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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케 여신의 행운과 신의 축복이 가득했던 테살로니키 여행(1/4)
아테네를 떠난 지 사흘 만에 그리스 북쪽여행의 종착지인 테살로니키로 향했다. 베르기나에서 테살로니키의 숙소까지는 92km로 승용차로 1시간 정도 걸렸다. 지평선이 바라다 보이는 한적한 고속도로를 한동안 달리다 테살로니키 시 외곽에 들어서니 운행차량이 제법 많아졌다. 우리가 오늘 묵을 숙소는 시내중심가에서 많이 벗어난 ‘파노라마’로 불리는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이번 그리스 여행은 난생 처음 해보는 완전한 자유여행으로 여행 코스와 숙소를 필자가 정했다. 그런데 여행코스를 짜고 각 여행지마다 빠뜨리지 말고 보아야할 것을 정하는 것도 골치가 아팠지만 숙박비, 시설수준, 그리고 위치를 감안하여 이른바 가성비가 괜찮은 숙소를 찾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그런데 어느 여행 블로그에서 테살로니키의 파노라마 호텔이 전망도 빼어나고 가성비도 좋다고 소개하여 망설임 없이 이 호텔을 예약하였다. 그런데 예약 당시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이 숙소는 시내중심가에서 많이 벗어난 게 흠이었다. 호텔 도착 후 승용차를 부둣가 근처에 있는 렌터카 업체에 반납하고 시내구경을 마친 후 호텔로 돌아올 때는 시내버스를 이용해야 했는데 시 외곽에 위치한 파노라마 언덕까지 운행하는 버스 편이 있을지가 걱정거리였다. 우리 차가 테살로니키 시에 진입해서 파노라마 언덕으로 올라가는 동안 교통편 알아보기가 숙제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정말 운 좋게도 구불구불한 파노라마 언덕길을 올라갈 때 이곳을 다니는 시내버스를 발견했다. 아니 발견했다기보다는 내 차 앞에 갑자기 짠하고 나타났다. 너무나 쉽게 고민거리가 해결된 나는 “와, 버스다! 이건 튀케 여신이 우리한테 준 행운의 선물이야.”하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기독교 신자인 아내는 즉시 “이건 신의 축복이야.”하고 활짝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나는 크게 웃으면서 “그래 맞아. 이 버스는 튀케 여신이랑 신이 함께 우리한테 준 선물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파노라마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였다. 이 언덕 이름이 왜 파노라마인지는 호텔 방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U자형 테라마이코스 만을 따라서 동쪽부터 서쪽까지 공항과 빌딩숲이 파노라마처럼 장쾌하게 펼쳐졌다.
※ 파노라마 언덕에 자리 잡은 숙소에서 내려다 본 테살로니키 시 전경: 파노라마 언덕은 시내중심가-파노라마 언덕-공항으로 이루어진 삼각형 꼭짓점에 위치해 있다. 시내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두 곳을 연결하는 시내버스가 있어 교통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음에 또 테살로니키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 때엔 시내중심가(부둣가나 박물관 근처) 호텔에서 묵고 싶다. ^^ (위) 왼쪽이 테살로니키 공항 방면, (아래) 오른쪽이 테사로니키 시 중심가 방면
테살로니키는 2300년 이상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315년에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왕이 건설하였는데 그는 자기 부인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테살로니케Thessalonike라 불렀다. 테살로니케는 테살로스Thessalos와 니케Nike를 합친 말로 테살리아의 승리Thessalian victory를 뜻한다. 오늘날에는 테살로니키 또는 살로니키라 부르기도 하고, 라틴어 명칭인 테살로니카나 살로니카로 부르기도 한다.
기원전 168년에 일어난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군에 패한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였고, 로마의 그리스 통치시기에 테살로니키는 마케도니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발칸반도 서쪽에 있는 뒤라키움Dyrrachium과 동쪽에 있는 비잔티움Byzantium을 연결하는 로마가도를 일컫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에 자리 잡은 덕분에 무역과 상업의 허브도시로 크게 성장하였으며, 로마제국 시기에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지정학적 중요성까지 더해져 그리스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동서로마로 분리되기 전 사두정치 시기의 동방정제 갈레리우스Galerius는 테살로니키에 황궁을 짓고 이곳에 머물렀으며, CE 395년 동서로마로 완전히 분리된 비잔티움 제국 시기에도 무역 및 군사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세의 끝 무렵인 14세기에 들어섰을 때, 오늘날 터키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은 영토 확장을 위해 소아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의 발칸반도를 침공하였다. 마침내 1430년 술탄 무라트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던 테살로니키를 점령했다.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에서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으로 도시의 통치권이 넘어갔지만 황제도시와 무역의 허브도시라는 위상은 바뀌지 않았으며, 이슬람 제국의 관용정책으로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어우러진 국제도시가 되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의 아랍왕국을 북아프리카로 내쫒은 기독교인들은 15-16세기에 걸쳐 유대인들을 국외 추방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테살로니키로 몰려왔다. 이후 테살로니키는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투르크인과 그리스인을 제치고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높은 인구비율(47%)을 차지했다. 그리스가 8년간에 걸친 독립전쟁 끝에 오스만 제국의 400년 통치로부터 벗어난 해가 1832년이었지만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지역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거의 망해가던 20세기 초,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발칸전쟁(1912-1913년) 끝에 마침내 테살로니키는 그리스 영토로 귀속되었다.
이처럼 테살로니키의 역사는 헬레니즘 시대에서 출발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현재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남아있는 유적은 주로 비잔티움 제국시기의 것이다. 13개의 초기 기독교 교회Paleochristian church와 비잔티움 시기의 건축물 2개(성벽, 목욕탕)가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된 테살로니키는 고대 그리스·로마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아테네하고는 여러모로 다른 색깔과 향기를 지닌 도시이다.
