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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장편소설>
첫 사랑 - 사랑은 후회하지 않는다. ( 13편 종편)
강 성수
-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두운 밤물결도 잦으려는 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에는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의 마지막 연)
♥ 12-9
그녀 어머님
78년도 대학교 시험에 붙자마자 합격증을 들고 몽탄으로 내달렸다.
1978.1. 10. 밤. 마침 어머님이 마당에 나와 계셔서 놀라시지 않게 인기척을 내고 들어섰다.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저 왔습니다!”
지난번 그렇게 하고 갔는데도, 알아보시고는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마 작년 7월에 만났던 얘기나 1월경에 온다는 것도... 현숙씨가 어머님한테 죄다 얘기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그전의 좋지 않은 기억만 있었다면 지금처럼 살갑게 대해주시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여전히 환대해주셨고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어서 오시게... 밤이 늦은 시간인데...수고하셨네... 방으로 들어가시게... 나도 들어갈 테니.”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현숙이 있다는 느낌이 아무 곳에도 없었다. 그리고 차분한 분이신데 뭔가 안절부절 허둥대는 것이었다. 물을 두잔 받쳐가지고 들어온 어머님은 나에게 들라고 귄 한 뒤 한잔을 마시고 크게 한숨을 쉬시더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현숙이는 작년 12월 27일 시집갔다네... ”
갑자기 어머님 뒤에 있던 벽면의 벽지가 휘청거리며 흔들리는 것 같았다. 또 노랗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 그랬었구나! 이제 영원히 돌아올 수없는 길로 멀리 멀리 가버렸구나! 목포에서 그날 밤도 밤을 새워가며 뜨겁게 나를 사랑하더니 그 몇 개월 후에 그예 시집을 가버렸구나!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하더니... 살아있는 날까지 사랑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제 정말 막이 내렸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찔했었다.
여인숙 창문건너 바라보이던 예쁜 집에서 살게 해주려는 꿈도 이제 사라져버렸구나! 이미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끝난 상태이기에 침착해야 했다. 어머님 앞에서 나도 같이 허둥거릴 수는 없었다.
“어머님 대학합격증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려고 왔는데... 죄송합니다.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서요...”
이상하게 목이 잠기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탓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미안하네. 현숙이가 잘못 생각하고...그렇게 가지 말고 기다렸다가 자네한테 가라고 했는데... 다 지나간 얘기지만, 나는 자네가 좋았네...
우선 정직하고 심지가 굳어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봤다네... 그리고 더 좋은 것이 있었다네... 그게 뭔 줄 아나?”
“예? 그게 뭣인데요?”
나는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싶어 궁금해졌다.
“그건 바로 자네가 웃는 모습일세... 사람이 똑똑한 것만으로는 안 되지. 머리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이 많으니까 꾸밈없이 천진난만하고 밝게 웃는 모습이 좋았다네... 내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무섭기도 하지만 그런 착하게 티 없이 웃는 웃음을 가진 사람이 악한사람은 없거든... 자네는 정직하고 부지런하니까... 틀림없이 잘살게 될게야... ”
그 말씀은 사심 없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니 딸하고 잘못되어 헤어지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어머님이 나를 처음부터 좋아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냥 사람 자체가 좋으면 되는 것이다. 다른 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님은 나 자체를 사위 감으로 흡족해 하셨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셨다.
“딸이라 해도, 말 안 듣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네. 그때 싸울 때만 하더라도 목포에 내려가라고 했는데 그 고집을 피우고 말을 듣지 않았지 뭔가? 다 제하기 나름이고 제 복이라고 할 수밖에...”
“어머님 말씀 고맙습니다. 잘 새겨들었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끝까지 저를 잘 챙겨주시려고 했는데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다 우리 잘못이고 우리 현숙이가 복이 거기까지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다 복대로 인연대로 사는 거지...”
어머님은 말꼬리를 흐렸다.
“가면서 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 내가 자네가 와서 너 내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었더니,
“시집갔다고 하면 그냥 조용히 갈 사람이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걔도 마음이 좋지 않은지 눈물만 훔치며 갔어...”
