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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합천군 대병면 장단리의 허굴산 아래에 임곡 선생 후손들이 세운 비석 전경
▲ 가까이서 본 임곡 선생 遺躅碑(유촉비). 오른쪽 큰 바위에 '羊亭'(양정) 등의 글씨가 보인다.
▲ 큰 바위에 '羊亭'(양정), '林谷林先生 杖屨之臺'(임곡 임선생 장구지대)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문 해설>
嘉樹 墟崛山之下 有羊亭 左右林壑 環擁泉石 明媚蔚然 爲州之勝區 允宜君子之所盤桓也
(가수 허굴산지하 유양정 좌우임학 환옹천석 명미울연 위주지승구 윤의군자지소반환야)
가수현(嘉樹縣) 허굴산(墟崛山) 아래 ‘양정’(羊亭)이 있는데 좌우(左右)로 우거진 골짜기에 물과 돌이 어우러져 자연(自然)의 경관이 아름답고 울창(鬱蒼)하여 고을에서 경치가 뛰어난 구역으로 실로 군자(君子)가 배회(徘徊)하기 마땅한 곳이다.
在昔林谷林先生 甞愛其地闢 一室曰 自知軒 藏修其中 樂以忘世
(재석임곡임선생 상애기지벽 일실왈 자지헌 장수기중 낙이망세)
옛날 임곡(林谷) 임선생(林先生)은 일찍이 그 지역(地域)을 좋아하여 한 칸의 집을 짓고 이르기를 ‘자지헌’(自知軒)이라 하고, 거기서 학문(學問)에 힘쓰고 즐거워하며 이로써 세상을 잊고 지냈다.
及先生 歿室則廢已 久而杖屨 徜徉之處 至今 隱隱有遺躅 過者 爲之指點而想慕焉玆
(급선생 몰실즉폐이 구이장구 상양지처 지금 은은유유촉 과자 위지지점이상모언자)
급기야 선생(先生)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곧 폐기(廢棄)하는데, 오랫동안 자취를 머물며 거닐던 곳이다. 지금 희미하게 남은 자취가 있으니 지나는 사람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생각하고 사모(思慕)하였다.
者先生諸後孫 相與謀曰 是地 爲吾祖 藏修杖屨之所 何忍任其湮廢而不思所以表章乎
(자선생제후손 상여모왈 시지 위오조 장수장구지소 하인임기인폐이불사소이표장호)
이에 선생(先生)의 여러 후손들이 모여 의론하기를, 이 땅은 우리 선조(先祖)께서 학문을 힘쓰며 머물렀던 곳인 바, 그곳의 자취가 묻히고 폐절(廢絶)되는 것을 어찌 차마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於是 謀治一穹石 以記其蹟 胄孫 永台與其族親鍾烈孟鍾 徵所刻之
(어시 모치일궁석 이기기적 주손 영태여기족친종렬맹종 징소각지)
이에 큰 돌을 다듬어 세워 이로써 그 자취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주손(胄孫) 영태(永台)가 친족(親族)인 종렬(鍾烈), 맹종(孟鍾)과 더불어 자료를 모으고 비문(碑文)을 새기었다.
文於憲柱 自惟晩生蔑學 不足以堪此 而自少誦慕先生 五十餘年矣 今以一言託名於 外碑實爲榮幸
(문어헌주 자유만생멸학 부족이감차 이자소송모선생 오십여년의 금이일언탁명어 외비실위영행)
비문(碑文)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저 헌주(憲柱)는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늦게 태어나 학문에 소홀하여 이로써 감당하기 부족하지만 어려서부터 선생을 칭송하며 사모한지 50여년이라. 이제 간단한 글로 이름을 비문(碑文)에 걸게 되었으니 실로 영광이요 다행이다.
則遂據存養齋宋公 所撰行狀 而爲之敍曰 先生諱眞怤 字樂翁 號林谷 又曰九曲老夫
(즉수거존양재송공 소찬행장 이위지서왈 선생휘진부 자낙옹 호임곡 우왈구곡노부)
마침 존양재(存養齋) 송공(宋公, 송정렴宋挺濂. 임곡의 생질)이 지은 행장(行狀)을 토대로 비문을 쓰게 되었다.
선생(先生)의 휘(諱)는 진부(眞怤)요. 자(字)는 낙옹(樂翁), 호(號)는 임곡(林谷) 또는 구곡노부(九曲老夫)라 하였다.