6-1. 테살로니키 시 중심가 지도(비잔티움 성벽 안쪽) 파란색 점선과 실선으로 표시한 곳이 비잔티움 시대 성벽이며 성벽 안쪽이 도심이다. 테살로니키 시의 남북방향 중심축은 아리스토텔레스 광장과 로만 아고라를 잇는 (붉은색 점선으로 표시한) 아리스토텔레스 거리이고, 동서방향 중심축은 에그나티아 거리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된 비잔티움 시기의 건축물 15개는 도심에 있어 부지런히 발품만 팔면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다.
우리는 시내 부둣가 근처에 있는 H 렌터카에 승용차를 반납하고 해안거리를 걸었다. 이 거리의 이름은 승리거리(nikis avenue)로, 서쪽의 자유광장(eleftherías square)에서 시작하여 중앙의 아리스토텔레스 광장(Aristotelous square)을 지나 동쪽의 백탑(white tower)까지 이어지는 500m 길이의 3차선 도로와 인도로 되어 있다. 이 부둣가 도로는 갈레리우스 개선문이 있는 에그나티아 거리(egnatia Street)와 함께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번화하고 관광객이 즐겨 찾는 거리이다. 돛대가 3개 달린 고풍스런 유람선 한 척이 청화백자의 짙은 푸른빛을 띤 테라마이코스 만을 가로지르며 미끄러지듯 달렸다. 짙푸른 바다와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하얀 그리스식 건물을 시야에 두고 승리거리를 걸으니 내 마음도 덩달아 들떴다. 조금 걷다보니 널찍한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이 길 건너 왼쪽에 나타났다.
※ 테살로니키 부둣가 앞을 지나가는 고풍스런 유람선 테살로니키 시의 상징건물인 백탑(White Tower) 근처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호메로스는 지중해를 와인처럼 어둑한 바다 (Wine-dark sea)라고 표현했지만, 필자는 청화백자처럼 짙푸른 바다라고 말하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은 아테네의 신타그마 광장과 함께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으로, 테살로니키의 각종 정치집회, 축제, 크리스마스와 사육제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테살로니키는 그리스 영토로 편입된 지 5년 후인 1917년에 도심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2/3가 폐허가 되었다. 당시 그리스 정부는 오래된 도시를 긴급히 원상복구하기 보다는 유럽 스타일의 신도시로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프랑스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을 비롯한 공공건물을 설계하였다. 그러나 심각한 재정 문제와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1950-60년대에 도시재건이 시작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로마시대 이래로 테살로니키 시의 동서방향 중심축은 에그나티아 거리이며, 남북방향 중심축은 로마시대에는 로툰다-개선문-갈레리우스 황궁을 잇는 거리였지만 현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동상-로만 아고라를 잇는 아리스토텔레스 거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매년 11월에 국제 필름 페스티벌이 열리는 올림피온 극장이다.
6-2. 아리스토텔레스 광장 테살로니키 시의 남북방향 중심축은 아리스토텔레스 광장과 로만 아고라를 잇는 아리스토텔레스 거리이다. 바닷가에 접한 U자형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의 오른쪽에 아리스토텔레스 동상이 있다.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건물은 매년 11월에 국제 필름 페스티벌이 열리는 올림피온 극장이다. 저 앞쪽 거리(아리스토텔레스 광장거리)를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로만 아고라를 만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은 필자가 깊은 인상을 받은 몇몇 유럽의 광장, 예를 들면, 스페인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이나 포르투갈 리스본의 로시우 광장과 비교하면 조금 심심했다. 그것은 바로 멋진 광장의 필수요소인 분수가 없는데다 무엇보다도 광장 바닥에 모자이크 문양이 없기 때문이다. 테살로니키 시는 마케도니아주의 주도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마케도니아의 별을 도시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음에도 정작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난 펠라의 마케도니아 왕궁의 거실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그리스 전통모자이크로 광장을 꾸미는데 활용하지 못했다. 비록 나는 이방인이지만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뭔가 살짝 부족한 듯 느껴지는 이런 풍경을 볼 때면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광장을 쓱 훑어보는데 오른쪽 한켠에 아리스토텔레스 동상이 눈에 띄어 가까이 다가갔다. 사각형 돌 의자에 걸터앉아 왼손으로 강의노트를 쥔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인간지식의 모든 영역에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탐구를 처음 시도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가장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 삼인 가운데 한명이다. 소크라테스는 끊임없는 문답을 통해 인간의 무지를 깨닫게 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오관(눈, 혀, 입, 코, 귀)으로 감지할 수 있는 감각세계, 즉 현실세계는 항상 변하지만 수학과 기하학이 지배하는 형상form의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변하지 않는 형상의 세계가 참된 실재reality이고 진리episteme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이것만이 오직 사유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재, 즉 형상이 감각의 대상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의 대상이 실재성(이데아)을 갖는다고 보았다. 질그릇을 예로 들어보자. 질그릇은 찰흙(질료)에 형상이 부여된 것으로 감각의 대상인 질그릇에는 형상(이데아)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형상(이데아)은 사물에 내재할 뿐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경험을 촉발하는 대상(사물)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진정한 지식, 즉 진리(이데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탐구방법에 있어서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그에 의하면, 과학적 탐구란 관찰로부터 공리(보편가설)를 얻은 다음 다시 그 공리로부터 논리적 추론(연역)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한 연역적 추론방법, 즉 삼단논법syllogism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예를 들면, 4원소설, 천동설 및 자유낙하 법칙(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는 가설)은 중세유럽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신성불가침한 권위를 획득했다. 중세를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사상은 17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과학혁명에 의해 비로소 부정되기 시작했다. 서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성인 가운데 한명인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그가 살았던 고대사회라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편 ‘형상과 질료’ 철학이라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형상이 없는 순수질료가 가장 아래에 자리하고 그 위에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현실계가 놓여있고 다시 이 위에 질료가 없는 순수형상(이것이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느님이 된다.)이 최고위로 있는 위계적 세계관이다. 그의 철학사상은 중세 초기에 교회신부에게 차용되어 교부철학이 되었고 기독교 교리로 자리 잡았다. 교부철학은 중세 중기에 이르러 스콜라철학으로 발전하였으며 중세 1천년 동안 서양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중세 서양에서는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느님이 부여한 형상을 구현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따라서 중세 때는 “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었고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도 없었다. 서양에서 '존재하는 나'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의 끝자락인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던 르네상스(그리스.로마의 인문주의 부활운동)를 통해서였다. 서기 1500년, 르네상스 시대의 독일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자신의 정면을 그린 그림,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자각을 불후의 색채로 당당하게 표현했다. 그림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내가 여기 있다!"