눈물을 훔치며 갔다니... 그래도 내가 아주 싫은 것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여자의 눈물은 본디 남자를 약하게 만든다. 강압적이거나 허위가 아닌 바에야 눈물은 진실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다. 원망하면서 간 것은 아니구나! 그래도 나에게 한 가닥 미련은 남겨진 것이 있다는 생각에 아픈 내 마음이 약간의 위안은 되었다. 정말 미워하고 싫어했다면 눈물을 비추며 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눈물을 보이고 갔다면 원망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와의 일에 대하여 그나마 불편해 하지 않고 간 것에 대해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는 날까지 운명적으로 사랑하려고 했으나 그녀와 나는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일도 운명이라고 그렇게 말들을 하는 가보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여러 가지의 헤어짐 중에서 서로 원망하는 마음 없이 헤어지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헤어지는 것도 서로 가슴 아픈 일인데 미워하기 까지 해야 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만일에 그렇게 헤어졌다면 길게 머리에 남아있지 않고 원망만 남을 것이다. 그만큼 헤어짐이란 피차에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 12-10
시집가던 날
아! 그랬었구나! 시집갔다는 그날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특별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었다. 작년 12월 27일 이면 한참 공부를 해야 하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그 전날부터 마음이 심란하여 초량 안사장님께 연락하였더니 가족들이 을숙도 철새 구경을 간다고 하여 같이 따라 나섰던 바로 그날이었다. 모터용 배를 빌려 하루 종일 부산 을숙도에서 배위에서 철새사진을 찍고 있던 날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마음이 안절부절 하던 바로 그날이었구나! 나는 을숙도에서 내내 불안정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그날 그 시간에 너는 예식장에서 다른 사람의 팔짱을 끼고 주례 앞에서 예식을 올리고 있었단 말이었구나! 그날은 참으로 이상한 날로 기억된다. 본고사공부를 정리한다고 바쁜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뒤숭숭하고 뭔가 불안정했던 날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을숙도 철새구경 간다는 말에 따라나섰던 것이다. 하도 마음이 뒤숭숭한 날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날이었구나!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에도 사람은 자신에게 닥치는 불안한 일의 낌새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내내 불안정해하던 그날에 다른 사람 팔짱을 끼고 주례 앞을 걸어갔을 그녀를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막혔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머님! 현숙이 어머님을 찾아오면 현숙이 좋아하는 소고기 국 끊여주고 다 먹고 나면 제가 왔다갔다고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시집갔으니 그 사람에게 잘 맞추어서 행복하게 살아라.” 하고 갔다고 전해 주세요.
받지 않으려는 얼마간의 돈을 어머님 손에 억지로 쥐어 드렸다.
“어머님도 내내 건강하세요. 처음에 절을 드린 것처럼 오늘도 절을 하고 가겠습니다. 언제나 몸 건강히 안녕히 계셔요!”
어머님도 눈물을 닦고 계셨다. 나도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질까 봐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근 한 시간을 걸어서 몽탄역까지 혼자서 걸어 나왔다.
그녀가 친정에 와서 고깃국을 먹고 내가 왔다 간 걸 알면 이 길을 눈물을 훔치며 서럽게 울고 간 것을 알까? 그래서 사람의 인연은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인가? 어머님은 저리 좋아하는데 정작 본인은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리다니... 손톱 같은 그믐달이 4년 전 걸어 나올 때처럼 새벽 서쪽 하늘에 파랗게 걸려있었다. 그때는 뒤를 따라 나오는가 싶어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했으나 오늘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 후회와 회한과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지난번에도 울고 간 길을 다시 눈물을 훔치며 혼자 걸어 나와야 했던 것이다. 집에서 몽탄역까지 걸어 나오는 길은 참으로 허망하고 길고 쓸쓸한 길이었다. 그래 갈려면 가거라. 나라고 못 갈까 봐... 그래 어느 사람의 품에 가서 살더라도 행복하게 잘 살아라... 그것이 너를 위하고 나를 위하는 길이다.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으며 그 긴 길을 걸어 나왔다. 그때가 78년도 일이니 꼭 4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 12-11
가버린 그녀
정작 대학에 합격하였으나 그녀가 시집가버렸으니 모든 것이 공허하기만 했다. 하느님은 두 가지 기쁜 일을 동시에 주지는 않는가 보다. 작년 7월에도 이런 예감 때문에 1990년도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는 나오려나? 그래도 그런 약속을 한 것은 잘한 일 같았다. 그녀에 대한 미련이 아픔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단 4 차례에 불과했다.
처음 목포에서의 만남. 이리에서의 만남. 몽탄 집에서의 만남. 작년 7월의 만남이 끝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찾아왔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니 전체 다섯 번 시도에서 마지막 한 번은 아예 만나지를 못했고, 두 번은 만났으되 그냥 헤어졌고, 두 번의 밤은 그녀를 가슴에 안을 수 있었으니 결국 그녀와 이틀 밤만을 보낸 것이었다. 그렇게 이틀 밤만 같이 보냈을 뿐인데 그 밤은 평생을 기억해야하는 밤이 되었던 것이다.