林氏 其先恩津人 高麗太常博士 諱成槿 爲其上祖 三傳至諱千年 官宜寧縣監 始居安陰之葛溪生
(임씨 기선은진인 고려태상박사 휘성근 위기상조 삼전지휘천년 관의령현감 시거안음지갈계생
諱自庥 勵節校尉 司勇於先生爲高祖曾祖 曰得蕃號石泉 成均進士 祖曰芸 是爲瞻慕堂
휘자휴 여절교위 사용어선생위고조증조 왈득번호석천 성균진사 조왈운 시위첨모당)
임씨(林氏)는 그 선대(先代)가 은진(恩津)사람이니 고려(高麗)때 태상박사(太常博士) 휘(諱) 성근(成槿)이 그 맨 위의 조상(祖上)이시다.
거듭 전(傳)하여 진부(眞怤)에까지 이르렀는데, 의령현감(宜寧縣監)을 지낸 휘(諱) 천년(千年) 때 처음으로 안음(安陰)의 갈계(葛溪)에 살기 시작했다.
선생의 고조(高祖)인 휘(諱) 자휴(自庥)는 여절교위(勵節校尉) 사용(司勇) 벼슬을 지냈으며, 증조(曾祖)인 휘(諱) 득번(得蕃)은 호(號)가 석천(石泉)이며 성균(成均館) 진사(進士)를 지냈다. 할아버지 휘(諱)는 운(芸)이고 이 분이 첨모당(瞻慕堂)이다.
先生與兄葛川先生 有至孝行 蒙賜爵旌閭 享龍門院 考曰承謹 天稟剛毅德 器夙成 與桐溪鄭先生
(선생여형갈천선생 유지효행 몽사작정려 향용문원 고왈승근 천품강의덕 기숙성 여동계정선생
爲道義交 光州盧立齋先生 欽其外祖
위도의교 광주노입재선생 흠기외조)
형(兄) 갈천(葛川) 선생과 더불어 지극한 효행(孝行)을 하였으니 성은(聖恩)으로 벼슬과 정려(旌閭)를 받아 용문서원(龍門書院)에 배향되었다.
아버지 승근(承謹)은 천품(天稟)이 강직(剛直)하고 덕행(德行)과 기량(器量)이 조숙(早熟)하여 동계(桐溪) 정선생(鄭先生, 정온鄭蘊)과 함께 도의(道義)로 교류하며, 광주(光州) 노입재(盧立齋, 본명 노흠盧欽) 선생(先生)인 그의 외할아버지를 흠모(欽慕)하였다 한다.
先生生以宣廟丙戌 四歲而孤 鞠于外氏 年七八受學于立齋 旣長 又從蘆坡李先生學 所在皆得 獎許當時同門
(선생생이선묘병술 사세이고 국우외씨 연칠팔수학우입재 기장 우종노파이선생학 소재개득 장허당시동문)
선생은 선조(宣祖) 병술년(丙戌年, 1586년)에 태어나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外家)의 보살핌으로 나이 7~8세부터 외할아버지인 입재(立齋) 노흠(盧欽) 선생에게 배우기 시작하였다.
더 자라면서부터는 다시 노파(蘆坡) 이선생(李先生, 이흘李屹)에게 배우고 이곳에서 모두 터득하자 당시 함께 공부한 친구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諸子 有若舍川鄭謇 睡軒李會一 滄州許燉 栗村宋翊 諸公皆一時之選 而與之講質論 辦學業大成 暇治擧子
(제자 유약사천정건 수헌이회일 창주허돈 율촌송익 제공개일시지선 이여지강질론 판학업대성 가치거자
業有能聲 累參鄕試
업유능성 누참향시)
당시 동문(同門)들로는 사천(舍川) 정건(鄭謇), 수헌(睡軒) 이회일(李會一), 창주(滄州) 허돈(許燉), 율촌(栗村) 송익(宋翊)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촌음을 아끼며 과거(科擧)를 보려는 사람으로 학업(學業)이 유능하다는 평판이 있었고 여러 번 향시(鄕試)에도 참여하였다.
壬子中司馬 旣而見光海政亂奸臣擅權 嘆曰 此豈出仕之時乎 遂不復應擧
(임자중사마 기이견광해정란간신천권 탄왈 차기출사지시호 수불부응거)
임자년(壬子年, 161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이미 광해군(光海君)의 정란(政亂)에서 간신(奸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는 일을 보았기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러한데 어찌 출사(出仕)할 때라 하겠는가?
드디어 다시는 과거(過擧)에 응시(應試)하지 않았다.