화제를 다시 아리스토텔레스 동상으로 돌려보자. 그리스는 2019년 10월 현재 청년실업률이 35.6%로 높은 편이다. 주력산업이 농업과 관광업이고 이렇다할만한 제조업이 없어서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직장을 얻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졸업 후에 그나마 상대적으로 취업이 잘 되는 명문대학 입학경쟁이 치열해서 그리스 고등학생들은 우리나라처럼 방과 후 과외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안에는 기부자 존 하버드의 청동좌상이 있는데, 동상의 발끝을 만지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다는 속설이 있어 이곳을 방문한 청소년들은 그의 왼쪽 구두를 만지며 사진을 찍곤 한다. 그리스 학생들 역시 만물박사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가락을 만지면 "더 현명하게" 돼서 명문대학의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 동상의 왼쪽 엄지발가락이 유난히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이제 시험하고는 무관한 나이이지만 성현으로부터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그의 반짝이는 왼쪽 엄지발가락에 내 오른손 검지를 살짝 갖다 대 보았다.
6-3. 아리스토텔레스 동상의 엄지발가락이 유난히 반짝이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에 만물박사였다. 그리스 학생들 사이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가락을 만지면 "더 현명하게" 돼서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 동상의 왼쪽 엄지발가락이 유난히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을 떠나 멀리 보이는 백탑을 향해 승리거리를 따라 걸었다. 백탑은 눈에 잘 띄는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다 제법 오랜 건축역사를 갖고 있어 오늘날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기념물이자 도시의 상징건물이 되었다. 이 탑은 1430년 테살로니키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이 16세기 이후 항구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해안가 남쪽 성벽이 동쪽 성벽과 만나는 모퉁이에 세운 보루로, 우리네와 비교하자면 경복궁의 동쪽 망루였던 동십자각(東十字閣)같은 것이었는데, 20세기 초에 해안가 성벽이 철거되면서 동십자각처럼 길거리에 나앉게 된 것이다.
6-4. 자유광장에서 백탑까지 이어진 승리거리 풍경 500m 길이의 이 부둣가 도로는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번화하고 관광객이 즐겨 찾는 거리이다. 앞쪽에 테살로니키 시의 상징인 백탑이 보인다.
백탑 근처에 있는 유람선 선착장을 지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마상이 있는 오각형 모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정원을 만나게 된다. 오른손으로 칼을 빼어들고 그의 애마, 부케팔로스Voukefalas에 늘름하게 올라 탄 알렉산드로스 대왕! 누군가에게 그는 고대 세계의 절반을 차지한 위대한 정복자로, 또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잔인한 파괴자로 기억되겠지만, 필자에게 알렉산드로스는 헬레니즘 문명의 창시자이자 그리스 문명과 고려 문명을 연결시켜준 위대한 문화 전파자이다. 이번 필자의 그리스 여행은 이 놀라운 동·서문명의 만남을 그리스 유물을 통해 확인하고픈 목적이 컸기에 그리스 북쪽여행의 종착지에서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정말 반가웠다. 나는 한동안 대왕의 기마상을 바라보다가 마음속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상 그는 등자(발걸이) 없는 말을 타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였다. 등자는 서기 3세기경 중국 또는 초원의 유목민이 발명하였다. 유럽에 등자가 전해진 것은 대략 8세기경 중세 때였다. 10년이라는 짧은 세월에 이집트와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땅이 모두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기에 가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시여, 등자도 없는 말을 타고 짧은 세월에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당신은 진실로 영웅이었습니다. 비록 당신은 페르시아 영토를 차지한 것이었지만 불과 10년 만에 그것을 성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천하의 영웅인 당신도 전장에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이를 말해줍니다.”
이어서 나는 머나먼 동방에서 이곳까지 온 이유를 대왕에게 설명해 주었다.
“2300여년의 세월의 벽을 뛰어 넘어 저를 이곳으로 잡아끈 힘은 대왕께서 아시아에 씨앗을 뿌린 헬레니즘 문명이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 아마 대왕께서도 놀라시겠지만, 헬레니즘 문명은 북인도와 중국을 거쳐 고려청자에 예쁜 문양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저는 아테네를 출발하여 이곳으로 오는 동안 아폴론의 성지 델피, 제우스의 도시 디온, 그리고 당신 아버지께서 잠든 아이가이에서 그 씨앗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왕이시여, 당신은 질긴 인연의 끈으로 고대 그리스문명과 고려문명을 이어주었습니다.”