12년 뒤 1990년도 10월 3일 개천절 날 여로다방 오후 4시에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 12-12
허름한 여인숙
4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길거리를 지나다가,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노래가 들려오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앳된 목소리로 나직이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불러주던 첫사랑 그녀가 생각난다. 첫사랑은 일생에 한 번 소나기처럼 와서 뜬구름처럼 가는 것인가? 첫사랑의 한 때가 가듯 우리도 강물 따라 어디론가 정처 없이 흘러간다.
우리는 누구라도 때가 되면 밤하늘에 찬란한 빛의 선을 그으며 유성처럼 사라져 간다. 풀무치가 숲속에서 사랑을 하듯이 우리도 그러한 애달픈 사랑을 나누고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며 늙어가고 어느새 하나씩 이 세상을 등지며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행복하세요. 안녕하세요. 사랑하세요. 그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며 평범한 삶의 모습이라도 첫사랑은 그녀가 시집을 가면서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으로 막을 내렸다. 내가 첫 편지에 썼었던 - 이 세상에 있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고 싶다-는 나의 소싯적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지만 그녀가 아직 이곳에 살아있는지 아니면 저 세상으로 갔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글을 그녀에게 바치면서 이제 그녀도 내 마음에서 놓아주고 싶고 나도 그녀로 부터 자유롭고 싶다.
♥ 12-13
그 후
그녀가 시집가버리는 바람에 그녀와의 일은 과거로 파묻히게 되고 곧 바로 대학 개강이 시작되면서 하숙집 미팅으로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연애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그때가 1980년 1월 14일이었으니 나이 31살 때였다.
병원 원장실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내려다 본 대전시청 앞 까치 네거리에 2017년 새해 연초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당신은 후세에서 나를 만나면 같이 또 살 것이요?”
“당신은 어떻게 할 건데요?”
“내가 먼저 물었는데 또 물으면 어떻게 하누?” 내가 웃었다.
“당신은 못 잊는 첫사랑 찾아서 갈 것 같으니까 그렇지요?”
“허허 이 사람이 싱겁기는.......내가 결혼할 때 당신에게 한 약속은 어디로 갔소?”
“결혼하면 우리 사이에 헤어짐은 없다! 하는 것 말이에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있을 때 하는 약속이었잖아요?”
“어 허! 참 내! 그게 결국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다 같은 얘기요! 그리고 또 있는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강권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열배 사랑하고 열배 벌어다 준다 하는 것 말이에요?”
“그런 말도 했었지! 또 있는데?”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까 당신이 하는 일에 너무 간섭하지 말아 달라는 것 까지요?”
“맞아요! 그렇게 말했었지!”
“또 있는 데?” 이번에는 집사람이 말했다.
“뭣이 있었나?”
“결혼 후 10년이 되면 결혼 예물 못해줬던 것 다 해준다고 종이에 기록해 두라! 했던 것 말이에요”
“맞아! 그때 돈 100만원을 빌려와서 장모님에게 돈이 이것 밖에 없으니 꼭 필요한 것만 장만하라고 했더니 쌍으로 된 금가락지 하고 노란 저고리 빨강치마 그리고 다이야 3부 반지를 하고 20만원은 다시 돌려 주셨지. 그래서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려고 10년 후에 다해준다고 받고 싶은 것 3 종 세트를 다 종이에 쓰라고 했지. 정작 10년이 되어서 다 해준다고 하니 장신구 많이 하면 명 짧아진다며 밍크코트 하나면 된다고 해서 그것 밖에 못해주었지.”
“당신하고 만난 지 어느덧 40년이 되나 봐요.”
“당신과 꿈처럼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시간이 빠르다고 하지만 40년 이 꼭 엊그제 만 같아요. 우리가 더 많은 나이가 들기 전에 한 번은 표 나게 당신에게 ‘고맙고 감사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저도 당신을 만나서 꿈같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당신이 성품이 남달리 착해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어느 때인가 우리들에게도 헤어짐이 찾아오게 될 것이고 우리가 다음 생에 태어나더라도 당신을 만나서 또 이렇게 살고 싶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던 참이요”
“왜? 그 사람 찾아가지 그랬어요?”
