던 손주들이 보입니다. 이른 아침에 나섰던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는 시간은 아침 일곱시 삼십 육분입니다. 반기는 이 없는 방으로 들어섭니다. 아내는 잠실로 이사 간 딸네 집으로 아침 일곱시에는 어김없이 가야 합니다. 외손주들의 아침밥을 먹도록 챙겨 주어야 합니다. 초등생 1학년인 외손자 녀석의 가방은 할머니 몫입니다. 등교길에서 만나는 친구를 끌어 안기도 하며 신나게 뛰어 다니며 학교로 들어갑니다. 책가방도 잊고 그냥 날쌔게 교실로 들어가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신나게 까불며 등교하는 손자놈을 보노라면 기특하기만 하답니다. 이처럼 가방도 들어다 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는 아내입니다. 덕분에 나 홀로 아침밥을 혼밥을 먹어야합니다. 아내가 일일이 준비해 놓은 반찬과 밥솥이 싱크대 위에 있습니다. 내 멋대로 입맛대로 버섯 취나물 두부 계란 밥 카레가루 등을 섞어서 재차 볶아서 먹습니다. 소파에 앉아서 NHK TV와 교육방송 영어회화 방송을 시청하면서 말입니다. 보고 듣고 익혀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도 또 보고 듣고 봅니다. 이것이 나의 출근 전의 메뉴입니다. 20여년 전에 강남구 삼성동에서 이곳 광진구 강변역 근처 H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강남구에는 1980년대 중후반인 30여년 전에 자녀들 학군(學群) 문제로 본의 아니게 이사를 했습니다. 경기고등학교 정문과 후문 사이에 연희주택 3층입니다. 그 당시 아파트 30여평 한채값은 고작 몇천만이면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아내와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부동산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못한 문외한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고 바보스럽기 까지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언북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는 오빠인 아들이 언북중학교와 숙명여고는 동생 막내 딸이 졸업을 한 곳입니다. 바로 집 근처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경기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아들 녀석은 아침 잠이 많아서 항상 콩 볶듯이 엄마가 서둘러 재촉해야 합니다. 가끔은 내 차에 태우고 학교 후문으로 데려다 주기도 합니다. 부리나케 학교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새벽이면 승용차를 운전하여 삼성동집에서 대모산 아래에 주차를 합니다. 대모산을 오르기 위함입니다. 대모산(292m)은 강남구 일원동과 서초구 내곡동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대고산 할미산으로도 불리웠으나 태종 헌릉이 자리한 이후로 대모산으로 불리웠습니다. 이 주위에는 밭 뿐으로 시골 농촌풍경 그대로입니다. 지금처럼 삼성의료원 아파트 일원터널 일원역 등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대모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정경은 영동대교와 북한산 인수봉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동트기 전의 서울시내 모습은 언제나 희뿌연 매연으로 덮혀 있습니다. 저렇게 공해에 찌들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이 가엾게도 생각됩니다. 나를 비롯하여 아내와 아들 딸 내 자식들이 사는 곳이라는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황사와 공해에도 무덤덤하게 의식없이 살고 있는 시민들은 체념이 습관으로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들 딸 모두가 자기 실력과 적성에 맞는 대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온 가족이 강남구 8학군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말에 지금 살고 있는 광진구 H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새벽이면 눈을 부비며 아차산을 향합니다. 한 때 체중이 표준에서 10Kg 정도를 초과하여 넘나들게 됩니다. 약사회 회장을 비롯한 임원을 한답시고 허구헌날 술에 쩔어서 헛 발질의 세월을 보내기도 하지요. 이대로는 안된다는 마음을 갖게됩니다. 아차산을 새벽에도 낮에도 하루 두번씩 뛰다시피 오르내립니다. 정상 체중으로 회복 할 때 까지의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영양가 없는 약사회를 멀리 하고자 SKK 대학교 약학대학 임상약학 대학원에 입학합니다. 수원에 있는 SKK 캠퍼스를 2년간 통학을 합니다. 전철로 아니면 SKK 통학버스로 굳센 마음으로 다녔습니다. 약사이면서도 보다 나은 약사의 상(像)을 꿈꾸며 임상약학을 접했습니다. 후배 교수들의 강의 내용을 쉽사리 이해하기에는 뇌세포의 기억이나 인지 능력은 퇴보되어 있습니다. 선배로서의 알량한 자존심으로 읽고 또 읽고 쓰고 이해하려고 무단히도 집중을 합니다. 만년(晩年) 학생이 명륜동 본교에서 영광스런 졸업가운을 입고 아내와 단둘만의 기념사진도 찍습니다. 1960년대 초(初)에는 k 방송국에서 라디오 게임이라는 고등학교 대항 실력을 겨르는 문제를 푸는 시합이 있었습니다. 내 모교인 DB고교도 출전을 합니다. 상대는 CD 여고로 명문에 속하는 학교입니다. 학교 마다 다섯명이 대표선수로 구성이 됩니다. 문제를 듣는 순간에 벨을 눌렀으나 상대 여학생의 벨이 먼저 울립니다. 