나는 우리 청자의 장식문양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대왕께 진심어린 감사를 전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상은 바다 가까이 세워져 있어 에게 해와 멋진 조화를 이룬다. 나는 이곳에 더 머물며 느긋하게 바닷가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지만 어느덧 시각은 6시를 향하고 있어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서둘러 근처에 있는 테살로니키 고고학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6-5.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청동 기마상 뉴 비치(new beach)란 뜻의 네아 파랄리아(Nea Paralia) 지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정원 안에 있다. 바다 가까이 세워져 에게 해와 멋진 조화를 이룬다.
1962년에 건축된 테살로니키 박물관은 테살로니키 시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출토된 선사시대(신석기와 청동기 시대)부터 그리스 시대(아르카익, 고전기, 헬레니즘)를 거쳐 로마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마케돈의 황금’ 전시실에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 은, 또는 청동으로 제작된 금속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뒤쪽의 야외에는 로마시대 석관과 모자이크가 바닥에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필자가 흥미롭게 보았던 유물 몇 개를 소개해 본다.
가장 먼저 오이노코에oinochoe를 살펴보자. 오이노코에는 주둥이에서 어깨로 굽은 손잡이가 달려있는 술 주전자를 일컫는데, 크라테르에서 포도주를 퍼내 술잔kylix에 붓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도기의 목과 어깨가 만나는 곳neck ring에 대표적인 그리스 전통무늬인 뱀 문양meander pattern이 장식되어 있다. 이 문양은 고려청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번개무늬뇌문·雷文로 부르고 있다. 두 문양을 비교해보면 완전 판박이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청자의 띠 장식 문양의 하나인 번개무늬의 원형이 그리스의 뱀 문양으로 판단하고 있다.
6-6. 그리스 술 주전자(오이노코에)와 고려청자 합의 기하문양 비교 (왼쪽) 그리스 오이노코에의 목과 어깨가 만나는 부위에 뱀 문양이 있다. (오른쪽 위) 뱀 문양을 확대한 것 (오른쪽 아래) 청자 상감 국화 넝쿨무늬 합의 뚜껑 테두리를 번개무늬로 장식했다. 두 문양은 완전 판박이다.
테살로니키 서쪽 교외지역인 신도스sindos의 어느 묘지에서 출토된 황금장식의 들국화 문양은 고려청자 국화무늬 합의 들국화 문양과 서로 빼닮았다. 필자는, 앞장에서 베르기나의 들국화 문양을 설명할 때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네 들국화 문양의 원형은 지중해 문명(미케네, 히타이트,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의 들국화 문양으로 판단하고 있다. 고려청자를 아름답게 장식한 들국화 문양을 지중해 문명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눈에 보이는 가장 큰 차이점은 잎사귀와 하얀 꽃망울이다. 우리네 청자 들국화에는 하얀 꽃 주위를 빙 돌아가며 마치 먹을 듬뿍 묻힌 붓으로 툭툭 찍어 그린 듯한 잎사귀 몇 개와 기다란 줄기 끝에 곧 피어날 꽃망울을 그려 넣은 경우가 아주 흔하다. 우리네 들국화 이미지에 대한 필자의 도상학적 해석은 이렇다. 보통 8-16개 사이의 꽃잎을 갖는 동그란 꽃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며, 꽃망울은 새 생명과 다산을, 꽃 주위에 배치한 잎사귀는 풍요속의 여유로움을 뜻한다. 그래서 고려청자 들국화는 아름다운 장식문양이면서 동시에 풍요, 번영, 다산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한 폭의 동양화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지중해 들국화 문양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네 들국화 문양만의 멋이라고 생각한다.
6-7. 마케도니아 황금 장식과 고려청자의 들국화 문양 비교 고려청자의 들국화 문양은 다산과 풍요 속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한 폭의 동양화이다. (왼쪽) 여성 피장자 무덤에서 나온 황금 장신구의 일부로 수의를 장식하는데 사용되었던 황금 로제트 (신도스 묘지, 기원전 560년 무렵) (오른쪽) 청자 상감 국화무늬 잔과 잔 받침 (고려, 13세기)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의 케이-팝(k-pop)과 영화가 세계의 주목을 끌면서 한국이 문화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동안 먹고 살기에 바빠서 한국인의 DNA에 각인되어 있는 ‘흥’과 ‘신바람’ 인자가 발현될 기회가 없었는데, 한국의 경제력이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면서 먹고사는 문제를 뛰어 넘어 삶의 질과 행복이 중요시 되고, 우리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다양한 견해가 억압받지 않고 표출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한국인의 무의식 세계에 깔려있는 신바람 인자, 바로 고구려 최강성기에 축조된 무용총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흥과 신바람이 비로소 발현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한국인의 무의식 세계에 잠재된 민족정서는 구한말 민족 침체기에 형성된 한과 아리랑이 아닌, 만주를 지배했던 고구려인의 흥과 신바람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한평생을 바친 건국의 아버지, 백범 김구께서 그토록 바라던 대한민국의 모습은 경제강국도 군사강국도 아닌 ‘문화강국’이었다. 당신께서 1947년에 쓴 ⟪나의 소원⟫에서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기에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해방된 조국의 동포에게 힘주어 말했다. 해방된 지 75년 만에, 그것도 우리 세대에서 백범께서 그렇게 원했던 문화강국의 틀이 조금씩 갖춰지고 있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뒷받침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지난 조선시대 5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고구려인의 신명과 호연지기를 흔들어 깨워 문화강국의 기둥을 튼튼히 세울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 것 같다.