“허허 참! 또 싱겁기는.......당신이 매번 그러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 당신보다 잘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리로 가서 살아보라고 하지 않았소? 당신이 그렇게 나에게 잘해주니 내가 다른 곳에 가서 살수가 있나?”
“그래도 많이 샘났어요!”
“당신과 만나기 전 일이고 다 끝난 일이라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하지 않았소?”
“말은 그렇게 해도 속심이야 어디 그래요?”
“나는 그저 그런 줄만 알고 있었네. 속이 많이 상하였다면 미안해요. 사과하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소?”
“당신은 그 여자를 사랑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했으니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이에요.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말처럼 나는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당신과 같이 함께하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했어요.”
“이제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먼 훗날에 누가 먼저 이곳을 떠나더라도 서로 만나기 위하여 기다리기로 합시다.”
“예”
가만히 아내의 손길을 붙잡는다. 이 세상 모든 평화와 행복은 아내로부터 온다. 아내가 웃으면 행복하고 즐겁다. 내 옆에서 아무 걱정 없이 쿨∼쿨 코를 골며 잘 자고 있는 복스러운 아내 얼굴을 보면,
“지아비 노릇은 제대로 하고 있는가?” 싶어 나도 행복해진다.
“언젠가는 이별이 올 텐데 지금 재미있게 잘 보내자!” 하는 마음이 생경하게 치솟아 오른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시간이 오더라도 담담하게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자. 가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이나 또 같은 길을 가야 할 터이니 너무 슬픔에 잠겨도 안 될 것이다. 또 저곳에 가서 만나면 되는 일이 아니가? 믿음이 있으면 이곳에서처럼 또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고 또 내 영역 밖의 일임을 알고 있다.
에필로그
♠ 12-14
백방으로 그녀를 찾다
1990년 10월3일 집사람과 둘이서 그녀를 만나러 갔으나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잘살고 있겠지. 그래 잘살고 있어라. 집사람은 자기를 버린(?) 여자가 얼마나 대단하게 생긴 여자인지, 당신이 푹 빠진 그녀가 어떻게 생긴 여자인지, 궁금해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고 한 번은 꼭 봐야겠다는 것이다. 내가 잘 데리고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도 해 주고 싶다고 하며 아무리 말려도 따라나섰다. 그러나 만나지 못하고 그녀와 갔던 째보선창에서 회만 시켜서 둘이서 먹고 올라왔다. 그리고 또 10년이 흘러 2000년이 되었다. 그런데 집사람 눈치가 좀 달랐다. 자신이 직접 찾아 나서보겠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며 내가 펄쩍뛰었지만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같이 찾아보기로 하고 나서서 초등학교며 중학교 고등학교 면사무소 동사무소를 다 뒤지고 다녔다. 그 다음해에도 집사람은 예전에 잘 알던 언니인데 결혼하고 소식이 끊겼다며 알려달라고 했으나 개인정보는 물론 주민등록 번호도 가르쳐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검찰청에 있는 후배는 주민등록 번호만 알면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도 그 후에도 여러 번 다른 경로를 통해서 수소문해봤으나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그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피천득 선생님은 ‘인연’이라는 글에서 상상하던 환상이 깨어진데 대하여 마지막 만남을 후회하는 듯이 썼었다. 그것이 옳고 바른 일인지도 모른다.
검찰 총수를 하던 고등학교 친구에게 후에 이런 얘기를 했더니 개인 정보에 대한 것은 보안 때문에 알려줄 수가 없고 후일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모두 다 알려주기를 회피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고 있던 친구 부인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너무나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몇 개월 후에 부부끼리 다시 만났을 때 그 부인은 그 얘기를 듣고 3 개월은 혼자서 있다가도 킥킥거리며 웃고 지냈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그게 뭐 그렇게 우스운 일인가? 했는데 그 부인은 그런 얘기를 부부끼리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부부가 같이 옛날 남편의 첫사랑을 찾으러 나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불가였다고 얘기하는데 그 얘기를 들은 집사람은,
“이 사람이 그렇게나 궁금해 하는 것이니 풀어주고 싶었고 머지않아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다 떠날 터인데 그런 것이 이상할 것이 뭐 있냐?” 면서 오히려 그 부인이 더 웃기는 사람이라는 표정으로 의아해 하는 것이었다.
집사람은 나와의 사이에 어떤 작은 간격이 있는 것도 허용치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은 같이 궁금해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우리 두 부부들 중에서 누가 더 웃기는 부부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나중에는 그 친구 부인이,
“까칠까칠한 세상살이에서 훈훈한 사람냄새 나는 얘기라 재미있었다.”고 마무리 지어줬다.