甞以早孤 不及事父 爲至痛奉母 夫人益致其孝 母甞患面瘇 勢甚危(谷+尤) 先生吮其膿處 晝夜將護
(상이조고 불급사부 위지통봉모 부인익치기효 모상환면종 세심위 극 선생연기농처 주야장호
惟謹及竟不 得救 則哀痛 若不欲生
유근급경부 득구 즉애통 약불욕생)
일찍이 고아가 되어 아버님을 섬기지 못했기에 지극한 아픔으로 어머님을 봉양하는데 지극히 효성을 다하였다.
어머님의 얼굴에 난 종기로 늘 근심하였으며 병세가 심히 위험해지자 선생은 고름 난 곳을 입으로 빨아내며 낮과 밤으로 간호를 오직 부지런히 하였으나 끝내 구해드리지 못하자 곧 살고 싶지 않을 만큼 애통해 하였다.
廬于墓下 執喪如禮服闋 遂自知軒左右壁上揭 無自欺 愼其獨 思無邪 學求聖賢 鳶飛魚躍 敬義等 語常自警省
(여우묘하 집상여례복결 수자지헌좌우벽상게 무자기 신기독 사무사 학구성현 연비어약 경의등 어상자경성)
묘(墓) 아래 오두막집을 짓고 상례(喪禮)를 여법(如法)하게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었다.
드디어 ‘자지헌’(自知軒)을 짓고 그 좌우 벽에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하자.’ (無自欺)
‘홀로 있을지라도 삼가 하자.’ (愼其獨)
‘생각에 간사함이 없도록 하자.’ (思無邪)
‘학문으로 성현(聖賢)이 되기를 구하자.’(學求聖賢)
‘자연에 순응하며 조화롭게 살자.’(鳶飛魚躍)
‘사람을 공경하고 의(義)를 실천하자.’ (敬義)
등의 말을 걸어두고 항상 스스로 경계하며 돌아보았다.
又手寫敬齋箴 夙興夜寐 箴于屛障 晨興誦一遍 蒔梅竹菊于庭畔 作詩以寓其趣
(우수사경재잠 숙흥야매 잠우병장 신흥송일편 시매죽국우정반 작시이우기취)
또 손수 경재잠(敬齋箴)을 써 놓고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며 경재(敬齋)의 잠(箴)으로 병풍을 만들고 새벽에 일어나 한 편씩 암송하며, 매화(梅花)와 대나무, 국화(菊花)를 뜰에 심어 놓고 이로써 그 정취(情趣)로 시(詩)를 지었다.
平居冠櫛端坐 對案觀書經 傳百家無不究硏 而尤愛讀論語曰 此書 載夫子言行者也 聖莫如夫子
(평거관즐단좌 대안관서경 전백가무불구연 이우애독논어왈 차서 재부자언행자야 성막여부자
則書 豈有過於論語者哉
즉서 기유과어논어자재)
평소에도 의관(衣冠)을 바로하고 단정히 앉아 책상을 마주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중에 논어(論語)를 가장 애독하였다.
선생은 “논어는 공자(孔子)님의 언행(言行)이 실려 있는 책이다. 성인(聖人)으로 공자님과 같은 분이 없는데 곧 글로써 어찌 논어(論語)를 넘어서는 것이 있겠는가?
又曰爲學 須要踐歷階級 漸至上達 譬如遊山者 若不能一一探歷 而倐登上峯則 何以知這裡之包許多境界也
(우왈위학 수요천력계급 점지상달 비여유산자 약불능일일탐력 이숙등상봉즉 하이지저리지포허다경계야)
또한 학문의 요체는 모름지기 계단(階段)과 등급(等級)을 두루 경험하여 점차 위에 이르러야 하니, 비유하자면 산(山)을 유람하는 사람이 만약 한발 한발 탐색하며 나아가지 않고 일시에 산 정상에 오르려 한다면, 어찌 산이 포용(包容)하고 있는 허다(許多)한 경계(境界)를 알 수 있겠는가?
又曰 君子之學 貴居敬而窮理盖不 居敬則 無以存心 不窮理則 無以致知 二者 不可偏廢也
(우왈 군자지학 귀거경이궁리개불거경즉 무이존심 불궁리즉 무이치지 이자 불가편폐야
先生一生 學問大要 此可槪見矣
선생일생 학문대요 차가개견의)
또한 군자(君子)의 학문은 경(敬)을 바탕으로 이치를 궁구하는 것(居敬窮理)를 귀(貴)히 여겨야 한다.
