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과 지조는 언제나 의좋은 짝으로 역사의 교훈이 되지만 권력은 이를 훼절시킨다. 권력의 역사는 충신을 역적으로 만들 듯 이 청빈한 관리를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낙인찍기도 한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1477~1535)의 경우도 그랬다.
헨리 8세가 형이 죽은 뒤 스페인왕의 공주인 형수 캐서린을 왕비를 맞은 것은 관습이기도 했지만 외교 관계를 고려한 추밀원의 압력이기도 했다. 애시당초 사랑이라고는 없었던 터라 헨리 8세는 이내 앤 불린과 사랑에 빠져 이혼을 결심했다. 신앙의 윤리로 모든 게 결정되었던 시대였는데, 교황의 동의를 끝내 얻어내지 못하자 헨리 8세는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교회의 유일 최고의 수장” 자리에 왕 자신이 앉도록 선포했다. 영국식 합리성을 띤 이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종교개혁은 성직자들 거의 모두가 새로운 ‘선서’를 하도록 만든 일대 돌풍이었다.
몇몇 신앙인과 대법관인 토머스 모어는 이 혁신적인 분위기도 아랑곳않은 채 의연히 로마의 가톨릭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움쭉 않던 모어에게 권력은 정치조작 사건 날조, 판사 시절의 부정부패 추궁 등 죄목을 찾다가 반역죄를 적용해 처형시켰다.
모어의 일대기를 가장 우아하게 그린 로버트 볼트의 희곡 <사계절의 사나이>는 이 석학이요 인류의 양심을 추호의 과오도 없는 완벽한 인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권력이 판사 시절에 그에게 작은 선물 하나를 준 여인을 간신히 찾아내어 부정부패의 위증을 시켰으나, 모어는 맹세코 자신은 법을 어기는 판결을 내려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종내에는 그 여자도 이를 인정하고 마는 것으로 볼트는 묘사하고 있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반역죄로 기소당해 법정에서 검찰과 공방이 전개될 때 그가 시종 침묵을 지키는 대목이다. 침묵은 피고인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최대의 변호인데 권력의 시녀로서의 재판은 언제나 그렇듯 이를 묵살하고 판결은 사형이었다.
토머스 모어 연구자로 유명한 칼 카우츠키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이 성자에게 내려진 판결문이 얼마나 끔찍했던가를 소개해 준다. “모어를 런던탑으로 도로 데려갈 것... 거기서 런던 시가지를 빙 둘러서 사형장으로 데려온다. 거기서 교수형에 처한다. 단 반 죽인 상태에서,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신체 각 부위를 베어낼 것, 성기를 절단, 배를 갈라 장기를 끄집어내고, 그리고 화형에 처한다. 끝낸 뒤 남은 시체를 넷으로 갈라 시가지의 네 성문에다 하나씩 매단다. 머리는 런던브리지에 매단다.” 이 판결을 뒤집고 참형을 시키도록 한 것은 왕의 대사면에 의한 것이었다니 권력에도 인자함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26세에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헨리 7세의 세금부과액을 삭감시킨 괘씸죄로 아버지가 런던탑에 투옥됨과 동시에 엄청난 벌금까지 강요당하면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모어는 헨리 8세에 의해 발탁되는 영광을 입었지만 지조와 청렴이 그를 불행으로 이끌었다.
모어의 맏사위 윌리엄 로버의 <토머스 모어의 생애>, 토머스 스티풀턴의 <세 사람의 토머스>, 증손자가 쓴 <크리세이커 모어> 등에는 예외 없이 모어를 성인화하려는 의도가 강력히 스며 있는데, 거기에는 돈독한 신앙인들이 발휘하는 초능력들이 거침 없이 나열되어 있다고 카우츠키는 밝힌다.
모어를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부각시킨 카우츠키의 시각과는 달리 앙드레 모루아는 도리어 당시의 로마와 라틴어 성서 중심주의적인 신앙이 영국에서는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이었다고 평가한다. 서민대중들이 영어 성서와 외세 배격을 원하는 시대에 지조와 청렴을 지킨 지식인이 하필이면 역사의 역류를 탔던가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그 자신이 뛰어난 풍자시인이기도 했던 모어. 당대 유럽 최대의 지성인 에라스무스를 자기 집에 묵게 했던 관계 등 모어의 이야기는 아직도 문학의 생생한 소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