“가버린 첫사랑 그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박복한 여인인지 금덩어리를 제 발로 차고 간 것 같다” 고 덧붙여 말을 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친구는,
“친구야! 그런 얘기 듣고 화 안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마 자네 부인 밖에 없을 것이니 자네야 말로 금덩어리를 만난 것 같다. 쫓겨난 금덩어리가 굴러가서 저절로 다른 금덩어리와 제대로 붙은 격이네 그래! 허허허!” 하고 거들었고 나는,
“그래, 친구 말이 맞다!” 하며 우리는 허허허! 거리며 같이 웃었다.
♠ 12-15
팔불출
팔불출 같은 얘기에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다른 복은 몰라도 마누라 복 하나는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내가 마누라 자랑을 하고 있으나 언감생심 그녀의 큰사랑이 없으면 맞아 죽으려고 이런 글을 쓰고나 있을 수 있겠는가 싶다. 집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가 낮에 여자들끼리 만나 서로 남편 흉을 보고 짓까부는 것이다.
“낮에 남편도 없는 자리에서 온갖 흉을 다 봐 놓고 갖다 주는 월급은 부끄러워 어떻게 받아서 쓰는지 모르겠고, 그 덕에 낮에는 할 일없어 편하게 식당에서 수다나 떨고 수영장으로 골프장으로 기웃거리며 놀러 다닐 수가 있느냐? 월급봉투를 받는 여인네들은 힘들게 벌어서 갖다 주는 남편 고마운 줄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나 간혹,
“여자 시원치 않은 사람이 남편 소중한 줄 모르고 남편 알기를 우습게 알고 살다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그때는 울기는 왜 그렇게 서럽게 울어! 있을 때 잘해주지도 않고서는! 남편 흉이나 보는 그런 모임은 소갈머리 없는 여편네들이 나가서 허송세월하는 일”이라며 일체 그런 모임에는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간혹은 그런 여인네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집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말을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봐 같이 있기가 민망스럽기도 하지만 집사람이 나를 아주 귀한 사람대접을 해주니 받는 나로서는 나쁠 까닭이 없다. 그렇게 살다보니 나도 길들여져서 이제 아내가 기분이 좋아지면 그날은 그것으로 무조건 나도 땡! 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간혹 노래방에 가서 어설프게 흔드는 춤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이더니 이제는 그렇게 어설프게 흔드는 춤이라도 나름 기분을 내는 집사람이 고마워지는 것이 새삼 그런대로 나에게 익숙해지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평탄한 인생길이 된 것이니 복 많이 받은 행복한 인생이라 생각한다. 장인이 일찍 돌아가신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집사람이 남자를 이해하는데 큰 폭으로 다가왔고 나는 결혼생활에서 그 혜택을 큰 덤으로 받았던 것이다. -시간은 소중한 것. 노력은 정직한 것. 열심히 살자! - 집사람의 좌우명이다. 매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사는데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 12-16
먼 훗날
강물처럼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르면 이런 사소한 개인적인 얘기는 시간 속에 묻어져서 물 위에 뜬 지푸라기마냥 사라져 가겠지만 이 세상에 와서 갓 눈뜬 병아리처럼 이곳의 일을 인식하고 또 애틋한 첫사랑을 꿈꾸며 살아가는 오늘의 청소년들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단지 몇 십 년 이곳에 먼저 와서 첫사랑을 만나면서 그때 이성(異性)의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에 대해서 신(神)의 존재를 느껴야 했던 감동과 감탄과 감사에 대한 느낌과 이곳에서 어떻게 살다가야 되겠다는 것에 대하여 쓴 글이다.
“사후(死後) ‘낙원, 천국, 극락’에 가려 하지 말고 많이 양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여 이곳에서부터 ‘낙원, 천국, 극락’의 세상을 구현하는 ‘극락지생(極樂之生)’의 기쁨으로 ‘완생(完生)’을 구하라.”는 것이다.