따라서 거경(居敬)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마음의 본성(本性)이 없게 되고, 궁리(窮理)를 하지 않으면 치지(致知)가 없을 것이니,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이 둘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의 일생 학문의 대요(大要)를 이것으로 대강을 관찰할 수 있으리라.
仁廟改玉 銓曹 薦爲童蒙敎官又 除大君師傅 數月之間 恩命疊至 先生詣闕謝恩 明日卽下歸
(인묘개옥 전조 천위동몽교관우 제대군사부 수월지간 은명첩지 선생예궐사은 명일즉하귀)
인조(仁祖) 때 조정에 법령(法令)이 바뀌어 전조(銓曹)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천거(薦擧)하고, 다시 대군사부(大君師傅)로 제수(除授)돼 몇 달 간에 임금의 은총이 거듭 이르렀으나 선생은 대궐(大闕)에 들어가 임금에게 은혜에 감사드리고 다음날 바로 낙향하였다.
无悶堂朴公絪 修書以賀曰 一出宦路 知進不知退者 滔滔皆是而兄 則肅謝翊日 決意勇退
(무민당박공인 수서이하왈 일출환로 지진부지퇴자 도도개시이형 즉숙사익일 결의용퇴
非其有得於出處之道 而能然乎 其可謂不負所學矣
비기유득어출처지도 이능연호 기가위불부소학의)
무민당(无悶堂) 박공(朴公, 박인朴絪)이 편지로 하례(賀禮)하기를 “한 번 벼슬길로 나서면 앞으로 나갈 줄은 알아도 물러나는 것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넘쳐나는데, 모두 이렇게 형(兄: 임진부)이 숙배(肅拜) 사은(謝恩)하고 다음날 굳센 의지로 용퇴(勇退)하였으니, 그것은 사물(事物)의 이치(理致)와 도(道)를 체득(體得)하지 않고서는 능히 그럴 수 있겠는가? 그것은 가히 이르나니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로다.”
澗松趙公任道 作同泛錄 曰林君家學 淵源旣有所 自而天稟之好識量之大 又非流輩 所及沉雅 厚重休休
(간송조공임도 작동범록 왈임군가학 연원기유소 자이천품지호식량지대 우비유배 소급침아 후중휴휴
有長者風度 令人心醉 若飮醇酎
유장자풍도 영인심취 약음순주)
간송(澗松) 조공(趙公, 조임도趙任道) 선생은 <동범록(同泛錄)>을 지었는데 여기서 이르기를 “임군(林君) 가학(家學)의 연원(淵源)은 그 유래가 있고, 천품(天稟)이 훌륭하고 그 기품이 일반인들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 그는 침착하고 단아하며 중후하여 훌륭한 대인이 풍도가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심취하게 하는 것이 마치 향기로운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眉叟 許文正公 撰碣銘盛言 先生人品之偉 行學之懿 而總之曰 南中高士巨人長者 此三君子
(미수 허문정공 찬갈명성언 선생인품지위 행학지의 이총지왈 남중고사거인장자 차삼군자
有德有言自重少 可人而於先生 愛敬特甚故其 稱道有如此
유덕유언자중소 가인이어선생 애경특심고기 칭도유여차)
미수(眉叟) 허문정공(許文正公, 허목許穆)께서 묘갈(墓碣)에 찬(撰)하여 말하기를,
선생의 인품이 위대함이여!
학문을 행한 훌륭함이로다.
모두를 이르자면
서울이남(以南)의 고사(高士)와 거인(巨人), 장자(長者) 이 세 군자에
덕행(德行)과 언행(言行)이 훌륭하면서 스스로 조심하는 자가 적은데
걸 맞는 분이 바로 선생이시다.
공경하고 사랑함이 특히 유별나고 그런 연고로 그를 칭찬함이 이와 같도다.
先生 誠於祭先 忠於交友 寬而有容 與物無忤 至義理 公私之辨凜乎 有不可奪者
(선생 성어제선 충어교우 관이유용 여물무오 지의리 공사지변늠호 유불가탈자)
선생은 정성껏 선조의 제사(祭祀)를 모시고
친구와의 교제에 충실하였으며
너그럽고 포용(包容)할 줄 알아서
사물(事物)과 더불어 거슬림이 없고
지극한 의리(義理)로 공(公)과 사(私)를 꿋꿋하고 의젓하게 분별하는데 가히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平生不慕輕煖 不耻蔬糲曰 此吾先子之遺規也 豈敢忘諸性 好山水 南遊德山 北躡伽倻與凡境內之諸名勝
(평생불모경난 불치소려왈 차오선자지유규야 기감망제성 호산수 남유덕산 북섭가야여범경내지제명승
無不歷覽 所至皆有題詩 以宣其湮鬱盖
무불역람 소지개유제시 이선기인울개)
평생 가볍고 따뜻한 비단 옷을 원하지 않았고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말하기를 “이는 우리 선조(先祖)들이 남긴 규범(規範)이다. 어찌 감히 모든 본성(本性)을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은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남으로 덕유산(德裕山)을 유람하고 북으로 가야산(伽倻山)과 더불어 무릇 경내(境內)의 여러 명승(名勝)을 섭렵하고 다니며 구경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르는 곳마다 모두 시(詩)를 지으며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떨쳐 내었다.
