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현의 느낌표가 있는 간이역(10) 나주 남평역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가 떠오르는 남평역
최원현
nulsaem@hanmail.net
누군가 톱밥을 넣어 불을 지폈을 녹슨 난로와 의자가 고즈넉이 그리움을 부르고 있는 작은 역. 햇빛 때문일까.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 본 안은 어둡다.
남평역은 내 고향 나주 쪽 역이다. 그런데도 한 번도 이 역에서 기차를 타보거나 내려 보지 못 했다. 주로 영산강을 건너는 작은 나룻배를 통해 사창역에서 기차를 타고 목포나 광주로 다니던 때였지만 그 사창역에서 광주까지 이르는 역들과는 달리 만날 수 없던 역이었다. 그런데 그런 남평역을 50년도 넘어서 폐역이 된 후에야 찾게 된 이 아이러니.
남평역은 1930년 12월 간이역으로 출발하여 1948년엔 보통 역으로 승격했으나 1950년 10월 여순반란사건 때 불에 타버리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휴전 후인 1956년 7월 지금의 역사(驛舍)를 새로 짓고 광주 화순 보성 등을 잇는 교통의 중요 역이 되었다. 하지만 사용자가 없자 2011년 10월 5일 여객 취급이 중지된 후 2014년 문을 닫고 말았다.
한 때 곽재구 시인의 처녀시집 <사평역에서>의 실제 역이라는(사실은 동광주역인데) 입소문으로 폐역 후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역이 되었고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 중 하나로도 알려졌다.
2006년 12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99호로도 지정되었다. 파란 지붕에 하얀 벽의 남평역은 거대한 느티나무와 팽나무 그리고 서어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숲의 품에 안겨 그 가슴에서 아름다운 꿈을 가꾸고 있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막차를 기다리는 이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위안/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중
그 막차조차 끊겨버린 지 8년, 그러나 기차가 오지 않는 역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일까.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만나러 오는 것, 그렇다면 기차가 오지 않는다 해도 역(驛)이다. 갈 곳으로 갔다가 다시 오는 사람들, 아니 다시 오지 않더라도 그리움 가득 따뜻한 위안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역이 어디 있을까.
오랫동안 톱밥 맛을 잃고 있을 저 난로에 톱밥 한 줌 던져주고 싶다. 불이 없어도, 활활 타오르지 않아도, 기차가 오지 않는 역이어도, 남평역에는 뭔가 모를 내 미안함까지 한 몫 하면서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림이 아닌 그리움으로 기다리며 나도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가만가만 입속으로 읊으며 발길을 돌린다. 나주 남평역에서.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수필작가회장·강남문인협회 회장(역임).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등 17권. 《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문학평론집 2권.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 등 여러 교재에 수필 작품이 실려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