화학문제 대표로 출전한 나는 일거에 패장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지금도 그 문제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연승(三連勝)을 하는 학교는 우승기와 트로피를 영구히 보유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 여상(女商) 중에서도 최고 명문인 S여상이 그 영예를 차지하게 된 학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S여상(女商) 출신의 한 아가씨가 지금의 나의 아내입니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스물 네살이며 결혼 상대인 총각은 스물여덟입니다. 아내의 아버지는 납북(拉北)되어 홀어머니 슬하에서 대학은 언감생심이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살림살이에 도움이 필요했고 남동생만은 대학에 진학을 시켜야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서는 남매를 기르며 교육시키느라 마음에 여유도 없었습니다. 아내가 첫 아들을 낳을 때에 내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라도 지르라우 " 산통을 이를 악 물고 참는 며느리를 옆에서 지켜보시며 하신 한 마디입니다.아내의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는 순간입니다. 웬만한 아픔이나 고통은 홀로 가슴으로 새기는 아내입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시누이에게 그토록 모진 시집살이의 고초를 당합니다. 이렇다 할 불평 한 마디 남편에게 뱉은 적이 없습니다. 시누이가 대문을 열고 들어와도 밖에 나와 보지도 않는다고 혼쭐을 냅니다. 돌이 지나지 않은 애기에게 젖을 물리고 잠깐 잠이 들었답니다. 받은 예단을 가위로 모두 잘라 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린 새색시 아내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게 아팠을까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변변치 못한 남편 덕분에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심적인 고통은 무엇으로 치유가 될 수 있겠습니까. 월말이면 비워버린 쌀독을 외상으로 채워야만 하는 다달의 세월이었습니다. 모든 고통과 설움을 온 몸으로 삼켜야만 했습니다. 오로지 자식만을 바라보며 자식만을 위하여 참고 또 참으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아닌 시누이의 시집살이는 아직도 풀을 수 없고 풀리지 않는 멍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절절한 아내의 고백 아닌 독백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몇푼 벌어다 준다는 알량함에 어린 자식과 가정에 무관심은 자격을 상실한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회한의 파도가 가슴을 적시워도 미안함과 서글픔이 칼날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품안에 자식 둘 모두 대학을 졸업시킨 후에야 아내도 꿈에 목 메이던 대학에 대한 열망을 이루게 됩니다. 나보다 먼저 아내도 때 늦은 대학에 여울진 한(恨)을 KNO대학교 중어중문학과로 4년에 걸쳐서 매듭을 풀었습니다. 지금은 자식 모두 결혼을 하고 외손주 친손주 각각 손녀 손자를 품안에 안아보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외손녀와 초등학교 1학년 외손자 그리고 여섯살 이란성 쌍둥이 친손녀 손자입니다. 아내는 요즘도 아침 일곱시면 외손주들 등교시키느라 딸네 집으로 서둘러 달려갑니다. 강변역에서 전철로 한 정거장인 잠실나루역 아파트입니다. 돌아올 때는 잠실철교를 걸어서 통과하고 한강가를 따라서 두시간여를 꾸준히 걷고 있습니다. 골다공증과 무릎 통증이 있지만 걷기운동만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친손주들이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침 일곱시면 엄마 아빠가 병원에 출근하면서 손주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유치원에 보내야 될 것 같습니다. 유치원은 아홉시에 시작하므로 시간상으로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40여년 가까이 경영하던 약국을 이제는 접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갓난 애기들 일 때 못 다 한 친손주들에 대한 보살핌을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하거나 미룰 수는 없습니다. 손주들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보고픔이 밀물이 되어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며느리와 아들이 마음 편히 의사로서 환자 진료에 전념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으로 말입니다. 금쪽 보다 더 귀한 손주녀석들입니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자손들입니다.. 칠십이 넘은 노구(老軀)라서 녀석들을 쫒아 다니기에도 벅차고 힘들 것입니다. 옆에서 그저 쳐다만 보아도 흐뭇하고 대견한 보물입니다. 더 늦기 전에 후회함이 없이 마음껏 사랑해 주고 보고 싶으니까 말입니다. 모처럼만에 찾은 아차산의 새벽 향기는 노객에게는 삶의 활력소 입니다. 산 아래 저기 저 아파트에서 들려오는 손주놈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 할아버지 빨리 와 , 넘어지면 안돼 ! " 손을 흔들며 부르는 손주들의 합창소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있습니다.
2017년 5월 25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