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닷새 째.
오늘 오전 일정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관광이다. 이곳저곳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그 멋진 폭포를 직접 보게 되는 것이다. 각도에 따라 색이 달리 보인다는 환상의 호수. 오늘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설 것인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낯선 작은 도시에서 아침을 맞은 호텔은 아드리아해변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늦은 시간에 도착하는 바람에 피곤이 겹쳐 바깥나들이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다는 우리가 보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으리라. 사실 아침에 바깥을 나와 보니 약간의 후회가 되었다. 아담한 마을은 호텔 앞으로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뒤로 높지 않은 산자락까지 집들이 빼곡했다. 동물이 자기 영역이라는 흔적을 남기듯이 일행 중 여럿은 여기저기서 호텔 주변을 사진에 담느라 부산했다.

“여행은 남는 게 사진 밖에 더 있겠어.”
이렇게 각자의 사진 찍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하나 둘 묵언수행 하듯이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작은 도시의 산허리를 지나자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서 아드리아해가 보였다. 날씨 탓에 늘 사진으로만 보던 그런 환상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드리아 해변 옆으로 쳐 지난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아쉬움은 컸다. 차창 밖으로 해변을 내려다보니 다시금 아침 일찍 해변을 다녀오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크로아티아에서 다소 남쪽으로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독일에서 출발하여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를 거쳐 계속 남으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버스는 산허리로 난 길을 천천히 달렸다. 멀리 또는 가까이 보이는 산에는 금방이라도 굴러 내릴 것 같은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박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너른 곳을 두고 굳이 그런 아슬아슬해 보이는 돌무더기 아래로 길게 마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 남쪽으로 내려온 탓일까? 눈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로변은 초록이 아직도 가득하다. 산허리를 지나 거의 산 정상 부근을 지날 때는 바람이 아주 심했다. 차창 밖으로 바람이 웅웅 울어댄다. 크로아티아의 바람은 사계절 매몰찬 모양이었다. 이런 곳이 바로 풍력 발전을 할 수 있는 적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년전 스페인 여행을 할 때 풍차 마을을 가본 적이 있다. 선 위에 오르자 그 앞 너른 벌판에서 몰려오는 바람은 강렬했다. 풍차가 산 능선에 일렬로 줄을 이어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 풍차가 있는 이유는 산 위에 올라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지금이 바로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바람을 본 적이 없다. 태풍이 빈번한 계절을 제외하고는 그저 밍밍한 바람이 전부다. 그런 곳에서 환경 친화적 발전인 풍력 발전이 가능할까 싶다.

언제부터인가 가이드의 굴곡 없는 지루한 유럽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낼 줄을 모른다. 아마도 자기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관광객들이 자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 잠을 잔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야기를 그치지 않는다. 일행은 그 동안의 여행에 지친 탓일까 가이드의 이야기에 질린 것일까 하여튼 왁자한 즐거움이 있어야할 텐데도 모두들 별로 말이 없었다. 버스에 갇힌 일행은 모두 창밖을 내다보거나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가 불과 두어 시간 전일 텐데도 다시 눈을 감았다. 나 역시 귀에 꽂았던 이어폰은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날씨 걱정을 했었으나 생각보다 춥지는 않아 다소 안도가 되었다. 다만 바람이 어제보다는 세찼다. 그게 오히려 여행객들을 더 생동감 있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크로아티아의 바람은 참으로 거셌다. 바람으로 인해 버스 운행이 방해를 받기도 한단다. 멀리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은 척박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 험한 산기슭으로 마을이 포도 알처럼 박혀 있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눈에 보이는 모든 산은 나무와 돌이 반반씩인 그야말로 악산이었다.
아침에 출발할 때의 아드리아의 멋진 해변과 지금의 척박한 눈앞의 풍경은 불과 한 두 시간의 시차만 있을 뿐인데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얼마를 더 가다보니 이번에는 먼데 산위로 잔설이 가득히 보였다. 험한 크로아티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지금으로 보면 크로아티아는 산지가 국토의 대부분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골짜기 사이로는 여전히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결국 바람으로 인해 고속도로가 폐쇄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바람이 셌으면 그럴까 싶다. 우리로서는 대단한 크기의 태풍이라도 불어야 가능할 성 싶은데 이곳은 바름으로 인한 고속도로 폐쇄가 그리 놀랄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결국 버스는 고속도로를 내려와 국도를 달렸다. 오늘 일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라나 하는 쓸데없는 의문이 들었다.
길을 돌아 산 정상에 이르자 주변은 온통 눈으로 가득했다. 온통 바람과 눈이었다. 산 아래로 펼쳐지는 설국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산자락에 겨우 버티고 선 조그마한 마을은 눈으로 갇혀버린 듯했다. 그래도 멀리로 보이는 마을은 때로 동화 속 그림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설국으로 가는 버스ㅡ