튼튼한 문화강국의 기둥을 세우는데 있어 필자는 우리 전통문양이 작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은 조선왕조 이래 한국의 수도였기에 5대 궁궐을 비롯한 볼거리와 쇼핑거리가 많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하지만 필자의 서울에 대한 인상은 5대 궁궐을 제외하고는 밋밋한 회색빛 도시, 중국이나 일본의 대도시와 구별되지 않는 특색 없는 도시이다. 보다 강렬하게 서울을 상징하는 색깔과 미를 찾아내면 좋겠다. 필자는 우리 전통문양이 이에 대한 약간의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산딸나무 꽃무늬(일명 칠보무늬)와 연꽃무늬로 바닥을 꾸민 광화문 광장을 떠올려 보자. 산딸나무 꽃무늬나 들국화 무늬, 혹은 거북등무늬로 장식된 명동거리, 종로거리 혹은 서울로7017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자.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강남거리와 삼성동 거리는 파도무늬(일명 번개무늬)나 태극무늬가 잘 어울릴 것 같다. 우리 전통 색깔과 현대적 감각이 가미된 문양으로 서울의 주요거리를 꾸민다면, 필자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것처럼, 이곳을 처음 찾는 외국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것이다.
현재 우리 전통문양은 보자기와 같이 요즘 잘 사용하지도 않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아주 제한적인 분야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세계인이 감탄하는 훌륭한 보물을 금고에 넣어두고 있는 꼴이다. 우리 전통문양을 관광객이 즐겁게 쇼핑할 수 있는 분야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 이런 분야가 어떤 분야인지는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무엇을 샀는지를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필자는 그리스 여행기를 마무리할 때, 우리 전통문양을 적극 활용한 하나의 사례로서 필자가 직접 디자인한 백팩backpack과 손가방을 보여줄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이태리 명품 브랜드인 구찌Gucci 못지않은 멋진 디자인을 보고나면, “우리 전통문양이 이렇게 예뻤어?”하고 틀림없이 감탄할 것이라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된 현악기로 리라lyre와 키타라kithara가 있다. 리라는 청아하면서 평화로운 음색을 내는데, 사교모임에서 실내연주에 사용하거나 어린이에게 음악을 가르칠 때 사용했다. 키타라는 4줄 또는 7줄짜리 리라를 전문악사가 연주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다. 민요를 연주하는 단순한 리라와 달리, 키타라는 키타로데스kitharodes로 불리는 전문악사가 연주했으며, 주로 음악경연이나 야외행사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리라는 제우스와 요정 마이아 사이에 태어난 헤르메스가 고안했다. 그는 태어난 날 오후에, 거북이 등껍데기에 황소 창자로 만든 줄을 걸어 리라를 만들었다. 리라를 뜯으며 신나게 놀던 어린 헤르메스는 그날 밤에 이복형 아폴론이 키우던 황소 50마리를 훔쳤다. 헤르메스를 의심한 아폴론은 아버지 제우스에게 불만을 털어 놓았다. 제우스의 중재로 헤르메스는 훔친 소떼를 아폴론에게 돌려주면서 사과의 의미로 자신이 만든 리라를 아폴론에게 선물로 주었다. 아폴론은 이때부터 리라의 명연주자가 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관악기는 아울로스aulos로 불리는 쌍피리이다. 아울로스의 음색은 목가적인 플루트보다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관악기인 백파이프 소리에 가까워 사람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강렬하면서도 달뜨게 만드는 소리를 낸다. 그래서 아울로스는 종교제식, 행진, 희생제, 극장 및 심포지엄에서 연주되었다. 테살로니키 박물관에 전시된 아울로스는 피드나의 옛 고분(BCE 약 400년)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울로스는 마르시아스Marsyas로 불리는 사튀르satyr가 고안한 악기라고 전하기도 하고,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아테나 여신이 처음 만들었다고도 한다. 아테나 전승을 따르는 아울로스에 얽힌 재미난 신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내려온다.
6-8. 고대 그리스의 전통악기 (왼쪽) 7줄짜리 리라 (오른쪽) 아울로스 (피드나 출토, 기원전 400년)
피리를 만들어 신나게 불던 그녀는 어느 날 청동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피리를 불 때 빵빵해지는 두 볼이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망치는 아울로스가 갑자기 싫어져 올림포스 산 밖으로 내던졌다. 숲속에 떨어진 아울로스를 마침 지나가던 마르시아스가 발견했다. 놀기 좋아하는 마르시아스는 열심히 쌍피리를 불어 능란한 명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자만에 빠진 마르시아스는 아폴론에게 음악대결을 신청하였다. 그 둘은 시합에서 이긴 자가 진 자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내기를 걸었다. 대결의 심판은 뮤즈들이 맡았다. 리라의 명연주자인 아폴론 못지않게 마르시아스도 쌍피리의 달인이었던지라 둘의 연주는 막상막하여서 심판은 판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에 아폴론이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를 하자고 (혹은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했는데 일차 무승부에 취한 마르시아스가 덜컥 동의했다. 아폴론은 리라를 거꾸로 들고 (혹은 노래를 곁들여) 멋진 연주를 했다. 그러나 피리를 거꾸로 문 마르시아스는 소리를 낼 수조차 없어서 (혹은 피리를 불면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서) 결국 지고 말았다. 아폴론은 휘브리스hubris·오만에 빠져 감히 올림포스 신에 도전한 마르시아스를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산 채로 가죽을 벗겼다. 마르시아스가 흘린 피와 이 모습을 보고 슬퍼한 요정들이 흘린 눈물이 합해져 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키타라(리라)가 이성과 질서를 상징하는 아폴론의 악기라면 아울로스는 황홀경과 무질서를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의 악기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함께 마신다.”라는 뜻의 심포지온symposion을 즐겼다. 나이 30세 이상의 상류층 남자들이 참가했던 심포지온은 저녁 식사 후에 열리는 연회였는데, 침대처럼 생긴 긴 소파에 기대어 와인을 마시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엔터테이너를 초빙하여 키타라나 아울로스 연주를 듣기도 했다. 심포지온에는 반드시 함께 마실 술이 있어야 했기에 그리스인들은 크라테르krater라 불리는 주둥이가 넓은 술항아리에 막걸리처럼 걸쭉한 와인 원액을 담고 물을 1대 1~1대 4 비율로 섞어 희석시킨 후 퀼릭스kylix라 부르는 전용술잔에 따라 마셨다. 와인 항아리인 크라테르의 몸체에는 신화의 한 장면이나 심포지온 장면을 그려넣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대결은 흥미로운 이야기꺼리였는지 이 음악경연 장면을 그린 도기화를 찾아볼 수 있다. 16세기 이후에는 유럽의 여러 화가들이 이를 주제로 한 많은 그림을 남겼다.
