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ISSUE 심층취재①】
일반고 위기,
정책이 낳은 ‘예고된 재앙’인가?
수업 중 떠들고 자는 학생 태반…
공부엔 관심도 없다
특목고·자사고가 우수학생 빨아들여
일반고 ‘슬럼화’
글. 박찬균 기자
요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시작을 알리는 수업종이 울려도 교실에서는 책상 앞에 앉은 학생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물함을 뒤지는 학생, 화장실에 가는 학생,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 등 대부분이 수업이 시작됐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가 당연한 듯이 나타나고 있다.
새 학기 시작과 함께 터져 나온 ‘일반고 위기’는 단순한 우려가 아니다. 학교 현장에서 일반고는 특수목적고와 자율형사립고보다 ‘공부 못하는 학교’, 특성화고, 마이스터고보다 ‘미래가 불투명한 학교’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일반고의 위기는 특목고와 자사고가 상위권 학생들을 먼저 뽑아 가고 중위권 학생 가운데 상당수가 대학 진학이나 대기업 취업을 노리고 특성화고로 간다.
결국 일반고는 특성화고에 지원했다 성적 커트라인에 걸려 떨어지고 온 학생들이나 아예 특성화고에 가지 못할 실력인 학생들이 대부분.
학생들의 성적 및 진로방향에 따른 맞춤형 교육의 유무가 성적 상승과 하락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학생들만 탓할 수도 없다.
일반고는 한 학기 180단위 가운데 필수이수 단위가 116단위로 정해져 있어 대학을 가려는 학생과 졸업 후 바로 취직을 하려는 학생들이 모두 똑같은 수업을 듣는다. 이에 비해 특목고는 72단위, 자사고는 58단위를 필수이수 단위로 정해 무학년제, 학생 개인별 맞춤식 교과목 편성이 가능하다.
특목고·자사고와 일반고 사이의 격차는 학업성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입학사정관제 확대 등으로 고교시절 다양한 경험이 대학입시에 필수적인 요소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동아리 참여율 등 학업 외적인 요건에서도 격차가 뚜렷하다.
학교알리미에 공시된 지난해 4월 기준 학생 동아리 참여율을 보면 서울지역 9개 특목고는 102.1%, 26개 자사고는 77%, 198개 일반고(2012년 신설교 제외)는 54.9%였다. 특목고가 일반고의 1.9배, 자사고가 일반고의 1.4배에 이른다. 특목고나 자사고 학생들이 학업에 치중하느라 자기계발에는 소홀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른 결과다.
한 일반고 교사는 “학생들이 학교에 흥미 자체를 느끼지 못하다 보니, 학생회나 학교 동아리 등 학내 생활 자체에도 소홀해지는 경향이 뚜렷하다”면서 “학교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패배주의가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팽배해 있다”고 밝혔다.
일반고에서 우수한 학생이 사라지고 고교 서열화가 진행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목고가 도입된 후 끊임없이 이어진 논란이다. 2010년 이명박 정부가 도입한 ‘고교 다양화 300’ 정책은 이 같은 현상을 고착화시켜, 불과 3년 만에 과거의 고교 비평준화 시대를 연상케 하는 각종 부작용을 낳고 있다. 정책 도입 단계에서의 예상되던 우려가 현실화되면서 일반고 슬럼화는 ‘예고된 재앙’이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고교 평준화 정책은 1974년 중학교 입시지옥과 사교육비 억제를 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평준화 제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학습능력이 다른 학생들을 같은 장소에 모아놓고 수업을 진행하면서 교사들이 지도에 어려움을 겪고, 전체적인 학력 저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83년 특목고가 처음 도입됐고, 2002년부터 자율형 사립고가 시범 운영됐다. 하지만 영재학교 성격이 강한 특목고와 달리 자사고는 전면 도입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됐다. 일반고와 비슷한 형태의 자사고가 도입될 경우 자사고의 ‘선발효과’로 인해 일반고가 슬럼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교육계 내부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기숙형 공립고 150곳, 마이스터고 50곳, 자사고 100곳을 지정하는 ‘고교 다양화 300’이라는 정책을 추진했다. 자사고가 지나치게 많이 책정됐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정부는 개의치 않았고, 우려는 현실이 됐다.