다시 한참을 지나 산 아래로 내려오자 눈은 간데없고 또다시 전형적인 가을 모습이다. 겨울이 가을로 순식간에 바뀐 것이다. 그야말로 자연의 변검이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차창 밖 길섶의 녹색 들풀 위에 흰 눈이 섞였다. 초록은 그저 초록이고 흰 눈은 또 그저 흰색일 뿐이었다. 서로 몸을 섞이는 했어도 그저 무덤덤하다.
침 말 많은 가이드는 이곳이 이슬람 문화권인 탓인지 이야기가 이슬람인들이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이유를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다소 황당해 보이는 설명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치 무슨 비밀스런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있는 듯 했으며 그런 류의 이야기로 자기의 지적 수준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슬람과 돼지고기. 어떻든 그의 설명이 다소 황당하기는 했으나 내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소재였다.
버스가 남쪽으로 갈수록 기온이 조금씩 떨어졌고 날씨는 변덕을 부렸다. 하늘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으려니 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호텔에서 타 온 커피를 홀짝였다. 버스 기사는 가급적 차안에서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며칠 여행이 계속되다보니 저절로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시트에 떨어질까 조심하며 한 모금씩 홀짝거리는 것이 꼭 학창 시절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점심 도시락을 까먹는 기분이었다.
얼마쯤 가다보니 가이드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차내 마이크로 전해온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먼저 닿은 동료 가이드의 말이 지금 그곳에 눈이 상당히 많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칫 입장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면 또 일정을 변경해서 무슨 동굴 같은 곳으로 안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라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무심히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얼마를 더 달리다보니 버스가 산 중으로 들어섰다. 주변에 초록은 모두 사라지고 조금씩 눈이 보이더니 마침내 온산이며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가득해졌다. 전나무 같은 나무들이 눈을 전신에 뒤집어 쓴 채로 계절을 맞고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두어 시간을 달리고 잠시 휴식을 취한 휴게소의 풍경은 또 달랐다. 도무지 동유럽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휴게소에는 이상하리만치 눈은 그야말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 대신 정갈하게 가꾼 화단에는 초록이 가득했으며, 휴게소 주변의 나무들은 침엽수뿐만 아니라 제법 잎 넓은 나무들도 푸른빛을 하고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초봄 같은 분위기였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가까이 오자 가이드는 관광지에 눈이 많이 와서 어쩌면 관광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몇 시간을 달려 왔지 하는 다소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크로아티아는 유럽 연합에 가입이 되어 있으나 생겐 조약에는 가입이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 국가로 이동할 때는 국경에서 출입국을 확인한다. 슬로베이나에서 크로아티아로 입국을 할 때 본 검문소의 초병의 모습은 유럽이어서 그런지 참으로 생경했다.

잘 생기고 젊은 초병은 직접 버스에 올라 입국 도장을 일일이 찍어주었다. 그런데 그의 임무는 여행객 중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인물을 가려내거나 밀수품을 숨기고 가지는 않는지를 감시하거나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초병은 일일이 여행객의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기는 했으나 여권 사진과 일행의 얼굴을 일일이 대조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었으나 초병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기는 우리는 서로 초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