6-9. 마르시아스와 아폴론의 악기연주 대결을 그린 도기화 마르시아스가 바위에 걸터앉아 쌍피리를 불고 있고, 오른쪽에 월계관을 쓴 아폴론이 월계수 나뭇가지를 왼손에 쥔 채 그의 연주를 듣고 있다. 여인들은 음악대결의 심판인 뮤즈이다. (크라테르, 기원전 430-410년, 영국박물관)
※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리스 우표:
(왼쪽) 마르시아스와 아폴론의 악기연주 대결장면, (오른쪽) 키타라를 연주하는 아폴론: 그는 오른손으로 (분실방지용으로 키타라에 연결된 줄에 묶여 있는) 기타의 피크(pick)같은 것을 쥐고 있는데, 이것을 이용해서 줄을 튕기듯 연주한다.
※ 갈레리우스 황제의 작은 개선문 (small arch of Galerius) 갈레리우스 황제가 세운 황궁의 가장 공식적인 홀이었던 옥타곤(Octagon) 현관 남쪽에서 발굴된 것으로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개선문이다. 꽃 디자인과 우화적 인물상으로 풍부하게 장식했다. 두 개의 원형 메달리온(medallion)에 갈레리우스 황제와 그의 부인 발레리아(Valeria)의 흉상이 새겨져 있다. (4세기 작품)
※ 갈레리우스 황제의 작은 개선문의 양 측면에 새겨진 부조: (왼쪽) 팬(pan), (오른쪽) 님프(요정)
다음에 소개할 유물은 약간 재미난 유물로, 일가족 네 명을 반신상으로 새겨 넣은 장례용 비석이다. 그리스 신전의 페디먼트(삼각형 박공)를 머리에 이고 있고, 기단부에 고정시키기 위한 사각형 돌기가 밑에 있다. 정면에는 가족으로 짐작되는 네 명의 인물을 마치 현대인이 사진관에서 가족사진 찍듯이 새겨 넣었다. 사실 이 가족사진은 반대면, 즉 뒷면에다 먼저 조각하였다. 그러나 이 뒷면 조각상은 조각가 자신 또는 의뢰자를 만족시키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반대면, 즉 지금의 정면에다 다시 새긴 것이다. 유물 아래에 부착된 설명문에 의하면, 삼각형 박공의 중앙 동그라미 안에 있는 인물은 태양신 헬리오스를 나타낸 것 같다고 적혀 있다. (At the center of the obverse pediment is a figure that may represent Helios.)
그런데 필자는 이 설명문을 읽어보기 전에 비석의 부조를 살펴보면서 박공 중앙의 인물이 메두사일 것이라 짐작했다. 왜냐하면 생김새가 메두사를 쏙 빼닮은 데다, 고대 로마인들은 메두사 얼굴 이미지를 일종의 액막이 부적처럼 즐겨 사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3세기에 로마인이 만든 공공건물, 신전 및 석관에서 메두사 얼굴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이 도깨비 문양의 와당으로 한옥의 처마 끝을 장식했던 것과 똑같은 이치였다. 그래서 필자는 메두사를 ‘서양 도깨비’라고 부른다.
6-11. 대리석 양면에 일가족을 새긴 장례용 비석 마치 현대인이 사진관에서 가족사진 찍듯이 일가족 네 명을 부조로 새겼다. 원래는 뒷면에 먼저 새겼는데 조각가 자신 혹은 고객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앞면에다 다시 새긴 것이다. (서기 160-180년)
적어도 메두사만큼은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유물설명문은 “자네, 틀렸어.”하고 나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정답을 맞히지 못한 내 실력에 살짝 실망했지만, 박공의 인물상을 아무리 요모조모 뜯어봐도 헬리오스를 닮은 구석이 전혀 보이질 않아 일단 물음표만 남겨놓고 자리를 옮겼다. 언젠가부터 나에겐 아무리 그 분야의 전문가가 한 말이라도 내가 납득이 안 될 때는 물음표를 붙여놓는 습관이 생겼다. 이 여행기를 쓰면서 그 때 찍어놨던 유물사진을 살펴보다가 문득 물음표를 붙여놨던 기억이 떠올랐다.