치과대학에 들어가고, 결혼하고, 사회에 나오고, 환자분을 치료하고 지금까지의 생활은 큰 스트레스를 받는 일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것에 대하여 그녀에게 무한히 감사드린다. 보통 책을 내면 가족들에게 헌정한다고 하는데 쥐꼬리만 한 양심은 있어서 이 책만큼은 미안한 마음에 착한 집사람에게 헌정하지는 못하겠다. 45년의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난 후에 그녀와 나 사이에 남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이제는 희미해져 모습조차 기억에서 사라져 가물가물하다 사라졌다. 혹시 첫사랑 그녀가 살아있어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첫 편지에서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사랑하겠다던 나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미안하다는 말과 첫사랑 그녀도 나에 대하여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45년 전 그 시절에 만났던 김 영찬에 대한 모든 궁금증은 사라졌으리라 믿고 그대에게 이 글을 바침으로서 이제는 은하의 어느 별로 가더라도 영원히 잘 가시기 바라오.... 그대여! 나는 이곳에서 살아서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 안녕! 을 고한다. 이제 놓아줄 터이니 부디부디 안녕! 잘 가시오. 부디 잘 가시오! 영원히 안녕!
-푸른 바람이 부는 고향들판의 극락지생(極樂之生)의 소나무아래에서-
♥ 12-17
기원
대전시청 앞 양 10차 선 까치네거리 신호등이 빨강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자 사람들은 우르르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다. 어두운 저녁이 되자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족들과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서 바쁜 걸음으로 길을 건너간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고독감에서 벗어나고자 지인(知人)들과 연인들과 많은 대화와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로(旅路)에서 사랑과 정담을 나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후회하지 않는 거래요. - 따뜻한 그녀의 말을 전한다. 후생에 인연이 된다면 여태껏 나를 따라 감싸주며 따뜻한 품으로 사랑해 주었던 사랑하는 당신을 따라갈 것입니다. 집사람의 성화에 못 이겨 그녀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사소한 감정에 치우치거나 개의치 않고 따라와 주고 도와준 집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으로 무한감사하고 언제나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나도 사는 날까지 건강하리라 믿는다.
우리 모두가 떠나가고 난 후에도 이곳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새 봄에는 꽃도 피고 지고, 여름철 한때는 장맛비도 오고, 가을은 온 산에 낙엽도 지고,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 캐롤과 함께 함박눈도 퍼부으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생명체들이 사랑을 나누며 끝없는 시간이 무상하게 흘러갈 것을 나는 안다. 하느님이 가진 여러 세상 중에서 지구라는 별에 와서 이곳저곳 구경 잘하고 있다. 신(神)은 앞으로 사후(死後) 나에게 어떤 세상을 선물해 주시려나? 새로운 한편의 영화에 기대가 크듯이 사뭇 설렌다. 이곳에서는 남아있는 시간은 매초천년의 즐거움으로 살다 천수(天壽)를 다하는 날이 오면 ‘극락지생(極樂之生)완생(完生)’ 여섯 글자를 영혼에 담고 K와 함께 횡!∼하니 ‘생명의 주인’을 만나러 가려한다.
이리가라하면 이리가고 저리가라하면 저리가고 바로가라하면 바로가고 돌아가라면 돌아가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고 누우라면 누울 것이다. 모두가 ‘생명의 주인’의 뜻일 뿐 그 분(神)이 하시는 일에 어떠한 토도 달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을 알아서 잘해주실 것으로 믿는다. 2017년 8월 현 시국이 어수선해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해도 얼마를 더 살거나 더 살지 않거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다지 큰일은 아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한치 앞도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들 생(生)이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미생(未生)으로 이곳에 왔다가 완생(完生)으로 가고 싶다. 그런 사람은 저곳에 가도 ‘극락지생(極樂之生)’이니 걱정할 일이 없지 않은가! - 사후(死後) 극락을 믿지 못하고 죽음이 두려운 그 만큼 정확하게 미생(未生)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알 수 있는 일이다. - ‘생명의 주인’에게 엎드려 충성하고 이곳에 있는 동안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매초천년의 즐거움의 삶을 산다. 우리는 언제나 즐겁게 웃으며 살다 그가 부르면 즐겁게 그에게로 가면 된다. 그것이 ‘극락지생(極樂之生)의 완생(完生)’이다.
- 대미(大尾)-
2017. 8. 15.
- 대전 둔산동 시청 앞 치과 원장실에서 -
그간에 애독해주신 독자님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강 성 수 드림
강성수: 시인, 소설가 *사진은 가을호 306쪽 참조
경북 선산 출생, 아호는 태로. 원광대 치대 졸업(치과 교정학 박사) 목원대학교 이사.
재전부산고동문회 회장. 구미선산향우회 회장.<국제문예>시 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국제문단』소설 부문 -첫 사랑, 사랑은 후회하지 않는다-신인상 수상 후 10회째 영재중.
[국제문단문인협회]자문위원. (현)대전 바르게 치과 원장. .kss287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