先生 絶意仕途 寓趣林泉 而憂國一念 未甞暫忘 觀於甲子 慨時之詠 丙子言志之篇 可知矣
(선생 절의사도 우취임천 이우국일념 미상잠망 관어갑자 개시지영 병자언지지편 가지의
所著有詩文四冊 其言皆敦厚 平易溫然 有有德者風味 又甞撰定禮略一書 以遺子孫 使之遵行焉
소저유시문사책 기언개돈후 평이온연 유유덕자풍미 우상찬정예략일서 이유자손 사지준행언)
대개 선생은 의지(意志)로 벼슬길을 끊고 정취(情趣)를 자연(自然)에 맡겼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한결같은 신념(信念)은 일찍이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갑자년(甲子年) 시대(1624년, 이괄李适의 난)를 개탄(慨嘆)한 시(詩)와 병자년(丙子年, 1636년 병자호란) 시편(詩篇)들을 보면 가히 알 수 있으리라.
지은 시문(詩文)이 사책(四冊)으로 그 말이 모두 인정(人情)이 많고 후(厚)하며 까다롭지 않고 쉬우며 온화(溫和)하고 원만하여 덕(德)이 있는 이의 고상(高尙)한 맛이 묻어난다.
또한 일찍이 「예략」(禮略) 한 권을 펴냈는데 이로써 자손(子孫)에게 남겨 하여금 따르게 하였다.
享壽七十二 而考終于 孝宗丁酉十月五日 越翌年正月
(향수칠십이 이고종우 효종정유십월오일 월익년정월
葬于鳳山面銅店 先壟之壬原 配東城李氏 龜巖先生之孫 主簿虎變之女 男曰 汝松汝栢 婿鄭彧
장우봉산면동점 선롱지임원 배동성이씨 구암선생지손 주부호변지녀 남왈 여송여백 서정욱
汝松男 東逸東遇東遠 汝栢男 東茂東說東迪東野
여송남 동일동우동원 여백남 동무동열동적동야
鄭男 時佐時亨時夏 餘不錄 旣敍述如右 又爲銘以系之 其辭曰
정남 시좌시형시하 여불록 기서술여우 우위명이계지 기사왈)
선생은 72세로 효종(孝宗) 정유(丁酉, 1657년) 10월 5일에 돌아가시어 다음해 정월(正月) 봉산면(鳳山面) 동점(銅店) 선영(先塋)의 임좌(壬座)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婦人) 동성(東城) 이씨(李氏)는 구암(龜巖) 선생(先生) 손(孫)으로 주부(主簿) 호변(虎變)의 따님이다.
슬하(膝下)에 아들은 여송(汝松), 여백(汝栢)이고 사위는 정욱(鄭彧)이다.
여송(汝松)의 아들은 동일(東逸), 동우(東遇), 동원(東遠)이며, 여백(汝栢)의 아들은 동무(東茂), 동렬(東烈), 동적(東迪), 동야(東野)이고, 정욱(鄭彧)의 아들은 시좌(時佐), 시형(時亨), 시하(時夏)이며
나머지는 수록하지 않고 아래와 같이 서술(敍述)하여 명(銘)을 삼는다.