테살로니키 박물관에 전시된 장례용 비석은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인 2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비석의 박공에 새겨진 인물상을 동일시기에 제작된 석관이나 신전에 새겨진 메두사와 비교해보면, 얼굴 모습(부릅뜬 눈과 굳게 다문 입을 보라), 머리카락 표현(메두사 신화에 의하면, 머리털 한 올 한 올이 뱀으로 변했다.), 턱 아래에서 질끈 동여맨 끈(사실은 뱀 두 마리가 서로 몸을 꼰 것이다.)까지 서로 매우 닮았음을 볼 수 있다. 헬리오스는 태양신이다. 그의 머리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태양빛은 결코 꺾일 수가 없다. 헬리오스 신상을 본 떠 만든 뉴욕의 자유여신상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게 된다. 그녀가 머리에 쓴 왕관에는 선인장 가시처럼 뾰족뾰족 튀어나온 것이 여러 개 있는데 바로 태양빛을 상징하는 것이다. 반면 비석 박공에 새긴 인물상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것은 하나같이 중간에서 꺾여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태양빛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뱀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은 장례용이기에 태양신 헬리오스 이미지보다는 망자와 그의 가족을 잡귀와 액으로부터 보호해줄 메두사 이미지가 더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스 박물관 학예사의 설명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 비석 박공의 주인공은 헬리오스가 아닌 메두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6-12. 로마시대(서기 2세기) 제작된 메두사 얼굴상 로마인들은 메두사 얼굴을 액막이 부적으로 사용했다. 메두사는 서양 도깨비였다. (1) 장례용 비석 (테살로니키 박물관, 그리스) (2) 석관 (안탈리아 박물관, 터키) (3) 아폴론 신전의 아키트레이브 (디디마, 터키) (4) 석관 (이스탄불 박물관, 터키)
세계 어느 박물관이든 각 박물관마다 간판 유물이 있게 마련이다. 테살로니키 박물관의 대표유물은 ‘데르베니 크라테르Derveni Krater’이다. 이 유물은 기원전 4세기경 아테네 또는 테살리에서 만든 청동제 술항아리(크라테르)로, 1962년 테살로니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르베니의 옛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화장 후 남녀의 골분을 담은 유골함으로 사용된 것이다. 크라테르 뒷면의 구연부(입구의 테두리)에 그리스 문자로 크라테르 소유자의 이름아낙사고라스의 아들, 라리싸 태생의 아스티오네이오스이 은으로 상감되어 있는데 이 유골함에 담긴 골분의 주인공과 동일인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높이가 약 90㎝에 달하여 상당히 우람하게 느껴지는 크라테르는 두 장의 청동 판을 각기 두드려 부조를 새긴 다음 목 부분에서 접합시켜 만들었으며, 크라테르의 어께부위에 올려놓은 작은 인물상(디오니소스, 사튀르, 두 명의 마에나드)과 소용돌이 손잡이, 그리고 밑 부분은 따로 주조하여 만든 후 몸통에 붙인 것이다.
※ 데르베니 크라테르 (명문이 있는 뒤면의 확대 사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아낙사고라스의 아들, 라리싸 태생의 아스티오네이오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망자의 이름 앞에 항상 아버지 이름을 밝혔다.
고대 그리스 예술품으로 대형 금속제 용기나 청동상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매우 드물다. 데르베니 크라테르는 현재까지 살아남은 헬레니즘 시기에 제작된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무게는 40kg이며, 구리에 주석이 15% 섞인 청동으로 만들었다. 구리에 주석을 첨가하면, 주석 함유량에 따라 구리합금의 색깔이 변하게 되는데, 주석함량 3%까지는 구리의 붉은 기가 남아 있으나 그 이상 첨가하면 차츰 노랗게 되고, 20%를 넘으면 회청색이 된다. 데르베니 크라테르 재질에는 금이 전혀 섞여 있지 않지만 살짝 황금빛 광택이 난다.
※ 데르베니 크라테르(정면):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신성한 결혼식 장면
청동제 크라테르의 몸체에 조형된 프리즈의 도상은 술의 신이면서 술이 갖고 있는 속성인 황홀경과 풍요로운 삶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신인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찬가로 구성되어 있다. 앞면에는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신성한 결혼식이 묘사되어 있고, 뒷면에는 디오니소스 밀교의 신비의식에 참가한 여인(마에나드)들이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 측면에는 광기에 빠진 여인들의 난폭한 행동이 조형되어 있다.
6-13. 데르베니 크라테르 원래 포도주 원액을 담는 용기지만, 화장 후 골분을 담은 유골함으로 사용되었다. (데르베니 무덤 출토, 기원전 4세기) (왼쪽) 몸통 정면에 디오니소스 신과 아리아드네 공주의 결혼을 상징하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몸통 뒷면에는 황홀경에 빠져 춤을 추는 두 명의 마에나드와 앉아있는 한 명의 마에나드가 새겨져 있다.
신성한 결혼식이 묘사된 용기의 앞면을 자세히 살펴보자. 정면 한가운데에 배치한 디오니소스 신은 프리즈의 다른 인물상보다 두 배 정도 크게 조형되어 있다. 이 인물상이 디오니소스 신이란 것은 그의 머리 위에 가로방향으로 달리는 포도넝쿨과 뒤쪽에 앉아 있는 표범으로 알 수 있다. 포도넝쿨과 표범은 그의 상징물attribute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는 온 몸을 드러낸 채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자신의 머리 위에 오른팔을 올려놓았다. 이것은 신성을 상징하는 동작으로 여기서는 디오니소스 신의 신성한 출현의 순간을 나타낸다. 또 그의 오른쪽 다리는 아리아드네 신부의 무릎 위에 친근하게 올려져있고, 신부는 오른손으로 면사포를 살짝 들어 올리면서 남편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결혼을 암시하는 제스처이다. 디오니소스의 두 손은 따로 주조하여 갖다 붙인 것이다. 이로 인해 부조의 높이가 높아져서 이 인물상을 더 주목하게 만든다.
※ 데르베니 크라테르 (정면 부조의 확대사진) (왼쪽) 아리아드네 (오른쪽) 디오니소스 : 두 손은 따로 제작하여 갖다 붙인 것이다.
※ 데르베니 크라테르 (뒤면 부조의 확대사진)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진 마에나드 (노란색 화살표) 마에나드의 오른팔을 둘둘 감고 있는 은으로 만든 뱀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늘색 화살표) 마에나드의 목에 은으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다.