자사고는 외형적으로는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지만, 중학교 성적 상위 50%라는 유일한 단서가 있다. 일단 상위 50%로 학교의 입학생 자체가 좁혀지는 것이다.
현실적인 진입 장벽도 있다. 학비 자체가 연간 평균 800만원에 이르고, 사교육비 등을 감안하면 서민층에는 대학등록금 수준의 가계부담으로 작용한다. 하나고 등 일부 자사고는 연간 학비가 2000만원에 육박한다.
특히 자사고 내에서도 입시 명문고 위주로 쏠림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우수학생을 깔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또 최근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로 적지 않은 중상위권 학생들이 눈길을 돌리면서 일반고로 진학하는 우수학생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일반고 육성책, 내실이 먼저다…
다양한 진로 선택할 능력 길러줘야
지난 4월 교육단체연대회의와 국회 교육문화관광위 김상희의원(민주당)이 연 ‘자사고, 어떻게 폐지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김학윤과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부회장(고교 교사)은 서울 강남에 있는 A고의 최근 3년간 입학생 중학교 내신성적 분포표를 공개했다.
이 자료에는 서울 강남의 ‘빅3’라는 서초구·강남구·송파구에서 소위 ‘잘 나가던’ 한 일반고교가 최근 3년 사이에 추락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분석 자료가 처음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이 시기는 서울지역에 자율형사립고(자사고) 27개교가 무더기로 생겨난 때와 일치한다.
이 분포에는 평준화 시절 명문고이던 A고가 최근 3년 사이에 성적우수학생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성적열등학생은 2배가량 늘어났다는 사실이 담겨있다.
이 학교에서 성적 상위 10% 이내인 학생이 2010년에는 8.4%였지만 2011년은 5.8%, 2012년은 3.6%로 3년 사이에 절반으로 떨어진 것으로 조사된 반면, 성적 하위 90% 이상인 학생은 2010년에는 9.8%였지만 2011년은 15.8%, 2012년은 20.5%로 3년 사이에 갑절 이상 늘어났다.
김 부회장은 “특목고와 외고는 성적 상위 5%, 자사고는 성적 상위 50%에 들어야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며 “2010년부터 자사고가 부쩍 늘어나면서, 일반고교는 나머지 학생들을 배정받기 때문에 학생 성적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부회장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자사고를 그대로 둔 채 ‘일반고 살리기’란 불가능하다”며 “왜냐하면 일반고의 위기는 학교 내부나 교사 개인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자사고 등장과 같은 학교 서열화 정책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A고의 경우 지난 한 해 동안 전체 학생 1400명 가운데 17%인 242명이 흡연·근태·벌점 누적 등으로 징계를 받았다. 더구나 1학년은 490명 가운데 23%인 111명이나 됐다.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에 나선 백병부 숭실대 교수도 “성적이 우수하고 가정 배경이 좋은 학생을 독점 선발하는 자사고와 나머지 학생들이 모이는 일반고의 학업 성취 격차는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김상희 의원이 최근 분석한 자료를 보면 2013년 서울지역 자사고 신입생 가운데 중학교 내신 성적이 상위 20% 이내인 학생은 50.7%에 달했다.
백 교수는 “자사고가 미달 사태 때문에 없어져야 하는 게 아니라 일반고에 악영향을 줘 교육 생태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없어져야 하는 것”이라며 “자사고의 등장이 공교육의 생태계를 위협하게 된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교육 생태계 복원을 위해 국가 권력의 적극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일반고에 대한 활성화 대책을 놓고 열띤 토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자사고 폐지’를 놓고 전교조와 한국교총 등 양대 교원단체 사이에 공방이 오갔다.
김동석 한국교총 정책본부장은 “자사고와 특목고를 폐지하면 일반고의 위기가 모두 사라지고 우리 교육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친 낙관론”이라며 “교육에서 지나친 수월주의나 평등주의적 접근이 아닌 균형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반면, 이현 전교조 정책실장은 “이명박 정부가 만든 자사고 정책은 고교 무상교육이라는 보편교육 시대에 평준화를 해체하는 매우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며 “사람을 살려야 할 교육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이 상황에서 자사고와 같은 특권학교는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②】편에서 계속