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박채동 (2017년 4월 30일. 오전 07:05)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전 1:9]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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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내 추억 보기
{페북}에서 요즘 일부 젊은 목사들이 하는 짓을 보면 ⑫
박채동 (2016년 4월 30일. 오후 02:21)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뒤틀린 의식’으로서 이중 잣대에서 나온 말, “간철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또한 ‘뒤틀린 의식’으로서 인종 차별주의ㅡ다윈 적자생존 원리를 받든 니체 인종우월주의나 백인 우월주의ㅡ가 생각납니다.
결혼 전이었습니다. 염색공장 같은 공장에 덕트duct 시설을 해 주면서 종종 그 공장에서 일하시는 동남아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흑인 니그로’와 같은 멸시를 받곤 했던 저는 그분들에게 존댓말을 썼습니다. 물론, 한국 직원들에게 온갖 멸시를 받으시는 그분들은 제 존댓말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저 역시 한때는 이른바 “노빠”였습니다. 물론,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민주당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던 호남’, ‘광주학살, 5월 광주의 아픔을 잊을 수 없는 호남 사람’으로서 노빠였습니다. 노빠였기 때문에 “나 같은 억울한 죽음이 또 되풀이되면 안 되잖아. 내가 죽으면, 오빠는 배운 사람이니까,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 힘써 줘.”라는 사촌여동생 유언을 생각하며 김대중 정부 후반부터 인터넷 진보 언론 사이트에서 이른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애썼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참여정부가 저지른 부안학살 뒤 인터넷 진보 언론 사이트에서 어떤 기사나 글을 두고 댓글을 쓰는 일이나 글을 올리는 일을 그만뒀습니다. 또한 제가 ‘한국사를 거꾸로 되돌려 버린 부안학살’로 평가한 그때부터 종이 신문조차 구독하지 않았습니다.
“부산 대구보다 호남이 싫다.”는 도00 님 독백 글은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억울한 죽음’과 ‘채 활짝 피지 못한 꽃, 꽃다운 나이에 꺾인 아이들, 세월호 억울한 죽음’을 염두에 둔 글, 이 두 억울한 죽음을 아파하는 심정, ‘간철수 국민의 당이 아닌 문재인 더민당을 호남 사람들이 지지해야만 억울한 죽음들을 해결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에서 나온 글이었을 것입니다. 도00 님 독백 글에 “아멘.”으로 화답하신 집사님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 대북송금 특검 → 열린 우리당 창당 → 부안학살 → 노무현 대통령, 한나라당에게 대연정 제안.
간단하게 적은 ‘노무현 참여정부 역사’입니다. 물론, 이 역사에 숨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동교동계를 악의 세력, 구 시대 잔재로 규정해 열린 우리당 창당을 주도한 의원들은 노무현계가 아닌 천정배, 정동영 의원 같은 호남 의원들이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안철수 의원을 “간철수”로 규정한 이른바 “노빠, 문빠” 분들에게 묻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대연정을 제안하셨던 것은 로맨스고, (현재 존재하지도 않는) 국민의 당과 새누리당 연정은 불륜입니까? 광주의 아픔을 아는 호남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 후보나 문재인 대통령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던 것은 로맨스고, 노무현 참여정부 역사를 기억하는 호남 사람들이 국민의 당에게 몰표를 던진 것은 불륜입니까?
저는 이른바 “부안사태”에서 노무현 대통령 인종 우월주의를 읽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광주학살’과 ‘부안학살’ 사진입니다. ‘진압군’이 “질서 확립”이라는 너울 아래 ‘공수부대’에서 ‘전투경찰’로 바뀌었을 뿐임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