용기의 뒷면을 살펴보면, 마에나드들이 황홀경에 빠져 춤을 추고 있다. 자신의 옷을 벗어 힘껏 내던지고 있는 오른쪽 여인은 제풀에 지쳐서 의자에 앉아있는 또 다른 마에나드의 무릎 위로 쓰러지고 있다. 이 여인처럼 자신의 윗몸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면서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뒤통수에 손을 갖다 대는 동작은 무아지경의 상태, 즉 엔투시아모스enthousiasmos에 빠진 것을 나타낸다. 아래로 쭉 뻗은 그녀의 오른손은 팔을 둘둘 감고 있는 뱀 머리를 움켜잡고 있다. 뱀은 청동기 벽에 은으로 표현했는데 현재는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그녀의 왼쪽에서 춤추는 또 다른 마에나드는 몸을 활처럼 휜 채 뒤를 돌아보고 있다. 이 댄서 앞에는 거시기를 빳빳이 곧추세운 실레노스가 있다. 그는 반인반수인 사튀르로서 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들과 함께 양육하고 그에게 와인제조법을 가르쳐 준 양아버지였다.
6-14. 데르베니 크라테르 양 측면에 새겨진 부조 (왼쪽) 황홀경에 빠진 두 명의 마에나드가 희생동물인 어린 사슴의 다리를 붙잡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오른쪽) 한 명의 마에나드가 어린 아기의 다리를 붙잡은 채 거칠게 어깨 위에 들쳐 메고 있다.
크라테르의 손잡이가 붙어있는 한쪽 측면, 즉 정면에 있는 아리아드네의 바로 왼쪽에는 황홀경에 빠진 두 명의 마에나드가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춤을 추고 있다. 그녀들의 머리는 헝클어졌고 옷은 어께에서 미끄러져 흘러내리려고 한다. 두 여인은 희생제에 사용될 어린 사슴 한 마리를 뒤집은 다음 앞·뒤 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반대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는데 이것은 산 짐승을 갈기갈기 찢는 행동이다. 디오니소스의 숭배자들 가운데는 마에나드로 불리는 여성들이 특히 많았으며 노예들도 있었다. 억압과 고통에 짓눌려 살던 여성들에게 디오니소스 밀교의 신비스런 제의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그들은 집을 버리고 무리를 지어 산과 들을 헤매면서 술을 마시고 황홀경 상태에서 야간집회를 가졌는데, 집회 때는 마음속의 온갖 한을 토해내듯 괴성을 질렀으며, 탬버린을 치고 피리를 불며 광란에 가까운 춤을 추었다. 때로는 산 짐승을 갈가리 찢어 죽인 후 그 고기를 날것으로 먹기도 했다. 그러다 의식이 끝나면 숲속에 그대로 쓰러져 죽은 듯이 잠을 잤다고 한다.
정면에 있는 디오니소스의 바로 오른쪽 측면에는 프리즈에 조형된 다섯 명의 마에나드 가운데 마지막 여인이 왼손으로 어린 아기의 다리를 하나 붙잡은 채 거칠게 어깨 위에 들쳐 메고 있다. 아래로 늘어뜨린 그녀의 오른쪽 팔뚝에는 원래 뱀이 한 마리 감겨있었고 손으로 뱀 머리를 쥐고 있었다. 크라테르의 몸통 프리즈에 조형된 모든 여인들은 원래 은줄로 만든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걸고 있었으며 그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아기를 들쳐 멘 마에나드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실레노스 사이에는 수염을 기른 남자가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는 상체를 벗었으며, 사냥용 창 두 개(이 가운데 한 개만 살아남았다)를 들고 있고, 허리춤엔 비스듬하게 칼을 차고 있으며, 왼발에만 신발을 신고 있다. 이 남자에 대한 도상학적 해석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디오니소스의 고향인 테베의 왕, 펜테우스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가 지은 비극, 바카이Bacchae의 주인공인 그는 테베에서 널리 유행한 디오니소스 컬트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마에나드와 함께 자신의 축제에 참가하라는 디오니소스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한 데 대하여 끔직한 징벌을 당하게 된다. 그는 디오니소스가 유발한 광기에 빠져서 여장을 한 채 축제에 몰래 잠입해서 나무 위에 올라가 구경을 했다. 바로 그때, 역시 디오니소스에 의해 유발된 광기로 이미 미쳐버린 어머니와 이모에게 발각되어 붙잡힌 그는 갈가리 찢기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디오니소스 컬트는 고대 그리스의 몇몇 미스터리 컬트 가운데 하나였으며 죽음, 즉 사후세계에 관한 그리스인의 관념과 연결되어 있었다. 디오니소스 컬트 추종자들이 믿는 사후세계는 심포지온(술 파티)을 닮았다. 그래서 컬트 멤버의 무덤엔 종종 술과 관련된 용기, 심포지온에 사용되는 긴 의자, 그리고 축제관련 용기를 매장하였다. 또한 디오니소스 신화는 불사의 몸으로 태어난 다른 신들과는 달리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대 그리스인의 장례용기에는 지상의 심포지온과 사후세계의 삶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 디오니소스의 생애나 술 파티로부터 따온 장면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2시간 남짓 테살로니키 고고학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시각은 저녁 8시를 향하고 있었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갈레리우스 개선문arch of Galerius을 보기 위해 이곳에서 약 600m 떨어진 에그나티아 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현대 테살로니키 시의 동서를 관통하는 “에그나티아”라는 도로명은 옛 로마시대에 발칸반도의 서쪽에 있는 뒤라키움과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연결하는 도로인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옛 로마의 비아 에그나티아는 주목적이 군사용 도로였기 때문에 테살로니키 시를 통과하지 않고 북쪽으로 우회해서 14km 동쪽에 있는 코로니아Koroneia 호수와 볼비Volvi 호수 연안으로 길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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