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명소, 선교장(船橋莊)
선교장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품위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강원도 강릉시에 경포쪽으로 4km 쯤 떨어진 선교장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타고 건넌다'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경포호의 둘레가 과거에는 12km에 이를 정도로 넓었으나 오늘날에는 지형 변화로 크게 축소돼 4km 정도 된다고 하는데, 경포대와 경포해변은 연중 관광객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명소다.
이 선교장은 조선 영조때(1703년) 효령대군(孝寧大君, 세종대왕의 형님)의 후손으로 강원도 통천(通川,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고향으로 유명하다)군수를 지낸 이내번(李乃蕃)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 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있다. 총건평 1,050m²(318평)으로,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 밖에는 수백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活來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선교장 전체가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풍치가 아름답다.
선교장은 건물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왕으로부터 임명장인 교지(敎旨), 병풍 등 하사품과 각종 생활용품이 전시된 박물관도 운영하고 있다. 선교장의 사랑은 열화당(悅話堂)이라하며,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
운영자가 소장으로 있는 현대의전연구소 임원진의 워크숍이 2018년 7월 7일부터 8일까지 1박2일 간 이 선교장을 중심으로 한 강릉 일원에서 이루어졋다. 이곳 전통 한옥에서 하루 밤을 자고, 순두부를 주로 한 맑은 아침식사에 이어 강릉시 문화유산해설사님의 안내로 선교장 일대를 답사하는 행운을 가졌다.
조선후반기에 하루 최고 300명의 손님을 맞을 정도의 식량과 그릇 등을 항상 준비해 멀리서 찾아온 손님은 물론 지나가는 길손에게도 정성을 다한 사대부 집안의 풍습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왕손의 후손인 선교장의 가족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이웃한 이웃 농민 자녀들을 이해하고 베풀고 모범을 보이도록 서민 체험과 교육을 반복적으로 실시했다고 한다. 요즘 말로는 이웃 주민들에게 '갑질'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 7월초의 선교장은 온통 푸르름을 더해갔다. 입구에서 본 선교장 모습. 무궁화 울타리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맞이해준 곳은 바로 활래정과 연못. 연못에는 한창 연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가까이 다가 본 활래정.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전을 펼칠 때 현장 실사 나온 각국 IOC위원들이 이 정자에서 앉아 차담과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 이 활래정 현판은 구한말 서예가, 화가이자 사진사로 유명한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 1868년~1933년)의 글씨라고 하는데, 검은색이 아닌 푸른색으로 한껏 멋을 낸 것이 이채롭다. 이 선교장에 편액이 많이 걸려져 있는데, 이는 선교장에 와 머무는 동안 환대를 받은 손님은 떠날 때 답례로 이처럼 글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본채에 들어가는 입구의 솟을 대문 위에 '선교유거(仙嶠幽居)'라는 현판이 눈에 띈다. 이 仙嶠幽居는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으로 이 집의 품격을 더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여 구분이 엄격해 출입문마저 달랐다고 하는데, 이 대문은 남자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 오은고택(鰲隱古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문화유산해설사. '오은'은 이 집을 지은 이내번의 손자 이후(李后)의 호로 집안 손님들이 주로 사용하던 곳이라 한다.
이 현판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최고 명필인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7~2007) 선생이 쓴 글씨다.
♣ 열화당(悅話堂)은 남성들의 공간으로,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 는 뜻이다.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열화당에는 러시아풍의 테라스가 연결돼 있어 이채롭다. 구한말 러시아 공사가 이곳을 방문한 후 감사의 마음으로 서울에서 자재를 보내줘 지었다고 한다. 문화유산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이 열화당의 측면과 건너편에는 여러 다양한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행랑)이 마련되어 있는데, 대개는 며칠 간 머문 후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떠나지만 예외적으로 지나치게 오랫동안 신세를 지던 손님에게는 방을 비워달라는 신호를 은근히 보냈음에도 내일내일하며 지체하다 미안한 탓인지 선교장에 감사의 말도 없이 어느샌가 홀연히 사라져버린데서 '줄행랑 쳤다'라는 말이 생겨낳다고 한다.
넓은 마당 한가운데 능소화가 무더위 속에 한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선교장의 뒤산에서 바라 본 선교장. 좌청룡에 해당하는 길목에 500년이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건너 소나무 숲이 우백호에 해당한다.
♣ 선교장 답사를 마친 후 활래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컷. 모자 쓴 분이 해설사님으로 이 선교장에는 3분의 해설사가 활동하고 있단다.
♣ 한옥 집에서 하루 밤을 묵고 아침에 툇마루에서 차담을 나누고 있는 운영자 일행. 선교장에 미리 예약하면 숙박을 할 수 있다.
♣ 숙소에서 활래정 쪽으로 본 아름다운 선교장 모습. <끝>
첫댓글 너무 정리를 잘 하셨네요. 최곱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