卓彼文貞 百世宗師 有的其緖 蘆翁承之
(탁피문정 백세종사 유적기서 노옹승지
蘆翁之門 髦士雲興 孰不彬彬 獨推先生 先生之生 寔鍾間氣
노옹지문 모사운흥 숙불빈빈 독추선생 선생지생 식종간기
英明之姿 宏偉之器 稟受旣異 又濟以學 內承祖訓
영명지자 굉위지기 품수기이 우제이학 내승조훈
外資朋益 進修之篤 望實俱尊 若將展布
외자붕익 진수지독 망실구존 약장전포
奈時政昏 後値改玉 恩命屢至 暫赴旋歸
내시정혼 후치개옥 은명누지 잠부선귀
守我初志 有植列庭 有書堆床 盤桓玩誦
수아초지 유식열정 유서퇴상 반환완송
其樂未央 嗚乎先生 名節之完 歷數古今 誰與可班
기락미앙 오호선생 명절지완 역수고금 수여가반
維玆羊亭 曾所薖軸 歷年三百 精彩如昨 孝孫寓思 寤寐曷已 乃治穹碑
유자양정 증소과축 역년삼백 정채여작 효손우사 오매갈이 내치궁비
載列厥美 陵谷可遷 其名不泐 凡百過者 視此必式)
재열궐미 능곡가천 기명불륵 범백과자 시차필식
탁월(卓越)하신 그 문정공(文貞公, 조식 남명 선생)은
백세에 우러르는 스승이시며,
진실로 그 단서가 있으니
노파(蘆坡, 이흘李屹)이 계승(繼承)하였도다.
노파(蘆坡)의 문하(門下)에
빼어난 인물이 구름같이 몰려드니
누가 성대하지 않다 하겠는가?
이 가운데 선생을 추천(推薦)하노라.
선생(先生)의 생애(生涯)여!
세상에 드문 뛰어난 기품(氣稟)이로다.
영명(英明)하신 자질에
위대(偉大)한 기품(氣品)이여!
천품(天稟)을 이미 기이(奇異)하게 받으시고
또한 학문으로써 제도(濟度)하시다.
안으론 선조(先祖)의 유훈(遺訓)을 계승(繼承)하고
밖으로 벗과의 유익(有益)한 바탕이 되다.
덕(德)과 학문(學問)을 닦아 돈독(敦篤)함이여!
실로 갖추어 모두 존경(尊敬)하였다.
장차 뜻을 펼치려 하였으나
이때의 정사(政事)는 혼미(昏迷)하였다.
그 뒤에 제도(制度)가 바뀌자
주상의 은혜(恩惠)가 여러 번 이르렀다.
잠시 부임 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자신의 처음 의지(意志)를 그대로 지키었다.
뜰에는 사군자를 나무를 심고
책은 경상(經床)에 쌓아놓고
배회(徘徊)하며 감상하고 암송(暗誦)하나니
그 즐거움이 그치지 않았다.
오호(嗚呼)라! 선생(先生)이시여.
명예(名譽)와 절개(節槪)의 완숙(完熟)함이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뉘라서 더불어 반열(班列)이 되겠는가?
이곳 양정(羊亭)은
옛날 선생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던 곳이라네.
햇수로 벌써 300년이 지났으나
정묘(精妙)하고 뛰어난 광채(光彩)가 어제 같도다.
효손(孝孫)들이 깊이 생각하고
자나 깨나 고심하다
이에 큰 비석을 다듬어서
선생의 그 아름다운 행적을 붙여 새겼다네.
산천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그 이름은 지워지지 않으리.
무릇, 이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바라보며 반드시 본받으리라.
後學 星山 李憲柱 謹撰
후학 성산 이헌주 근찬
十三代 胄孫 秀英 謹竪
십삼대 주손 수영 근수
<주석>(註釋)
* 가수 허굴산(嘉樹 墟堀山)
: 가수현에 있는 허굴산.
가수현(嘉樹縣)은 오늘날 합천군 대병면 일대의 옛 지명이며, 허굴산(墟堀山)은 대병면과 가회면에 걸쳐 있는 682m 높이의 수려한 산.
* 양정(羊亭)
: 합천군 대병면 장단리의 현재 비석이 서 있는 곳의 별칭인 듯.
한편, 조부(祖父) 첨모당(瞻慕堂) 임운(林芸) 등의 근거지인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600여년 이어온 은진임씨(恩津林氏) 세거지(世居地)에 ‘隱士의 정원’으로 불리는 ‘임정’(林亭)이 있다.
의령현감(宜寧縣監)을 지낸 휘(諱) 천년(千年) 때부터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하여 '恩津林氏 宜寧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 자지헌(自知軒): 임곡(林谷)이 37세 때 모친(母親) 사별 후 자지헌(自知軒)이란 작은 집을 짓고 거처한 곳.
* 이헌주(李憲柱, 1911~2001): 고령 관동 사람으로 근대의 대표적인 한학자. 호는 진와(進窩)
* 태상박사(太常博士)
:고려(高麗) 때, 태상시(太常寺)에 딸리어, 제사(祭祀) 및 시호(諡號)의 일을 맡아보던 정6품(正六品)의 벼슬
* 여절교위(勵節校尉)
:조선시대, 무관(武官)의 종6품 관계(官階). 세조(世祖) 12년(1466)에 승의교위(承義校尉)를 고친 이름이다.
* 사용(司勇)
: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오위(五衛)의 정9품(正九品) 군직(軍職)의 하나.
현직(現職)이 아닌 24명(名)의 문관(文官), 무관(武官), 음관(蔭官)으로 채웠음
* 첨모당(瞻慕堂)
:조선 중기 대학자로 참봉을 지낸 임운(林芸 : 1517∼1572)의 호(號), 임진부(林眞怤)의 조부(祖父).
* 갈천(葛川): 임진부(林眞怤)의 백조부(伯祖父) 임훈(林薰)의 호(號).
* 동계(桐溪): 거창 출신으로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낸 정온(鄭蘊)선생(1569~1641)의 호(號).
이조참판 당시 인조(仁祖)에게 임곡선생(林谷先生)을 대군사부(大君師傅) 로 추천한 바 있다.
* 입재(立齋): 노흠(盧欽)의 호(號), 임진부(林眞怤)의 외조부(外祖父)
* 선묘(宣廟): 묘호(廟號)로서 조선의 선조(宣祖).
* 노파(蘆坡)
:이흘(李屹)의 호(號)이자, 합천군 봉산면의 한 지역 이름(현재는 합천댐에 수몰됨)
* 사천(舍川): 정건(鄭謇)의 호(號).
* 수헌(睡軒) 이회일(李會一, 1582~1618) : 광해군 때 진사2등 합격한 학자, 37세로 졸(卒).
* 창주(滄洲) 허돈(許燉, 1586~1633)
: 가회면 덕촌리 출신 학자로 예조정랑(禮曹正郎), 전라도사(全羅都事) 역임(歷任).
* 율촌(栗村): 송익(宋翊)의 號.
* 인묘(仁廟): 조선(朝鮮) 인종(仁宗)의 묘호.
* 전조(銓曹):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문관(文官)의 전형을 맡아보던 이조(吏曹)와 무관(武官)을 맡아보던
병조(兵曹)를 두루 이르던 말.
* 동몽교관(童蒙敎官): 조선 시대에 서울의 사학(四學)과 각 지방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던 종9품의 관직.
* 무민당(无悶堂):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 박인(朴絪, 1583~1640)의 당호(堂號),
훗날 무민당의 행장(行狀)을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와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가 지었다.
*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1585~1664)
: 함안 출신의 남명(南冥) 후예(後裔), 사후(死後)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 되었다.
* 동범록(同泛錄)
: 경남 함안군 대산면의 낙동강변에 반구정(伴鷗亭)이 있는데 선조(宣祖) 40년( 1607), 봄에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곽재우(郭再佑)등 도내(道內) 선비 35인이 낙동강(洛東江)에서 뱃놀이를 하고 기록함.
* 미수(眉叟)
: 허목(許穆,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의 호(號), 조선후기 성균관 제조,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의정(右議政) 등 역임(歷任).
* 구암(龜巖)
: 동성이씨(東城李氏)가문의 대표인물인 이정(李楨, 1512~1571)을 지칭, 예조정랑(禮曹正郎), 선산부사(善山府使),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청주목사(淸州牧使) 등을 역임(歷任).
* 주부(主簿)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돈령부(敦寧府)ㆍ봉상시(奉常寺)ㆍ종부시(宗簿寺)ㆍ내의원(內醫院)ㆍ사복시(司僕侍) 및 그 밖의 여러 관아(官衙)에 딸린 종6품(從六品)의 낭관(郎官) 벼슬.
* 이호변(李虎變)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자무(子武). 학행 이구암(李龜岩) 선생의 장손이며, 증직 형조좌랑 이응인(李應寅)의 아들이다. 1570년(선조 3) 생원 진사시(進士試)에 아우 곤변(鯤變)과 함께 합격하고 선무랑(宣務郎)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지냈다. 효행과 문학에 뛰어났으며, 임진왜란에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끝
林谷 林眞怤 선생 약력
1586(선조 19년) 嘉樹縣 墟崛山下 출생
(현 경남 합천군 대병면 대산동의 외가에서 태어나 자람)
* 본관 恩津, 字 樂翁, 號 林谷. 九曲夫(居士). 九曲老夫
배우자 泗川(東城)李氏(1586~1667). 아버지는 이호변(李虎變)이며,
그는 청주목사 구암 이정(龜巖 李楨, 1512~1571, 사천읍 출생)의 손자
- 임곡선생 가족 내력 - ◇ 증조부 林得蕃(임득번, 호 石泉) : 進士試에 합격한 명종 때 유학자로,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특히 임훈(林薰)·임영(林英)·임운(林芸)3형제가 현달(顯達)하였다.(두 명은 일찍 사망) ◇ 조부 林芸(임운, 호 瞻慕堂.첨모당) : 安陰縣(안음현, 현 거창군 북상면)갈계 출신으로 參奉을 지낸 대학자, 孝行으로 旌閭를 받음 - 중 조부 林英(임영, 호 道溪) :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학자, - 큰 조부 林薰(임훈, 호 葛川) : 거창의 대표적 학자로 光州牧使, 掌隷院判決事(정3품) 역임, 사후 吏曹判書 추증 * 현재 지명 葛川里도 林薰의 號에서 따 왔으며, 오늘날 ‘搜勝臺’ 이름도 당초 ‘수송대’에서 退溪 李滉과의 서신 왕래로 인해 개칭된 것임 ◇ 부 林承謹(임승근, 1560~1689, 젊은 나이에 별세), 모 光州盧氏, 奉事(종8품) 立齋 盧欽(1527~1601, 장단리 출생)의 딸 ◇ 임곡의 자녀(2남 1녀) - 장남 여송(汝松) : 자 東逸, 東遇, 東遠 - 차남 여백(汝栢) : 자 東茂, 東說, 東迪, 東野 - 사위 정욱(鄭彧) : 자 時佐, 時兄, 時夏 |
4세 부친 林承謹(임승근) 별세
9세 외조부인 立齋(입재) 盧欽(노흠)에게 배움
이후 외조부 命으로 같은 고을 蘆坡(노파) 李屹(이흘)에게 사사
외조부 별세 후 安陰縣(안음현) 葛溪(갈계)에서 伯父(백부) 西澗公(서간공) 林承順(임승순)에게 論語(논어) 배움(論語를 배운 후부터 과거보다도 학문에 뜻을 둠)
25세 <生員試>에 합격했으나 滄洲(창주) 許燉(허돈) 등과 공부에 힘씀
37세 모친 별세 후 ‘自知軒’(자지헌)이라는 자그마한 집을 짓고 거처
- 좌우 벽에 여러 가지 警句(경구)를 써 붙이며 학문에 정진
47세 모친 병환 중에 지은 ‘林谷齋’(임곡재) 중수
50세 吏曹(이조) 천거로 童蒙敎官(동몽교관)이 됨.
이어 吏曹參判(이조참판)인 桐溪(동계) 鄭蘊(정온)의 천거로 ‘大君師傅’가 됨
* 당시 인조와 仁烈王后 韓氏(인렬왕후 한씨) 사이에 소현세자(昭顯世子) 외에
鳳林(봉림대군, 후에 17대 효종), 麟坪(인평대군) 두 대군이 있었다.
51세 大君師傅로서 궁궐에 가 인조에게 감사인사올리고 그다음날 바로 낙향
- 궁궐에 도착할 무렵에 마침 인열왕후 상중이라 장례준비에 바쁜 가운데 두 대군에게 문안단자(問安單子)를 올리고 인사들 드렸으나 “사부로 받들어 뵈려고 했는데 처소가 불편하고 아직 성례를 끝내지도 못했으니 애통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자 단념하고 그 다음날 바로 낙향
- 현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의 九曲山 아래에서 스스로 ‘九曲老夫’라 칭하며, 尤悶堂(무민당) 朴絪(박인),
澗松(간송) 趙任道(조임도)등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에 정진(특히 論語 공부에 관심을 갖고 열중)
56세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기 시작
68세 眉叟(미수) 許穆(허목)의 예방을 받음
72세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학문에 정진하다 1658년(효종 9년) 봉산면 술곡리 자택에서 별세
- 묘소 및 비석 :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
- 林谷祠堂(임곡사당) : 합천군 대병면 장단리 대산동
☞ 이 비문 한글 해설문은 한학자 한조(寒照) 신흥식(申興植) 선생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원래 비문 해설은 그 주인공의 생애와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등장인물 간의 관계 등 전반적으로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어려운 작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움을 주신 한조 선생은 道家의 무위사상과 儒家의 도덕이념을 거쳐 佛家의 선(禪)사상에 흠뻑 빠져 평생을 공부해 온 분으로서 현재 서울에서 유마강원(維摩講院)을 운영하고 있으며,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법구경'(法句經), '채근담'(採根譚), '직지'(直指) 등 여러 권의 역서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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